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郭樂園, 1859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여사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이다. 본관 현풍이다.

백범 김구의 어머니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삼각혼이라는 황해도 전통적 겹사돈 혼례 풍습에 따라 (6촌아주버님)의 6촌 아우가 되는 김순영에게 시집왔다. 아들 김구를 성장시키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사서삼경》 등을 읽혔다. 그 뒤 아들 김구의 옥바라지에 힘썼으며, 후에 중국으로 망명, 82세로 중경에서 인후염과 폐병 등의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0003010104456

 

백범 김구선생 수감 인천감옥 최초확인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897년 탈옥했던 인천감옥은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 감옥서(監獄署)’이며 인천시 중구 신흥동 2가23 현 중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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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생활을 하던 중 1897년 탈옥했던 인천감옥은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 감옥서(監獄署)’이며 인천시 중구 신흥동 2가23 현 중구보건소 서쪽 뜰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퇴직 교도관인 홍종식씨(77·인천시 남구 학익2동 15)의 증언과 인천감리사·인천지방법원·인천지검 연혁 및 백범일지 등을 통해 국내 최초로 확인됐다.

홍씨는 백범선생이 인천감리서의 인천개항재판소 감옥에 수감돼 있다 탈옥했으며, 40∼50년대 함께 근무했던 선후배 교도관들은 ‘김구 선생이 탈옥했던 장소’라며 수차례 방문했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또 한국전쟁 전까지만해도 보건소 자리 400여평 정면에 재판소와 검사분국이 있었고, 서편으로 폭 4m 길이 40m의 1층 목조감옥이 건재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홍씨는 이와함께 1914년 김구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인천으로 이감왔을 때도 이 감옥에 수감됐으며, 인천법원과 검찰청이 중구 내동 83 현 스카이타워 자리로 이전한 것은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홍씨의 이같은 증언은 김구선생이 1914년에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항만축조공사 등에 강제노역 당한 사실을 보다 구체화 하는 것으로 백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천 부두 건설

신포 문화거리 중앙부터 시작
노역의 현장 조형물 눈에 띄어


백범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중 한 명으로서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인천 중구에 있는 청년 김구 역사거리는 '청년' 김창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 김구 선생으로 단련되는 과정과 그 속에서의 애틋함을 구현해냈다.

총 8개 이야기로 구성된 청년 김구 역사거리는 신포 문화거리 중앙에서부터 시작된다.

'백범 김구, 일대기를 돌아보다'로 시작되는 거리는 앞선 주제와 함께 백범 김구의 중요 일대기 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김구 동상을 시작으로 바닥에 그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김구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핵심 일대기만 적혀 있어 이해하기 편하고 시선이 가는 구성이다. 그 후 '청년 김구와 인천의 만남', '김구와 교감하다' 등 표시판에 적혀진 김구와 인천과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나 '첫 번째 수감, 인천의 조력자들'의 경우 김구 구출 계획을 수립한 김주경, 유완무, 박영문, 안호연 선생 등이 소개되어 있어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조력자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청년 김구,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의 경우 백범일지 중 일부인 “하늘이 밝아오고 천주교당 뾰족집(현재의 답동성당)이 보였다.” 부분을 그대로 재현한 조형물이 있어, 이야기에 따라 걷는 이들의 몰입도에 더욱 흥미를 더했다.


'노역의 현장'과 '노역 현장에서의 회고' 부분은 조형물과 주변 공간 활용이 눈에 띈다. 죄수 신분으로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 겪었던 축항 경험을 조형물로 구현하고 백범일지 일부 내용과 함께 구성해 당시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인천항 축항 공사에 관한 생각을 일깨운다. 이동 골목에 낮은 담장에 삽, 곡괭이 등 노역 현장에서 활용한 도구들을 표현하였고 역사 거리 내 가로등은 축항 공사 작업 장면을 재현하여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운 어머니'는 김구 선생의 신념적 행보에 대한 존경을 더 하는 부분이다. 뒷짐을 지고 있는 김구 동상 뒤에 아들 등을 지탱해주는 곽낙원 여사 동상과 뒷짐을 지며 아들 뒤를 지키는 김순영 선생 조형물을 보면 당시 독립을 위해 힘썼던 수많은 독립투사가 결국 한 가정의 소중한 일원임을 일깨워준다. 동상들 시선이 닿는 인천의 거리, 그리고 그 너머의 곳들이 선조들의 신념으로 일궈낸 터전임을 다시금 인지시켜준다.

청년 김구 역사거리는 김구 선생과 인천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도 이와 관련된 조형물과 내용이 잘 구성된 거리다.

출처 : 인천일보(https://www.incheonilbo.com)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753

 

김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신민회,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김구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https://blog.naver.com/incheontogi/222644792858

 

독립운동사를 따라 산책, 인천 신포동 걷기 좋은 청년 김구 역사거리

독립운동사를 따라 산책, 인천 신포동 걷기 좋은 청년 김구 역사거리 인천 신포동 시장이 끝나는 오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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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족보로 항렬표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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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동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중시조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174 김방경(金方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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