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자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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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일부 일련번호가 앞의 것과 중복되지만 원문과 대조해 보니 빠진 곳은 없다.

그냥 제시된 순서대로 읽어 나가면 원문의 기술순서와 일치한다.



312.上大夫壺遂曰(대부호수왈):
대부 호수(壺遂)가 물었다.

■호수(壺遂)/전한 무제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313.“昔孔子何爲而作<春秋>哉(석공자하위이작)?”
“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314.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대답했다.

315.“余聞董生曰(여문동생왈):
“나는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듣기를

■동중서(董仲舒)/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한나라가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후로 유학은 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 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316.‘ 周道衰廢(주도쇠폐),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매

317.孔子爲魯司寇(공자위노사구),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으나

■사구(司寇)/춘추전국 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을 말한다.

318.諸侯害之(제후해지),
제후들은 해치려 하고

319.大夫雍之(대부옹지).
대부들은 공자님의 뜻을 펼치시려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320.孔子知言之不用(공자지언지불용),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321.道之不行也(도지불행야),
추구하려는 도도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322.是非242年之中(시비242년지중),
242년에 걸친 역사의 시비를 따짐으로서

■242년/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는 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14년 기원전 481년까지의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春夏秋冬)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한 것이고 이어서 동주가 시작된 기원전 771년부터 지금의 산서성에 있던 북방의 강국 당진(唐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어 전국시대가 열린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춘추시대라 명명한 것이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323.以爲天下儀表(이위천하의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셨다.

324.貶天子(폄천자),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325.退諸侯(퇴제후),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326.討大夫(토대부),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328.以達王事而已矣.’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329.子曰 : “我欲載之空言(자왈, 아욕재지공언),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330.不如見之于行事之深切著明也(불여견지우행사지심절저명야)”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함으로서, 그 결과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

331.夫<春秋>(부 <춘추>)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332.上明三王之道(상명삼왕지도),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삼왕(三王)/ 하(夏) 나라를 세운 우(禹)임금,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을 말한다.

333.下辯人事之紀(하변인사지기),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논하여

334.別嫌疑,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335.明是非,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336.定猶豫,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을 확실히 하게 했고

337.
善善惡惡,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338.賢賢賤不肖,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불초한 자는 천하다고 했다.

339.存亡國,
망한 나라의 이름은 보존하게 하여

340.繼絶世,
그 끊어진 대를 계속 잇게 만들었으며

341.補弊起廢
낡아서 해진 것을 보충하고 폐하여 없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342.王道之大者也.
가장 큰 왕도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43.<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
역경(易經)을 저술한 것은 천지(天地), 음양(陰陽), 사시(四時), 오행(五行)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344.故長于變:
변화를 아는데 그 뛰어난 장점이 있고

345.<禮>經紀人倫,故長于行;
예경(禮經)은 인륜의 기강에 대해 서술하여, 인간의 행위를 밝히는데 뛰어나며

346.<書>記先王之事,
서경(書經)은 선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

347.故長于政;
정치 방면에 대한 기술이 뛰어난 것이다.

348.<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
또한 시경(詩經)은 산천(山川)과 계곡(溪谷), 들짐승과 날짐승, 초목, 빈모(牝牡)와 자웅(雌雄)에 관하여 기록을 한 것이기 때문에

349.故長于風;
풍토와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관한 기술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350.<樂>樂所以立,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351.故長于和;
화목하게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다.



태사공자서(11)

352.<春秋>辯是非,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353.故長于治人.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며

354.是故<禮>節人,
그런 이유로 예경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고

355.<樂>以發和,
악경은 그 소리로서 화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356.<書>以道事,
서경은 그 글로서 정사를 말하고

357.<詩>以達意,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편찬한 뜻이 있으며

358.<易>以道化,
주역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359.<春秋>以道義.
춘추는 세상의 도의를 논한 것이다.

360.撥亂世反之正,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돌려놓아 올바르게 만드는 데는

361.莫近于<春秋>.
춘추만한 책이 없다.

362.<春秋>文成數萬,
춘추는 수만 자의 글로 쓰여 진 것에 불과하나

■춘추는 실제로 16,500자에 불과하다.

363.其指數千.
그 뜻하는 바는 수천가지이다.

364.萬物之散聚皆在<春秋>.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으며

365.<春秋>之中,
춘추의 기록에는

366.弑君三十六
살해당한 군주는 36명이며

377.亡國五十二
망한 나라는 52개국에

368.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난 제후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369.察其所以,
그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370.皆失其本已.
모두가 그 본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371.故<易>曰‘失之豪厘,
그런 까닭에 역경에서 말하기를 ‘ 잃은 것은 터럭이나

372.差以千里’.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373.故曰‘臣弑君,
또한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374.子弑父,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인 것은

375. 非一旦一夕之故也,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76.其漸久矣.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였다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77.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
그런 까닭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위정자들은 춘추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78.前有讒而弗見,
춘추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서 아첨하는 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379.後有賊而不知.
뒤에 숨어서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아지 못한다.

380.爲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
남의 신하가 되려고 하는 자도 춘추를 모르면 안 될 것이며

381.守經事而不知其宜,
춘추를 알지 못한 관계로 평상시의 일만을 알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382.遭變事而不知其權.
변고를 만났을 때는 그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할 줄 모른다.

383.爲人君父而不通于<春秋>之義者,
사람이 군주나 그 아비가 되었음에도 춘추가 말하는 대의에 통하지 못한다면

384.必蒙首惡之名.
그 사람은 필시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385.爲人臣子而不通于<春秋>之義者,
남의 신하나 자식이 된 자가 춘추를 읽어 대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386.必陷纂弑之誅,
필시 찬역이나 시해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387.死罪之名.
죽을죄를 지었다는 악명을 얻게 될 것이다.

388.其實皆以爲善,
사실은 그들은 옳다고 여겨 행한 것이지만

389.爲之不知其義,
춘추의 대의를 아지 못하고 행한 것이기 때문에

390.被之空言而不敢辭.
사가들로부터 사실이 아닌 말로 시역죄를 저질렀다고 단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391.夫不通禮義之旨,
무릇 예와 의의 요지를 모른다면

392.至于君不君,
결국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게 되고

393.臣不臣,
신하는 신하답지 못할 것이며

394.父不父,
아비 되는 자는 아비답지 못하고

395.子不子.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되어

396.夫君不君則犯,
대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들로부터 범함을 입게 되고

397.臣不臣則誅,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그 군주로부터 주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398.父不父則無道,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399.子不子則不孝.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다.

400.此四行者,
이 네 가지를 행위야말로

401.天下之大過也.
천하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다.

402.以天下之大過予之,

이 천하의 가장 큰 죄과를

403.則受而弗敢辭.
뒤집어쓰면서도 감히 아무런 대꾸도 못할 것이다.

404.故<春秋>者,
그런 까닭에 춘추는

405.禮義之大宗.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6.夫禮禁未然之前,
무릇 예란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407.法施已然之後;
법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408.法之所爲用者易見,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

409.而禮之所爲禁者難知.”
예란 것이 소용되는 바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2번 본선(封禪)

 

태사공자서3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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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而太史公留滯周南(이태사공유체주남),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周南)에 머물러

♣주남(周南)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241.不得與從事(부득여종사),
봉선을 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간 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242.故發憤且卒(고발분차졸).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243.而子遷適使反,(이자천적사반)
이때 마침 그의 아들 사마천이 천자의 사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244.見父于河洛之間.(견부우하락지간)
하수와 락수 지간에 그의 부친을 뵙자

245.太史公執遷手而泣曰:(태사공집천수이읍왈)
태사공은 사마천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246.“ 余先周室之太史也.(여선주실지태사야)
우리들의 선조들은 주나라의 태사였다.

247.自上世嘗顯功名于虞夏, (자상세상현공명우우하)
우리 종족들은 까마득한 옛날인 하나라 때부터 공명을 세상에 들어낸 이래

248.典天官事. (전천관사)
하늘에 관한 일을 주관해왔다.

249.後世中衰, (후세중쇠)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쇠락해지기 시작하더니

250.絶于予乎?(절우예호)
나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려 하고 있지 않느냐?

251.汝復爲太史,(여복위태사)
너는 다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

252.則續吾祖矣. (즉송오조의)
우리들 조상들이 해 왔던 일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253.今天子接千歲之統, (금천자접천세지통)
지금 천자께서는 천년 대통을 이어 받아

254.封泰山, (봉태산)
태산에 봉선을 행하시려고 가셨는데

255.而余不得從行, (이여부득종행)
나는 부득이 따라가 수행할 수 없었다.

256.是命也夫, (시명야부)
이것은 천명이로다!

257.命也夫! (명야부)
진실로 천명이로다!

258.余死, (여사)
내가 죽으면

259.汝必爲太史;(여필위태사)
너는 반드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60.爲太史, (위태사)
너는 태사가 되어

261.無忘吾所欲論著矣 (무망오소욕론저의),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결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262.且夫孝始于事親, (차부효시우사친)
무릇 효도라는 것은 그 부친의 뜻을 받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263.中于事君, (중우사군)
출사하여 그 군주를 섬기다가

264.終于立身. (종우입신)
입신하는데서 끝나며

265.揚名于後世, (양명우후세)
후세에 이름을 남겨

266.以顯父母, (이현부모)
그 부모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267.此孝之大者. (차효지대자)
효도의 가장 큰 도리라 할 것이다.

태사공자서(8)

268.夫天下稱誦周公,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을 칭송하고 있는 것은

♣주공(周公)/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269.言其能論歌文武之德,
그가 능히 문왕과 무왕의 덕을 시가(詩歌)로서 논했으며

■문왕(文王)/원래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270.宣周邵之風,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노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시경 국풍(國風)에 실려 있는 장의 이름이며 주공(周公) 단(丹)과 소공(召公) 석(奭)이 함께 문왕의 명을 받들어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 원정을 나갔다가 그곳의 시가를 수집해 왔는데 주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주남, 소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소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271.達太王王季之思慮,
결국은 태왕(太王)과 왕계(王系)의 사려 깊은 지혜에 통하게 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태왕은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원래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의 빈( ) 땅에 살았으나 이민족인 훈육(燻 )의 침입을 받자 고공단보는 주족을 이끌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 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공단보는 아들을 셋을 두었다. 장자가 태백, 둘째는 우중이고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주족들을 번성하게 할 사람은 왕계의 아들인 창(昌)(후에 주문왕)이 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족장 자리를 계력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남쪽으로 달아나 오랑캐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272.爰及公劉,
마침내는 공유의 공적에 미치고

■공유(公劉)/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다음은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공유 부분이다.

<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 )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農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273.以尊后稷也.
후직까지 높인 까닭이다.

■후직(后稷)/ 주족의 시조로 요임금과 순임금 때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기(棄)를 말한다. 후직은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벼슬 이름이다. 다음은 사기 주본기의 후직에 관련된 부분이다.

<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이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부른 것이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 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 기(棄)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 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274.幽?之后,
유왕과 여왕 이후

■유왕/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 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여왕( 王)/ 서주의 11대 왕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지금의 산서성 곽현인 체( ) 땅으로 달아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서주는 달아난 려왕을 대신해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대신 나라를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선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이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275.王道缺,
왕도가 무너지고

276.禮樂衰,
예악이 쇠하게 되자

277.孔子脩舊起廢,
공자께서 옛것을 고치고 버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278.論<詩>, <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논하셨고

279.作<春秋>
춘추(春秋)를 논하자

280.則學者至今則之.
후세의 학자들이 그것을 규범으로 삼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281.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
획린한 이래 400여 년 동안

♣획린(獲麟)/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기원전 722년에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 장(將) 39년 기원전481년에 끝나는 240년 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노애공 치세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자 공자는 그것은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獲麟)이라고 한다. 공자는 2년 후인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282.而諸侯相兼,
제후들은 서로 다투어 나라를 넓히는 일에만 몰두하여

283.史記放絶,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284.今漢興,
지금 한나라가 흥기하여

285.海內一統,
온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286.明主賢君忠信死義之士,
밝고 어진 임금과 충신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가득하니

287.余爲太史而弗論載,
내가 태사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논평하여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288.廢天下之史文,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폐하고 말았구나!

289.余甚懼焉,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290.余其念哉!”
너는 나의 이 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91.遷俯首流涕曰:
사마천이 머리를 수그리며 눈물을 흘리며 그의 부친에게 말했다.

292.“ 小子不敏,
소자가 불민하나

293.請悉論先人所次舊聞,
선조들이 정리하여 놓은 옛날의 기록들을 논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294.弗敢闕.”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309.卒三歲而遷爲太史公(졸삼세이천위태사공),
사마천은 그 부친이 세상을 뜬지 삼 년 후에 태사공이 되어,

310.紬史記石室金櫃之書(유사기석실금궤지서).
역사 기록과 석실의 금궤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들을 편철(編綴)하였다.

311.五年而當太初元年,
그리고 5년 뒤인 태초(太初) 원년,

■태초(太初) 원년/ 한무제 37년인 기원전 104년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역법은 그 시작을 매년 10월로 했으나 1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고쳐 태초력이라 하고 연호를 원봉(元封)에서 태초(太初)로 개원했다. 태초력은 그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陰曆)을 말한다. 한무제(漢武帝)는 그의 재위 54년 동안 연호를 모두 11번 바꿨다. 태초(太初)는 한무제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1까지 사용했던 한무제의 7번 째 연호이다.

312.十一月甲子朔旦冬至,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313.天曆始改,
역법을 개정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314.建于明堂,
명당을 세워

■명당(明堂)/중국 고대에 있어서 천자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조회, 제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명당을 노래한 명당부(明堂賦)이다.

‘ 빛나는 명당은 양지 녘에 자리 잡고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본다. 하늘 아래 한 명뿐인 천자가 정령을 발하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배알하며 조공을 바친다. 명당의 내부는 종횡(縱橫)으로 각각 세 개씩의 방을 만드니 모두 아홉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 가운데의 큰방에 태묘(太廟)를 모시고 태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태실(太室)을 두었다. 또한 각 태실의 한 가운데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溜)를 두었다. 열고 닫는 단짝 문으로 36개의 문을 내고 72개의 창문을 열을 지어 달았다.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그 직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명당의 윗 모습은 둥글고 아래 모양은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기수(奇數)와 우수(隅數)로 이루어진 법칙에 따른 것이다. 관리들이 서는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은 것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라 마땅히 명당의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여러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며, 작위가 후작(侯爵)인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伯爵)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천자에게 절을 올린다. 자작(子爵)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늘어서고, 남작(男爵)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도열한다. 융족은 금(金)이니 서문 밖에, 이(夷)족은 목(木)이니 동문 밖에, 북문 밖에는 화(火)의 종족인 적(狄)족이, 남문 밖에는 수(水)의 종족인 만(蠻)족이 선다. 천하 구주(九州)의 지방 관원들은 명당 담장 밖에서 오른 쪽으로 열을 서서 도열하고,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은 담장 밖에 도열하여 지방 관원들의 맞은편인 왼쪽에 서서 도열한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의장용 도끼들은 마치 수많은 나무들이 우뚝 솟아나서 앞 다투어 천자에게 배알하듯이 하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며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모습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룬 듯 하다. 연기가 걷히고 여러 백관들이 일제히 도열하면 하늘에서 태양이 나타나면, 천자께서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면류관을 쓰시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으신다. 비단에 도끼의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뒤에 둘러치시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천하 제후들과 구름 같은 관리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것을 굽어보시면서 온 천하가 복종하고 있음을 아신다.

315.諸神受紀.
여러 신들에게 기년이 바뀌어 천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고했다.

■제신수기(諸神受紀)/남북조 때 남송(南宋)의 배인(裵 馬+因)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의 “ 告于百神, 與天下更始, 著紀于是”를 따랐다.

316.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했다.

317.“ 先人有言:
돌아가신 부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318.‘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 주공이 죽고 5백 년이 지나 공자(孔子)가 태어나셨고

■주공(周公)의 정확한 사망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보며 고 공자의 탄생은 기원전 551년이다.

319.孔子卒后至于今五百歲,
다시 공자가 돌아가신 이래 지금 500년이 되었으니,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 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 113년의 일이니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이 아니라 사실은 363년 만의 일이다.

 

320.而能紹明歲,
누가 나타나 능히 그 뜻을 이어받아 밝은 시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321.正<易經>,
주역(周易)과 그 해설서들을 바르게 하고

322.繼<春秋>,
춘추를 계승하여 끊어진 역사기록을 잇게 할 것이며

323.本<詩>, <書>, <禮>, <樂>, 之際.’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의 근본을 밝힐 시기로다." 라고 말씀하셨다.


324.意在斯乎! 意在斯乎!
아버님의 뜻이 여기에 있도다!
여기에 있도다!

325.小子何敢讓言.”
소자가 어찌 감히 그 일을 사양하겠습니까?

 





태사공자서 2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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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太史公旣掌天官(태사공기장천관),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219.不治民(불치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20.有子曰遷(유자왈천).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221.遷生龍門(천생용문),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서

♣용문(龍門)/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으로 태원 북쪽에서 발원하여 산서성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분수(汾水)가 하수(河水)와 만나는 곳이다. 그 북쪽에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222.耕牧河山之陽(경목하산지양).
그는 하수의 근처의 태항산(太行山) 남쪽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살다가

223.年十歲則通古文(연십세즉통고문).
나이가 10 살이 되자 고문(古文)을 익혀 통달하게 되었으며

♣고문(古文)/진시황이 중국의 문자를 금문(今文)으로 통일하기 전에 사용했던 선진시대의 문자.

224.二十而南游江, 淮,(이십이남유강회)
나이가 20세에 이르자 남쪽의 강회(江淮) 사이를 유람하고,

♣강, 회(江淮)/강수(江水) 즉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를 말한다.

225.上會稽(상회계),
월(越) 땅의 회계산에 올라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하(夏)왕조를 세운 우(禹) 임금이 그곳에 올라 천하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회계라 지은 것이다. 회계(會稽)는 곧 회계(會計)이다. 춘추 말기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부차(夫差)에게 쫓겨 회계산으로 달아나 농성하다가 결국은 항복하였으나 후에 권토중래하여 부차를 멸망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226.探禹穴(탐우혈),
우(禹)임금이 묻혔다는 굴을 찾아 보고

♣ 우혈(禹穴)/ 우임금이 회계에 순수(巡狩)차 회계산에 들렸다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우임금은 죽은 것이 아니라 회계산 산중에 있는 굴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우혈이란 그것을 말한다.

227.窺九疑(규구의),
다시 구의산에 올라 순임금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며

♣구의산(九疑山)/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순임금이 순수를 나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 영원현은 광동성과 인접해 있는 호남성 남쪽에 있는 산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이다.


228.浮于沅, 湘( 부우완,상);
그곳을 흐르던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두 강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원수(沅水)/귀주성과 호남성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동서로 가로질러 동정호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상수(湘水)/광서성, 광동성, 호남성과의 접경지대의 구억산(九 山)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상담시(湘潭市)와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를 지나 동정호(洞庭湖)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장사시에서 50여 키로 남쪽에 있는 상담시(湘潭市)는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또한 순임금이 구억산으로 순수 나왔다가 그곳에서 죽자 요임금이 딸이었던 순임금의 두 부인이 상심한 나머지 상수에 빠져 죽은 전설이 있다. 상군(湘君)은 상수에 빠져 죽은 순임금의 두 부인을 말한다.

229.北涉汶, 泗,( 북섭문,사)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문수(汶水)/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 이름. 시경의 제풍(齊風)과 노풍(魯風)에 나오는 시가의 무대로 많이 나온다.
♣사수(泗水)/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노나라의 도성이었던 곡부를 거쳐 회수와 합쳐지는 회수의 지류.

230.講業齊, 魯之都(강업제, 노지도),
제(齊)와 노(魯) 두 나라의 도성에서 학문을 논했으며

231.觀孔子之遺風(관공자지유풍),
공자가 남긴 유풍을 살펴보고,

232.鄕射鄒,嶧);(향사추,역);
추(鄒)와 역(嶧) 땅의 향사(鄕射)를 참관했다.

♣추(鄒)/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에 있었던 고을 이름으로 맹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역()/추현 동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이 산에 올라 자기의 공적비를 세웠다.

233.厄困鄱, 薛, 彭城, (액곤파, 설, 팽성)
파(鄱)와, 설(薛), 팽성(彭城)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파()/지금의 산동성 등현( 縣)을 말하고
♣설(薛)은 등현 경내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 때 중소제후국이었다가 제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맹상군(孟嘗君)의 아버지인 전영(田 )이 이곳에 봉해져 설공(薛公)이라 했고 다시 맹상군이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를 말한다. 진시황이 죽고 한초(漢楚)가 천하를 놓고 다툴 때 초의 항우(項羽)가 도성으로 삼은 곳이다.

234.過梁, 楚以歸(과량, 초이귀).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도성으로 들어갔다.

♣양(梁)/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처음 수도는 지금의 산서성 남쪽의 하현(夏縣)에 있었던 안읍(安邑)이었으나 후에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그 도읍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로 옮기고 그 이름을 대량(大梁)이라 불렀다. 이어서 위나라는 나라이름을 양(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맹자의 양혜왕(梁惠王)이란 위혜왕을 가리킨다.

♣초(楚)/춘추전국시대 때 호북과 호남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름. 처음에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를 도읍으로 했으나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쫓겨 갔다. 다시 안휘성 거양(巨陽)을 거쳐 다시 지금의 수현(壽縣)인 수춘성(壽春城)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그림 7-1> 기원전 110년 경 사마천의 중국 주유도


235.于是遷仕爲郎中(우시천사위낭중),
그리고 천(遷)은 조정에 나가 낭중이 되어

♣낭중(郎中)/진한시대 때 황제의 시위(侍衛)를 담당했던 관직명. 진나라 때 시위의 직분을 셋으로 나누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外朗)이라 했다.

236.奉使西征巴,蜀以南(봉사서정파,촉이남),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 이남 지방을 정벌한 다음,

♣ 파촉(巴蜀)/(巴)파는 지금의 중경시(重慶市)를 말하고 촉은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237.南略邛,窄,昆明 (남략공,착,곤명),
다시 남쪽으로는 공(工+部우변), 착, 곤명을 공략하고,

♣공()/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漢武帝) 때 이곳에 월수군(越 郡)을 두었다.
♣착()/사천성 한원(漢源)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 때인 기원전 110년에 이곳에 심려군(沈黎郡)을 설치했다.
♣곤명(昆明)/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주(大理州) 일대에 살았던 이민족 이름이다. 운남성의 주도(州都)인 곤명(昆明)은 이 민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38.還報命.
돌아와 복명하였다.

239.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시세천자시건한가지봉),
이해에 천자는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봉선(封禪)/태산(泰山)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봉(封), 낮은 구릉인 양보산(梁父山)에 단을 만들어 땅에 지내는 의식을 선(禪)이라 하여 합하여 봉선(封禪)이라 한다. 봉선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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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너무 장황하여 사마담-사마천의 기사를 중심으로 발췌하여 싣는다. 자서 원문에는 사기 130편에 대한 기술 취지를 모두 요약해 두었으나 분량이 너무 많아 상고시대의 ‘五帝本紀 第一’의 내용 이하는 끊었다. 본 블로그에서는 <태사공 자서> 발췌본을 5회에 나누어 수록한다.

내가 특히 감동받은 부분은 사마담이 태산 봉선제에 부름을 받지 못하자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자탄한다. 아버지는 이 말을 두 번 반복했다.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사마천도 이릉의 화를 입어 궁형을 당하자 “이것은 나의 죄로다.”라고 실패는 자기 탓임을 자인했다. 남을 원망한다고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은 수정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남의 인생에 도저히 간여할 수 없다. 사실과 진정성이란 것도 보는 이의 이해관계나 시각에 따라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수성의 업 부분인데 아버지 담이 아들 손을 잡고 사기 기술을 부탁하자 아들은 눈물을 떨구며 굳게 다짐했고, 그는 끝내 이 거대한 역사서를 완성했다. 그 작업을 가능케 한 것이 곧 발분(發憤)의 글쓰기 정신이며, 후세인들에게 글쓰기의 전범이 되었다.

인생에 대한 도가의 해석도 간단명료하여 따질 것이 없다. 나는 아래 구절을 특히 좋아한다.

 

205.凡人所生者神也(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정신[의식]이며

206.所托者形也(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신이다.


207.神大用則竭(신대용즉갈),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쇠갈(衰竭) 하고

208.形大勞則幣(형대노즉폐),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피로해진다.

209.形神離則死(형신리즉사).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210.死者不可復生(사자불가복생),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211.離者不可復反(이자불가복반),
육체를 떠난 정신은 다시 돌아와 결합할 수 없다.

212.故聖人重之(고성인중지).
고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다.

213.由是觀之(유시관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214.神者生之本也(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천재는 요절하는 것인가?

원문 번호는 구절 순서 표시임. 빠진 번호는 발췌에서 누락된 구절로 보면 된다.


12.司馬氏世典周史(사마씨세전주사)
후에 사마씨는 주나라의 사관이 되어 대대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중략]

52.喜生談,
사마희는 담을 낳고

53.談爲太史公.
사마담은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54.太史公學天官于唐都(태사공학천관우당도)
태사공은 당도(唐都)로부터 천문학을 배우고

55.受<易>于楊何(수<역>우양하)
양하로부터 <주역>을 전수받았으며

56.習道論于黃子(습도론우황자)
황자(黃子)에게서 도학을 익혔다


57.太史公仕于建元元封之間(태사공사우건원원봉지간)
태사공은 건원(建元)과 원봉(元封) 년간에 벼슬을 하면서

▶건원(建元)/ 기원전 140-136년의 한무제 때의 연호.
▶원봉(元封)/ 기원전 110-108년 “

58.愍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민학자지부달기의이사패)
학자들이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여 스승들의 본 뜻에 위배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59.乃論六家之要指曰(내론육가지요지왈 ;
육가들이 세운 학설의 중요한 요지를 논했다.


60.<易.大典>(<역대전>):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따르면


61.“天下一致而百慮(천하일치이백려),
천하 사람들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이치는 하나인데 그 생각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며

62.同歸而殊?.(동귀이수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가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63.夫陰陽, 儒, 墨, 名, 法, 道德(부음양, 유, 묵, 명, 법, 도덕),
무릇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들은

64.此務爲治者也(차무위치자야),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65.直所從言之異路(직소송언지이로),
다만 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은 서로 다르니

66.有聲不聲耳
어떤 것은 살피고 또 어떤 것은 살피지 않는 것이 있다.


129.夫儒者以<六藝>爲法(부유자이<육예>위법).
대저 유가들은 육예(六藝)로서 그 법도로 삼는다.

♣ 육예(六藝)/육경(六經)을 말한다. 즉 예(禮), 악(樂), 서(書), 시(詩), 역(易),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중 예경은 일실되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기도 한다.

120. <六藝>經傳以千萬數(<육예>경전이천만수),
<육예>에 관한 경(經)과 전(傳)의 종류는 천만 가지가 넘어

♣경(經)/육경(六經)을 말한다.
♣전(傳)/경의 해설서를 말한다. 즉 시경의 경우 모전(毛傳), 춘추의 경우, 춘추좌전, 춘추공양전 등과 같은 해설서를 가르킨다.

121.累世不能通其學(누세불능통기학),
누대에 걸쳐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122.當年不能究其禮(당년불능구기례),
평생을 바쳐 예경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 할지라도 다 구명할 수 없다.

123.故曰“ 博而寡要, 勞而少功.(고왈, 박이과요, 노이소공)”
그런 이유로 해서" 유학이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적고 노력은 많이 들지만 그 이루는 바는 적다" 한 것이다.

124.若夫列君臣父子之禮(약부열군신부자지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를 바르게 세우고

125.序夫婦長幼之別(서부부장유지별),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고 , 어른과 아이의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은

126.雖百家弗能易也(수백가불능영야).
비록 백가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171.道家無爲(도가무위),
도가의 설은 무위이면서

♣무위(無爲)/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72.又曰無不爲(우왈무불위),
또한 무불위라고도 말하고

♣ 무불위(無不爲)/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이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정정함을 지켜 나간다면, 만물은 장차 자화하여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173.其實易行(기실이행),
그 실제는 행하기는 쉬우나

174.其辭難知(기사난지).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175.其術以虛無爲本(기술이허무위본),
도가의 이론을 시행하는 방법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176.以因徇爲用.
인순(因循)을 수단으로 삼는다.

♣인순(因循)/ 자연에 순응한다는 뜻

177.無成勢(무성세),
고정된 세도 없고

178.無常形(무상형),
일정한 형상도 없다.

179.故能究萬物之情(고능구만물지정).
고로 만물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

180.不爲物先(불위물선),
사물에 앞서지도 않고

181.不爲物后(불위물후),
사물에 뒤지지도 않는다.

182.故能爲萬物主(고능위만물주).
고로 능히 만물을 주제 할 수 있다.

183.有法無法(유법무법),
법칙이 있으나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184.因時爲業(인시위업);
시대에 응하여 사업을 이루기도 한다.

185.有度無度(유도무도),
사물을 재는 척도가 있으나 일정한 것이 없어

186.因物與合(인물여합).
사물에 따라 더불어 합친다.

187.故曰 “ 聖人不朽(고왈, 성인불후),
그런 연유로 “ 성인의 사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188.時變是守(시변시수).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켜진다.

189.虛者道之常也(허자도지상야),
허무는 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고

190.因者君之綱”也(인자군지강야).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임금이 지켜야 할 강령이다."라고도 말해진다.

191.君臣幷至(군신병지),
임금이 신하와 같이 이르게 되면

192.使各自明也(사각자명야).
임금은 신하들 각자가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193.其實中其聲者謂之端(기실중기성자위지단),
이때 신하들의 실제가 그 명성에 부합하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194.實不中其聲者謂之 (실부중기성자위지관).
그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관( )이라 한다.

195. 言不聽(관언불청),
신하들의 헛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196.奸乃不生(간내불생),
간사스러운 신하가 생기지 않으며

197.賢不肖自分(현불초자분),
어진 자와 불초한 자는 스스로 분별되어

198.白黑乃形(백흑내형).
흑백과 같이 형체를 확연히 드러낼 것이다.

199.在所欲用耳(재소욕용이),
단언(端言)과 관언( 言)을 적재적소에 따라 쓰기만 한다면

200.何事不成(하사불성).
무슨 일인들 이루어 내지 못하겠으며

201.乃合大道(내합대도),
이것은 곧 대도에 부합되는 일이 될 것이며

202.混混冥冥(혼돈명명).
어지러우며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203.光耀天下(광요천하),
천하를 빛낼 수 있어

204.復反無名(반복무명).
반복해서 무명(無名)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명(無名)/ 노자의 도가 사상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도란 것도 무명인 것이다. 인위적인 예악, 인의 등을 반대하는 노자의 무명론은 유가의 정명론(正名論)과 대립된다.


205.凡人所生者神也(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음을 말하며

206.所托者形也(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신이다.


207.神大用則竭(신대용즉갈),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쇠갈(衰竭) 하고

208.形大勞則幣(형대노즉폐),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피로해 진다.

209.形神離則死(형신리즉사).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210.死者不可復生(사자불가복생),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211.離者不可復反(이자불가복반),
육체를 떠난 정신은 다시 돌아와 결합할 수 없다.

212.故聖人重之(고성인중지).
고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 것이다.

213.由是觀之(유시관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214.神者生之本也(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도구이다.


216.不先定其神形(불선정기신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를 먼저 안정시키지 않고서

217.而曰 “ 我有以治天下”何由哉?”(이왈, 아유이치천하, 하유재)
오히려 “ 내게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말미암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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