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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

춘향가 중 오리정 이별 대목 - 김소희

<아니리> 방자 충충 들어오더니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러시오 내 행차는 벌써 오리정(五里亭)을 지나시고 사또 께서 도련님 찾느라고 동헌(東軒)이 발칵 뒤집혔소 어서 갑시다."
도련님이 하릴없이 방자 따라 가신 후 춘향이 허망하야 "향단아 술상 하나 차리여라. 도련님가시는디 오리정에 나가 술이나 한 잔 듸려보자."

<진양조>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숲을 울며 불며 나가는디, 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씻치면서 농림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욱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거!"

<자진모리> 내행차(內行次) 나오난디 쌍교(雙轎)를 거루거니 독교를 어루거니 쌍교 독교 나온다. 마두병방(馬頭兵房) 좌우나졸(左右邏卒) 쌍교를 옹위하야 부운같이 나오난디 그 뒤를 바라오니 그 때여 이 도령 비룡같은 노새등 뚜렷이 올라앉어 제상(制喪) 만난 사람 모냥으로 훌쩍훌쩍 울고 나오난디 농림숲을 당도허니 춘향의 울음소리가 귀에 언뜻 들리거날 "이 얘, 방자야. 이 울음이 분명 춘향의 울음이로구나. 잠깐 가 보고 오너라." 방자 충충 다녀오더니, "어따,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아 이 놈아. 누가 그렇게 운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울겄소? 춘향이가 나와 우는디 사람의 자식은 못 보겄습디다."

<중모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여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천연히 집에 앉어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으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 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요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으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노라." 술 한 잔을 부어들고, "옛소. 도련님 약주잡수! 금일송군 수진취(今日送君須盡醉:오늘 임을 보내니 실컷 취하여보자)니 술이나 한 잔 잡수시오." 도련님이 잔을 들고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천하에 못 먹을 술이로다. 합환주(合歡酒)는 먹으려니와 이별허자 주는 술은 내가 먹고 살어서 무엇허리!" 삼배를 자신 후에 춘향이 지환(指環)벗어 도련님께 올리면서, "여자의 굳은 절행 지환빛과 같은지라 니토(泥土)에 묻어둔들 변할 리가 있으오리까!" 도련님이 지환 받고 대모석경(玳瑁石鏡:거북 등껍질로 만든 거울)을 내어주며 "장부의 맑은 마음 거울빛과 같은 지라 날 본 듯이 네가 두고 보아라" 둘이 서로 받어 넣더니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을 적에, 방자 보다 답답하여라고. "아 여보 도련님. 아따 그만 좀 갑시다." 도련님 하릴없어 말 위에 올라타니 춘향이 정신을 차려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도련님 등자 디딘 다리 잡고 "아이고 여보 도련님 한양이 머다 말고 소식이나 전하여주오! " 말은 가자 네 굽을 치는디 임은 꼭 붙들고 아니놓네.

<자진모리> 저 방자 미워라고, 이랴. 툭 쳐 말을 몰아 다랑다랑 훨훨 넘어가니, 그때여 춘향이난 따라갈 수도 없고 높은 데 올라서서 이마 위에 손을 얹고 도련님 가시는디만 뭇두두루미 바라보니 가는 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 별만큼 보이다,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 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 그림자도 못 보겄네.

<중모리> 그 자리 퍽석 주저앉더니 방성통곡 설히 운다. "가네, 가네, 허시더니 인자는 참 갔구나 .아이고 내 일을 어찌여. 집으로 가자 허니 우리 도련님 안고 눕고 노든 디와 오르내리며 신 벗든디 옷 벗어 걸든 데를 생각 나서 어찌 살거나. 죽자 허니 노친이 계시고 사자 허니 고생이로구나. 죽도 사도 못허는 신세를 어찌하면은 옳을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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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echwar/80085303680

지난 1997년,
성주이씨 문중에서 소장해 오던 '묵재일기' - 묵재 이문건(李文健, 1494~1567)이 30여년간 쓴 한문일기- 의 낱장 속면에서 의문의 한글로 씌여진 소설이 발견되었다.
이는 앞서 최초의 한글소설이라 불리는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100여년이나 앞서있는 한글문학작품으로 알려지며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설공찬전'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한글로 씌여진 최초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채수(蔡壽. 1449~1515)라는 사람이 쓴 한문소설을 국문으로 옮겨 적은 것이었다.

채수는 어렷을 적 귀신의 출현을 목격한 바 있다고 하는데, 그때의 경험이 이 작품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듯 하다.

이 소설은저승의 이야기를 빌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이런 내용 때문에,설공찬전은

중종 당시 금지도서로 분류되어 모조리 불태워지고 가진 사람은 문책을 당하였다 한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빙의현상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술이 쓰여있는것과,

우리나라에서 귀신을 물리치는(이른바 퇴마) 의식에 대한 몇몇 단서와 그에 대한 직업(엑소시스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잠시 원문중 일부를 살펴보면,

정덕(正德) 무신년 7월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끌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한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슬퍼 더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청하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로 가리키고 방법하여 부적하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계집이므로 이기지 못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 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가 오니 그 계집은 없어졌다.

공찬이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를 붙들어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아주버님이 백방으로 양재(攘災)하시려 하시지만 오직 아주버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고 이르기를, 아주버님(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 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보았더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하고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 하였다.

공찬의 넋이 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가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았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번씩 먹되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얘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는가?󰡓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내리면 공침의 마음도 제대로 되어 도로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보채여 서럽습니다하더니 그로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에 가서 겨우 들이더니 충수가 아들의 병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냥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 말을 많이 하여 그 영혼에게 들려주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대로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때리시면 아주버님 얼굴을 변화시키겠습니다하고 공침의 사지를 비틀고 눈을 뜨니 눈자위가 자지러지고 또 혀도 파서 베어내니, 코 위에 오르며 귀 뒤로 나갔더니, 늙은 종이 곁에서 병구환하다가, 깨우니 그 종도 죽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기는 것이었다. 공침의 아버님이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놓아보내고 부르지 않으마하고 많이 빌자, 한참만에야 얼굴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설공찬전 속에 나타나는 빙의현상은 그 기괴함이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속의 흉측한 악마의 모습을 보는듯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어, '스펀지'라는 TV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도 있을 정도이다.

원문 중, 공침에게 빙의된 공찬의 혼이 공침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정신을 혼란시키며, 얼굴을 변형시켜

공침의 아비에게 공포를 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빙의라는 현상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비일비재하게 인간들을 괴롭혀 왔으며, 그 양상또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빙의라는 현상이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우리 주변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고,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여러 TV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그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빙의가 정신분열증과 같은 여태의 정신질환과 다른 점은, 빙의환자 본인이 자신의 이상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영화속의 대사처럼,

빙의된 사람은 빙의령의 영향이 사라졌을때 의식이 지극히 정상이며,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설공찬전"속에도 그런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빙의령이 발현되어 몸과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극심한 정서적 변화와

기억상실, 뇌파변형, 호르몬 이상(특히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가 정상인의 2~3배로 증가)은 물론 완전히 다른 인격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약하게는 말을 더듬는 증상에서부터 틱장애(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욕설이나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는 증세), 신체마비 등이 함께 찾아온다.

빙의가 더욱심해지면 끈임없는 자해와 폭력을 일삼고, 알 수 없는 말을 끈임없이 지껄이며,

술이나약물을 과다복용하거나 폭식-거식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특히 밤(자정에서 새벽이 이르는 시간대)에는 증세가 훨씬더 심해진다.

빙의가 별다른 조치없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자신의영력이 쇠약해져 점점 자신의 혼을 잃어간다.

자기 영혼의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가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 정신으로 있을 때조차 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며,

점점 빙의령에 몸이 지배당해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설공찬전"속의 엑소시즘

우리는 고대로부터 빙의를 치료하고 혼을 통제하는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식이 언제, 어디로부터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우리의 무속 문화에

그 흔적이 남아있으며, 고대 갑골문과 같은 기록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극중 귀신을 쫏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김석산'이라는 사람은 말 그대로 엑소시스트이다.

김석산은 공찬이 빙의되기 전에 먼저 공침에게 빙의된 어떤 여자아이의 혼령을 내쫓는다.

이때 김석산이 사용하는 것이 복숭아나무 가지이다. 복숭아나무는 퇴마와 관련된 의식에 자주 등장하는 자연물이다. 왜 복숭아나무인가??라고 묻는다면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왜 복숭아나무인지는 모른다. 다만 복숭아(특별히 천도복숭아)의 색깔이 후에 김석산이 사용하려하는 '주사(경면주사)'와 거의 똑같다는 점에서 복숭아나무가 어떤 상징적인 의미(귀신을 쫓는 붉은색)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하고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경면주사 인데, 경면주사는 이 블로그에서 전에도 다룬 적이 있지만,

매우 특별한 광물이다. 황화수은을 주 성분으로 하는 경면주사는 핏빛처럼 깊은 붉은 빛을 띈다.

무속에서는 주로 곱게 갈아서 기름과 혼합해 부적을 그리는데 쓰는데, 그 정확한 용도와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 이 물질이 귀신을 통제하는데 쓰이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봐야한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 분화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지식들 중 일부가

지금은 세속화된 무당들(블랙샤면)에게 그 사용법이 전수되었을 뿐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아주 먼 옛날에는 단순히 부적에 쓰려고 이 광물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장을 찍는 인주에 이 경면주사를 사용했던 것과, 도장 인(印)이라는 한자의 고대어원을 살펴보면

분명 이 물질이 영혼과 육신을 연결하는 어떤 의식에 사용되는 주요한 재료였다는 것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음.)

각설하고, 설공찬전에서 등장하는 퇴마사가 경면주사를 이용해 귀신을 쫓으려 했던 것은 아마도

'부'를 그려 퇴치하려 했던것이 아닌가...하고 유추해 볼 수 있을뿐이다.

부적은 지금도 무속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중 하나지만, 사용자의 믿음 여하에 따라 그 효과가 차이나기도 하고, 영험이 없는 무당이 그려준 부적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다, 애시당초 부적의 사용이 아예 아무 효과도 없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의 영험이 쇠락하고, 자연과 신령, 영적믿음에서 멀어진 생활을 오래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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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o-seol/seol-kong-chan.htm

[참고자료]

이복규 편저,설공찬전,시인사,1997.

예전에 순창(淳昌)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이는 지극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하더니 한 딸이 있어 서방을 맞이하였지만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公瓚)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였다. 어릴 때부터 글 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작법을 매우 즐겨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갑자년(甲子年)에 나이 스물인데도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들어 죽었다.

공찬의 아버지가 불쌍히 여겨 신주(神主)를 만들어 두고 조석으로 매일 울면서 제사지내었다. 병인년(丙寅年)에 삼년상이 마치자 아버지 설충란이 조카딸더러 이르되, “죽은 아들이 장가도 들이지 않아서 죽으니 그 신주에게 (제삿밥) 먹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묻어야겠다”하고 하루는 (신주를) 멀리 싸서 져다가 그 무덤 곁에 묻고 많이 서러워 이레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서러워하였다.

설충란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薛忠壽)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공침(公琛)이고 아이 때 이름은 업종이었는데 서울에서 업살고 있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업동이니 순창에서 살았다. 공침이는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우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정덕(正德) 무신년 7월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끌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한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슬퍼 더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청하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로 가리키고 방법하여 부적하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계집이므로 이기지 못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가 오니 그 계집은 없어졌다.

공찬이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를 붙들어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아주버님이 백방으로 양재(攘災)하시려 하시지만 오직 아주버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고 이르기를, “아주버님(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 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보았더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하고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 하였다.

공찬의 넋이 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가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았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번씩 먹되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얘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는가?”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내리면 공침의 마음도 제대로 되어 도로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보채여 서럽습니다”하더니 그로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에 가서 겨우 □들이더니 충수가 아들의 병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냥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 말을 많이 하여 그 영혼에게 들려주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대로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때리시면 아주버님 얼굴을 변화시키겠습니다”하고 공침의 사지를 비틀고 눈을 뜨니 눈자위가 자지러지고 또 혀도 파서 베어내니, 코 위에 오르며 귀 뒤로 나갔더니, 늙은 종이 곁에서 병구환하다가, 깨우니 그 종도 죽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기는 것이었다. 공침의 아버님이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놓아보내고 부르지 않으마”하고 많이 빌자, 한참만에야 얼굴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하루는 공찬이가 편지를 보내 사촌 동생 설워와 윤자신이 이 둘을 함께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와 보니, 그때는 공찬의 넋이 오지 않은 때였다.

공침이 그 사람들더러 이르기를, “나는 병들어 죽을 것이다”하고 이윽고 고개를 빼서 눈물을 흘리고 베개에 누웠는데, 그 영혼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공침의 말이 아주 간절하였는데, 제 아버지가 이르기를 “영혼이 또 온다”고 하였다.

공침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고 그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내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해니, 멀리 떨어져 있어 매우 슬픈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저승 기별을 물어보았다.

저승에 대한 말을 이르기를 “저승은 바닷가이로되, 매우 멀어서 여기서 거기 가는 것이 40리인데, 우리 다니는 것은 매우 빨라 여기에서 술시(저녁 8시)에 나서서 자시(자정)에 들어가, 축시(새벽 2시)에 성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이라고 한다. 중국과 모든 나라의 죽은 사람이 다 이 땅에 모이니, 하도 많아 수효를 세지 못한다. 우리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육지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이승 생활에 대해 묻는데, ‘네 부모, 동생, 족친들을 말해보라’며 쇠채로 치는데, 많이 맞는 것을 서러워하면 책을 상고(詳考)하여, 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그냥 두고, 다하였으면 즉시 연좌(蓮座)로 잡아간다.

나도 죽어 정녕히 잡혀가니, 쇠채로 치며 묻기에 맞기가 매우 서러워 먼저 죽은 어머니와 누님을 대니, 또 치려고 하길래, 증조부 설위(薛緯)로부터 편지를 받아다가 주관하는 관원한테 전하니 놓아주었다. 설위도 이승에서 대사성 벼슬을 하였다시피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말을 여기에 하기를, “이승에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 임금은 당나라 사람이다.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저승에서) 가장 품계 높이 다닌다. 서럽게 살지 않고 여기에서 비록 존귀히 다니다가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 가도 수고롭고 불쌍하게 다닌다. 이승에서 존귀히 다니고 남의 원한 살만한 일을 하지 않고 악덕을 베풀지 않았으면 저승에 가서도 귀하게 다니고, 이승에서 사납게 다니고 각별히 공덕 쌓은 게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그 가지(자손?)도 사납게 다니게 된다.

민후가 비록 이승에서 특별한 행실은 없었어도 청렴하다 하여, 거기 가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염라왕 있는 궁궐이 장대하고 위엄이 매우 성하니,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염라왕이 시키면 모든 나라 임금과 어진 사람이 나오는데, 앉히고 예악을 썼다.

또 거기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설위도 허리□□안고 민후는 아래에서 두어 자 쯤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성화 황제의 신하 애박이를 염라왕께 보내 “아무개는 나의 가장 어여쁘게 여기는 사람이니 한 해만 잡아오지 마소서”하고 청하자, 염라왕이 이르기를, “이는 천자의 말씀이라 거스리지 못하고 부득이 들을 것이지만, 한해는 너무 많으니 한 달만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애박이가 다시 “한 해만 주소서”하고 아뢰자, 염라왕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황제가 비록 천자라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다 내 권한에 다 속하였는데 어찌 거듭 빌어 내게 청할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아니 듣는 것이었다. 성화 황제가 들으시고는 즉시 위의를 갖추시고 친히 가신대, 염라왕이 자네는 북벽에 주홍사 금교의 놓고 앉고, 황제는 교상에 앉히고, 황제가 청하던 사람을 즉시 잡아오라 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죄가 중하고 말을 내니 그 손이 빨리 삶아지리라”하니 성화 황제[이하 부분은 소실됨] 


[연극/설공찬전]

[은자주]설공찬전의 발견으로 국문소설의 역사는 100여년 앞당기게 되었다.

국문소설의 등장

蔡壽(1449- 1515), 薛公贊傳. ◇이복규,설공찬전;주석과 자료,시인사,1997.

許筠, 洪吉童傳

1618년작. 허균 작품?. 원래 한글본? /구전되면서 차차 살을 붙여 분량이 늘어남.


◈薛公瓚傳

◇중종실록 중종 6년 辛未(1511) :「한문으로 필사하거나 국문으로 번역해 유포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패관잡기 등에 중종 때 내용이 문제가 돼 왕명으로 불태워졌다는 기록만 전해옴.

당시 승지를 지낸 李文楗(1494-1567)의 생활일기 《黙齋日記》의 낱장 속면에 기록됨.

일기는 1535-1567년 사이의 기록. 이 소설이 서울에 전파되자 사헌부에서는 이 작품을 수거해 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간 논의를 계속함.

◇작자 蔡 壽(1449-1515): 훈구파. 세조14년(1468) 장원급제. 실록 편찬 등에 종사함.

성종 때 폐비 윤씨에게 애석한 정을 나타내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남.

성종16년(1485) 충청도 관찰사로 관직에 들어서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 지냄.

연산군 즉위 후 외직에 머물러 무오사화(연산군4,1498)의 화를 모면함.

중종반정(1506)에 가담한 공로로 仁川君에 봉해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병을 핑계로 경상도 상주에 은거해 지내며 이 소설을 씀.

행장에 의하면 거사 주도 인물들이 채수를 동참시키기 위해 군인들을 보내 데려오게 하였으며 만약 이에 불응하면 목을 베도록 지시함. 장인의 성품을 잘 아는 사위가 술을 만취케 하여 부축하여 대궐문 앞으로 인도했고, 술에서 깨어난 그는 「어찌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다 전함.

◇창작시기:1506-1515.중종은 1506년9월 즉위했고 채수는 1515년 사망함. 일기가 1535-1567년 사이의 기록이므로 필사연대는 1567년 이후.

◇《설공찬이》란 제목의 필사상태로 총13쪽 4천여 자 분량.

◇<개관>

내용은 건국공신과 신흥사대부의 갈등이 본격화하는 정치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이 당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됨.

순창에 사는 설충란의 아들 공찬이 장가들기 전에 병사한다.

공찬의 혼령은 삼촌 설충수의 아들 공침의 몸을 수시로 왕래한다.

오른손잡이인 공침의 몸에 공찬의 혼령이 들어오면 그는 왼손잡이가 된다.

저승에서는 모두 왼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공찬의 혼령이 공침의 몸을 빌어 저승 경험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허구와 사실을 결합하였다.

공찬의 혼령은 삼촌들을 불러모으고 「내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 해로 머리조차 희니 매우 슬픈 뜻이 있다.」는 말로 저승의 소식을 전한다.

저승의 위치는 순창 바닷가에서 40리,저승의 이름은 단월국, 임금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 소개한 후 명이 다한 영혼을 불러오는 저승의 심판 모습을 일러주었다.

자신도 심판을 받았으나 증조부 덕택으로 놓여 나게 되었다.

그의 증조부는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薛緯였다. 그는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반전되어 반역자들에 미친다.

민후, 애박이 등의 이름이 나오고, 당나라 신하였다가 반난을 일으켜 양나라 시조가 된 朱全忠(852-912)이 대표적 인물로 소개된다.

그의 결론은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 비명에 죽더라도 저승에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기술로 「이승에서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아 잘 지낸다.」며 저승에는 남존여비가 없음도 말하였다.

전체적으로 당시 실존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중종반정에 가담했던 신흥사림파를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치적 의도가 잘 드러난다.

◇《사학연구》53호 원문 소개. 이복규 교수의 설공찬전연구 발표,한남대,1997.5.10. 2시

◇魚叔權,稗官雜記2.국역 대동야승Ⅰ,민족문화추진회,1984,p.456.

「懶齋 蔡壽가 중종 초에 薛公瓚傳을 지었는데,(그 내용이) 극히 괴이하다.

그 끝에 이르기를,

『공찬이 남의 몸을 빌어 몇 달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일들을 아주 자세히 말하고, (또) 말하고 쓴 것을 그대로 써 보게 하여, 한 자도 틀리지 않은 것은 그것을 전하여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하였다.

言官(諫官)이 논박하기를, 『채 아무개가 지은 책은 허황하고 거짓되어 믿을 수가 없으며, 상도에 어긋나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는 것이니, 죽음을 내려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파직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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