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편제는 섬진강 동쪽인운봉,구례,순창,흥덕지역을 기반으로 웅장하고 씩씩하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아니리가 길게 발달하지 않았고, 발림도 별로 없고 목을 내는 통성에 의지하여 연행하는 소리재이다. '대마디 대장단'이라는 말고 같이 장단에 소리를 맞춰서 붙여 나간다.
판소리(Pansori)는 한 명의 사람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발림)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1]
판소리는 소리꾼이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긴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노래하는한국 전통음악의 하나이다. 일정한 극적 내용을 광대 혼자 육성과 몸짓의 창극조로한국향토의 선율을 토대로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켜 연행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당초에 '소리'라는 범칭으로 불리었으며 타령, 잡가, 광대소리, 극가(劇歌). 창극조(唱劇調) 등의 용어로도 통용되었다.
판소리는 창(唱)의 문학의 한 형태로서, 특히 한국에서 18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음악 예능의 한 형태이다. 판소리는 판+소리의 합성어로서 원래는 판놀음 속에서 부르는 소리를 말했다.
'판놀음'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을 일컫기도 하고 근두(筋斗), 줄타기 등을 하는 놀음 전체를 말하기도 하였다.순조시대의 판놀음에는 새면(樂子)에 의한 음곡(音曲)과 더불어시조와 판소리(本事歌)가 들어갔다. 그러므로 판소리를 보통 창극(唱劇)·창극조(唱劇調)라고 말하는 것은 적당한 용어가 아니다. 창극은원각사(圓覺社) 이후 판소리가 극화(劇化)된 뒤의 명칭으로는 그런대로 근거가 있으나 순수한 판소리의 명칭으로는 적당치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창극조는 이런 창극에서 부르는 가락이라는 음악적 용어로서는 적당하나 판소리의 형태적 면에서는 역시 적당치 않다.
이상을 통해서 판에서 부르는 소리라는 뜻의 판소리는 판놀음이란 용어에서 독립해서 나온 음악 용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판소리의 문학적 조사(措辭) 내지 문자로 정착된 형태를 판소리사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음악적 용어로서의 판소리와 문학적 용어로서의 판소리사설을 구별하여야 하겠지만, 시조(時調)처럼 이를 통용하여 '판소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판소리의 장르적 유형
판소리의 장르적인 유형은 중세기 시대에 동서양에 편재했던 음악과 문학 형태이다.중국에 있어서도당대의 변문(變文)에서 시작된 강창류(講唱類)가송대에는 평화(平話)로서 발전했던바, 이는 설창인(說唱人)들이 이야기와 창(唱)을 섞어 대중에게 고사(故事)를 들려주는 서사문학(敍事文學)이었다. 이것이금대에 와서는 제궁조(諸宮調)라는 한국 판소리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발달하여, 여기서 다시 잡극(雜劇)으로 창극화(唱劇化)되어 원곡(元曲)으로 넘어가고 애초의 평화(平話)는 창사(唱詞)로서 청(淸) 말까지 전승되기도 하고, 창을 잃고 소설로서 명·청시대에 크게 성행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도 중세기 이후 음유(吟遊)시인들의 무리가 있었다.프랑스의 경우, 성당의 수도사들이라틴어가 아닌 토속어(lingua romana)로 그 성당의 내력에 대해 순례자를 위해 부른 것이 무훈시인 샹송 드 제스트(changson de geste)이고, 로맨스도 광장이나 살롱에서 여러 사람을 위해 노래 부른 형태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런 문학과 음악과의 협동으로 생성된 서사시 형태는 어느 민족에게도 있었다. 이는 10세기 전후에서 14, 5세기 전후에 걸친 중세기 공통의 문학형태인데, 한국의 판소리는 문자로 형성된 소설이 먼저 나오고, 이런 판소리 형태가 18세기에 이르러 나온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무가와 판소리와의 관계
판소리가 무당의 남편인 광대(廣大)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그 음악적 소원(溯源)은 그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보형이 나눈 무가의 가락은 다음과 같다.
시나위권(圈)-육자배기조(調)로 부르는 것으로 지역으로는 경기 한강 이남, 충청도·전라도 지방이 속한다.
메나리조(山有花調)-산유화가락으로 부르는 것으로 경상도·강원도 지방이 이에 속한다.
수심가·산염불조-평안도·황해도 지방.
창부타령·노래가락조-경기 북부, 개성·서울·철원·양주지방의 무가(巫歌)가 이에 속한다.
여기서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는 시나위권에서, 우조(羽調\)는 가곡(歌曲)·정악(正樂)에서, '경드름'은 경기 민속악에서 그 원류를 잡고 있다. 또한 경드름은 경기 북부무가의 창부타령(倡夫打令)의 가락과 흡사하다는 설이 있다.
다시 판소리의 가락은 그 박자(拍子)의 느린 것으로부터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등의 템포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용어 '모리'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즉, 시나위조로 부르는 전라도 지방의 살풀이 굿이나,경기도·충청도지방에서 부르는 도살풀이(女唱)·도살모리·발래 등과 전기 판소리 가락을 비교하면 다같이중모리·중중모리로 진행하는데 특히 남자무당, 즉 광대가 부르는 고사소리는 옛날의 홍패고사(紅牌告祀)나 요즈음의 성조(成造)·안택(安宅) 등에서 중중모리·중모리·자진모리 등의 템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 가설, 즉충청도광대에서 판소리가 생성됐다는 이론에 상부되는 것이 바로 이 남무(南巫)인 광대가 부르는 홍패고사·성조·안택 등의 무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더욱 밝혀져야 할 문제이나 이런 것으로 보더라도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독서성(讀書聲)에서 판소리가 나왔다고 하는 추리는 허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대는 민속창자이기 때문에 이런 무가의 가락을 근간(根幹)으로 하여 여러 민속창을 섭취하여 이를 완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성립 당시는 무가의 가락을 원용하였다 하더라도 그 전승과정에서 이를 순화하고 판소리로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므로 오늘날의 판소리가 고도의 음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판소리의 종류
판소리가 하나의 민속음악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완성의 단계에 이른 시기는 대체로 조선왕조 숙종 조로부터 영조 조까지의 시기라 생각된다. 또한 판소리의 전성시기는 대개 정조 조로부터 철종 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18세기 말경에서 19세기 초까지가 그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저 유명한 판소리 작가이며 이론가인신재효와 8명창(八名唱) 등이 배출(輩出)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판소리에는 열두 소리가 있는데 이를 열두 마당이라고도 한다. 1810년경 간행된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본사가(本事歌) 대목을 보면, 판소리의 열두 마당을 <춘향가(春香歌)> <화용도타령(華容道打令)> <박타령>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변강쇠타령> <왈자타령(曰字打令)> <심청가(沈淸歌)>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옹고집타령(甕固執打令)> <가짜신선타령> <토끼타령> <장끼타령> 등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철종 때(1852)에 제작된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 서(序)에도 판소리에 12강(十二腔)이 있음을 기록하였고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도 판소리에 열두 판(마당)이 있음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 열 마당은 <관우희>의 것과 같으나 다만 <관우희>의 <왈자타령>을 <무숙이타령>이라고 하고, <가짜신선타령>을 <숙영낭자전>이라 한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상의 근거로써 최소한 1810년 이전부터 판소리에 열두 판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재효 때에 내려와서는 그 대부분이 불리지 않았고 그 후에도 차차 줄어서 지금은 겨우 다섯 마당이 불리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적벽가)> <박타령(흥부가)> 등은 실제로 불리고 있는 것들이며,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등은 사설(唱本)만 전해오고 있을 뿐 실제로 불리지는 않는 것들이다. <강릉매화타령> <왈자타령(무숙이타령)>은 창본도 전해지지 않고 물론 불리지도 않는 것들이다. 그 중 <숙영낭자전>은 근세의 명창 정정렬(丁貞烈)제가 불리고 있는데 이것이 정정렬 작곡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것과 철종·고종 시의 명창 전해종(全海宗)의 <숙영낭자전>의 가락과 사설의 전승 관계는 애매한 바가 있다.
판소리의 마당수가 앞에서 열거한 여러 전적(典籍)들에 의해 열두 마당으로 되어 있는 것은 판소리가 꼭 열두 마당뿐이었다는 것보다는, 선인들이 민속적으로 '열둘'이란 숫자를 좋아한 데서 판소리에서도 열두 마당으로 맞추어 일컫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판소리의 레퍼토리는 열둘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나 혹은 이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현재 불리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 하여 열두 마당에서 독립시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다섯 마당에는 역대 명창들의 '더늠'이 전해지고 있다. <숙영낭자전>은정정렬(丁貞烈), <장끼전>은김연수(金演洙)가, <변강쇠전>은박동진이 복원하여 불렀으나 열두 마당 시절의 가락을 전승한 것은 아니며 새로 편곡하여 부른 것이다.
판소리 다섯마당의 눈대목
판소리 다섯마당중에서도 흔히 불리는 대목들을 '눈대목'이라 한다. 다섯마당의 눈대목은 같다
1. Prologue (이렇게 눈이 내리면) 2. Spring Campus (캠퍼스의 새봄) 3. Drinking House (작부집) 4. Boy Meets Girls (민우와 다혜의 인사) 5. Father & Minu (아버지와 민우의 대화) 6. Campus Night (꿈에 그리던 별) 7. Minu in Jail (면회실) 8. Hyuntae (소중한 나의 친구여) 9. Club Niagara (클럽 나이아가라) 10. Aunt's Song (이모의 노래) 11. Eunyoung's Theme (은영의 노래) 12. Drug Deal (밀매자들의 노래) 13. Is Tru's a Dream (이것은 꿈이 아닐까) 14. Eunyoung & Priest (왜 마음을 못 붙일까) 15. Minu's Suicide (민우의 라스트) 16. Finale
1. 캠퍼스의 새봄 2. 여자를 높이보면 안돼 3. 내 아들아 4. 꿈은 아닐까 5. 사람을 쳤다, 믿을 수 없어 6 나이아가라 7. 나에게로 와 8. 뒤돌아봐요 9. 잡초로 살아가는 법 10. 슬픈재회 11. 행복이란 항상 우릴 피해가나봐 12. 세상은 어둠일 뿐 13. 추억의 삼주창
1막 1. 나아가리라 2. 믿을 수 없어 3. 캠퍼스의 새봄 4. 설레임 5. 풍기문란 6. 젊은 날의 청춘 7. 봄의 꿈 8. 사랑일까 9. 내 아들아 10. 세상이 우릴 흔들어도 11. 사람을 쳤다 12. 내 아들아 reprise.1 13. 어디가 바닥일까 14. 어떨까 15. 마음대로 안 돼요 16. 나아가리라 reprise[7] 17. 믿을 수 없어 reprise[8]
2막 18. Overture 19. 오늘밤은 20. 뒤돌아봐요 21. 그래도 살아가야만 해 22. 슬픈 재회 23. 그대에게 24. 용서해요 25. 동두천 밤거리 26. 어긋난 시간 27. 어긋난 사랑 28. 내 아들아 reprise.2 29. 세상은 어둠일 뿐 30. 레퀴엠
1825년 오스트리아 빈. 친구 집을 방문했던 가난하고 병든 작곡가 슈베르트는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빌헬름 뮐러의 시집 '겨울 나그네'를 읽게 된다. 시집에 깊이 감동한 슈베르트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실로 시집을 가져와 작곡에 매달린다. 가곡집 '겨울 나그네'는 이렇게 1827년에 완성된다. 가곡집의 첫 번째 곡은 '잘 자요'다.
"그대의 단잠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발걸음 소리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네
가면서 나는 그대의 방문에다
'잘 자요'라고 적어놓네."(이하 김재혁 번역)
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주제 역시 사랑의 아픔이다. 사랑에 실패하고 방랑의 길에 나선 한 젊은이의 심리가 가사와 곡을 통해 절절하게 전해진다. 가곡에 수록된 뮐러의 시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보리수'다. 전반부를 읽어보자.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난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네."
가곡에 수록된 뮐러의 시 24편에는 사랑을 잃고 길을 떠난 나그네의 실존적 몰락과 자아 상실의 과정이 처절할 정도로 슬프게 묘사되어 있다.
오죽하면 슈베르트가 '겨울 나그네'를 친구들에게 직접 들려줬을 때 모두 그 쓸쓸함에 놀랐다고 전해질까. 뮐러의 쓸쓸함에 슈베르트의 쓸쓸함이 더해졌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이 간다.
1794년 독일에서 태어난 뮐러는 전통적인 독일 민요에 특유의 낭만성을 녹여낸 시인이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뮐러는 독일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가장 독일적인 시인이었다. 동시대 시인이었던 하이네는 뮐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당신의 민요에서 내가 바라던 순수한 음향과 진정한 소박성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민요는 그지없이 순수하고 맑습니다. 나는 괴테와 당신 말고는 그 어느 민요시인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뮐러와 슈베르트는 비슷한 시기에 생을 마감했다. 가곡집 '겨울 나그네'가 나온 1827년 가을 뮐러가 세상을 떠났고, 슈베르트는 다음해 31세로 먼 길을 떠났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다른 연작시에도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겨울 나그네'보다 먼저 나온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다. 독일 3대 가곡집 중 '백조의 노래'를 제외한 2편의 원작자가 뮐러인 셈이다.
우리가 뮐러의 시를 찾아 읽고,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고, 최인호 소설과 곽지균의 영화로 '겨울 나그네'를 만났던 그 겨울날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