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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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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은 조선 후기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이다. 한글본, 한문본, 한글·한문 혼용본 등의 필사본(筆寫本)이 전해지고, 이본이 현재 20여 종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중록」은 내용상 세 차례에 걸쳐 서술된 혜경궁 홍씨의 글 모음인데, 저자의 일생을 회고한 내용,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경위를 기술한 내용, 친정에 쏟아진 여러 가지 죄의 혐의에 대해 변명하는 내용이다.
「한중록」은 한글본, 한문본, 한글·한문 혼용본 등의 필사본(筆寫本)이 전해진다. 「한중록」의 이본은 현재 20여 종으로 확인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 국내에 많은 소장본이 있다. 해외 소장본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읍혈록(泣血錄)」과 「보장(寶藏)」을 꼽을 수 있는데, 이것들은 「한중록」의 일부가 따로 전하는 경우이다.
「한중록」은 총 3부로 구성된 6권 6책이고, 이 3부는 전혀 다른 저작 동기와 성격을 지닌 글이다. 다만 「한중록」은 출간된 정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본에 따라서 제1부만 따로 묶인 것이 있고, 제3부만 따로 묶인 것도 있으며, 제3부만 묶인 것도 부록까지는 함께 묶이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제1부에서 제3부까지를 모두 묶은 이른바 종합편에도 부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제2부의 경우에는 종합편 속에서만 존재하며 따로 독립적으로 묶여서 전해지는 것은 없다.
「한중록」은 세 차례에 걸쳐 서술된 혜경궁 홍씨의 글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저술 시기는 1795년(정조 19)으로 저자의 일생을 회고한 내용이다. 조카 홍수영의 부탁이 저작 동기이다. 두 번째는 1802년(순조 2) 봄 초고를 작성하고, 1805년 4월에 완성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경위를 시간순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嘉順宮)이 자손들도 알 수 있도록 써 달라고 한 것이 저작 동기이다. 세 번째는 다시 2차례로 구분된다. 1802년 7월에 본편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은 친정에 쏟아진 여러 가지 죄의 혐의에 대한 변명이다. 이는 친정에 죄가 없음을 항변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1806년에 부록을 저술하였는데 전편에서 못다 한 말을 보충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권은 제1부의 전편이다. 제1부는 혜경궁 홍씨가 글을 쓴 내력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장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환갑을 기념하여 자기 친정에 남긴 글이다. 내용은 자신의 일생을 비교적 담담한 심정으로 회고한 것이며 아울러 후손들에게 충고한 말도 있다. 서울 서대문 밖 거평동 외가에서 태어난 일, 한글을 가르쳐 준 작은어머니, 어려운 살림이지만 단란했던 가족,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럽게 행동한 일, 정을 나눈 주위 친척들의 일이 먼저 기술되었고, 이어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간택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어 궁중에 들어와서 엄격한 궁중 생활에 적응해 나간 과정을 적고 있으며, 정조가 태어나고 세손빈을 맞이하고 이어서 남편이 죽게 되는 과정을 차분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남편이 죽고 나서 아들 정조와 궁궐을 나누어 헤어져 살면서 영조로부터 가효당(佳孝堂)이라는 현판까지 받은 일까지 적고 있다.
2권과 3권에서는 사도세자 죽음의 경과를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총명했던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 일화, 동궁의 내인들 때문에 사도세자와 멀어진 영조, 아버지와 성격이 다른 데다가 아버지가 너무도 엄격하여 아버지를 무서워하기 시작한 사도세자, 15세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막중해진 부담과 거듭된 부왕의 꾸짖음에 병이 깊어지기 시작한 사도세자,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리고 주위 하인들을 죽이기 시작한 사도세자, 평양까지 몰래 다녀오는 등 부왕의 눈 밖에 벗어난 사도세자, 마침내 영조가 대처분을 결심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4권에서는 다시 제1부의 후반을 이어 붙이고 있다. 1764년의 이른바 갑신 처분, 즉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니라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두게 한 뼈아픈 일을 적고 있고, 그다음 화완옹주(和緩翁主)가 이간하여주1 정조와 외가가 멀어지고, 또 정순왕후(貞純王后) 측에서 자기 친정을 공격한 일 등을 시간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집안의 어려움이 극에 달했는데, 제1부를 쓴 1795년(정조 19) 무렵에는 정조가 비로소 예전의 과오를 깨닫고 외가를 잘 대해 주기 시작해서, 환갑 때는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의 사도세자 무덤으로 갔고 외가 친지들을 불러 성대한 잔치를 열어 주었다는 것으로 서술을 끝맺고 있다.
5권과 6권은 모두 제3부의 내용으로 사실은 제3부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다. 5권은 친정에 겨누어진 여러 혐의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밝힌 것이다. 화완옹주가 정조와 외가를 이간시킨 일에서 시작하여, 홍국영이 또한 친정을 더욱 공격한 일, 홍낙임이 천주교 신자라고 하여 사약을 받은 일, 홍봉한에게 가해진 여러 혐의에 대한 변호를 담고 있다. 6권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며 친정이 공격당하고 결국 동생 홍낙임이 사사된 아픈 상황을 말하면서, 정조의 입을 빌려 친정의 억울함을 변호하겠다는 데서 시작된다. 정조가 말년에 외가를 변호하며 그 억울함을 모두 풀어 주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정조의 말을 근거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홍봉한이 뒤주의 아이디어를 말했다는 혐의를 벗긴다. 이어서 정조가 홍봉한의 문집을 편집하기 위해 애쓴 사실을 적어서 정조가 결코 외가에 혐의를 두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다음에는 정순왕후의 친정이 어떻게 정조의 등극을 방해했는지를 말하고 있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면서, 더욱이 그 인물이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치적 야화(野話)로서 역사의 보조 자료가 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사건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이유 및 홍봉한 일가에 대한 사실 관계를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 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 문학, 특히 궁중 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 용어·궁중 풍속 등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한편,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그리고 문체는 옛 귀인(貴人)들의 전아한주2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단행본
https://namu.wiki/w/%ED%95%9C%EC%A4%91%EB%A1%9D
한중록
閑中錄 또는 恨中錄 혜경궁 홍씨 가 한중록이란 이름을 직접 지어 붙이진 않았다. 전해지는 이본에 붙여진 제목들 중
namu.wiki
1. 개요
사도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자기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수필.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시대 궁중 문학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게 왕실의 여성이 저술한 책이다.[2]
한번에 쭉 저술한 책이 아니라 혜경궁 홍씨가 여러 차례 저술한 문장을 모은 것으로, 대략 4차례에 걸쳐 썼다고 본다. 첫 번째는 정조 시절에 조카 홍수영에게 요청받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회고하여 쓴 것이다. 여기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두루뭉술하게 회피하고 있다. 2번째는 정조가 승하하고 남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슬픔 속에서 친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이다. 3번째 역시 친정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번에는 손자 순조에게 자기 한을 풀어달라고 청한다. 4번째는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 쓴 것으로 임오화변의 전말을 자세히 전한다.[3]
필사본으로 전해졌으며 여러 이본이 있어 조금씩 내용이 다르다. 예컨대 혜경궁 홍씨의 어린 남동생들이 궁에 들어올 때 현빈 조씨[4]의 가족들에게 "당색이 다르니[5] 같이 못 놀겠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판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필사본들은 대부분 순한글로 쓰였다.
2. 가치
2.1. 역사성
2번째 집필한 부분부터 남편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미친 사람으로, 시아버지 영조를 편집증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다른 여러 사료에도 이와 일치하는 기록이 많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승정원일기는 정조가 세초시켜 한중록을 제외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다.
현대에 와서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을 옹호하고자 쓴 정치적 글이라며 가치를 폄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한중록은 세자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세자가 죽는 동안 홍봉한은 거의 집행관 수준으로 참여했으나, 한중록은 홍봉한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혜경궁의 작은아버지 홍인한의 소위 삼불필지(三不必知) 사건에 대한 변명도 있다. 삼불필지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3가지'라는 뜻이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는 영조에게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고한 것을 말한다. 영조가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는, 홍인한은 세손이 다 안다고 답하면 "내가 금지하는 당쟁을 세손이 어찌 안단 말이냐?"라고 트집 잡힐까 봐 당황해서 답하기를 "(붕당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그의 아들이자 본인의 외삼촌인 홍낙임[6]은 살려주었고, 홍봉한은 봉조하에 제수하기까지 했다. 외가에 이정도로 성의를 보인 정조가 단순 오해만으로 홍인한을 사사했을 리 없다. 설령 혜경궁의 말대로 저 삼불필지 발언이 와전되었다 치더라도, 실록에는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요청을 대놓고 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보아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승계를 저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조 즉위 후에 다들 정후겸만 탄핵하자 "야, 이 대간님들아, 큰 놈은 왜 탄핵 안 하냐?" 꼬집으니, 그제서야 몇 명이 홍인한도 탄핵하였다. 정조는 홍인한도 같이 유배 보내고 곧 둘 다 죽였다.
한중록에서 세자가 미쳤다고 주장하는 기간을 영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인원 천여 명을 데리고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행궁으로 요양을 가는 동안, 아픈 사람 하나 없고 백성들의 고초도 해결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기간 중에 정말로 세자가 미쳤을까 싶은 부분.[7] 영조가 경종 독살설에서 입장이 그리 떳떳하지 못했는데, 여러 벽서 사건 등으로 소론을 치려하자 세자가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영조와 사도세자간 사이가 나빠졌다고 봄이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당시 조선 조정의 사정에 좀 더 부합하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임오화변을 노론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자들이 이 점을 과다하게 부풀려서, 마치 "혜경궁 홍씨마저 사도세자 죽이기에 참여해놓고 한중록에서 이를 미화했다"고 주장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8] 허나 아래의 정신과 전문의들의 분석을 봐도 위에 언급한 세자의 광증이나 친소론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이 부분은 사도세자 및 임오화변 문서에 있다. 즉, 결론을 내리면 한중록은 다른 사료에도 꼭 필요한 교차검증 및 사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충분하며, 내용 전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2.2. 문학성
2.3. 문화성
3. 정신과 의사들의 분석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헌경왕후
獻敬王后재위전임후임별호시호존호휘호전호작호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가문부친모친배우자자녀능묘
| 조선의 추존 왕비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 |
| 조선의 세자빈 | |
| 1744년 1월 9일 ~ 1762년 윤5월 13일 (음력) | |
| 세자빈 조씨 (효순왕후) | |
| 세자빈 조씨 (신정왕후) | |
| 이름 | |
| 혜경궁(惠慶宮) · 자궁(慈宮) | |
|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 |
|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 |
|
| 인철계성(仁哲啓聖) | |
| 경모전(景慕殿) | |
| 혜빈(惠嬪) | |
| 신상정보 | |
| 1735년 8월 6일 (양력) | |
| 조선 한성부 반송방(盤松坊) 외가 | |
| 1816년 1월 1일(80세) (양력) | |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 |
| 풍산 홍씨 | |
| 영풍부원군 홍봉한 | |
|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 | |
| 장조 (사도세자) | |
| 2남 2녀의소세자 · 정조 · 청연공주 · 청선공주 | |
| 융릉(隆陵)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5 | |
헌경왕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일(1815년 음력 12월 15일))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조선의 왕세자빈이자 추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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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전의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고, 장종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아들 정조와 손자 순조 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과 본인의 60년 동안의 궁중에서의 삶을 회고한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의 저자이다.
생애
탄생과 가계
1735년(영조 11년) 6월 18일, 한성부 반송방에서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조의 외6대손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의 아들 홍만용의 증손자이다.
혜경궁이 태어날 때 할아버지 홍현보는 태몽을 꾸고, 혜경궁이 태어나자 아들 내외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말하였다.
1743년(영조 19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그의 가계는 빈한하여 언니를 시집보낼 때와 그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다 한다. 그가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릴 때,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바로 영조의 특명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그에게 《소학(小學)》, 《내훈(內訓)》, 《어제훈서(御製訓書)》를 가르쳤다 한다. 영조 20년인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정조가 있다. 영조는 첫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이 태어나자 기대가 남달랐으나 의소세손은 곧 요절했다. 그러나 2년 만에 둘째 아들 세손 이산이 태어났다.
사도세자 사망 이후
1769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언급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 즉위 후 사사된다.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정조의 등극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았다.
1795년(정조 19년) 그녀가 회갑을 맞는 해에,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였다. 《한중록》은 한번에 쓰인 게 아니라 십수년에 걸쳐 여러 번 쓰였으며 목적도, 내려준 사람도 각기 다른데 후대에 누군가가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집안의 명예회복이란 아들 정조가 죽은 후 벽파계의 공격에 의해 친동생이 사사당하고 아버지가 역적으로 다시 몰리자 그에 대해 변호한 것으로 가문의 원수였던 김귀주 계열, 벽파 계열에 대한 원한이 드러나 있으며 친동생의 죄목이나 아버지에 대한 공격등에 대해 정조 생전의 말이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거론하며 조목조목 변론하고 있다.
생애 후반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조 치세기간부터 집필하던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의 제목을 순조 즉위 후 《한중록》(恨中錄)으로 고쳤다. 이를 두고 1910년부터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그가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친정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생전 그는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의 존호를 받았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4]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사후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광무 3년)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이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위치하여 있다.
평가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수필로서, 정사에서는 알 수 없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왕실내의 비화, 여러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사건 및 대화 등을 상세히 저술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ZDyUKX1I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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