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shorts/ETKbExfNRR4

鸞郎碑 序文.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이 작성한 난랑비의 서문. 난랑비서(鸞郞碑序)라고도 한다.

崔致遠鸞郞碑序曰(최치원난랑비서왈)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말하기를

國有玄妙之道(국유현묘지도)
나라에 현묘[1]한 도가 있으니

曰風流(왈풍류)
풍류라 한다

設敎之源(설교지원)
그 가르침을 창설한 내력은

備詳仙史(비상선사)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實乃包含三敎(실내포함삼교)
실로 곧 삼교[2]를 포함하여

接化羣生(접화군생)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且如入則孝於家(차요입즉효어가)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出則忠於國(출즉충어국)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魯司寇之旨也(노사구지지야)
노나라 사구[3]의 뜻이요

處無爲之事(처무위지사)
무위로(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周柱史之宗也(주주사지종야)
주나라 주사[4]의 근본이요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諸善奉行(제선봉행)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竺乾太子之化也(축건태자지화야)
축건태자[5]의 가르침이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012030001

 

한·중 국빈 만찬···이 대통령 ‘한비자’, 시 주석은 ‘최치원’ 언급

이재명 대통령은 1일 “저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님은 흔들림 없이 평화를 위한 길을 함께 나아가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한·중 정상회담 직후 시 주석의 방한을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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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공동 번영의 기본적 토대는 바로 평화”라며 “양국이 어떤 상황에도 평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정부가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과정에서 중국 역시 건설적인 역할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이 대통령은 중국 한비자의 구절을 인용하며 “중국 고전에는 ‘봉황이 날 수 있는 것은 깃털 하나의 가벼움 때문이 아니며, 천리마가 달릴 수 있는 것은 다리 하나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양국의 신뢰를 두텁게 해 준, 한·중관계의 주역들”이라고 격려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B9%84

 

한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생 한나라 사망 진나라 직업 철학자, 사상가, 작가 학파 법가 한비(韓非, 기원전 280년? ~ 기원전 233년)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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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韓非, 기원전 280년? ~ 기원전 233년)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 사상가, 작가이다. 한비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알려진 정보의 거의 전부가 실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韓)나라의 공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형명과 법술을 익혀 중앙집권적 제국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창도한 법가 이론의 집대성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비자[1]로도 불리나 한비자는 보통 그의 저서로만 불리고 있다. 순자의 문인이다.

 

https://kydong77.tistory.com/22184

 

최치원, 격황소서(檄黃巢書)·쌍녀분기(雙女墳記 )·사산비명(四山碑銘)/ 현승환, 최치원설화의

중국 양주 최치원 기념관 얖 백옥석상 https://kydong77.tistory.com/3613 최치원,격황소서(檄黃巢書) 최치원(崔致遠) ,격황소서(檄黃巢書)동문선 제49권 격서(檄書) http://www.minchu.or.kr/index.jsp?bizName=MK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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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격황소서(檄黃巢書)·쌍녀분기(雙女墳記 )·사산비명(四山碑銘)/ 현승환, 최치원설화의 형성(논문)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9%98%EC%9B%90

 

최치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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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은 신라의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의한 최은함이며 손자는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고려 제6대 왕인 성종(982년)때에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이다.

유학

최치원의 유학이 국비로 이루어진 것인지 사비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나이 열두 살에 바다를 따라 배로 당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라고 한 것이나, 《택리지》 전라도 영암군조에는 "최치원과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는 상선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 당의 제과에 급제했다."고 한 기록은 최치원이 신라의 다른 숙위학생들과는 달리 사신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상선을 타고 당에 들어간 것으로 관비 유학생이 아닌 사비 유학생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이것은 한국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어 있다. 국비유학생으로 보는 근거는 최치원 자신의 업적이나 당에 있을 때의 활동, 귀국 뒤의 국가적인 대우나[4]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최치원에게 말한 '10년'이라는 기간[5] 과, 최치원 자신이 지은 「헌시계」(《계원필경집》권17)에서 "아무(최치원)와 같이 같은 자는 외방(外方)에서 건너온 데다 재예(才藝)도 하품(下品)에 속합니다. 그래서 유궁(儒宮)에서 덕행을 사모하며…" 라고 한 내용이나[6] 《성주사 낭혜화상비》에서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돌아보건대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최치원을) 국자로 뽑아 과거를 응시하게 하셨으며 강왕께서는 국사로서 예우하셨다" 라고 한 데서 생각할 때 국비 유학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문왕 8년(868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에게 “10년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고 말했으며, 최치원 자신도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는(人百己千)’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했다고 밝히고 있다.[7]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경문왕 14년(874년), 최치원은 당나라의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2년 동안 별다른 직책 없이 동도(東都)를 유랑하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두 3편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 희종 건부 3년(876년)에[8] 이후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초투헌태위계」). 훗날 최치원은 자신이 현위 시절 지은 시와 부를 모아 《중산복궤집》을 지었으며 이는 《계원필경》과 함께 헌강왕에게 헌상되었다.

그러나 율수현위가 된 이듬해 겨울에 최치원은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에 응시하고자 중난산(終南山)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도 없이 생활이 궁핍해지고 학업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당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어려움이 닥쳤다. 생활이 궁핍해진 상태에서 최치원은 희종 광명 원년(880년)) 5월 절도사 고병(高騈)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으로 들어가게 된다.[9]

고병의 막하 활동 및 토황소격문

 황소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명 2년(881년) 황소가 군사를 일으킨 황소의 난이 발생하자, 고병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되고, 고병의 천거로 최치원은 도통순관에 임명되어 병마도통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정하였다. 7월 8일에 그는 반란군의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 已議陰誅)"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신라 귀국

헌강왕 10년(884년) 음력 10월 신라 사신으로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고국 소식을 전해 온 사촌동생 서원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는데, 회남을 출발한 신라의 배는 풍랑으로 유산에서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고, 곧 겨울이 되어 곡포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헌강왕 11년(885년)에야 신라에 도착한다.

신라에서 그는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거나 왕실 사찰의 비문과 기, 찬, 발원문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문장을 지었다. 당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한 최치원은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가 되었으며, 《초월산대숭복사비》의 글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자신이 당에서 저작한 《사금체시》 5수(1권), 《오언칠언 금체시》 100수(1권), 《잡시부》 30수(1권), 《중산복궤집》 1부(5권), 《계원필경집》 1부(20권) 등 28권의 문집을 추려 헌강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7월에 헌강왕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이후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에게 밀려 외직(外職)인 태산군(太山郡)의 태수(太守)로 나가게 된다. 정강왕 2년(887년) 11월에 지은 《왕비 김씨 위선고급망형추복 시곡원문》에서 자신을 부성태수라고 하고 있어, 이듬해에 태산군에서 다시 부성군으로 부임지가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정강왕 사후 진성여왕 원년(887년)과 4년(890년), 7년(893년)에 각각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을 각각 지었다. 진성여왕 7년(893년) 납정절사로 임명되어 당나라로 파견되었던 병부시랑 김처회가 그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자, 조정은 다시 혜성군태수 김준을 고주사로 삼고 부성군태수로 있던 최치원을 하정사로서 당에 보냈지만, 당시 흉년이 들고 도처에 도적들이 들끓어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시무 10여 조를 올린 시기에 최치원은 천령군 (함양) 태수로 나가 있었는데,[10]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 해인사의 승려 희랑에게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치원의 관직을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문집에 남아 전하는 증희랑화상시 6수 중에는 이러한 문구가 보이지 않지만, 천령군 즉 함양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던 당시 올라가 노닐었다는 학사루가 있고,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 상림도 존재하고 있다.

만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 이어 아찬(阿飡)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산림과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주 남산, 강주(현, 영주시)의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에서 은거하다가 마지막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난랑비서문이 있어 신라 화랑도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으며, 계원필경과 동문선 등에 그의 시문이 일부 전하며, 금석총람에도 비문이 전한다.

사후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현종 14년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주의 서악서원, 태인 무성서원, 영평 고운영당, 함양 백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357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내용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시무십여조 진상 이전에 편찬하거나 작성하였던 『 계원필경(桂苑筆耕)』과 『 사산비명(四山碑銘)』의 내용과 연관되었을 것이다.

『계원필경』에서는 당 사회의 혼란을 일으켰던 반적(叛賊)주2들을 다스리는 입장과 함께 인(仁)・효(孝)에 밝은 군왕의 자질을 강조하면서 군왕의 덕화 정치와 도(道)의 추구를 부각하였다. 『사산비명』에서는 군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여 군자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유학적 소양을 가진 6두품 유학 지식인을 등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무십여조에는 우선 국학(國學)을 통한 유학 교육의 강화, 도당 유학생 파견과 그 활용 방안 모색, 문한기구의 확장과 문한관의 관직 서열상 승격 도모, 유학적 소양을 기준으로 한 관료 임용과 승진 방안 구축이 담겼을 것이다. 또한 지방민 유망주3을 방지하는 제도적 보완 장치 마련, 유망의 원인인 수취 제도의 개선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 등이 사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왕의 교화로 설득되지 않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 방안도 담겼을 것이다. 진성여왕이 기뻐하며 최치원을 아찬의 관등을 내렸고, 최치원이 헌강왕 때 이후 왕실 측근 문한관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아, 시무십여조의 진상에는 진성왕의 요청도 반영되었을 듯하다.

 

주2) 자기 나라를 배반한 역적.    우리말샘

주3)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님.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https://www.youtube.com/watch?v=ZemJ2iP3Wnk

 

[참고]

https://www.dt.co.kr/article/12026599?ref=naver

 

또 최치원 시 인용한 시진핑, “한중, 국제정세 급변 속 우호 전통 계승해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일 “급변하는 국제·지역 정세에 직면해 한중 양국이 우호의 전통을 계승하고 동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이날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

www.dt.co.kr

과거 중국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도에 원정을 왔던 것으로 전해지는 서복과, 통일신라 말기 경주 출신 학자인 고운 최치원의 한시 ‘범해’(泛海)도 언급했다.

시 주석은 먼저 “지난 날 중한 간에 우호 미담들이 많이 있다”며 “2천여 년 전 서복 선생이 동쪽으로 건너 제주도까지 가셨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당나라 시기 장안에서 유학했던 경주 출신 문학가 최치원 선생이 귀국 도중 ‘괘석부창해(掛席浮滄海)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 즉 ’돛을 달아서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 리에 나아가네‘라는 시를 남겼다”며 “오늘날의 중한 우호도 계속해서 생기와 활력을 발산하고 있다”고 했다.

 

http://www.wsobi.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855

 

최치원 '신선을 찾으려 하네' - 여성소비자신문

[여성소비자신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은 신라 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요 도인이다. 최치원이 12살 되던 해 신라 경문왕 8년에 중국...

www.wsobi.com

 

掛席浮滄海 ( 괘석부창해)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 ( 장풍만리통)

긴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

乘嵯思漢使 승차사한사 

뗏목 탄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採藥憶秦童 채약억진동

약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日月無何外 일월무하외 

해와 달은 허공 밖에

乾坤太極中 건곤태극중

하늘과 땅은 태국 안에 있네. 

蓬來看咫尺 봉래간지척 

붕래산이 가까이 보이니 

吾且訪仙翁 오차방선옹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https://www.youtube.com/watch?v=jt8JAvUrS8g&t=68s

 

 

https://www.youtube.com/watch?v=qVNVJmp3Sx0

 

1000년 전 중국을 매료시킨 신라 천재의 비밀 (KBS_2012.09.06.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m1G8t6GjtGU

 

 

최치원, 討黃巢檄文(원명 : 檄黃巢書격황소서, 황소에게 보낸 격문)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9399099

 

◈ 최치원의 나이 24세에 쓴 격황소서(檄黃巢書)원문-번역문.

    ◈  최치원의 격황소서(檄黃巢書)원문-번역문.   최치원의 나이 24세에 쓴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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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swings81/220956739129

 

[당시삼백수]춘궁원(春宮怨:춘궁 안의 원망)-두순학(杜荀鶴)

당시삼백수 권3 오언율시 167.춘궁원(春宮怨)-두순학(杜荀鶴) 〈春宮 안의 원망〉 春宮怨(춘궁원) 杜荀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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