허균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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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才論 (유재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함께 하늘이 내려준 직분을 다스리는 것으로
하늘이 인재를 낳은 것은 원래 한 세상에서 쓰려해서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 귀하고 유망하다 하여 부여해준 재능이 뛰어난 건 아니고,
미천하고 비루하다 하여 품부 받은 것을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옛날의 선철들과 임금들은 그러한 줄 알아 간혹 시골에서 구하였고
간혹 항복하여 포로가 됐거나 패주한 장수를 발탁하기도 했고
간혹 도적에서 천거하거나 간혹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그들을 등용한 사람은 모두 마땅한 일을 주었고 등용된 사람들은 또한 각각 그 재주를 펼쳐냈으니,
나라는 복을 받았고 다스림은 날로 융성해졌으니, 이 도를 썼기 때문이다.
천하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인재가 혹여나 버릴까 걱정하여
긍긍연측석이사, 거궤이탄.
전전긍긍하며 자리에 있을 때도 생각했고, 밥상을 받고도 탄식했다.
내하산림초택, 회보불수자비비;
그런데 어찌하여 한적한 시골에 보배를 품고서도 팔지 못하는 사람이 흔해졌고
뛰어나고 준수한데도 하급 직책에 머물며 마침내 포부를 시험해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역다유지?
참이로구나. 인재를 모두 얻기 어렸다는 게, 쓰더라도 다하기가 어렵다는 게.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인재가 드물게 나왔으니 대저 예로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조선에 들어와 인재등용의 길은 더욱 협소해졌다.
대대로 벼슬하는 명망가가 아니고선 현달한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못했고,
이암혈초묘지사, 칙수유기재,
동굴이나 시골에 있는 선비로 비록 기이한 재주가 있더라도
비록 덕업(德業)이 갖춰져 드러난 사람이라도 마침내 경상에 오르지 못했다.
하늘이 부여한 재주는 균등한데 명망가와 과거출신들로만 한정 짓고 있으니,
의호상병기핍재.
마땅하구나 항상 인재가 적다고 괴로워하는 것이.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시대는 멀어졌고 오래되었고 세상은 넓지만
어머니가 개가했기에 인재를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모천여개적자지자손, 구불치사로.
어머니가 천출이거나 개가한 사람의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나란히 서지 못한다.
작디작은 나라로 두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오히려 인재가 우리의 쓰임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더라도 혹 일이 구제될지 점치지도 못한다.
그런데 도리어 스스로 벼슬길을 막고서 스스로 “인재가 없구나 없어”라고 탄식하니,
어찌 월나라로 가고자 하면서 북쪽으로 수레를 모는 것과 다르리오.
(부끄러워) 이웃나라에 알리지 말아야 정도다.
보통사람도 원한을 품으면 하늘이 그를 위해 속상해주는데
하물며 원한을 지닌 사내와 홀어미들이 나라의 절반이나 되니
이욕치화기자역난의.
화목한 기색을 극진히 하고자 해도 또한 어렵다.
옛날의 어진 인재들이 대부분 미천한 데서 나왔는데,
만약 당시에 우리나라의 인재등용법을 썼다면 범문정(范文正)의 재상으로서의 업적은 없었을 것이고
진관(陳瓘)과 반양귀(潘良貴)는 직신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사마양저ㆍ위청지장,
사마양저(司馬穰苴)와 위청(衛靑)과 같은 장수,
왕부(王符)의 문장으로도 세상에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인재를 내었는데도 사람이 그걸 버렸으니, 이것은 하늘을 거스른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고도 하늘의 영명(永命)을 빌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
위국자기봉천이행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하늘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행한다면
즉경명역가이아속야.
* 진관(陳瓘) : 송 사람. 호는 료옹(了翁). 진사(進士)로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역임. 간관(諫官)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시호는 충숙(忠肅)임
* 반양귀(潘良貴) : 송 나라 금화인(金華人). 호는 묵성(黙成). 부당한 관리를 여러 차례 탄핵한 직신이었다
* 사마양저(司馬穰苴) : 춘추 시대의 제(齊) 나라 사람. 성은 전씨(田氏). 미천한 출신으로 병법에 밝아서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병서(兵書)를 남겨 사마병법으로 널리 알려졌다
* 위청(衛靑) : 한(漢) 나라 평양인(平陽人). 본래 정씨(鄭氏)인데, 어머니가 개가(改嫁)하여 위씨(衛氏)가 되었음. 무제(武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음.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지고 시호는 열후(烈侯)임
* 왕부(王符) : 후한(後漢) 임치인(臨淄人).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조를 지켰음. 끝내 벼슬하지 않고 「잠부론(潛夫論)」을 지어 문명을 남겼다. 마융(馬融)과 특히 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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