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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가볼만한 곳 사육신 혼이 있는 동학사 초혼각지 숙모전 삼은각

공주 초혼각지(招魂閣址) 충남기념물 제18호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789 세조(재위 1455∼1468)가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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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ClPcM3sN_rA

 

 

https://www.youtube.com/watch?v=p_QBizn6kWs

 

 

https://namu.wiki/w/%EA%B3%A0%EB%A0%A4%EC%82%BC%EC%9D%80

 

고려삼은

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하기도 한다. 고려 말기에 절의를 지킨 아래 세 학자, 곧 목은(牧隱) 이색 , 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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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하기도 한다.

고려 말기에 절의를 지킨 아래 세 학자, 곧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를 일컫는 말. [1]

2. 기록

저 셋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2]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즉 이에 따르면, 이숭인이 삼은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당해 제자를 못 남겼기 때문. 사망 당시 이숭인은 46세였다. 젊지 않은 나이인데도 별다른 제자를 두지 못한 이유인 즉, 이 사람은 고려 정국이 변할 때마다 족족 귀양길에 오르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탄압받을 때는 사대부라 귀양가고 이인임이 몰락하자 이인임 친척이라 귀양가고 조선건국 즈음엔 고려유지파라 귀양가고.

참고로 당시 고려에는 은(隱)자를 호에 쓰는 경향이 매우 많았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은자 돌림 호가 꽤 많이 나온다. 대표적 인물이 대은(大隱) 변안열. 심지어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도 초은(樵隱) 이인복이라는 멀쩡한 형을 두었다.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가 쪽으로 변절한 동정 염흥방도 어은(漁隱)이라는 호도 썼었다. 이런 현상은 당대 헬게이트나 다름 없었던 고려의 상황을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은일(隱逸, 세상을 피하여 숨음)' 의식이 당대 사대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색은 이런 은일의식이 지배하는 당대의 지식인 풍조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지 제자 이숭인이 '도은'이라는 호를 짓자 "나야 늙었으니 괜찮지만, 자안(이숭인의 자)은 앞길이 창창한 시기인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비판했으며, 정몽주에 대해서는 "달가(정몽주의 자)는 채소밭에 숨어 있으나 조정에 서서 유학의 부흥을 자임했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1] 고려삼은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칭호이며, 거론되는 구성원도 안정적이다. 간혹 더 나아가 고려사은, 오은, 육은, 팔은, 구은 하는 등의 칭호들도 나도는데, 그 구성원들은 제각각이다. 이 탓에 누구 이름을 삭제하고 대신 누구 이름을 끼워넣는 수정이 본 항목에서 종종 일어나는데, 자칫 서로의 조상을 깎아내리는 치기 어린 경쟁이 될 수 있으니 지양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2] 사실 길재는 정몽주보다는 양촌(陽村) 권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N_A5S1gkI70&t=480s

 

조선 태조 이성계와 스승 무학대사는 막역한 관계로, 무학은 이성계의 건국 꿈을 해석해주고 조선의 첫 왕사가 되어 한양 천도를 주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4dK9QVU6q0

 

한명회는 압구정 정자를 짓고

*한명회는 세조의 책사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낙향거사 행세를 한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는 법. 어느 날 부패한 세상을 조롱하던 생육신 김시습이 이 시구를 보고는 부(扶)를 危(위)로, 와(臥)를 오(汚)로 바꿔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로 조롱했다. 

靑春扶社稷

청준부사직,  청춘엔 사직을 붙들고,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김시습의 조롱, 글자 바꾸기]

靑春社稷 

청준위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

白首江湖

백수오강호,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8EwJgdJxCEs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7808667

 

한명회 욕심 없는 척 말년 보낸 압구정, 지금은 간 데 없고 … | 중앙일보

압구정 현대아파트 74동 뒤에 세워져 있는 압구정터 표지석. [김경록 기자]압구정(狎鷗亭)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등극시킨 한명회(韓明澮, 1415~87)가 지은 정자라는 건 세

www.joongang.co.kr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865

 

사육신(死六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사육신은 조선전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관리이다.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말한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했다.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거사가 드러나 박팽년은 옥에서 죽고 나머지는 처형됐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형된 사람은 더 있지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에서 여섯 사람의 이름을 밝힘에 따라 사육신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육신은 1691년 12월에 정식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고 복관되었다. 조선전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관리.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관련 사건사육신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육신은 조선전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관리이다.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말한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했다.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던 거사가 드러나 박팽년은 옥에서 죽고 나머지는 처형됐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형된 사람은 더 있지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에서 여섯 사람의 이름을 밝힘에 따라 사육신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육신은 1691년 12월에 정식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고 복관되었다.

정의
조선전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관리.
접기/펼치기내용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하위지(河緯地) · 유성원(柳誠源) · 유응부(兪應孚) 등 여섯 사람을 말한다.

사육신 사건으로 김문기(金文起) · 박쟁(朴崝) · 권자신(權自愼) · 성승(成勝) · 윤영손(尹令孫) · 허조(許慥) 등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세조는 이 사건에 집현전학사 출신이 주동이 되었다 하여 집현전을 혁파하였다.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왕자로 야심 만만한 호걸이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에 야심을 품고 정인지(鄭麟趾) · 신숙주(申叔舟) · 한명회(韓明澮) 등을 당여(黨與)주1로 삼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먼저 고명대신(顧命大臣)주2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한 다음, 1455년(단종 3) 6월 드디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 세조의 잔인한 왕위 찬탈에 분개한 6신을 비롯한 많은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하였다.

마침 세조가 상왕(上王: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는 자리에서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를 별운검(別雲劒)으로 임명하자 곧 그 자리에서 거사, 세조와 측근 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주장으로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세조가 연회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하고 또 왕세자도 질병 때문에 연회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박팽년과 성삼문의 주장으로 거사를 미루게 되었다.

이 때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정창손이 즉시 김질과 함께 대궐로 가서 반역을 고발하였다.

세조는 이들을 직접 국문(鞫問)하였다. 이에 박팽년 ·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 유응부 등이 차례로 국문을 당했으나 모두 늠름한 태도로 공초(供草)에 승복하였다.

박팽년은 옥에서 죽고 유성원과 허조는 거사 실패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결하였다. 이들은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의 단기간에 모두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의 주모자가 꼭 사육신이라고 단정할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추국(推鞫) 과정에서 주모자로 생각될만한 사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즉, 김질이 고변할 때 성삼문의 말이라 하여 모의자로서 금성대군 ·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 유응부를 들었고, 성삼문이 잡혀와 첫번 국문 때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이 같이 모의했다 하고 이 계획을 알고 있는 자는 유응부와 박쟁이라고 말하였다.

박팽년의 공초에서는 성삼문 · 하위지 · 유성원 · 이개 · 김문기 · 성승 · 박쟁 · 유응부 · 권자신(權自愼) · 송석동(宋石同) · 윤영손 · 이휘(李徽) · 박중림(朴仲林) 등 13인이 모의한 것을 자백하고 있다.

또, 김문기는 도진무(都鎭撫)의 직책을 가지고 있음을 들어 박팽년과 성삼문에게 “그대들은 궐내에서 성사하고 나는 밖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기다리겠다.”는 말이 보이고 있지만, 주모자임이 확실한 성삼문과 박팽년을 제외하고 사육신이 꼭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건 5일 만에 그 전모를 밝힌 공식 명단에서 이개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유성원 · 박중림 · 권자신 · 김문기 · 성승 · 유응부 · 박쟁 · 송석동 · 최득지(崔得池) · 최치지(崔致池) · 윤영손 · 박기년(朴耆年) · 박대년(朴大年) 등 17인이 몰래 반역을 도모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순서대로 여러 사람의 이름만 거론했을 뿐, 역시 사육신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나타나 있지 않다.

단종 복위 계획의 주동자가 육신으로서 확실히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남효온(南孝溫)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6신전(六臣傳)」이다. 여기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의 순서로 6신의 이름이 명백히 밝혀져 있다.

남효온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6신의 옥이 일어날 때에는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지만, 그 뒤 세조의 즉위를 불의로 얼룩진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세조를 비난,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 1478년(성종 9) 4월에는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 복위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남효원은 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무오사화의 도화선을 만든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며, 소릉 복위를 청한 죄로 부관능지(剖棺陵遲)의 극형을 당하였다.

남효온이 사육신의 명단을 어디서 취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해 큰 옥이 벌어지고 단종마저 영월로 귀양가 피살되자, 이 사건을 은밀히 동정하던 사람들에 의해 사육신의 이름이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을, 사종(師宗)인 김종직이나 종유(從遊)인 김일손(金馹孫)으로부터 확인해 남효원의 문집에 수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종반정  사림파의 절의 문제는 그 당시 조신들로부터 국력배양면에서 거론되었다. 즉, 성삼문과 박팽년 등의 일은 난신(亂臣)이라는 죄명을 벗기고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는 상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또, 1511년(중종 6) 3월에 그동안 발간이 금지되었던 『추강집(秋江集)』이 인출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사육신 문제가 정치적으로 공인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34년이 지난 1545년(인종 1) 4월에 경연에서 시강관 한주(韓澍)의 입으로 『추강집(秋江集)』에 나오는 사육신의 이름을 그대로 들고 그들의 충절을 거론했으며, 이 사실은 곧 『인종실록(仁宗實錄)』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사육신 문제는 선조 때에 조상(세조)을 무욕(誣辱)주3하는 허황된 일이므로 기휘(忌諱)주4에 저촉된다 하여 수난을 겪을 뻔했으나, 영의정 홍섬(洪暹)의 지극한 간청으로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점점 이 문제가 올바로 인식되어감에 따라 1691년(숙종 17) 12월에 이르러 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공인, 복관시키고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1791년(정조 15) 2월에는 절의 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하였다.

즉,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을 비롯한 6인의 종친) · 사의척(四懿戚: 송현수(宋玹壽)를 비롯한 4인의 외척) · 삼상신(三相臣: 황보인 · 김종서 · 정분(鄭苯) 등 3정승) · 육신(六臣: 성삼문 · 이개 · 유성원 · 박팽년 · 하위지 · 유응부) · 삼중신(三重臣: 민중(閔仲) · 조극관(趙克寬) · 김문기) · 양운검(兩雲劒: 성승 · 박쟁) 등으로 구분 선정해 정단배식인원(正壇配食人員)을 32인으로 편정하고 있다.

이 『어정배식록』은 정조 내각 홍문관에 명령,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참고 문헌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이었다. 이와 같이 사육신 문제는 오랜 기복(起伏)을 거듭한 끝에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국민들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육신(死六臣)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C%A1%EC%8B%A0

위 포스트를 클릭하면 열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et8xmr8Gso&t=381s

 

https://www.youtube.com/watch?v=9Z-l7mNc31s&t=328s

 

 

https://www.youtube.com/watch?v=3-Tpt8yFa5M

 

 

https://www.youtube.com/watch?v=GRwaftZmcA8

 

엄흥도 무덤

https://www.youtube.com/watch?v=rH91Xfi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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