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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 군(群). 이름의 뜻은 서쪽에 있는 5개의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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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릉

2.1. 경릉(敬陵)2.2. 창릉(昌陵)2.3. 명릉(明陵)2.4. 익릉(翼陵)2.5. 홍릉(弘陵)

3. 원(園)과 묘(墓)

3.1. 순창원(順昌園)3.2. 수경원(綏慶園)3.3. 대빈묘(大嬪墓)

4. 관련 문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군(群). 이름의 뜻은 서쪽에 있는 5개의 능(陵)이라는 뜻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으로[1]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곳으로 5릉은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홍릉(弘陵), 명릉(明陵) 등을 말하며, 그 외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소(위 지도에서 6번)도 이곳에 있다.

꽤나 유명한 인물들의 능묘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순창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능묘의 주인공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조연급으로 나왔던 인물들이다. 경릉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그의 부인인 인수대비의 능이고, 창릉은 세조의 차남이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과 그의 부인 안순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숙종과 관련한 인물들도 있는데, 당장 본인 숙종과 그의   모두 이곳에 능이 있으며 역시 왕후에까지 올랐던 장희빈도 이쪽으로 묘가 옮겨 왔다. 또한 사도세자와 관련한 인물들의 능묘도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묘와 사도세자를 보호해주던 정성왕후의 능이 있다. 그야말로 조선 왕조의 드라마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묻혀 있기에 다른 왕릉들에 비해 인기가 꽤 있는 편에 속한다.

참고로 정문에서 가장 먼 창릉까지 그냥 걸어만 가도 30분 정도가 족히 걸릴 정도로 꽤나 길고 고차도 상당한 편이다. 전부 다 돌아본다면 1시간 정도는 족히 잡고 와야 한다. 지리적으로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구산동과 근접해 있다. 그 덕에 은평구 소재 학교들은 꼭 한 번은 이 곳으로 소풍을 올 정도로 자주 오는 곳.

현재 국가유산청이 관리감독하고 있다. 

2. 왕릉

2.1. 경릉(敬陵)

조선 덕종과 소혜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1기
경릉

敬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소혜왕후 (1504년 5월 21일 사망)
언덕 우: 덕종 (1457년 9월 29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경릉(敬陵) 전경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세자이자 제9대 국왕 성종의 아버지인 추존국왕 덕종 소혜왕후 한씨가 안장된 왕릉.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1457년(세조 3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현 치소 동쪽(현재의 자리)에 의묘(懿墓)를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의 묘가 있던 자리였으나, 의묘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경릉(敬陵)으로 높여졌다. 이후 1504년(연산군 10년)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경릉 근처에 그녀의 능을 조성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침(左)과 덕종의 능침(右)
원래대로라면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묻혀있어야 하지만 덕종은 세자 신분으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대왕대비 신분으로 묻혔기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반대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형식의 차이도 있어서 덕종은 원(園)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혜왕후는 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2]

 
 
소혜왕후 능침의 무인석(左)과 덕종 능침의 문인석(右)
덕종 능침의 경우, 추존된 국왕인 탓인지 석물의 구성이 간소하고 문석인만 설치되어 있다. 반면 소혜왕후의 경우 대왕대비 신분으로 사망하였기에 석물들 또한 왕릉의 격에 맞게 잘 갖춰져 있으나, 무석인을 자세히 보면 비례와 좌우균형 등이 무너져 있어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연산군 말기 능묘의 석물 형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경릉(敬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국 덕종대왕 경릉 소혜왕후 부우강(朝鮮國 德宗大王 敬陵 昭惠王后 祔右岡)"라는 글씨가 전서체로[3] 음각되어 있다.

2.2. 창릉(昌陵)[편집]

조선 예종과 안순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2기
창릉

昌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예종 (1470년 1월 9일 사망)
언덕 우: 안순왕후 (1499년 2월 12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창릉(昌陵) 전경
 
조선 제8대 국왕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 해당 문서 참고.

2.3. 명릉(明陵)[편집]

조선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3기
명릉

明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인원왕후 (1757년 5월 13일 사망)
*언덕 우
봉분 좌: 숙종 (1720년 7월 12일 사망)
봉분 우: 인현왕후 (1701년 9월 16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명릉(明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가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그 옆에 단릉으로 묻혀있다. 인현왕후는 숙종보다 한참 먼저 세상을 떠났고, 후에 숙종도 60세를 일기로 승하하면서 그녀 옆에 묻히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죽기 전까지 현재 왕비였고 가장 오랜 기간 숙종의 정비였던 인원왕후[4] 끝내 죽어서도 홀로 남편을 바라보는 형태로 묻히고 말았다.

 
 
숙종·인현왕후의 능침(左)과 인원왕후의 능침(右)
명릉의 모든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형태와 배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인원왕후의 단릉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명릉(明陵)의 표석[5]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다. 좌측 표석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 부좌(朝鮮國 肅宗大王 明陵 仁顯王后 祔左)"라는 글씨가, 우측 표석에는 "조선국 인원왕후 부우(朝鮮國 仁元王后 祔右)"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여담으로 숙종의 능침에는 그가 평소 아꼈다고 전해지던 고양이 금손도 함께 묻혀있다. 또한 서오릉 구역 내에 숙종의 다른 왕후와 후궁들의 묘역도 있는데, 하나는 첫 번째 정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 다른 하나는 희대의 여인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이다.

2.4. 익릉(翼陵)

조선 인경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4기
익릉

翼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익릉(翼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안장된 능이다. 일찍 사망했기 때문인지[6]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묻힌 명릉과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익릉(翼陵)의 문·무석인과 석호
봉분은 명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숙종 초기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정전 양옆에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설치하여 규모를 키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2.5. 홍릉(弘陵)

조선 정성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5기
홍릉

弘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홍릉(弘陵)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 서씨가 안장된 능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묻혔다가 고종이 사망하면서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된 서울 동대문구 홍릉(洪陵)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를 조성하였다.[7] 석물의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고 빈 자리의 정혈(正穴)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묻는 등 영조는 생전에 정성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다. 그러나 영조 사후 즉위한 정조가 당시 살아있던 정순왕후의 눈치도 같이 살펴야 하는 상황에 신하들의 의견 불일치까지 겹치는 바람에 영조를 현재 동구릉 권역에 장사지냈고, 결국 홍릉은 정성왕후 혼자 쓸쓸히 묻힌 채 남아있게 된다.

 
 
홍릉의 난간석과 문·무인석
홍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로 표기한(‘乙’과‘辛’) 능의 방향만 새겨져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에는 구름 모양을 새겼다.

 
홍릉(弘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朝鮮國 貞聖王后 弘陵)"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8]

3. 원(園)과 묘(墓)

3.1. 순창원(順昌園)

조선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1기
순창원

順昌園
 
매장지
조성형태
합장분(合葬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순창원(順昌園) 전경
 
조선 제13대 국왕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가 안장된 원(園). 서오릉 내에 있는 능묘들 중 수경원과 함께 둘 뿐인 '원(園)'이다.

현재 두 사람 중 시신이 온전히 안장된 인물은 순회세자 한 명 뿐이다. 공회빈 윤씨는 시신 대신 의복을 관에 넣고 합장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공회빈 윤씨는 1592년 4월 14일 사망하였는데, 한 달 뒤인 5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말았다.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와 신하들은 한양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떠났는데, 경황이 없던 나머지 공회빈 윤씨의 시신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것. 뒤늦게 벽제에 다다라서야 선조가 그녀의 시신을 후원에 가매장하라는 명령을 보내긴 했지만, 1년 뒤인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1603년 선조는 그녀의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신주만 봉안해 종묘에 모셨으며, 동시에 그녀를 유의장[9]으로 장사지내며 순회세자와 합장했다.

조성 당시에는 순회묘(順懷墓)라 불리었으나 1870년(고종 7년)에 순창원으로 승격되며 격에 맞는 석물들이 조성되었다.

3.2. 수경원(綏慶園)

조선 영빈 이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2기
수경원

綏慶園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수경원(綏慶園)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원(園)이다. 원래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했고,[10]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루스채플이 세워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빠져 있었다.

3.3. 대빈묘(大嬪墓)

조선 옥산부대빈 장씨의 묘
대빈묘

大嬪墓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1970년 이후
홈페이지
 
 
대빈묘(大嬪墓)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후궁이자 제20대 국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11]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園)'이 되어야 하나, 죄를 지어 사약을 마시고 죽은 죄인인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로 남게 되었다.
 
사실 희빈 장씨 사후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가 정해졌으나 장씨는 죄인인 데다 해당 제도를 만든 영조부터가 희빈 장씨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희빈 장씨의 무덤은 “원(園)”으로 승격되지 못했다.

위치는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 곳이다. 다른 능과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도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희빈 장씨의 생애가 워낙 파란만장했던 탓인지 온갖 귀신 괴담이 돌아다녔던 장소이기도 하다.

4. 관련 문서

조선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3기
명릉

明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인원왕후 (1757년 5월 13일 사망)
*언덕 우
봉분 좌: 숙종 (1720년 7월 12일 사망)
봉분 우: 인현왕후 (1701년 9월 16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명릉(明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가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그 옆에 단릉으로 묻혀있다. 인현왕후는 숙종보다 한참 먼저 세상을 떠났고, 후에 숙종도 60세를 일기로 승하하면서 그녀 옆에 묻히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죽기 전까지 현재 왕비였고 가장 오랜 기간 숙종의 정비였던 인원왕후[4] 끝내 죽어서도 홀로 남편을 바라보는 형태로 묻히고 말았다.

 
 
숙종·인현왕후의 능침(左)과 인원왕후의 능침(右)
명릉의 모든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형태와 배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인원왕후의 단릉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명릉(明陵)의 표석[5]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다. 좌측 표석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 부좌(朝鮮國 肅宗大王 明陵 仁顯王后 祔左)"라는 글씨가, 우측 표석에는 "조선국 인원왕후 부우(朝鮮國 仁元王后 祔右)"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여담으로 숙종의 능침에는 그가 평소 아꼈다고 전해지던 고양이 금손도 함께 묻혀있다. 또한 서오릉 구역 내에 숙종의 다른 왕후와 후궁들의 묘역도 있는데, 하나는 첫 번째 정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 다른 하나는 희대의 여인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이다.

2.4. 익릉(翼陵)

조선 인경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4기
익릉

翼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익릉(翼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안장된 능이다. 일찍 사망했기 때문인지[6]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묻힌 명릉과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익릉(翼陵)의 문·무석인과 석호
봉분은 명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숙종 초기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정전 양옆에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설치하여 규모를 키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2.5. 홍릉(弘陵)[편집]

조선 정성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5기
홍릉

弘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홍릉(弘陵)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 서씨가 안장된 능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묻혔다가 고종이 사망하면서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된 서울 동대문구 홍릉(洪陵)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를 조성하였다.[7] 석물의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고 빈 자리의 정혈(正穴)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묻는 등 영조는 생전에 정성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다. 그러나 영조 사후 즉위한 정조가 당시 살아있던 정순왕후의 눈치도 같이 살펴야 하는 상황에 신하들의 의견 불일치까지 겹치는 바람에 영조를 현재 동구릉 권역에 장사지냈고, 결국 홍릉은 정성왕후 혼자 쓸쓸히 묻힌 채 남아있게 된다.

 
 
홍릉의 난간석과 문·무인석
홍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로 표기한(‘乙’과‘辛’) 능의 방향만 새겨져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에는 구름 모양을 새겼다.

 
홍릉(弘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朝鮮國 貞聖王后 弘陵)"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8]

3. 원(園)과 묘(墓)

3.1. 순창원(順昌園)

조선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1기
순창원

順昌園
 
매장지
조성형태
합장분(合葬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순창원(順昌園) 전경
 
조선 제13대 국왕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가 안장된 원(園). 서오릉 내에 있는 능묘들 중 수경원과 함께 둘 뿐인 '원(園)'이다.

현재 두 사람 중 시신이 온전히 안장된 인물은 순회세자 한 명 뿐이다. 공회빈 윤씨는 시신 대신 의복을 관에 넣고 합장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공회빈 윤씨는 1592년 4월 14일 사망하였는데, 한 달 뒤인 5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말았다.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와 신하들은 한양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떠났는데, 경황이 없던 나머지 공회빈 윤씨의 시신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것. 뒤늦게 벽제에 다다라서야 선조가 그녀의 시신을 후원에 가매장하라는 명령을 보내긴 했지만, 1년 뒤인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1603년 선조는 그녀의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신주만 봉안해 종묘에 모셨으며, 동시에 그녀를 유의장[9]으로 장사지내며 순회세자와 합장했다.

조성 당시에는 순회묘(順懷墓)라 불리었으나 1870년(고종 7년)에 순창원으로 승격되며 격에 맞는 석물들이 조성되었다.

3.2. 수경원(綏慶園)

조선 영빈 이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2기
수경원

綏慶園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수경원(綏慶園)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원(園)이다. 원래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했고,[10]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루스채플이 세워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빠져 있었다.

3.3. 대빈묘(大嬪墓)

조선 옥산부대빈 장씨의 묘
대빈묘

大嬪墓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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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이후
홈페이지
 
 
대빈묘(大嬪墓)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후궁이자 제20대 국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11]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園)'이 되어야 하나, 죄를 지어 사약을 마시고 죽은 죄인인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로 남게 되었다.
 
사실 희빈 장씨 사후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가 정해졌으나 장씨는 죄인인 데다 해당 제도를 만든 영조부터가 희빈 장씨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희빈 장씨의 무덤은 “원(園)”으로 승격되지 못했다.

위치는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 곳이다. 

희빈 장씨의 생애가 워낙 파란만장했던 탓인지 온갖 귀신 괴담이 돌아다녔던 장소이기도 하다.

4. 관련 문서

 

 

 
] 舊 사적 제198호[2] 동구릉에 위치한 추존 황제 문조와 그의 비 신정익황후가 안장된 수릉도 동일한 이유로 신정왕후가 왼쪽에 묻혔으나, 수릉은 합장릉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봐야 알 수 있다.[3]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글씨이다.[4] 인원왕후가 왕비에 있던 기간은 전임자 인경왕후 인현왕후보다 훨씬 긴 18년이다.[5] 왼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표석, 오른쪽이 인원왕후의 표석이다.[6] 1680년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40년이 지나서야 숙종이 사망했다.[7] 숙종의 명릉과 조성 과정이 똑같은데, 영조가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당시 명릉의 예를 참고하도록 했기 때문이다.[8] 표석의 글자 배치가 일반적인 단릉 표석의 형식과는 많이 다른데, 원래 가운데와 좌하단의 빈자리에 '영종대왕(英宗大王)'과 '부좌(祔左)'가 들어가야 했으나 영조 정순왕후와 함께 안장되며 그대로 비워진 채 전해진 것이다.[9] 遺衣葬. 의복으로 장사를 지내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시신 대신 고인의 의복을 관에 넣고 안장한 것이다.[10] 그래서 원래 자리에 현재까지도 정자각이 남아있다.[11]  광주시 오포1동(법정동 문형동 452 일대)

2. 왕릉[편집]

2.1. 경릉(敬陵)[편집]

조선 덕종과 소혜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1기
경릉

敬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소혜왕후 (1504년 5월 21일 사망)
언덕 우: 덕종 (1457년 9월 29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경릉(敬陵) 전경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세자이자 제9대 국왕 성종의 아버지인 추존국왕 덕종 소혜왕후 한씨가 안장된 왕릉.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1457년(세조 3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현 치소 동쪽(현재의 자리)에 의묘(懿墓)를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鄭易)의 묘가 있던 자리였으나, 의묘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경릉(敬陵)으로 높여졌다. 이후 1504년(연산군 10년)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생전에 남긴 유언에 따라 경릉 근처에 그녀의 능을 조성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침(左)과 덕종의 능침(右)
원래대로라면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묻혀있어야 하지만 덕종은 세자 신분으로 죽었고, 소혜왕후는 대왕대비 신분으로 묻혔기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반대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형식의 차이도 있어서 덕종은 원(園)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혜왕후는 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2]

 
 
소혜왕후 능침의 무인석(左)과 덕종 능침의 문인석(右)
덕종 능침의 경우, 추존된 국왕인 탓인지 석물의 구성이 간소하고 문석인만 설치되어 있다. 반면 소혜왕후의 경우 대왕대비 신분으로 사망하였기에 석물들 또한 왕릉의 격에 맞게 잘 갖춰져 있으나, 무석인을 자세히 보면 비례와 좌우균형 등이 무너져 있어 언뜻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연산군 말기 능묘의 석물 형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경릉(敬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국 덕종대왕 경릉 소혜왕후 부우강(朝鮮國 德宗大王 敬陵 昭惠王后 祔右岡)"라는 글씨가 전서체로[3] 음각되어 있다.

2.2. 창릉(昌陵)

조선 예종과 안순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2기
창릉

昌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예종 (1470년 1월 9일 사망)
언덕 우: 안순왕후 (1499년 2월 12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창릉(昌陵) 전경
 
조선 제8대 국왕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 해당 문서 참고.

2.3. 명릉(明陵)[편집]

조선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3기
명릉

明陵
 
매장지
조성형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매장자
*언덕 좌 인원왕후 (1757년 5월 13일 사망)
*언덕 우
봉분 좌: 숙종 (1720년 7월 12일 사망)
봉분 우: 인현왕후 (1701년 9월 16일 사망)
조성시기
홈페이지
 
 
명릉(明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가 안장되어 있는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으로, 인원왕후는 그 옆에 단릉으로 묻혀있다. 인현왕후는 숙종보다 한참 먼저 세상을 떠났고, 후에 숙종도 60세를 일기로 승하하면서 그녀 옆에 묻히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죽기 전까지 현재 왕비였고 가장 오랜 기간 숙종의 정비였던 인원왕후[4] 끝내 죽어서도 홀로 남편을 바라보는 형태로 묻히고 말았다.

 
 
숙종·인현왕후의 능침(左)과 인원왕후의 능침(右)
명릉의 모든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의 형태와 배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인원왕후의 단릉 모두 비슷한 모습이다.

 
명릉(明陵)의 표석[5]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인원왕후의 능침을 위한 표석이다. 좌측 표석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 부좌(朝鮮國 肅宗大王 明陵 仁顯王后 祔左)"라는 글씨가, 우측 표석에는 "조선국 인원왕후 부우(朝鮮國 仁元王后 祔右)"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여담으로 숙종의 능침에는 그가 평소 아꼈다고 전해지던 고양이 금손도 함께 묻혀있다. 또한 서오릉 구역 내에 숙종의 다른 왕후와 후궁들의 묘역도 있는데, 하나는 첫 번째 정비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 다른 하나는 희대의 여인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이다.

2.4. 익릉(翼陵)[편집]

조선 인경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4기
익릉

翼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익릉(翼陵)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안장된 능이다. 일찍 사망했기 때문인지[6]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묻힌 명릉과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익릉(翼陵)의 문·무석인과 석호
봉분은 명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숙종 초기에 조성된 능이기 때문에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서오릉 내에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정전 양옆에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설치하여 규모를 키웠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지형에 따라 중간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2.5. 홍릉(弘陵)

조선 정성왕후의 왕릉 | 서오릉 내 5기
홍릉

弘陵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홍릉(弘陵)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 서씨가 안장된 능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묻혔다가 고종이 사망하면서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된 서울 동대문구 홍릉(洪陵)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를 조성하였다.[7] 석물의 배치 역시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고 빈 자리의 정혈(正穴)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묻는 등 영조는 생전에 정성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다. 그러나 영조 사후 즉위한 정조가 당시 살아있던 정순왕후의 눈치도 같이 살펴야 하는 상황에 신하들의 의견 불일치까지 겹치는 바람에 영조를 현재 동구릉 권역에 장사지냈고, 결국 홍릉은 정성왕후 혼자 쓸쓸히 묻힌 채 남아있게 된다.

 
 
홍릉의 난간석과 문·무인석
홍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로 표기한(‘乙’과‘辛’) 능의 방향만 새겨져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에는 구름 모양을 새겼다.

 
홍릉(弘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朝鮮國 貞聖王后 弘陵)"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8]

3. 원(園)과 묘(墓)

3.1. 순창원(順昌園)

조선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1기
순창원

順昌園
 
매장지
조성형태
합장분(合葬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순창원(順昌園) 전경
 
조선 제13대 국왕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가 안장된 원(園). 서오릉 내에 있는 능묘들 중 수경원과 함께 둘 뿐인 '원(園)'이다.

현재 두 사람 중 시신이 온전히 안장된 인물은 순회세자 한 명 뿐이다. 공회빈 윤씨는 시신 대신 의복을 관에 넣고 합장하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공회빈 윤씨는 1592년 4월 14일 사망하였는데, 한 달 뒤인 5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말았다.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와 신하들은 한양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떠났는데, 경황이 없던 나머지 공회빈 윤씨의 시신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것. 뒤늦게 벽제에 다다라서야 선조가 그녀의 시신을 후원에 가매장하라는 명령을 보내긴 했지만, 1년 뒤인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1603년 선조는 그녀의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신주만 봉안해 종묘에 모셨으며, 동시에 그녀를 유의장[9]으로 장사지내며 순회세자와 합장했다.

조성 당시에는 순회묘(順懷墓)라 불리었으나 1870년(고종 7년)에 순창원으로 승격되며 격에 맞는 석물들이 조성되었다.

3.2. 수경원(綏慶園)

조선 영빈 이씨의 원(園) | 서오릉 내 원(園) 2기
수경원

綏慶園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수경원(綏慶園)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원(園)이다. 원래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했고,[10]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루스채플이 세워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빠져 있었다.

3.3. 대빈묘(大嬪墓)[편집]

조선 옥산부대빈 장씨의 묘
대빈묘

大嬪墓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1970년 이후
홈페이지
 
 
대빈묘(大嬪墓) 전경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후궁이자 제20대 국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11]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園)'이 되어야 하나, 죄를 지어 사약을 마시고 죽은 죄인인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로 남게 되었다.
 
사실 희빈 장씨 사후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생모인 후궁의 무덤을 원으로 삼는 제도가 정해졌으나 장씨는 죄인인 데다 해당 제도를 만든 영조부터가 희빈 장씨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희빈 장씨의 무덤은 “원(園)”으로 승격되지 못했다.

위치는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 곳이다. 다른 능과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도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희빈 장씨의 생애가 워낙 파란만장했던 탓인지 온갖 귀신 괴담이 돌아다녔던 장소이기도 하다.

4. 관련 문서

 
 
[1] 舊 사적 제198호
[2] 동구릉에 위치한 추존 황제 문조와 그의 비 신정익황후가 안장된 수릉도 동일한 이유로 신정왕후가 왼쪽에 묻혔으나, 수릉은 합장릉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봐야 알 수 있다.
[3]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글씨이다.
[4] 인원왕후가 왕비에 있던 기간은 전임자 인경왕후 인현왕후보다 훨씬 긴 18년이다.
[5] 왼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표석, 오른쪽이 인원왕후의 표석이다.
[6] 1680년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40년이 지나서야 숙종이 사망했다.
[7] 숙종의 명릉과 조성 과정이 똑같은데, 영조가 정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당시 명릉의 예를 참고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8] 표석의 글자 배치가 일반적인 단릉 표석의 형식과는 많이 다른데, 원래 가운데와 좌하단의 빈자리에 '영종대왕(英宗大王)'과 '부좌(祔左)'가 들어가야 했으나 영조 정순왕후와 함께 안장되며 그대로 비워진 채 전해진 것이다.
[9] 遺衣葬. 의복으로 장사를 지내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시신 대신 고인의 의복을 관에 넣고 안장한 것이다.
[10] 그래서 원래 자리에 현재까지도 정자각이 남아있다.
[11]  광주시 오포1동(법정동 문형동 452 일대)
 
 

어제 들렀던 서오릉 사진을 순서대로 사진을 올려 본다.

 

장희빈 [張禧嬪]

일장춘몽 권세를 누리다

1659년(효종 10) ~ 1701년(숙종 27)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10400&code=kc_age_30

1 환국의 정쟁 속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삶

숙종[조선](肅宗)은 기존의 붕당 연합의 구도가 점차 폐단을 드러내며 대립과 갈등의 골이 심해지자,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붕당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하는 정국 운영 즉 ‘환국’의 방식을 취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치적 부침이 심한 붕당은 서인과 남인이었다. 장희빈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인의 정치적 행보와 운명을 함께 했으며,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딸로 궁중 나인으로 들어와 숙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왕자를 낳은 이후 왕비의 지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예는 남인의 득세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역으로 남인의 몰락은 그녀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장희빈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약을 먹고 죽음에 이르렀다. 그녀의 몰락은 이후 남인의 정치적 패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후 그녀의 아들인 경종[조선](景宗)과 노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영조(英祖)의 갈등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2 숙종대 환국과 서인∙남인의 정치적 부침

장희빈이 생존한 시기는 숙종 초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극대화되었던 시기이며, 장희빈은 그 속에서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가 된 동시에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던 인물이다. 15년간 집권한 현종의 뒤를 이어 14세에 왕위에 오른 숙종은 45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換局)’이라 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680년(숙종 6)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하였는데, 남인 영수 허적(許積)이 군인을 동원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일을 계기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이 사이에 서인은 자체 분열을 일으켜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 1689년(숙종 15)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층으로 재등장하고, 5년 뒤 장희빈이 사형을 당하면서 남인은 몰락하고 이후에 이전처럼 재기가 어렵게 되었다.

3 역관의 딸로 태어나 숙종의 후궁이 되다.

장희빈(?~1701(숙종 27))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조선시대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했던 인동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던 연유로 1604년(선조 37)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인동 장씨는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데, 장금용은 고려시대 대광보국 벽상공신 상장군으로 옥산부원군을 지냈기 때문에 본관을 옥산으로 쓰다가 조선말에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면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장희빈의 부계는 아버지 장형(張炯), 조부인 장응인(張應仁), 증조부 장수(張壽)이다. 이들은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을 때, 각각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장희빈의 조부인 장응인은 역관으로서 중국어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쓰고, 풍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희빈의 종숙부인 장현(張炫) 역시 주목할 만한데, 1639년(인조 17) 역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에 가서 6년을 머물며 여진족 사정을 파악했다. 귀국해서 당상관이 되어서는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30차례 북경을 다니며 국사를 도맡아 주선하였다. 장현은 이미 효종(孝宗) 초기부터 ‘나라 안의 부자’라고 불릴 만큼 재산을 모았고, 품계가 종일품 숭록대부까지 올라가기도 하였지만 종실, 남인계 인물과의 친분을 이유로 경신환국 때에는 역모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고 유배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희빈의 가계는 대대로 역관 가문으로서 재력도 좋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씨는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다. 그녀가 남다른 자색으로 숙종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 것은 1680년(숙종 6)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사망한 이후부터였다. 둘의 관계를 눈치 챈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는 장씨와 숙종의 관계를 우려하며 궁 밖으로 쫒아냈다.

1681년(숙종 7) 인현왕후(仁顯王后)는 명성왕후에게 총애를 입은 궁녀를 여염집에 두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 때문에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명성왕후는 그녀의 자질이 좋지 않은데, 주상이 꾐을 받게 된다면 때문에 국가의 화가 크게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성왕후가 사망하자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다시 장씨의 일을 아뢰고,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 역시 왕에게 권장함으로써 장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 무렵 항간에는 “궁인 장씨를 위한 별당을 세우려 하는데,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밤에 몰래 재목을 나르게 한다.”거나, 때마침 일어난 수해에 대해 사람들은 예로부터 여인을 총애하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말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시기 부교리 이징명(李徵命)은 이러한 민심을 근거로 근래에 일어난 천재지변은 매우 놀랄 만한데, 『사기(史記)』에 의하면 외척의 집권으로 혹은 여인의 극성으로 연유하였다고 하니, 최근 들어 일어난 천재지변이나 국가의 화란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다고 운을 떼었다. 이어서 궁인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이 이전 경신환국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점과, 국가의 화란은 여인에 대한 총애에서 말미암으니 장녀를 내쫒아서 정치를 원상태로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 상소를 읽은 숙종은 크게 분노하면서 이징명을 파직하였고, 이후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봉하는 등 장씨에 대한 대우는 더욱 융숭해졌다. 그런 가운데 1688년(숙종 14) 장씨가 왕자 균을 낳았다.

숙종은 왕자가 출생한 지 채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지금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서 명호를 정하려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바치고 물러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난색을 표하며, 다른 날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이어서 보란 듯이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숙종의 처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여 국가의 화가 조석에 미칠 것이라 두려워하였다.

명호의 문제가 일단락되고 남인의 집권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있을 무렵인 2월 1일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명호를 정한 것이 너무 성급한 조처였으니, 환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분노하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성문 밖으로 내칠 것을 명하였다.

원자로서의 명호를 정하는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된 이 문제는 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송시열의 처벌, 그것은 곧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환국 즉 ‘기사환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1년에 걸쳐 전 현직 관료와 재야 유림을 막론하고 100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난 자리는 남인이 주도하였고 이전의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남인들이 신원되었다. 그 결과 숙종 14년 12월에 열에 한두 명에 불과했던 정부요직에서 남인의 비중은 숙종 15년까지 8할이 넘게 되었다.

4 환국의 여파와 장희빈의 파란만장한 삶

남인이 기사환국으로 소생하여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희빈에게는 큰 기회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였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급기야 1690년(숙종 16)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되었다.

결국 장희빈은 환국의 과정에서 남인의 집권과 궤를 같이하여 희빈에서 왕비에 이르는 영예를 안았지만 그가 왕비로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은 3년에 그쳤다. 기사환국 이후 숙종은 극도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 당파인 남인에게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갑술환국’으로 드러났다.

기사환국이 일어 난지 5년 후인 1694년(숙종 20) 3월,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의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내용인 즉 노론이 남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서인의 재집권을 꾀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남인의 음모임이 밝혀졌고, 이후 남인의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대한 독살설까지 불거짐에 따라 숙종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갑자기 비망기를 내려 남인을 축출하고, 기사환국으로 몰락했던 서인을 다시 등용하는 갑술환국을 단행했다. 남인들은 기사환국 때보다 훨씬 많은 수가 처벌받았으며, 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두 번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장희빈이 남인의 정치적 흥망과 운명을 같이 했다면, 인현왕후는 서인과 그것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서인의 재집권과 궤를 같이 하여 인현왕후가 복위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억울한 정상을 모두 이해하였고, 자신은 권간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음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흉악한 자를 내치고 옛 신하를 다시 등용할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로서 인현왕후는 다시 복원되었고, 서인이 재집권을 함으로써 장희빈의 앞날은 불투명할 밖에 없었다. 이로써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한 장씨 집안에서는 서인 타도를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1696년(숙종 22)에는 장희빈 부친인 장형의 묘에서 흉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남인의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져서 문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이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숙종은 희빈 장씨가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고자 신당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종사를 위하고 세자를 위하여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

이 일로 장희빈은 물론 장희재까지 사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희빈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급기야 사약을 먹고 자진하기까지 파란만장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숙종이 실시한 환국정치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장희빈은 바로 정치 문제의 핵이었고, 또한 갈등, 대립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5 남인의 몰락, 그리고 경종과 영조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은 장희빈은 사약을 먹고 사사(賜死)되었다. 이일의 여파로 장희빈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후 남인의 재집권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장희빈의 몰락은 남인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또한 노론을 등에 업은 숙빈 최씨와의 갈등은 이후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후의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계열과 노론 측에 가까웠던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후의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계열간의 갈등의 불씨를 남겨놓은 것으로, 후대 피비린내 나는 경종 초반의 옥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역사넷

숙종[조선](肅宗)은 기존의 붕당 연합의 구도가 점차 폐단을 드러내며 대립과 갈등의 골이 심해지자,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붕당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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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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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왕릉(朝鮮王陵)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들의 무덤을 총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1897년에 수립된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와 황후의 무덤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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