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당기(不移堂記)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사함(士涵)이 스스로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고 짓고,
거처하는 당(堂)에 ‘불이(不移)’라는 편액을 걸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 마루에 올라 보고 정원을 거닐어 보았어도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지 못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이는 이른바
이요
의 집인가?
이름이란 실질(實質)의 손님이니 날더러 장차 손님이 되란 말인가?”
하였더니, 사함이 실망스러워하며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그저 스스로 뜻을 붙인 것뿐일세.”하였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상심할 것 없네.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실질이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사함이 누구의 자(字)인지 알 수 없다. ‘불이(不移)’는 사철 내내 푸른 대나무처럼 절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빈천이 그의 절조를 변하게 할 수 없는〔貧賤不能移〕”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문은 ‘所居之堂’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所’ 자가 ‘新’ 자로 되어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莊子 逍遙遊》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뜻한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子虛) · 오유선생 · 무시공(亡是公)이라는 가공의 세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하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장자》 소요유에서 요(堯) 임금이 은자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고찰하는 명실론(名實論)은 묵가(墨家) 등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름이 실질의 손님이란 말은, 이름이 실질에 대해 종속적 · 부차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지난날
께서 관직에 있지 않고 한가히 지낼 적에 매화시(梅花詩)를 짓고는,
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자 그 시로써 두루마리 그림의 첫머리에 화제(畫題)를 붙이셨지. 그리고 나서 웃으며 나더러 말씀하시기를,‘너무하구나, 심씨의 그림이여! 능히 실물을 빼닮았을 뿐이구나!’하기에, 나는 의혹이 들어서,‘그림을 그린 것이 실물을 빼닮았다면
인데 학사께서는
하고 물었네.
[주D-006]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 : 이양천(李亮天 : 1716 ~ 1755)으로, 공보는 그의 자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므로 학사라 칭한 것이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권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화가 심사정(沈師正 : 1707 ~ 1769)으로, 동현은 그의 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畫業)에 정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훼(花卉) · 초충(草蟲)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원문은 ‘良工’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良畫’로 되어 있다.
원문은 ‘何笑爲’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笑’ 자가 ‘所’ 자로 되어 있다.
그러자 학사께서 말씀하시기를,‘그럴 일이 있지. 내가 처음에
과 교유할 적에 비단 한 벌을 보내어
를 그려 달라고 청했더니, 원령이 한참 있다가 전서(篆書)로
를 써서 돌려보냈지.
[주D-010]이원령(李元靈) : 화가 이인상(李麟祥 : 1710 ~ 1760)으로, 원령은 그의 자이다.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 · 서 · 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에 “촉 나라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울창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였다. 여기에서 측백나무는 변치 않는 제갈공명의 절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두보의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진(晉) 나라 사혜련(謝惠連 : 397 ~ 433)이 지은 부(賦)의 제목이다.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양원(梁園)이라는 호사스런 원림(園林)에서 당대의 문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시를 주고받았던 고사를 노래하였다. 《文選 卷14 雪賦》
내가 전서를 얻고는 우선 기뻐하며 더욱 그 그림을 재촉하였더니, 원령이 빙그레 웃으며, 「그대는 아직 모르겠는가? 전에 이미 그려 보냈네.」 하길래, 내가 놀라서, 「전에 보내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뿐이었네. 그대는 어찌 잊어버린 겐가?」 했더니, 원령은 웃으며, 「측백나무가 그 속에 들었다네. 무릇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몰아치면 변치 않을 것이 어찌 있겠는가. 그대가 측백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찾아보게나.」 하였지.나는 마침내 웃으며 응수하기를,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전서를 써 주고, 눈을 보고서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다니, 측백나무와는 거리가 너무도 머네그려.
그대가 도(道)를 행하는 것이 너무도 멀리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였지.
[주D-013]그대가 …… 아닌가 : 《중용(中庸)》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중용장구》 제 13 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힘든 일에서 도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이다.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그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700리 길을 달려갔는데, 도로에서 전하는 말들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장차 이르면
이 있을 것이라 하니, 하인들이 놀라서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 때마침 날씨는 차고 눈이 내리며, 낙엽진 나무들과 무너진 산비탈이
앞을 가리고 바다는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는데, 바위 앞에 오래된 나무가 거꾸로 드리워져 그 가지가 마른 대나무와 같았지. 나는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다가, 손으로 멀리 가리키면서 그 기이함을 찬탄하며 「이것이야말로 어찌 원령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 하였지.
[주D-014]나는 ……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8년(1752) 10월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이듬해 6월 위리(圍籬)가 철거되고 육지로 나왔으나, 영조 31년(1755)에야 관직에 복귀했다가 이내 사망했다.
유배형을 받은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대본은 ‘嵯砑’인데, ‘砑’는 ‘岈’의 오자이다. ‘치아(嵯岈)’는 둘쭉날쭉 뒤섞여 있는 모습을 뜻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차아(嵯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뜻한다.
섬에 위리안치되고 나니 장기(瘴氣)를 머금은 안개로 음침하기 짝이 없고 독사와 지네 따위가 베개나 자리에 이리저리 얽혀 언제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었지. 어느 날 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벼락이 치는 듯했으므로 종인(從人)들이 다 넋이 달아나고 토하고 어지러워했는데, 나는 노래를 짓기를,
南海珊瑚折奈何 남해산호절내하 남쪽 바다 산호가 꺾어진들 어쩌리오
秪恐今宵玉樓寒 지공금소옥루한 오늘 밤 옥루가 추울까 그것만 걱정일레
하였지.원령이 편지로 답하기를, 「근자에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니, 말이 완곡하면서 슬픔이 지나치지 않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조금도 없으니, 그만하면 환난에 잘 대처할 수 있겠구려. 지난날에 그대가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대 역시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겠소. 그대가 떠난 후에 측백나무를 그린 그림 수십 본이 서울에 남아 있는데, 모두
들이
으로 서로 돌려가며 베껴 그린 것이라오. 그러나 그 굳센 줄기와 꼿꼿한 기상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고, 가지와 잎은 촘촘하여 어찌 그리도 무성하던지!」 하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하였지. 이로 말미암아 보면, 좋은 그림이란 실물을 빼닮은 데 있는 것은 아니야.’하시기에, 나도 역시 웃었다네.
[주D-017]남쪽 …… 걱정일레 : 옥루(玉樓)는 상제(上帝)가 산다는 곳인데, 여기서는 궁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임금께서 평안하신지 염려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걸작으로 알려져, 그의 벗 이윤영(李胤永)이 지은 만시(輓詩)에도 인용되었다. 《丹陵遺稿 卷10 挽功甫》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예리하지 못한 붓이라는 뜻으로, 그림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몰골도(沒骨圖)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하는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이른다. 몰골도에는 붓 자국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인상이 편지에서, 화원들이 모방한 측백나무 그림이 사이비(似而非)임을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은근히 풍자했다는 뜻이다.!」
얼마 있다가 학사께서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그분을 위하여 그 시문(詩文)을 편집하다가, 그분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형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네. 그 내용인즉,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 보니, 그가 나를 위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귀양을 풀어 주기를 청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어찌 나를 이다지도 천박하게 대우하는지요?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갇혀서 병들어 죽을지언정 저는 그런 노릇은 하지 않겠습니다.’했네. 나는 그 편지를 쥐고 슬피 탄식하며,‘이 학사(李學士)야말로 진짜 눈 속에 서 있는 측백나무이다. 선비란 곤궁해진 뒤라야 평소의 지조가 드러난다. 재난을 염려하면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고, 고고하게 굳건히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 것은, 어찌
하였다네.”
[주D-021]근자에 …… 하였으니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9년(1753) 3월과 4월에 언관(言官)들이 이양천의 해배(解配)를 건의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개적인 노력 말고도, 이양천의 벗들 중에 당시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논어》 자한(子罕)에 “추운 계절이 되어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추운 계절이 닥친 뒤에 내 장차 자네의 마루에 오르고 자네의 정원을 거닌다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겠는가?
'한문학 > 연암 박지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취하여 운종교를 거닌 기록 -박지원 (0) | 2008.09.12 |
---|---|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박지원 (2) | 2008.09.12 |
박지원 -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속인의 괴이함 (0) | 2008.09.10 |
노인일쾌사 5-다산 정약용 (0) | 2008.09.09 |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 -박지원 (0) | 2008.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