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88%98%EC%9B%90%ED%99%94%EC%84%B1

 

수원화성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에 있는 조선 시대 의 성곽 으로, 정식 명칭은 화성(華城), 별칭으로는 수원성(水

namu.wiki

 

https://www.youtube.com/watch?v=VXx71r6ZqX0

 

https://www.youtube.com/watch?v=SvlrePxj6OI

 

 

https://www.youtube.com/watch?v=xeUzIB3GmcE&t=343s

 

https://www.youtube.com/watch?v=El8ZXyzdmrc

 

https://ko.wikipedia.org/wiki/%EC%9C%B5%EA%B1%B4%EB%A6%89

 

융건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융건릉(隆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선황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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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또는 장헌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의황제(莊祖, 1735년 ~ 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 ~ 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1]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건릉

건릉(健陵)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2]

융건릉 참배를 위한 한강대교 자리의 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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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過舟橋(배다리를 건너며)/ 용주사와 융건릉

https://kydong77.tistory.com/21494 단원 김홍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화성 룡주사 후불탱화 수원 룡주사 후불탱화 - 원근법, 명암법 https://www.youtube.com/watch?v=QSqVmXMtaDc https://www.youtube.com/watch?v=kR62A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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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舟橋 (과주교)

배다리1)를 건너며

ㅡ 정약용(1762-1836)

歲歲靑陽月, 
세세청양월, 해마다 이렇게 봄이 오면

鑾輿幸華城。

난여행화성. 군주께서 화성2)으로 거둥하시매,

船從秋後集, 
(선종추후집, 가을 지난 뒤에 배를 모아

橋向雪前成。

교향설전성. 눈 내리기 전에 다리를 만드나니,

鳥翼紅欄夾, 
조익홍란협, 새 날개처럼 붉은 난간 양쪽에 세우고

魚鱗白板橫。

어린백판횡. 고기비늘처럼 널판자 가로로 까누나.

艙磯石不轉, 
창기석부전, 선창가 바위는 구르지 않아3)

千載識宸情。

천재지신정. 천년토록 우리 임금 마음 기억하리라.

 

배다리1)  화성2)  3)

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한강 배다리를 건널 때 수행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배다리의 제작 과정과 구조를 간단히 서술하고, 정조가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는 효성을 예찬하였다. 정조는 1월 25일 현륭원에 참배하고, 1월 26일 환궁하였다.

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약용 31세 때 지음.

[네이버 지식백과] 배다리를 건너며 [過舟橋] (여유당전서 - 시문집 (시) 2권, 심경호,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https://m.cafe.daum.net/hanganghistorycommun/1z3K/46?listURI=%2Fhanganghistorycommun%2F1z3K

 

배다리를 건너며(過舟橋)

경기도 남양주 세미원에 설치한 배다리이다,노들나루에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배다리 주교(舟橋)를 설치한 다산 정약용이다.다산 정약용은 그 ''배다리를 지나며過舟橋)' 시(詩)를 남긴다.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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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cafe.daum.net/hanganghistorycommun/1z3K/93?listURI=%2Fhanganghistorycommun%2F1z3K 

 

정조와 정약용 그리고 노량진 배다리

조선왕조실록에는 1795년 음력 2월9일 첫날 새벽 6시45분, 1779명의 일행을 거느리고 창덕궁을 떠난 정조가 노량진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11시30분 출발, 장승배기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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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lO7MqHofYA 

 

배다리의 설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604&tabId=03&levelId=hm_112_0040 

 

배다리의 설치 < 사료로 본 한국사

근대 신재호이홍구 곽금선, 김기성, 김명섭, 김명재, 김명환, 김상훈, 김소영, 김영진, 김헌주, 남기현, 류동연, 박순섭, 박주영, 박한민, 성주현, 송영화, 심철기, 양진아, 이성우, 이양희,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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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過舟橋(배다리를 건너며)/ 용주사와 융건릉

https://kydong77.tistory.com/21494 단원 김홍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화성 룡주사 후불탱화 수원 룡주사 후불탱화 - 원근법, 명암법 https://www.youtube.com/watch?v=QSqVmXMtaDc https://www.youtube.com/watch?v=kR62A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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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7EPJRHhwP00

 

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C%A3%BC%EC%82%AC

 

용주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용주사(龍珠寺)는 조계종의 절로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에 위치해 있다. 신라 말기인 854년에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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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는 조계종의 절로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에 위치해 있다.

신라 말기인 854년에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되었다. 조선 정조때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 대본산

갈양사가 다시 중창하게 된 것은 조선 제22대 정조 임금 때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인다. 아버지 묘와 화성의 건설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둥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의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때 정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스님이 보일당 사일스님이다. 장흥 가지산 보림사 출신이었던 보일스님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설해주었다고 한다. 정조는 보일스님이 들려준 부모은중경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국보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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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過舟橋(배다리를 건너며)/ 용주사와 융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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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華山) 건릉(健陵) · 융릉(隆陵) 참배/정조효공원,참배 준비행렬

산 위에 ㅡ 김소월 사도세자(장조 의황제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로 추존)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조선 제22대 왕 정조(정조 선황제로 추존)와 효의왕후가 함께 묻힌 건릉(健陵)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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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K-rSeDidEIE

 

화성 행궁, 봉수당

https://www.swcf.or.kr/?p=63&listGubun=list&page=1&viewMode=view&idx=61

 

수원문화재단

수원문화재단

www.swcf.or.kr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편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월대 :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https://www.youtube.com/watch?v=ZOTceVfdt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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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說 부모은중경 10도(圖),어머니 마음&정조의 지극한 효심/무애(无涯) 양주동선생님 偉業

*진행이 느려터진 카눈을 보내고 나니, 문득 노래가 생각키우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zLgmEOMuUHU * 어버이날 노래로 불러왔던 이 노래는 의 어머니의 은혜 10가지를 바탕으로 양주동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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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 주는 은혜.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어머니 은혜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④ '연고감은[咽苦甘恩]'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

⑤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젖은 자리엔 엄마가 눕고 마른 자리엔 아기를 눕힘.

⑥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

⑦ '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⑧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먼 길을 떠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⑨ '위조아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

⑩ '구의련민은 [究意憐愍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은혜 등이다.

 

첫 번째는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으로,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입니다. 집안 내부로 보이는 공간에 의자에 앉은 여인이 있습니다. 임신한 어머니를 그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으로, 해산이 임박한 어머니가 괴로움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가옥 안에 시녀를 동반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회탐수호은’과 유사한 도상이지만, 앉아 있는 곳에 휘장이 쳐져 침상 주인이 해산에 임박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으로, 아이를 낳은 다음 모든 근심을 잊은 은혜를 말합니다. 침상에 앉아 있는 여인이 어머니이며 그림 하단에는 목욕을 시키는 시녀와 아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먼저 적고 이를 이미지로 가시화하였습니다.

넷째,연고감은[咽苦甘恩]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이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다섯째,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섯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일곱째,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덟째, 원항억념은[遠行憶念恩] 떨어져 있는 자식을 걱정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아홉째, 위조아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해 몹쓸 짓도 감히 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열째,구의련민은 [究意憐愍恩]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변상도는 새김이 깔끔하여 이미지가 명확합니다. 인물들은 얼굴 형태가 갸름하고 이목구비를 단아하게 묘사하여 표정까지 살필 수 있으며, 옷주름을 묘사한 선도 정교하고 유연합니다. 이 판본은 왕실 발원본으로 사실적인 밑그림과 정교한 새김이 어울려 훌륭한 도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판각할 때 새로 밑그림을 그려서 새겼으며 고려본보다도 그림 표현과 새김이 우수합니다.

정조, 다시 부모은중경을 탄생시키다

국왕으로서 효심이 깊었던 정조(正祖, 1759~1800)는 명(命)으로 <부모은중경>을 조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의 명령으로 나라에서 조성되었기에 이 경전은 다른 사찰 간행본에 비해 판식이 정교하고 서체가 아름다우며 변상도도 매우 화려합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007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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