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산 유길준 묘소 앞에서
유길준 선생을 회고하다
검단산은 두 번째다. 심대섭 교장님, 이유식 사장님과 함께 전병근 사장님의 토요모임인 영어 쓰는 사람들과 한 번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더운 입김도 선명한, 눈 덮인 2월말경이어서 7부 능선쯤에 있는 약수터 위는 얼음이 깔려 있어 아이젠을 끼고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산행 기록은 아래 창에도 올린 적이 있었다.
http://blog.paran.com/kydong/24697358
http://www.munjung13.com/board/read.php?table=m13sarang&no=23565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퍽퍽 더운 김을 내뿜었고, 땀구멍에서 솟구친 물기와 염분은 피부에 습지를 이루었다. 산길도 하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과 위안을 제공하느라 몸을 말릴 틈이 없어 질척거리는 대로 등산객들에게 몸을 내맡긴 채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었다.
검단산은 악산이 아니어서 음전한 바위는 없었다.
하산길에 유길준 묘소를 만난 건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유길준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고 한학(漢學) 공부를 통한 입신양명을 포기 하고 김옥균 등과도 교분을 쌓는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일본유학을 거쳐 보스턴대 유학생이었고 유럽 여행 기록을 <서유견문>에 남기기도 했다. 그의 이력에는 미국유학생 1호, 국비지원 유학생 1호, 갑오경장시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 역임 등 찬란한 기록들이 따라다니지만 그의 찬연한 업적은 1895년 일본에서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의 신기원을 이룬 《서유견문(西遊見聞)》이다. 세종대왕이 각고의 노력 끝에 문자 창제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사상적인 글은 한문으로 적기를 고집했다. 그런데 《대한문전(大韓文典)》이라는 최초의 국어문법책까지 만들어가며 한국어 어순(語順)에 맞는 글쓰기를, 그것도 파천황의 새로운 세계를, 언문일치 문장의 글쓰기의 전범을실천해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그 저술은 글쓰기의 혁명의 신기원을 이룬 것이다. 오늘날국어의 글쓰기 패턴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견문록의 제19편과 20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등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기록물이다.
그에 대한 사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18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95년에 탈고했다.
[은자 주]다른 연구에 의하면 그는1885년 12월 귀국 직후 개화파로 분류되어 체포됨.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은 면하나 1892년까지 자기집과 삼청동 취운정으로 주거제한을 받는다. 《서유견문》은 1890년에 완성되었다 한다. 이 연구 기록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주소창에는 더 자세한 삶의 궤적이 기록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myunggyu?Redirect=Log&logNo=60028660157
다산이 강진 유배를 저술의 기회로 삼았듯이 그는 개화파로 몰려 7년 삼청동 유폐 기간동안 《서유견문》을 얻었다. 인류 역사에 남은 역저들은 사마천이나 박경리 선생이 그러했듯이 극단적 역경 속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인간 승리의 궤적들이다. 그들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통해 거짓없는 진정한 자아를 건져올렸다. 어부가 심해에서 물고기를 낚아올리듯이 그들은 절망의 심연에서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들을 정립했던 것이다.
7년의 유폐기간에 이어지는 그의 삶은 12년간의 일본 망명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에 성공한 친러내각의 개화파 소탕작전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일본 육사 조선인 장교들과 일으킨 쿠데타 실패로 오가사와라섬에 갇혀 지내던 그는 일본에서1907년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위 주소창에는 방송인들답게 국내파의 마음에 쏙 드는 유길준의 경구도 《서유견문》에서 뽑아냈다.
외국담배를 물고, 외국시계를 차며, 외국말을 얼마쯤 지껄이는 자는 한낱 개화의 병신이다.
나는 길을 대상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길은 한자로 ‘道’이다. 도덕은 인륜의 지표가 된다. 말하자면 도덕은 인류가 함께 가야 하는 길이다. 나의 인생길에는 험난한 길도 많았고 틈틈이 유쾌한 시간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나 자신을 억세게는 아니라도 비교적운이 좋았던 사내라고 자위한다.
우리 중학동기들도 어느 새 환갑 나이를 지났다. 어릴 때는 무척 우르러 보이는 연령이었는데 도달해 보니 내달아 도망친 세월이 허망하기만 하고 또 아쉬운 구석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원초적 질문들이 뇌리를 어지럽힌다.
현재 병고에 시달리는 동기들도 있고, 일찌감치 살아가기를 접고 영원한 시간의 늪 속으로 사라진 벗님들도 있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현재의 절박한 심정이지만 해답은 막막하기만 하다.
갑갑한 심정에 기냥, 옛날 소시적 교과서에서 배운 로버트 프루스트의<가지 않는 길>, 윤동주의 <길>과 <새로운 길>을 함께 읽어 본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루스트
노란 숲속에 길이 두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사람의 나그네로 오랫동안 서서
한길이 덤불 속으로 꺽여 내려간 데 까지,
바라 볼 수 있는데 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 같이 아름다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므로 해서
그 길은 거의 같아 질것입니다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가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채 묻혀 있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었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 올것을 의심 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 입니다.
그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택하였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화장품 광고 사진에 나온 이효리의 길도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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