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작가 정유정 / 내 심장을 쏴라 -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새 책...'내 심장을 쏴라' 外 [동영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250187

원문 http://blog.naver.com/lugali/50053577494

포스트 제목을 뭔가 거창하게 붙이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으므로 PASS. 이럴 때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는 졸라 빡센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죠.

어제죠. 샀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 오프라인에서 11,000원 제값주고 샀단 말이죠. 가끔씩은 이렇게 지를 때도 있어야죠. '1억원 고료 2009년 세계문학상 수상, 문학상 공모 사상 최고 심사위원진의 압도적 선정!'따위의 중의적인 표현으로 의미가 모호한 문구에 끌려 산 건 아닙니다. 오롯이 세계문학 수상작을 다 훑은 한 분의 독서취향이 생각나서 샀습니다.

끝.

이라고 하기에는 굳이 포스팅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좀만 더 사설을 풀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명의 인간이 생각났습니다.

1. 프리드리히니체. 그린비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중 니체를 쓴 고병권에 의하면 니체는 질병과 치유의 변증법으로 생성된 철학자라고 합니다.

2. 조경란.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책은 치유의 수단이었다고. 한편 모순적이게도 내가 가장 암울한 시기에 쓴 책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3. 억지로 누군가를 쓰려 했으나. 별로 생각 안 나네요. 한국인은 삼세판이라고, 인물도 세 명 추리려 했는데 더 이상 생각 안 나므로 PASS.

이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의 평가 이렇습니다 ; 초반에 조금 지루하나 서사가 진행될수록 강해지는 흡입력. 저도 동감합니다. 그 동안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된제 탓인지 모르겠으나 소설 초반은 확실히 지루합니다. 심사위원의 말로는 '폭넓은 취재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얼개, 한 호흡에 읽히는 문장, 간간이 배치된 블랙 유머'라고 하는데. 이 중 저는 세 번째는 동감하기 힘들었습니다. 문장 자체가 재밌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요즘 작가들은 문창과 출신이 많아 그런지 문장은 모두 다듬어 나오는 듯합니다. 이 시대에 박상륭이나 서정인 같은 문체를 고집하기라도 하면 큰일 나죠. 폭넓은 취재는 정신병동, 의학에 대해 잘 모르는 저 같은 독자가 보기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썼습니다. 작가의 경력을 보니 간호사로 근무했던데, 이때의 경험이 생생히 묻어납니다. 문창과를 안 좋아하기로 유명한 황석영 작가가 심사위원진에 포함되어 있는 점과 묘하게 맞닿아 있네요. 이상 작품에 대한 평은 끝.

그 다음은 전적으로 저의 마음대로 썰 풀기입니다.

이 소설은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정신병원이란 어떤 곳이냐. 감시와 감금, 처벌의 공간입니다. 푸코는 정신병동의 등장을 학교와 군대의 등장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며 근대는 규율권력이 만들어진 시기라고 말하죠. 알튀쎄의 논의로 연장시키면 규율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국가, 민족국가가 되겠죠. 규율권력은 만인을 감시하고 통제하지만 이 중에서 특히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비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는 말을 우리는 학교 등지에서 들었지만 이러한 사실에 테클 거는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스트죠.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했고, 푸코는 근대를 이성이 감성을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시기라 구분, 데리다는 플라톤의 로고스 중심 철학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푸코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그는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이전까지 광기에 대한 공동체의 대응은 경애 또는 추방이었지 감시와 통제, 처벌을 통한 훈육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흔적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는 백치이면서 성인인 사람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백치'가 그렇고 '미성년'이 그렇죠. 이는 그리스정교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성, 합리적 사유가 부족하다는 징표는 성스러움의 표시였죠. 도스토예프스키가 활동하던 19세기 러시아는 아직 서유럽에서 발생한 3중혁명(산업혁명, 프랑스혁명, 과학혁명)의 여파가 덜 미친, 후진적인 사회였습니다. 그의 소설에서 광인이 긍정적으로 보여지는 이유는 당시의 러시아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반면에 루쉰의 '광인일기'를 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때 광인은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에 직면한 중국의 비참한 처지를 비극적으로 읊는 인물입니다. 우습고 조롱을 받을 만한 사람이죠. 즉 광기에 대한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광인에 대한 가치 평가, 이것이 근대성의 한 측면입니다.

이성, 합리성으로 제단할 수 없는 사람을 굳이 정상의 범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 왜 할까요. 근대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요즘이야 정보화사회, 탈산업사회다 해서 노동이 생산 요소 중에 가장 하찮게 치부되지만 산업화 초반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직하면 리카도,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얘기했겠습니까. 잉여자원을 많이 쌓기 위해서 인간의 시계를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으른 자, 태만한 자, 주정뱅이, 백치는 모두 비정상이나 광기의 범주로 묶여 보내집니다. 그것이 감옥이든 정신병원이든. 여기서 그들은 감시와 통제를 거쳐 훈육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다소 성공적일 경우 이들은 원래의 공동체로 복귀해서 수많은 너트나 볼트 중 하나가 되지만 현재 정신의학이 거두고 있는 성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실패하죠.

광인, 미친사람, 미친놈, 미친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치료의 대상?감금의 대상? 사회에서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면 안 되는 인간, 아니 인간 아닌 동물? 대동소이한 반응이죠.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건 근대적인 증후란 말이죠. 인간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 비해 우리가 광인을 다루는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시종일관 묘사하는 진실입니다. 특히나 농촌과 같은 촌락 공동체가 아닌 도시에서 광인을 대하는 시선과 처세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을 상기시킬 정도로 잔혹합니다. 뭐,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하철에서 광인 보면 무조건 피합니다. 일상의 공간이 아닌 광인을 정상인으로 돌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신병원은 사정이 어떨까요. 비슷합니다.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이 들어오면 갇혀야 하는 곳이고, 정상인 사람이 들어와도 갇히면 미치는 곳이니까요.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류승민과 이수명.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류승민은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로맨티스트. 이수명은 충격적인 어머니의 자살 장면을 평생의 외상으로 안고 사는 불행한 기억의 소유자. 끊임없이 정신병동을 탈출해서 나도 이 땅에서 원하는 바를 당당히 행하고 살고 싶어하는 승민. 이곳에서의 생활에 안주하다가 승민을 보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수명. 소설은 수명의 시선을 통해 진행됩니다. 수명의 눈에 비춰진 병원 관계자들과 환자들의 차이는 전무. 오히려 환자를 감시하는 점박이는 환자들에 비해 더 난폭하고 광기어린 행동을 합니다.

작가는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이 소설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인생에 대한 기막힌 알리고리입니다. 지구상의 다른 공간도 그렇듯 정신병동은 소우주이고 이곳에 사는 다양한 인물, 이곳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사건은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죠. 모든 사람이 살다 보면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타자는 지옥이야, 지옥에서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등지의 질문에 부딪칠 겁니다. 광인 역시 그러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 역시 수백 번 겪었고 지금도 스스로 되묻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죠. 앞서도 말했듯 조경란 작가는 책이 치유의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없이 기업 원서 찔러놓고 면접 보러 다니고, 결국 한 군데도 걸리지 못하여 잠시 한숨 쉬는 동안 책을 거의 못 읽었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느꼈습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 면접비 득템보다 그 시간에 괜찮은 책 한 권 읽는 게 더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사람이 바라볼 때 저의 이런 생각은 기회비용을 따지면 넌 장래 돈 벌기는 글렀고 앞으로 손가락 빨기에 적절한 사유라고 조롱할 지 모르나. 중요한 건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니까요. 저는 이렇게 살래요.

이 책은 서울로 들고 갈게요. 음. 이 부분까지 안 읽으셨겠죠 ㅋㅋ

아 마지막으로 하나.

이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뜨거운 감동과 생에 대한 각성이 꿈틀대며, 희망에 대한 끈을 다시 움켜잡게 만드는 마력이 깃든 작품!'

살면서 희망은 안 가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1人이지만,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다소 앞이 지루하여 읽기에 힘든 점이 있지만. 잘 읽었어요. 고마워요, 세계문학상 수상작을 꿰고 있는 싱클레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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