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熱河日記
 
기록
1780년 (정조 4)
편저
권수
26권 10책
소장

 

https://namu.wiki/w/%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 이 건륭제 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 에 다녀온 일을 적은

namu.wiki

1. 개요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음에도 사절단으로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 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 이들은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1]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2] 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3]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4] 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해야 했다. 이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5]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6]에 생생하게 실렸다.

박지원이 직접 집필한 초고본은 행계잡록(杏溪雜錄)을 비롯한 문집으로 남았는데, 이 초고본을 단국대학교에서 소장했다. 그 외의 필사본과 근대 이후의 인쇄본 등이 전국에 산재했다.

열하일기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32년에야 연암집으로 활자화되었다. 초고본부터 문체반정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로 너무 적나라한 표현 등은 삭제되거나 표현을 달리하였고, 지동설이나 천주교에 관한 언급은 문단째 삭제되었다가 나중에 나온 필사본에는 다시 복원되기도 하고 필사가에 따라 원문에 없는 명에 대한 극존칭을 더하거나 문체를 제각각으로 바꾸는 등 정본이 없어 아쉽다.

2. 내용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열하일기.

상당히 해학적인 묘사가 많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황에서 하인에게 "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성경잡지 7월 11일),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도강록 7월 2일), 사신단이 아래에 언급할 판첸 라마의 접견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귀양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 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며 엄청 좋아하는 이야기(태학유관록 8월 10일), 잠시 쉬고 있던 숙소에서 아름답게 노래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부리나케 가봤더니 험상궂게 생긴 아줌마가 앉아있어 기겁하는 얘기(도강록 7월 1일) 등,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다.

길을 가다가 본 가게들의 간판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친분을 쌓은 다른 상인들의 휘호에 그 문구를 써줬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박지원이 본 문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직역하면 '서리를 속이고 눈과 내기하다')로, 박지원은 이를 보고 '마음이 깨끗하여 서리같고 눈보다 더 희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진짜 뜻은 '눈처럼 하얀 국수'였다. 조선에서 온 문인이 그럴듯한 글을 하나 써 준다기에 기대를 했는데 정작 써 준 글이라는 게 국수집 간판이었으니 청나라 상인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도 당연하다. 나중에야 '서릿발처럼 가느다랗고 눈처럼 하얀 국수'를 뜻하는 간판이라는걸 알고는 무안해져서 '나도 아는데 그냥 써봤다' 라고 둘러댔다.

또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가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나를 깨우라."고 채근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성경잡지 7월 12일)[7], 심지어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그릇에 담긴 독주를 데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원샷하는 호기를 부렸다. 그러자 주점에 있던 사내들이 "어이쿠 어르신!!" 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태학유관록 8월 11일) 원문에서는 "술집에 몽골인과 회회인(위구르)[8] 패거리들이 앉아 있었다. 오랑캐들의 모습이 더럽고 사나워 주점에 올라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라고 나온다.

박지원 항목에 나와 있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박지원은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 등으로 딱 봐도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일삼던 험한 음주풍토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사내의 호방함과 건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으니까 설설 기는 게 이해될 법하다. 게다가 하필 당시 조선의 임금부터 맥주 피쳐에 증류식 소주를 가득 붓고 원샷하라고 강요해댄 걸로 악명높은 정조였으니.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중국술 체험담도 있다. 독한 것 같지만 마시고 일어서면 모두 깬다고.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명작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레가 우글거릴 수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청나라의 경우 일반 백성도 벽돌로 2층 집을 지어 튼튼해서 문만 닫으면 금고가 되어 도둑도 방지한다는 감탄이 있다. 당시 박지원이 받았을 컬쳐쇼크를 엿볼 수 있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한 조선 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이 부분은 박지원이 한반도의 지형과 토질에 대해 무지했던 것으로, 한반도에서 양질의 벽돌을 찍어낼만한 토양 자체가 흔치 않았고, 수레 또한 일부러 쓰지 않는 게 아니라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아 보부상 등의 인력 운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한반도에는 삼국시대부터 풍부한 강줄기를 따라 수로를 통한 물류운송이 발달하였다.[9] 비슷하게 산지가 많은 일본도 에도시대까지 수레 대신 수로를 이용한 운송이 발달했고 중국도 강북에서는 수레가 널리 이용되었으나 물길이 풍부한 강남(중국)은 수로를 이용한 운송이 일반적이었다. 거기다 전 국토를 갈아엎고 토목공사를 벌일 인력도 예산도 전무했다. 사실 조선은 유교적 덕치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세율을 낮게 유지하고 요역과 노역도 줄였으며 잔혹한 형벌도 가능한 피했던 나라였다. 즉 작은 정부였던 것인데, 그런 만큼 국가가 나서서 뭔가 큰 공사를 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물론 조선 후기쯤 가면 내수사가 변질되고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는 등 혼란에 빠지지만, 그 때에도 평소 세율이 60~70%에 달하던 옆나라 일본의 농민들에 비하면 상황이 비슷하거나 더 나은 편이었을 정도다.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나라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하고 북벌론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10] 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11]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 들면 한족에게 사기당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참외를 파는 노파가 '아까 동이 사람들이 참외를 사갔는데 처음 몇 개는 돈을 내고 먹더니 갑자기 맘대로 집어가고는 내 얼굴에 참외를 집어던지면서 때렸다' 라고 울면서 하소연하자 불쌍해져서 하인과 마부까지 없는 돈을 털어 참외를 샀는데, 알고보니 그 노파는 원래 거기서 그러면서 장사하고 살고 있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한밤중에 기척이 느껴져서 밖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청나라 병사(갑군)가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대답하는데, 이건 "되놈"을 한자로 음차한 것. 한편으로는 한족 관료들과 만주족 정부 인물들에 대한 알력도 다루고 있는데, 한족 대신들이 만주족 관료들을 욕하는 모습도 상세히 그려놓았다.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12]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 데이빗 커퍼필드 귀싸대기를 날릴 마술들 20개가 소개되어 있다.[13] 심지어는 티베트 법황(판첸 라마)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당시 건륭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신단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 만주어로는 판천 어르더니(班禪 額爾德尼, pancen erdeni)[14]라고 하였다. 작중에서는 주로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활불은 조선 사신단을 만나보고 불상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양반)들은 더럽다고 역관에게 준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 70냥을 만들어 마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마부들조차도 '이것으론 술 한 잔도 사 마시고 싶지 않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받으시면 큰일난다"는 판단에 형식적으로 만난 것. 또한 황제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신단은 숭유억불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이에 건륭제는 분노하였고, 조선 사신단은 최소 유형이거나 잘못하면 사형당할 수 있겠다며 벌벌 떨었으나,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신단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 정도로 황제가 기분이 상했음을 알려주는 선에서 끝났다.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 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라고 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사상은 현대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던 것이다.

물론 사신단이 그저 숭유억불을 하는 유학자라 그런 것은 아니고 만약 여기서 판첸 라마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유생들 사이에서 승려에게 절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벼슬길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 심하면 파직을 당하거나 유생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크나큰 오명을 써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선비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해서 압력에 굴복하는 것은 절개가 없다고 공격받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할 수 있는 행위라 단순한 절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 사신들은 눈치가 없어서 건륭제의 비위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서의 평판과 건륭제에 대한 입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즉 건륭제가 노골적으로 화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교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 최선의 방도를 취한 것이다.

현대까지 남았으면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법황이 선물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데,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신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이다. 일성록에는 정조와 박명원이 사행길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황제가 줬다는 불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정조가 불상의 처분에 대해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봉안했다"고 답한다. 이 불상이 판첸 라마가 선물로 준 그 불상인지, 아니면 판첸 라마의 것과는 별도로 건륭제가 따로 하사한 불상인지는 불분명하다. 보통 사신들이 중국에서 불상을 받으면 상술한 이유로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에 절에 봉안하거나, 나무 상자 등에 넣어 압록강에서 황해로 띄워보낸단 얘기가 전해지는데 전자였던 모양이다.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필담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지동설도 있다.)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한다.

박지원과 일행이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읊은 단상 '통곡할 만한 자리'(호곡장론好哭場論이라는 제목)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필화(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 '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15]이 해주었던 변승업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

그 당시 사람들의 (현대와 많이 다른)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해서 파운딩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 이유는 '심심해서'. 그래 놓고 조선 측이나 몽골 측이나 서로 웃으며 잘만 제 갈 길 간다.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고요? 청심환 하나만 주세요."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신단은 가짜 청심환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다. 진짜는 높으신 분들 뇌물.

다른 일화도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와 시기를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아,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목록을 적어주었다. 물론 이 목록도 열하일기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번화가인 연경의 유리창(琉璃廠)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유리창은 단순한 번화가가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서적과 그림, 골동품들이 돌아다니는 문화의 거리여서 청나라를 방문하는 사절단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이 유리창 거리가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배청 사상이 강했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연호 대신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로 날짜를 표기한 것. 명나라에 매달려있던 많은 유생들이 박지원을 비판하였으나, 박지원은 "이미 망한 지가 100년도 넘은 명나라 연호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이들의 비판을 씹었다.[16]

2.1.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사실 열하일기의 절반 이상은 경개록, 황교문답, 망양록, 심세편, 곡정필담, 동란섭필 등 청나라 관료, 학인들과의 필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필담의 대부분이 유학, 특히 주자학적 사고관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 시사적인 내용이라는 것. 이로 인해 오늘날 일반 대중이 읽는 축약본 열하일기에는 이 내용들이 빠져 있거나 일부분만 발췌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박지원으로서는 기행문 부분보다도 필담 부분에 더 공을 들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시대가 흘러 후세인들이 접하기 어려워진 탓에 다소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내용을 줄여 싣고자 해도 줄여 싣는 편역자부터 주자학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과 이해도를 갖춰야 할 것을 요구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망양록' 부분은 제목에서 암시되듯이[17] 분량이 매우 방대한데, 전부 전통 동양 악률과 음악 이야기라서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때문에 시중에 팔리는 대부분의 열하일기 축약본에는 빠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필담 부분에서 박지원은 단순한 질문 정도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장황하게 떠드는 것은 대체로 청나라 사람들이라는 것. 이는 박지원이 훗날 책 잡힐 일을 피하기 위해 자체 편집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 사상적 색채가 옅은 천문학이나 음률학, 조정에서도 문제삼지 않을 불교 흉보기 등의 분야에서는 박지원이 신나게 떠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독 문제가 될 부분에서는 박지원은 침묵하고 청나라 사람들만 떠든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 특히 반청, 반주자학적인 발언을 한 거인 '왕곡정'의 경우, 필담 부분에서의 묘사와 박지원이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열하일기 말미에 수록한 잡록 부분에서의 묘사가 크게 다르다. 사실상 그냥 오다가다 만난 왕곡정을 박지원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활용하여 평소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친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면, 왕곡정이 신나게 주자학을 비판하여 박지원이 너무 심하지 않냐는 뜻으로 일부러 어리숙한 질문을 날리는데, 이때 왕곡정이 정색하며 '주자 뒤에 태어난 사람은 다 백치란 말이오?'[18]라고 되묻는다. 당연하지만 박지원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기에 껄끄러워 왕곡정이 한 얘기마냥 꾸며 놓은 것이다. 과연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3. 번역

최초의 번역은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이 1948년 ~ 1950년 내놓은 번역본인데, 김성칠이 도중에 피살[19]되어 3분의 1 가량만 번역되었다. 1955년 ~ 1957년 북한에서 리상호에 의해 첫 완역본이 발간되었으며, 1966년 ~ 1973년 이가원의 <국역 열하일기>와 1982년 ~ 1984년 윤재영의 박영문고본 완역 등이 주요한 번역으로 꼽힌다. 2009년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혈조의 완역본이 출간되었고, 2017년에 개정신판이, 2025년에 개정2판이 출간되었다.

4. 여담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삼종손(三從孫, 육촌 형제의 손자) 박남수가 책을 불태우려다가 다른 식구들과 친척들이 막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박남수가 무식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열하일기에서 조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내용이 자칫하면 집안을 거덜낼 수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대한 비하적인 평가 때문에 현대에는 일부 사람들이 조선을 비판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조선은 빈민국이었고 중국과 일본은 전통적 부국이었다"라는 주장을 펼 때 악용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다만 이는 진짜로 조선이 답도 없는 나라였다기보다는 중국과 비교서술하며 작성된 부분이라는 점과 책에서 주장하고자하는 바를 위해 의도적으로 더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저서인 박제가의 북학의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사신단은 상대국의 상황을 본국에 전달하는 스파이 역할도 했기 때문에 중국 측에서는 정보 노출을 막기 위해 사신단 일행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이동에 제약을 두었고 그래서 조선은 청에 대해 수박 겉 핥기식으로 알았다고 한다. 당장 에피소드 중에 청나라 갑군이 스스로를 되놈이라 칭했던 사건도, 청나라 측이 사신단이 잠에 들면 매일 인원을 체크하고 있었단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박지원은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그 덕분에 단편적으로만 알아왔던 청의 다양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는 청을 오랑캐로만 치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는데, 박지원이 열하일기로 조선이 몰랐던 청의 발전된 모습을 소개하자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도 충격을 받았고,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는 풍조가 생겼다. 게다가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맛깔난 글솜씨 덕분에 열하일기는 지식인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선비들이 필사해갔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구어체 한문으로 썼는데, 당시 임금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원래 조선에서는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던 고문체 위주였는데 정조시대 들어서서 다양한 문체가 유행하였고 열하일기가 그 선두주자였다.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나아가 국가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서 정조는 조선시대 문학 탄압인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박지원에게도 고문체로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박지원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해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정작 정조 본인은 개인적인 편지에서 자신이 금지한 여러 언어적 필체와 형식들을 다 구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쓴 지 10년 후에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열하로 간 예조판서 서호수의 연행기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다. 서호수는 외국어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던데다 관상감 제조를 지낸 천문학자이기도 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영조 때 말을 잘못 했다가 해남으로 유배를 당한 전력이 있을 정도로 평범한 선비였던 박지원보다도 훨씬 힙스터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은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을 내몽골 투메드부를 거쳐가며 몽골, 그리고 옛 원나라와 관련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역관이 간단한 만주어로 황제에게 답하자 황제가 유달리 기뻐했다' 전한 기록과도 비교할 수 있는 '역관들의 청학, 몽학이 허접해서 개쪽이 될까봐 황제 앞에서 그냥 한어 역관만 데려왔다고 둘러댔더니 황제가 아쉬워했다'는 기록으로 조선 사대부들의 우물 안 개구리급 대외인식에 대해서도 꼬집고 있다.[20]

최인훈도 동명의 작품을 썼는데, 노골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풍자하는 소설이다.

4.1. 윤가전의 문자옥

한편 박지원과 친분을 쌓고 열하일기 안에서도 필담이 상세하게 기록된 인물 중 가장 거물급 인사는, 70세의 전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21]이란 인물이었다. 짧은 기간임에도 박지원과 매우 두터운 교분을 나눠, 열하일기 곳곳에 박지원을 아끼고 후하게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작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또한, 박지원에 따르면 북경에 돌아와 당대 중국 명사들에게 묻자 이 사람을 백거이에 비하고 있다더라고 전할 정도로 거물급 명사 중 명사였는데...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바로 이듬해 1781년에 건륭제 문자의 옥[22]에 걸려들어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열하일기 속에 기록된 윤가전은 박식하면서도[23] 다정하고 소탈한 위인[24]이긴 한데, 어딘가 주책스럽고 공명심을 내세우는 면모도 있긴 하다.[25]

그래서일까, 이듬해에 지나치게 오버한 나머지 건륭제의 분노를 샀으니, 자기 아버지[26]에게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올려달라고 상소한 것. 특히 건륭이 이 문제로 극대노한 까닭은, 청조가 들어선지 150년 동안 만주 - 한족 이중 정치 체제 속에서 문묘에 오른 자가 전무했는데 자식이 직접 자기 아버지를 문묘에 추증해달라 요구한 것이 매우 건방지게 여겨졌기 때문.[27] 또, 윤가전의 상소문에서 윤가전이 자기 자신을 고희(古稀)(칠십 세)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황제 본인이 고희를 맞아 "내가 고희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윤가전 또한 건방지게 황제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

이를 괘씸하게 느낀 건륭제는 윤가전의 집을 수색하라고 명했고, 조사관들은 그의 장서와 그가 쓴 글들을 샅샅이 뒤져 황제나 황실을 모욕한다고 해석될 만한 문장 130개를 찾아냈다.[28] 이것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윤가전이 쓴 모든 글들은 수집되어 폐기되었다.[29]

사실 윤가전은 건륭과 동갑의 나이로 무탈하게 고희에 이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인지, 황제가 본인을 아낀다거나 동갑내기 친구로 생각한다고 이방인인 조선인 박지원에게까지 자랑을 내비추기도 했고, 박지원에게 적어준 시의 말미에 '윤가전 70세'라고 서명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꼬투리 잡힐 줄은 몰랐을 테니 윤가전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 그래도 딴에는 한때 아꼈던 사람이라고 건륭이 막판에 형을 낮춰 그 가족은 방면해주고 처벌 수위는 능지형에서 교형으로 감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기를 보면 살짝 운이 나쁘기도 했다. 왜냐하면 문자옥은 불과 다음해인 1782년부터 가라앉기 시작하기 때문. 열하일기를 보면 필담을 나누면서도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될까봐 바로 불에 태우는 묘사가 나온다. 그렇게 주의했는데도 1년 뒤에 바로 처형되니 사람 인생 알 수 없는 일이다.

5. 구성

열하일기의 구성(김혈조[30] 번역본 기준)[31]
  • 머리말(열하일기서)
  •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에 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 말을 빠르게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일신수필):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일을 쓴 기록.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관내정사):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이 나온다.
  •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막북행정록): 북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 태학관에 머물며(태학유관록):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 15일간의 기록.
  •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환연도중록):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 열하에서 만난 친구들(경개록):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 라마교(티베트 불교)에 대한 문답(황교문답):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 반선의 내력(반선시말):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 반선을 만나다(찰십륜포):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 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 사행과 관현된 문건들(행재잡록): 조선과 청나라 황실 사이에 주고 받던 외교문서와 외교문서를 쓴 내력을 옮겨 적은 기록.
  •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심세편):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망양록):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 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 이야기.
  • 곡정과 나눈 필담(곡정필담): 중국 지식인 곡정과 장장 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 피서 산장의 기행문들(산장잡기): 열하(熱河)의 피서 산장에서 쓴 기행록 9편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 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 피서 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 피서 산장에서 쓴 시화 보충(피서록 보유): 삼한총서본의 열하피서록 내용을 김혈조 번역본에서 추가했다.
  •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32]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 북경의 유교 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 적바림[33] 모음 (앙엽기):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요법을 적은 기록.

 

https://leeza.tistory.com/10666

 

열하일기 - 목차

열하일기(熱河日記) 목차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1. 도강록(渡江錄)6월 24일에서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六月二十四日辛未二十五日壬申二十六日癸酉

leeza.tistory.com

 

열하일기 목차

https://leeza.tistory.com/10666

1. 도강록(渡江錄)

6 24일에서 7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 六月二十四日辛未
二十五日壬申 二十六日癸酉
二十七日甲戌 二十八日乙亥
二十九日丙子 七月初一日丁丑
初二日戊寅 初三日己卯
初四日庚辰 初五日辛巳
初六日壬午 初七日癸未
初八日甲申 初九日乙酉
舊遼東記 遼東白塔記
關帝廟記 廣祐寺記

 

2.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에서 14일까지,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 동안의 기록

秋七月初十日丙戌 十一日丁亥
粟齋筆談 商樓筆談
十二日戊子 古董錄
十三日己丑 十四日庚寅
盛京伽藍記 山川記略

 

3.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에서 23일까지.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9일간의 기록

馹汛隨筆序 秋七月十五日辛卯
北鎭廟記 車制
戱臺 市肆
店舍 橋梁
十六日壬辰 十七日癸巳
十八日甲午 十九日乙未
二十日丙申 二十一日丁酉
二十二日戊戌 二十三日己亥
姜女廟記 將臺記
山海關記  

 

4.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에서 8 4일까지. 산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11일 동안의 기록

秋七月二十四日庚子 二十五日辛丑
冽上畵譜 二十六日壬寅
夷齊廟記 灤河泛舟記
射虎石記 二十七日癸卯
二十八日甲辰 虎叱
虎叱評 二十九日乙巳
三十日丙午 八月初一日丁未
初二日戊申 初三日己酉
初四日庚戌 東嶽廟記

 

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에서 9일까지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5일간의 기록, ‘무박 나흘의 대장정이 펼쳐짐

漠北行程錄序 秋八月初五日
初六日 初七日癸丑
初八日甲寅 初九日乙卯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8 9일에서 14일까지 6일 동안의 기록, 열하의 태학에서 왕민호, 윤가전, 추사시 등 한족 선비들과 나눈 필담

秋八月初九日乙卯 初十日
十一日丁巳 十二日戊午
十三日己未 十四日庚申

 

7.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에서 20일까지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6일 동안의 기록

秋八月十五日辛酉 十六日壬戌
十七日癸亥 十八日甲子
十九日乙丑 二十日丙寅

 

8. 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에서 만난 선비들의 리스트

傾蓋錄序 본문

 

9. 심세편(審勢編)

조선 선비들의 폐단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글, 주자학, 중화주의에 대한 연암의 관점이 담겨 있음

 

10. 망양록(忘羊錄)

열하에서 왕민호, 윤가전과 함께 음률에 대해 주고받은 기록이다. 토론에 열중하느라 윤이 미리 마련해둔 양 한 마리가 온통 식는 것도 잊었다는 뜻에서 망양록이라 이름함

忘羊錄序 본문1
본문2 본문3
본문4 본문5
본문6  

 

11. 곡정필담(鵠汀筆談)

곡정은 왕민호를 말한다. 왕민호와 그 주변의 인물들과 펼친 종횡무진 필담

鵠汀筆談序 본문1
본문2 본문3
본문4 본문5
본문6  

 

12. 찰십륜포(札什倫布)

찰십은 티베트 말로 대승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 그곳에서 판첸라마를 접견하는 과정을 담음

본문 仲存評語

 

13.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은 판첸라마를 뜻한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원리에 대해 논함

본문 班禪始末後識
仲存評語  

 

14. 황교문답(黃敎問答)

티베트 불교에 대해 열하의 선비들과 주고받은 취재록

黃敎問答序 본문
黃敎問答後識 仲存評語

 

15. 피서록(避暑錄)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을 때 보고들은 바를 기록

避暑錄序 본문1
본문2 본문3
본문4 본문5
朱昆田小識 避暑錄補

 

16.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선비들과 주고받은 시화에 관한 기록

楊梅詩話序 본문

 

17.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 간 잡록

銅蘭涉筆序 본문1
본문2 본문3
본문4 본문5
본문6 본문7
본문8  

 

18. 옥갑야화(玉匣夜話)

옥갑에서 비장들과 주고받은 이야기. 역관들에 관한 숨겨진 비화들을 기록

본문 許生傳
許生後識1 許生後識2
次修評語  

 

19. 행재잡록(行在雜錄)

청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들은 것을 기록

行在雜錄序 본문
班禪事後識 銅佛事後識
行在雜錄後識 仲存評語

 

20. 금료소초(金蓼小抄)

중국에서 채집한 의학적 노하우를 모아 놓은 글, 동의보감에 관한 언급도 보임

金蓼小抄序 본문
 

 

21. 환희기(幻戱記)

열하의 장터에서 본 요술에 관한 기록이다. 스무 가지 쯤 되는 기막힌 요술을 생생하게 묘사함

幻戲記序 본문1
본문2 幻戲記後識

 

22.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의 산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

夜出古北口記 夜出古北口記後識
一夜九渡河記 乘龜仙人行雨記
萬年春燈記 梅花砲記
蠟嘴鳥記 萬國進貢記
萬國進貢記後識 戱本名目記
象記  

 

23. 구외이문(口外異聞)

고북구 밖에서 보고들은 기이한 이야기들을 기록

盤羊 彩鷂蝴蝶
高麗珠 崇禎相臣
伊桑阿舒赫德 王振墓
曹操水葬 魏忠賢
楊貴妃祠 樵史
麈角解 荷蘭鹿
砟答 入定僧
別單 籐汁膠石
照羅赤 元史天子名
蠻語 麗音離東頭登切
丙午乙卯元朝日食 六廳
三學士成仁之日 當今名士
明璉子封王 古兒馬紅
東醫寶鑑 深衣
羅約國書 佛書
皇明馬牌 哈密王
徐花潭集 長興鏤板
周翰朱昂 武列河
雍奴侯 𢘿
順濟廟 海印寺
四月八日放燈 五絃琵琶
獅子 降仙樓
李榮賢 王越試券
天順七年會試貢院火 新羅戶
證高麗史 朝鮮牡丹
艾虎 十可笑
子規 慶壽寺大藏經碑略
謊糧臺 胡元理學之盛
拜荊 還鄕河
桂苑筆耕 千佛寺

 

24. 황도기략(黃圖紀略)

북경 황성(皇城)의 요소요소를 세밀하게 기록

皇城九門 西館
金鼇橋 瓊華島
兎園山 萬壽山
太和殿 軆仁閣
文華殿 文淵閣
武英殿 擎天柱
御廐 午門
廟社 前星門
五鳳樓 天壇
虎圈 天主堂
洋畵 象房
黃金臺 黃金臺記
雍和宮 大光明殿
狗房 孔雀圃
五龍亭 九龍壁
太液池 紫光閣
萬佛樓 極樂世界
瀛臺 南海子
回子館 琉璃廠
綵鳥舖 花草舖

 

25. 알성퇴술(謁聖退述)

황도기략의 후속편, 역시 북경의 이모저모가 담겨 있음

順天府學 太學
學舍 歷代碑
明朝進士題名碑 石鼓
文丞相祠 文丞相祠堂記
觀象臺 試院
朝鮮館  

 

26. 앙엽기(盎葉記)

황도기략의 부록과도 같은 편.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20여 개의 명소를 기록

盎葉記序 弘仁寺
報國寺 天寧寺
白雲觀 法藏寺
太陽宮 安國寺
藥王廟 天慶寺
斗姥宮 隆福寺
夕照寺 關帝廟
明因寺 大隆善護國寺
火神廟 北藥王廟
崇福寺 眞覺寺
利瑪竇塚  

 

 

열하일기 - 목차

열하일기(熱河日記) 목차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1. 도강록(渡江錄)6월 24일에서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지나 요양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渡江錄序六月二十四日辛未二十五日壬申二十六日癸酉

leeza.tistory.com

 

[참고]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셍전은 "열하일기" 수록 작품.

https://kydong77.tistory.com/22142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 호질(虎叱), 허생전, 양반전 : 한문 vs 국역/ 방경각외전 6.양반전

박지원(朴趾源), 원사(原士)/ 열하일기, 호질(虎叱), 허생전, 양반전 https://kydong77.tistory.com/21552 박지원(朴趾源), 원사(原士)/ 열하일기, 호질(虎叱), 허생전, 양반전 https://kydong77.tistory.com/17759 박지

kydong77.tistory.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