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자서 04

태사공자서 5-4

767. 武王克紂(무왕극주),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였으나

768. 天下未協而崩(천하미협이붕).

천하의 인심을 미처 얻기도 전에 죽었다.

769. 成王旣幼(성왕기유),

무왕의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770. 管蔡疑之(관채의지),

관숙과 채숙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던 주공을 의심하였고

771. 淮夷叛之(회이반지),

다시 회수(淮水) 강안에 살던 이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772. 于是召公率德(우시소공솔덕),

그래서 소공은 덕으로써 그들을 이끔으로써

773. 安集王室以寧東土(안집왕실이영동토).

천하의 인심을 왕실에 쏠리게 하여 안정시키고 동쪽의 땅을 평안하게 하였다.

774. 燕(易)( )之禪(연이쾌지선),

소공의 후손인 연왕 쾌는 선양의 도를 흉내내다가

775. 乃成禍亂(내성화란).

이윽고는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776. 嘉<甘棠>之詩(가<감당>지시)

<감당(甘棠)>의 시에서 노래한 소공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777. 作<燕世家>第四(작<연세시가>제사)

<연세가>제사를 지었다.

778. 管蔡相武庚(관채상무경),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무경(武庚)의 상(相)이 되어

779. 將寧舊商(장영구상);

장차 옛 상나라의 땅의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780. 及旦攝政(급단섭정),

그러나 주공단이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앉자

781. 二叔不饗(이숙불향);

두 사람은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782. 殺鮮放度(살선방탁),

이에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한 다음

783. 周公爲盟(주공위맹);

어린 성왕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다할 것임을 맹세했다.

784. 大任十子(태임십자),

대임은 슬하에 아들을 열이나 두어

▶대임(大任)/ 태임(太任) 혹은 태사(太 )라고도 한다. 주문왕의 정비이며 주무왕의 모친이다. 10명의 아들은 그 순서에 따라 백읍(伯邑) 고(考), 무왕(武王) 발(發), 관숙(管叔) 선(鮮), 주공(周公) 단(旦), 채숙(蔡叔) 도(度), 조숙(曹叔) 진탁(振鐸), 성숙(成叔) 무(武), 곽숙( 叔) 처(處), 강숙(康叔) 봉(封), 심계(沈季) 재(載) 등이다.

785. 周以宗强(주이종강).

주나라는 종실로써 강성하게 되었다.

786. 嘉仲悔過(가중회과).

이어서 채훅의 아들 채중이 그 부친의 잘못을 뉘우쳐 선행을 했음으로

787. 作<管蔡世家>第五(작<관채세가>제오)

<관채세가>제오를 지었다.

788. 王后不絶(왕후부절),

옛날 성왕(聖王)들의 후손들이 끊어지게 하지 않았으니

789. 禹舜是說(우순시설);

이는 우임금과 순임금이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790. 維德休命(유덕휴명),

그들이 베푼 덕은 아름답고 청명하여

791. 苗裔蒙烈(묘예몽열).

그 후세들이 은혜를 입었고

792. 百世亨祀(백세형사),

백세가 되도록 제사밥을 얻어먹다가

793. 爰周陳杞(원주진기),

주나라에 시대에 이르러 분봉되어 진나라와 기나라라는 제후국이 되었으나

794. 楚實滅之(초실멸지).

후에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795. 齊田旣起(제전기기),

그러나 진씨들은 다시 제나라로 들어가 전씨로 성을 바꾸어 제나라를 차지하였으니

796. 舜何人哉(순하인재)?

도대체 순임금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그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그렇게 번창했단 말인가?

797. 作<陳杞世家>第六(작<진기세가>제육)

이에 <진기세가>제육을 지었다.

798. 收殷余民(수은여민),

주무왕은 은나라의 유민들을 수습하여

799. 叔封始邑(숙봉시읍),

강숙(康叔) 봉(封)을 봉하고

800. 申以商亂(신이상란),

상나라 말에 어지럽게 된 것을 일러주며

801. <酒><材>是告(<주><제>시고),

<주고(酒誥)>와 <재재(梓材)>를 글로 써서 경계로 삼게 했다.

▶주고(酒誥)와 재재(梓材)/ 주공이 그 아우인 강숙(康叔) 봉(封) 상나라의 구토에 봉하면서 상나라가 말기에 나라가 부패하여 망하게 된 것을 말하고 그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훈계한 내용을 담은 글로써 상기 두 편 외에 <강고(康誥)> 한 편이 더 있다. 모두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실려 있다.

802. 及朔之生(급삭지생),

이어서 위나라가 혜공(惠公) 삭(朔)의 대에 이르게 되자

▶혜공(惠公) 삭(朔) / 재위 기원전 699년-697, 686-669년. 위선공(衛宣公)의 아들로서 이복형인 세자인 급자와 동복형인 공자수(公子壽)를 살해하고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 일로 해서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14년 만에 제양공의 도움으로 다시 위후의 자리를 찾았다.

803. 衛頃不寧(위경불녕);

국세가 기우러져 평안한 때가 없게 되었다.

804. 南子惡  (남자오괴외),

이어서 위영공(衛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그의 아들 괴외를 싫어하여

805. 子父易名(자부이명).

아들과 부친의 명분을 전도시켰다.

806. 周德卑微(주덕비미),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지고

807. 戰國旣强(전국기강),

전국의 일곱 나라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808. 衛以小弱(위이소약),

위나라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국세가 미약하게 되었으나

809. 角獨后亡(각독후망).

육국이 진나라에 병합된 뒤에도 계속 살아 남아 각왕(角王) 때 최후로 망했다.

810. 嘉彼<康誥>(가피<강고>),

저 <강고(康誥)>의 덕을 칭송하여

811. 作<衛世家>第七(작<위세가>제칠)

<위세가>제칠을 지었다.

812.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3.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4. 正言不用(정언불용),

올바른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815. 乃反爲奴(내반위노).

오히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구나!

816. 武庚旣死(무경기사),

주나라는 무경이 반하자 죽이고

817. 周封微子(주봉미자).

미자계(微子啓)를 다시 봉했다.

818. 襄公傷于泓(양공상우홍),

이어서 그 후예인 양공(襄公)은 초나라와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의(義) 지키려다가 패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819. 君子孰稱(군자수칭).

군자라면 그 누구가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820. 景公謙德(경공겸덕),

후에 송경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나

821. 熒惑退行(형혹퇴행).

형혹성이 위치를 바꾸어 송나라로부터 벗어났다.

822. 剔成暴虐(척성포학),

이어서 척성이 포학무도 했음으로

823. 宋乃滅亡(송내멸망).

송나라는 이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824. 嘉微子問太師(가미자문태사),

미자계(微子啓)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825. 作<宋世家>第八(작<송세가>제팔).

<송세가>제팔을 지었다.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했다.

828. 君子譏名(군자기명),

그러나 문후 때에 이르자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829. 卒滅武公(졸멸무공).

결국은 분봉된 동생의 나라 출신인 무공이 본국을 멸하고 말았다.

830. 驪姬之愛(려희지애),

후에 진헌공은 여희(驪姬)에 빠져

831. 亂者五世(란자오세);

다섯 군주의 치세 동안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832. 重耳不得意(중이부득의),

중이는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833. 乃能成覇(내능성패).

유랑생활 19년 동안 결국은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

834. 六卿專權(육경전권),

진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육경이 권력을 독점하여

835. 晉國以 (진국이모).

진나라는 끝내는 그 힘을 다하게 되었다.

836. 嘉文公錫珪 (가문공석규울),

진문공이 주천자로부터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창주(鬱 酒)를 하사 받은 것을 칭송하여

▶규(珪)/ 옥이나 나무로 만든 자루가 달리고 둥그런 모양의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 酒)를 담았다. 제기(祭器)의 일종이다.

▶창( )/ 울창주(鬱 酒)를 말하며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해 울금향(鬱金香)을 넣어서 빚은 술을 말함. 울금향이란 백합과의 다년초인 튜율립에서 채취한 향이다. 봄철에 황색, 백색 등의 꽃이 피며 향기가 있다. 주로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주(祭酒)를 빚는 데에 사용한다.

▶상기 기사는 주양왕(周襄王)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이끄는 진군(晉軍)과 초성왕의 장수인 성득신(成得臣)이 이끌던 초군(楚軍)이 성복에서 크게 싸운 결과 진군이 이겨 그때 잡은 포로와 전리품을 주천자에게 받쳤다. 주천자는 진문공의 공로를 포상하여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기와 술인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금향으로 빚은 울창주를 하사한 것을 말한다.

837. 作<晉世家>第九(작<진세가>제구).

<진세가>제구를 지었다.

838. 重黎業之(중려업지),

중려(重黎)는 화정(火正)이 되어 제곡(帝 )을 위해 공을 세웠으나 공공(共工)의 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살해당하고

▶중려(重黎)/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 )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중려(重黎)는 제곡(帝 ) 고신씨(高辛氏)를 위해 화정(火正)의 벼슬에 앉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게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帝 )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구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초세가)

▶ 창의(昌意)/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로 황제(黃帝)의 비(妃) 누조( 祖)의 소생이다.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養 )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先 )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 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839. 吳回接之(오회접지),

오회(吳回)가 그 뒤를 이어 화정이 되었다.

840. 殷之季世(은지계세),

은나라 말기에 이르자 오희의 손자인 계련이 그 대를 이어 초나라의 시조가 되어

▶오회가 육종을 낳고 육종이 여섯 아들을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낳게 하였다. 장남을 곤오(昆吾)라 하고 이남을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인 미성( 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이다.

841. 粥子牒之(죽자첩지).

이때부터 죽웅의 후손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지게 되었다.

842. 周用熊繹(주용웅역),

주나라 죽웅의 후손인 웅역(熊繹)을 초자(楚子)에 봉하고

843. 熊渠是繼(웅거시계).

그 뒤를 웅거(熊渠)가 이었다.

844. 庄王之賢(장왕지현),

어진 마음의 초장왕은

845. 乃復國陳(내복국진);

멸한 진나라를 다시 세워주고

846. 旣赦鄭伯(기사정백),

초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용서했다.

847. 班師華元(반사화원).

송나라의 우사(右師) 화원의 말을 믿고 군사를 물리쳤으며

848. 懷王客死(회왕객사),

후에 전국 때의 초회왕은 진나라에 유인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객사했으나

849. 蘭咎屈原(란구굴원);

자란과 근상은 그 잘못을 모두 굴원에게 돌렸다.

850. 好諛信讒(호유신참),

초회왕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어진 신하를 참소하는 말을 믿었기 때문에

851. 楚幷于秦(초병우진).

초나라는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 것이다.

852. 嘉庄王之義(가장왕지의),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853. 作<楚世家>第十(작<초세가>제십)

<초세가>제십을 지었다.

854. 少康之子(소강지자),

소강의 아들 무여(無餘)는

855. 實賓南海(실빈남해),

남해(南海)의 바닷가로 가서

856. 文身斷髮(문신단발),

몸에는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857.   與處(원선여처),

자라와 물고기들과 함께 살며

858. 旣守封 (기수봉우),

우산( 山)에 봉해져 그곳을 지키다가

859. 奉禹之祀(봉우지사).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860. 句踐困彼(구천곤피),

그 후손인 구천은 부차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861. 乃用種,  (내용종,려).

이내 문종과 범려를 얻어 신임하였다.

862. 嘉句踐夷蠻能脩其德(가구천이만능수기덕),

구천이 만이들 속에 있으면서 능히 그 덕을 쌓아

863. 滅强吳以尊周室(멸강오이존주실),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주왕실을 받든 것을 기리어

864. 作<越王句踐世家>第十一(작<월왕구천세가>제십일)

<월왕구천세가> 제십일을 지었다.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그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태사 백(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다음은 <정세가> 편에 실린 태사(太史) 백(伯)의 말이다.

" 낙수(洛水)의 동쪽이며 하수의 남안(南岸)에 해당하는 땅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대에는 괵국( 國)과 회국( 國)이 있는데 구 군주들이 탐욕스럽고 이(利) 만을 밝히는 자들이라 백성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의 직에 계시고 백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니 공께서 그곳 주변의 땅을 성심껏 청하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군주들은 공께서 주왕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의 봉지를 떼어 줄 것입니다. 경께서 그곳에 자리잡으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백성들은 모두 공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면 제(齊), 당진(唐晉), 섬진(陝秦), 초(楚) 등의 나라가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성(姜姓)이며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백이는 옛날 요(堯)임금을 도와 나라의 법도와 예절을 제정했습니다. 섬진(陝秦)은 영성( 姓)이며 백예(伯 )의 후손들입니다. 백예는 순(舜)임금을 도와 많은 부락을 회유하여 귀순시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조상들도 역시 천하를 위해 큰공을 세웠습니다. 주 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습니다. 성왕이 당(唐) 땅을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에게 주어 제후로 봉했습니다. 당 땅은 산천의 지세가 험(險)하여 이 곳에서 덕 있는 후손이 태어나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면 같이 병존(竝存)하게 되어 당진(唐晉)은 틀림없이 흥성(興盛)하게 될 것입니다. "

▶괵( )/ 주문왕(周文王)의 동생들인 숙(叔)과 중(仲)이 각각 동괵(東 )과 서괵(西 )에 봉해졌다. 서괵이 후에 동천(東遷)하는 주평왕(周平王)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옮겨 북괵이 되고 원래 서괵의 자리에는 잔존세력이 나라를 세워 소괵(小 )이라 했다.

동괵(東 )/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했다.

서괵(西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부근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봉해졌다. 주평왕(周平王)이 낙읍으로 동천할 때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이가요(李家窯)인 상양성(上陽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북괵(北 )/ 서괵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부르다가 주혜왕(周惠王) 22년 기원전 665년 당진(唐晉)의 헌공(獻公) 때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 ) 작전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소괵(小 )/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의 잔존세력이 세운 나라를 서괵이다. 주장왕(周庄王)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陝秦)의 무공(武公)에 의해 멸망당했다.

▶회국( 國)/ 회(檜)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신밀시(新密市) 동남에 있던 제후국으로써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정나라에 병합되었다.

867. 及侵周禾(급침주화),

이어서 정장공(鄭庄公)은 군사를 내어 주나라 경계를 침략하여 벼이삭을 베어오자

868. 王人是議(왕인시의).

주왕실의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며 정나라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869. 祭仲要盟(제중요맹),

제중(祭仲)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함으로써

▶정나라 상경(上卿) 제족(祭足)이 장공의 뒤를 이어 소공(昭公)이 새로 선 것을 알리기 위해 송나라에 특사로 갔다. 그러나 송장공(宋庄公)은 오히려 제족을 붙잡아 소공을 몰아내고 당시 송나라로 망명해 있던 자돌을 대신 세우라고 위협하였다. 제족은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하였다. 제족은 아무도 몰래 자돌을 귀국시켜 소공을 몰아내고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 소공은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이 구절은 제족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870. 鄭久不昌(정구불창).

정나라는 강국으로서 오래가지 못했다.

871. 子産之人(자산지인),

이어서 자산(子産)이 나타나 정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자

872. 紹世稱賢(소세칭현).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873. 三晋侵伐(삼진침벌),

삼진이 번갈아 가며 정나라를 쳐들어오니

874. 鄭納于韓(정납우한).

정나라를 망하여 결국은 한나라 땅이 되었다.

875. 嘉 公納惠王(가려공납혜왕),

정려공(鄭 公)이 왕자 퇴(頹)의 란으로 나라에서 쫓겨난 것을 도와 복국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876. 作<鄭世家>第十二(작<정세가>제십이)

<정세가>제십이를 지었다.

877. 維驥 耳(유기록이),

주목왕(周穆王)에게 명마 기(驥)와 녹이( 耳)를 선사하고

878. 乃章造父(내장조보).

그것으로 이름을 얻은 조보(造父)는 조씨(趙氏)들의 시조가 되었다.

879. 趙夙事獻(조숙사헌),

조숙(趙夙)이 진헌공(晉獻公)을 모셨고

880. 衰續厥緖(쇠속궐서).

그의 후손 조쇠가 계속해서 조숙의 유업을 이었다.

881. 佐文尊王(좌문존왕),

진문공을 보좌하여 패자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주왕실을 높여

882. 卒爲晉輔(졸위진보).

이윽고 진나라를 크게 일으킨 공신이 되었다.

883. 襄子困辱(양자곤욕),

조양자가 진양에서 지백을 포함한 삼가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졌으나

884. 乃禽智伯(내금지백).

이내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지백을 사로잡아 조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885. 主父生縛(주보생박),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은 사구궁(沙丘宮)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포위되어

886. 餓死探爵(아사탐작).

참새를 잡아 허기를 채우다가 굶어 죽었다.

887. 王遷 淫(왕천벽음),

조왕 천(遷)은 편협하고 음락을 즐겨

888. 良將是斥(양장시척).

훌륭한 장수들을 멀리한 결과 조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889. 嘉 討周亂(가앙토주란).

조앙(趙 )이 주왕실의 란을 토벌한 것을 칭송하여

890. 作<趙世家>第十三(작<조세가>제십삼)

<조세가>제십삼을 지었다.

891. 畢萬爵魏(필만작위),

진헌공(晉獻公)을 모신 필만(畢萬)은 그 세운 공으로 위(魏) 땅에 봉해졌다.

892. 卜人知之(복인지지).

점술가는 필만의 후손들이 번창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893. 及絳戮干(급강육간);

이어서 그의 후손인 위강(魏絳)은 진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을 치죄하고

894. 戎翟和之(융작화지).

다시 융적의 무리들을 회유하여 당진의 신민으로 삼았다.

895. 文侯慕義(문후모의),

위문후(魏文侯)는 의로운 선비들을 좋아하여

896. 子夏師之(자하사지).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897. 惠王自矜(혜왕자긍),

그러나 문후의 뒤를 이은 혜왕은 스스로 교만하다가

898. 齊秦功之(제진공지),

제와 진 두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세가 크게 꺾였다.

899. 旣疑信陵(기의신릉),

안리왕은 신릉군을 의심하자

900. 諸侯罷之(제후파지).

제후들이 위나라를 멀리했다.

901. 卒亡大梁(졸망대량),

결국은 진나라가 대량성을 파하고 위나라를 멸했다.

902. 王假 之(왕가시지).

위왕 가(假)는 진나라의 포로가 되어 일개 노역으로 전락했다.

903. 嘉武佐晉文申覇道(가무좌진문신패도),

위무자(魏武子) 주( )가 진문공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한 공을 기리어

904. 作<魏世家>第十四(작<위세가>제십사)

<위세가>제십사를 지었다.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가 망한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907. 紹絶立廢(소절립폐),

끊어진 후손들을 잇게 하고 없어진 제사를 다시 지내게 만들었으니

908. 晉人宗之(진인종지).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받들었다.

909. 昭侯顯列(소후현열),

한소후가 열후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은

910. 申子庸之(신자용지).

신불해를 임용한 것이다.

911. 疑非不信(의비불신),

한왕 안(安)은 한비를 의심하여 믿지 않았음으로

912. 秦人襲之(진인습지).

결국은 진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913. 嘉厥輔晉匡周天子之賦(가궐보진광부천자지부),

한궐이 진나라 군주를 보좌하여 패업을 계속 잇게 하고 다시 주천자의 존엄함을 높였다. 이에 그 공을 칭송하여

914. 作<韓世家>第十五(작<한세가>제십오)

<한세가>제십오를 지었다.

915. 完子避難(완자피난),

진나라의 공자 진완(陳完) 난을 피하여

916. 適齊爲援(적제위원),

제나라에 와서 도움을 받아 살다가

917. 陰施五世(음시오세),

그 후손들 중 5세에 연이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918. 齊人歌之(제인가지).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덕을 노래 불렀다.

919. 成子得政(성자득정),

전성자가 그의 군주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전성자(田成子)/전상(田常)을 말하며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諡號)이다. 감지( 止)와 정권을 다투다가 기원전 481년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平公)을 대신 세웠다.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성자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920. 田和爲侯(전화위후).

전성자의 오대 손인 전화(田和) 때에 이르러 강씨를 대신하여 제후(齊侯)의 자리를 찾이하였으나

921. 王建動心(왕건동심),

제나라의 마지막 왕 왕건(王建)이 진나라의 공작에 마음이 움직여

922. 內遷于共(내천우공).

이윽고 나라가 망하자, 그는 진왕(秦王)에 의해 공(共) 땅으로 옮겨져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923. 嘉威(가위),

제위왕(齊威王)과

924. 宣能撥濁世而獨宗周(선능발탁세이독종주),

제선왕(齊宣王)이 능히 혼탁한 세상을 밝혀 내고 오로지 주나라를 받든 것을 칭송하여

925. 作<田敬仲完世家>第十六(작<전궁중완세가>제십육)

<전경중완세가>제십육을 지었다.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방자해 졌다.

928. 仲尼悼禮廢樂崩(중니도례폐락붕),

공자가 예(禮)가 없어지고 악(鄂)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여

929. 追脩經術(추수경술),

세상을 구하는 방도를 구하여

930. 以達王道(이달왕도),

그것으로써 왕도에 이르게 하여

931. 匡亂世反之于正(광란세반지우정),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길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932. 見其文辭(견기문사),

공자의 저서와 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933. 爲天下制儀法(위천하제의법),

천하를 위해서 의례와 법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934. 垂<六藝>之統紀于后世(수<육예>지통기우후세).

육예의 기강을 후세에 영원히 남겼다.

935. 作<孔子世家>第十七(작<공자세가>제십칠)

이에 <공자세가>제십칠을 지었다.

936. 桀,紂失其道而湯武作(걸, 주실기도이탕무작)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상나라의 주왕(紂王)이 실덕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은나라의 탕임금과 주무왕은 덕을 쌓아 나라를 일으킨 것이다.

937. 周失其道而<春秋>作(주실기도이<춘추>작.

이어서 주나라가 그 도를 잃자 공자는 <춘추>를 지은 것이다.

938. 秦失其政(진실기정),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나 그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939. 而陳涉發迹(이진섭발적),

진섭이 한 번 일어나니

940. 諸侯作難(제후작난),

천하의 제후들이 그 뒤를 쫓아 난을 일으키니

941. 風起雲蒸(풍기운증),

그 기세가 마치 바람과 구름과 같아서

942. 卒亡秦族(졸망진족).

진나라는 창졸간에 망하게 되어

943. 天下之端(천하지단),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망하게 된 발단은

944. 自涉發難(자섭발난).

진섭이 일으킨 반란에 기인한 것이니

945. 作<陳涉世家>第十八(작<진섭세가>제십팔)

이에 <진섭세가>제십팔을 지었다.

946. 成皐之台(성고지대),

하남의 성고(成皐)에 세운 대(臺)는

947. 薄氏始基(박씨시기).

한문제(漢文帝)의 모친인 박씨(薄氏)가 그 터를 파기 시작했고

948.  意適代(굴의적대),

두황후(竇皇后)는 뜻을 꺾고 대(代) 땅으로 들어갔다가

949. 厥崇諸竇(궐숭제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이 제위(帝位)를 잇게 되자 그녀의 일족들은 모두가 존귀하게 되었다.

950. 栗姬 貴(율회부귀),

율희는 그 사이에 틈을 타서 존귀하게 되었으나 교만해 졌으며

951. 王氏乃遂(왕씨내수).

왕씨들이 그 뒤를 이어 세력을 얻었다.

952. 陳后太驕(진후태교),

진황후는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953. 卒尊子夫(졸존자부).

결국은 한무제에 의해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되어 존귀하게 되었다.

954. 嘉夫德若斯(가부덕약사),

위자부의 아름다운 덕행을 칭송하여

955. 作<外戚世家>第十九(작<외척세가>제십구)

<외척세가>제십구를 지었다.

956. 漢起譎謀(한기휼모),

한고조가 속임수를 써서

957. 禽信于陳(금신우진);

한신을 진(陳) 땅에서 사로잡았다.

958. 越荊剽輕(월형표경),

한고조는 월(越)이나 초(楚) 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민첩하여

959. 乃封弟交爲楚王(내봉제교위초왕),

그의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으로 봉해 두 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다.

960. 爰都彭城(원도팽성),

유교는 이어서 팽성에 도읍을 정하고

961. 以强淮泗(이강회사),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의 고을들을 힘으로 다스려

962. 爲漢宗蕃(위한종번).

한나라를 위한 오랑캐의 종주국이 되었다.

963. 戊溺于邪(무익우사),

초왕 유무(劉戊)는 사간(邪奸)의 죄를 범했다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에 가담하고, 이어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무(劉戊)/ 초왕(楚王)으로 시봉된 유교(劉交)의 손자로 상중에 궁녀를 봉하여 그 죄로 봉지의 일부인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에 불만을 품고 오왕(吳王) 유비(劉 )와 함께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자살했다. 오초칠국의 란의 상세한 전개과정은 655항 참고

▶사간(邪奸)/ 국상 중에 궁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국상 중에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했다.

964. 禮復紹之(예복소지).

그 뒤를 유례(劉禮)가 초왕에 봉해져 초원왕(楚元王)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유례(劉禮)/ 초원왕 유교(劉交)의 아들이다.

965. 嘉游輔祖(가유보조),

초원왕 유교(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것을 칭송하여

▶유(游)/ 유교(劉交)의 자(字)다.

966. 作<楚元王世家>第二十(작<초원왕세가>제이십)

이에 <초원왕세가>제이십을 지었다.

967. 維祖師旅(유조사려),

한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968. 劉賈是興(유가시흥);

유고(劉賈)가 함께 참가하여 그 공으로 제후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유고(劉賈)/ 한고조 유방(劉邦)의 사촌형이다. 한고조 밑에서 장군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기원전 201년 형왕(荊王)에 봉해졌다. 후에 반란을 일으킨 영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969. 爲布所襲(위포소습),

후에 영포(英布)에 의해 습격 당해

970. 喪其荊,吳(상기형,오).

자신은 목숨을 잃고 봉지인 형(荊)과 오(吳)의 땅을 잃게 되었다.

▶형(荊)/ 원래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때 백기(白起)의 침입에 의해 도성을 뺏기고 지금의 하나성 진현(陳縣)으로 나라를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으로 옮겼다.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에 있었던 옛날의 초나라 땅을 형(荊)이라 하고 초나라가 새로 옮겨 간 수현(壽縣) 일대를 초(楚)라고 명명한 것이다. 항우(項羽)는 팽성(彭城) 즉 지금의 수현에 도읍을 새우고 초나라라고 명명했다.

971. 營陵激呂(영릉격려),

영릉후(英陵侯) 유택(劉澤)은 여태후를 감격시켜

▶유택(劉澤)/ 한고조 유방의 사촌 형제이다. 유방 밑에서 낭중의 벼슬을 살다가 여태후에 의해 영릉후에 봉해졌다.

972. 乃王琅邪(내왕낭야);

이윽고 낭야왕에 봉해졌다.

973. 祝午信齊(축오신제),

그는 축오(祝午)의 말을 듣고 제나라를 믿은 나머지

974. 往而不歸(왕이불귀),

그곳으로 들어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975. 遂西入關(수서입관),

후에 계교를 써서 서쪽의 관중으로 들어가

976. 遭立孝文(조립효문),

효문제를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올릴 때

977. 獲復王燕(획복왕연).

연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978. 天下未集(천하미집),

천하의 인심이 아직 모아지지 않았을 때

979. 賈, 澤以族(가, 택이족),

유고(劉賈)와 유택(劉澤)은 황제(皇帝)의 일족으로

980. 爲漢藩輔(위한번보).

번국의 왕이 되어 황실을 도왔다.

981. 作<荊燕世家>二十一(작<형연세가>이십일)

이에 <형연세가>제이십일을 지었다.

982. 天下已平(천하이평),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인심이 안정이 되었으나

983. 親屬旣寡(친속기과);

황실의 종족들의 수효가 많지 않았다.

984. 悼惠先壯(도혜선장),

고조의 아들 중 도혜왕(悼惠王)이 가장 먼저 성인이 되어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庶長子)로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985. 實鎭東土(실진동토).

동쪽의 제나라에 봉해져 그곳을 굳게 지켰다.

986. 哀王擅興(애왕천흥),

애왕(哀王)은 경솔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애왕(哀王)/ 유비(劉肥)의 아들 유양(劉襄)을 말한다.

987. 發怒諸呂(발노제려),

당시의 실권자들인 여씨(呂氏)들의 전횡에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으나

988. 駟鈞暴漏(사균폭루),

사균(駟鈞)이 포학하고 잔인했음으로

▶사균(駟鈞)/

989. 京師弗許(경사불허).

조정의 대신들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990.  之內淫(려지내음),

려왕( 王)이 그의 누이와 간음하자

991. 禍成主父(화성주보).

주보언에게 들켜 화를 입었다.

▶주보(主父)/ 주보언(主父偃)을 말한다. 그는 제나라 임치(臨淄) 사람으로 한무제 때 중대부의 벼슬을 지내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그 봉지를 여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 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다. 후에 자기의 딸을 제려왕(齊 王)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려왕이 자기의 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밝혀 내고 그 사실을 한무제에게 고하여 려왕으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주보에게 화를 입었다는 것은 이 것을 말한 것이다.

992. 嘉肥股肱(가비고굉),

유비가 한고조의 고굉지신이 되어 잘 보좌했음을 기리어

993. 作<齊悼惠王世家>第二十二(작<제도혜왕세가>제이십이)

<제도혜황세가>제이십이를 지었다.

994. 楚人圍我滎陽(초인위아형양),

우리의 한고조가 형양(滎陽)에서 초왕 항우에 의해 삼년을 포위 당하여

995. 相守三年(상수삼년);

항복하지 않고 삼 년을 버틴 것은

996. 蕭何塡撫山西(소하전무산서),

소하가 산서의 땅을 위무하여

997. 推計踵兵(추계종병),

호구를 관리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998. 給糧食不絶(급량식부절),

병사들을 위한 군량미를 끊어지지 않게 공급한 때문이었고

999. 使百姓愛漢(사백성애한),

또한 소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로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1000. 不樂爲楚(불락위초).

초나라를 위해 즐겨 일하지 않게 했다.

1001. 作< 蕭相國世家>第二十三(작<소상국세가>제이십삼)

이에 <소상국세가>제이십삼을 지었다.

1002. 與信定魏(여신정위),

조참(曹參)은 한신(韓信)과 함께 출동하여 위나라를 평정하였고

1003. 破趙撥齊(파조팔제),

조나라를 군사를 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1004. 遂弱楚人(수약초인).

드디어는 초나라 세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1005. 續何相國(속하상국),

소하가 죽은 다음에 상국의 자리를 이어 받아

1006. 不變不革(불변북혁),

그가 세워 놓은 제도는 아무 것도 개변하거나 혁파하지 않고

1007. 黎庶攸寧(여서유녕).

그대로 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했다.

1008. 嘉參不伐功矜能(가삼불벌공긍능),

조참이 자기의 공로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송하여

1009. 作<曹相國世家>第二十四(작<조상국세가>제이십사)

<조상국세가>제이십사를 지었다.

1010. 運籌 幄之中(운주유악지중),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우고 실행하여

1011. 制勝于無形(제승우무형),

눈에 보이지 않은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쟁취한 것은

1012. 子房計謀其事(자방계모기사),

모두가 장자방의 계책에 의한 것이며

1013. 無知名(무지명),

그는 명성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1014. 武勇功(무용공),

무용을 발휘하여 공을 세운 일도 없었으나

1015. 圖難于易(도난우이),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해결하고

1016. 爲大于細(위대우세).

사소한 일을 행하여 큰일을 이루었다.

1017. 作<留侯世家>第二十五(작<유후세가>제이십오)

이에 <유후세가>제이십오를 세웠다.

1018. 六奇旣用(육기기용),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을 고조에게 바쳐

1019. 諸侯賓從于漢(제후빈종우한);

천하의 제후들이 한나라를 따르도록 만들었고

1020. 呂氏之事(여씨지사),

여씨들이 전횡하자 그들을 토벌한 것은

1021. 平爲本謀(평위본모),

원래 진평(陳平)의 계책에 의한 것이다.

1022. 終安宗廟(종안종묘),

한나라 종묘와

1023. 定社稷(정사직).

사직을 안정시킨 것도 진평의 공적이라

1024. 作<陳丞相世家>第二十六(작<진승상세가>제이십육).

이에 <진승상세가>제이십육을 지었다.

1025. 諸呂爲從(제려위종),

여씨들이 서로 결탁하여

1026. 謀弱京師(모약경사),

황실의 세력을 깎아 내리려 획책했으나

1027. 而勃反經合于權(이발반경합우권);

주발은 정도에 벗어난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들을 주멸했다.

1028. 吳楚之兵(오초지병),

오초가 힘을 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29. 亞父駐于昌邑(아부주우창읍),

주발의 아들인 주아부가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창읍에 주둔하여

▶주아부(周亞夫)/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한문제 때 세류(細柳 : 지금의 섬서성 함안 서남)에 주둔하여 흉노의 침략을 막아냈다. 한경제 때 오초(吳楚)를 포함한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벌군 대장이 되어 창읍에 주둔하여 반란군의 후방을 끊고 제와 조 두 나라와의 연락도 두절시켰다. 전후에서 보급망이 끊어진 오초(吳楚)의 군사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초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왕은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한나라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동맹국의 왕 동월왕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오초칠국의 란을 진압한 공로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가 무고를 받아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옥중에서 굶어 죽었다.

1030. 以厄齊趙(이액제조),

제와 조 두 나라의 군사들과 오초의 군사들의 연락을 끊었다.

1031. 而出委以梁(이출위이양).

이어서 양나라의 위급함을 스스로 해결하게 하여 결국은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했음으로

1032. 作<絳侯世家>第二十七(작<강후세가>제이십칠)

<강후세가>제이십칠을 지었다.

1033. 七國叛逆(칠국반역),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34. 藩屛京師(번병경사),

한왕조의 변경을 지키던 제후국들 중

1035. 唯梁爲 (유량위한);

오직 양나라만이 대항하였다.

1036.  愛矜功(부애긍공),

그러나 모후의 총애를 너무 믿었고 또한 자기의 공을 너무 자랑한 나머지

1037. 幾獲于禍(기획우화).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1038. 嘉其能距吳楚(가기능거오초),

양효왕(梁孝王)이 오초의 군사들을 능히 막아내어 황실을 안정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1039. 作<梁孝王世家>第二十八(작<양효왕세가>제이십팔)

<양호왕세가>제이십팔을 짓는다.

1040. 五宗旣王(오종기왕),

오종이 모두 제후왕이 되자

▶오종(五宗)/ 한경제(漢景帝)는 그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한 사람이 한무제(漢武帝)이고 나머지 13명이 모두 제후왕(諸侯王)에게 봉해졌다. 13명은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 소생이었다. 이에 5명의 여인들을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오종이라고 한 것이다.

1041. 親屬洽和(친속흡화),

황실의 친속들은 서로 친하여 화합을 이루었고

1042. 諸侯大小爲藩(제후대소위번),

이어 모두 크고 작은 나라의 제후왕들로 봉해져

1043. 爰得其宜(원득기의),

황실의 변방을 지키는 번국(藩國)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1044. 僭擬之事稍衰貶矣(참의지사소쇄폄의).

이에 자기의 직분을 벗어나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제후들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1045. 作<五宗世家>第二十九(작<오종세가>제이십구).

이에 <오종세가>제이십구를 지었다.

1046. 三子之王(삼자지왕)

무제의 세 아들은 모두 제후왕으로 봉해졌는데

1047. 文辭可觀(문사가관)

그때 지은 책문의 글은 가히 명문이었다.

1048. 作<三王世家>第三十(작<삼왕세가>제삼십)

이에<삼왕세가>제삼십을 지었다.

▶삼왕세가(三王世家)/ 사마천의 삼왕세가의 원본은 소실되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의 삼왕세가는 저소손( 少孫)이 지어 보충하였다. 1049. 末世爭利(말세쟁리),

세상이 말세가 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익을 다투게 되나

1050. 維彼奔義(유피분의)

오로지 그들만은 의를 추구하여

1051. 讓國餓死(양국아사),

나라의 군주 자리도 마다하고 결국은 굶어 죽었으니

1052. 天下稱之(천하칭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하였다.

1053. 作<伯夷列傳>第一(작<백이열전>제일)

이에 <백이열전>제일을 지었다.

▶백이(伯夷)/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는 형이고 숙제는 동생으로 지금의 천진시 복쪽의 창려(昌黎)시에 있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군주가 차자인 숙제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생전에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백이가 자기 부친의 뜻을 알고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 주기 위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숙제도 형을 제치고 동생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왕자리에 앉지 않고 그 역시 나라 밖으로 떠났다. 그후 두 사람은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신하의 나라가 주인 되는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며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비록 곡식일지라도 주나라 땅에서 난 것이라 먹지 않고 고사와 고비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고 말았다.

1054. 晏子儉矣(안자검의),

안자(晏子) 평중(平仲)은 검소했으며

1055. 夷吾則奢(이오즉사);

관자(管子) 이오(夷吾)는 사치하여 두 사람은 서로 행하는 바가 달랐으나

1056. 齊桓以覇(제환이퍠),

이오는 제환공을 패자로 만들었고

1057. 景公以治(경공이치).

평중은 제경공으로 하여금 치세를 이루게 만들었다.

1058. 作<管晏列傳>第二(작<관안열전)제이)

이에 <관안열전>제이를 지었다.

1059. 李耳無爲自化(이이무위자화),

노자(老子) 이이(李耳)는 무위(無爲)를 주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하게 만들게 하고

▶무위(無爲)/ 도가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060. 淸淨自正(청정자정);

마음을 깨끗하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마음을 갖게 만들었으며

1061. 韓非 事情(한비췌사정),

한비자는 각기 일마다의 정황을 헤아려

1062. 循勢理(순세리).

세력과 도리가 움직이는 이치에 따랐다.

1063. 作<老子韓非列傳>第三(작<노자한비열전>제삼)

이에 <노자한비열전>제삼을 짓는다.

1064. 古王者而有<司馬法>(고왕자이유<사마법>)

옛날 왕들에게도 <사마법>이라고 있었으나

1065. 穰 能申明之(앙저능신명지).

사마양저(司馬穰 )가 그 병법의 쓰임새 넓히고 분명히 밝혔다.

1066. 作<司馬穰 列傳>第四(작<사마양저열전>제사)

이에 <사마양저열전>제사를 지었다.

1067.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비신렴이용불능전명논검),

신(信), 염(廉), 인(仁), 용(勇)이 아니고는 병법과 검술에 대해 논할 수 없으며

1068. 與道同符(여도동부),

부절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1069. 內可以治身(내가이치신),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1070. 外可以應變(외가이응변),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1071. 君子比德焉(군자비덕언).

군자가 이것에 더하여 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덕이라고 했다.

1072. 作<孫子吳起列傳>第五(작<손자오기열전>제오).

이에< 손자오기열전>제오를 지었다.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사(伍奢)의 몸에 미쳤다.

1075. 尙旣匡夫(상기광부),

오상(伍尙)은 그 부친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1076. 伍員奔吳(오원분오),

그 동생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달아나 그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았다.

1077.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육)

이에 <오자서열전>제육을 지었다.

1078. 孔氏述文(공씨술문),

공자는 학문과 문학을 논하고

1079. 弟子興業(제자흥업),

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세상에 일으켰다.

1080. 咸爲師傅(함위사부),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1081. 崇仁 義(숭인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1082. 作<仲尼弟子列傳>第七(작<중지제자열전>제칠)

이에 <중니제자열전>제칠을 지었다.

1083.  去衛適秦(앙거위적진),

상앙은 위(衛) 땅을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1084. 能明其術(능명기술),

그가 배운 술법을 능히 펼칠 수 있어

1085. 强覇孝公(강패효공),

진효공(秦孝公)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1086. 後世遵其法(후세준기법).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1087. 作<商君列傳>第八(작<상군열전>제팔)

이에 <상군열전>제팔을 지었다.

1088. 天下患衡秦毋 (천하환형진무염),

천하가 근심하고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강포함이었으나

1089. 而蘇子能存諸侯(이소자능존제후),

소진은 능히 제후국들을 존립하게 하고

1090. 約從以抑貪强(약종이억탐강).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러운 진나라를 제어 하였다.

1091. 作<蘇秦列傳>第九(작<소진열전>제구)

이에 <소진열전>제구를 짓는다.

1092. 六國旣宗親(육국기종친),

육귝이 서로 합종을 맺어 친하게 지내게 되자

1093. 而張儀能明其說(이장의능명기설),

장의는 그 잘못을 능히 지적할 수 있어

1094. 復散解諸侯(복산해제후).

다시 합종책을 깨고 제후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1095. 作<張儀列傳>第十(작<장의열전>제십)

이에 <장의열전>제십을 짓는다.

1096. 秦所以東攘雄諸侯(진소이동양웅제후),

진나라가 동쪽의 제후들을 물리치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1097. 樗里, 甘茂之策(저리, 감무지책).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의 계책 덕분이었다.

1098. 作<樗里甘茂列傳>第十一(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이에 <저리감무열전>제 십일을 지었다.


사마천-태사공자서 03

[태사공자서 5-3]

499.維昔黃帝(유석황제),

옛날 황제 헌원씨(軒轅氏)는

500.法天則地(법천즉지),

하늘과 땅의 법칙을 본 받았고

501.四聖遵序(사성준서),

사성은 각기 그 순서에 따라 .

▶사성(四聖)/ 전욱( 頊), 제곡(帝 ), 당요(唐堯), 우순(虞舜)을 말한다.

502.各成法度(각성법도);

황제가 만든 법도를 이루었다.

503.唐堯遜位(당요손위),

당요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504.虞舜不台(우순불태);

우순은 기뻐하지 않았다.

505.厥美帝功(궐미제공),

이에 제왕들의 공을 찬미하여

506.萬世載之(만세재지),

만세에 전하도록 실어

507.作<五帝本紀>第一(작<오제본기>제일)

제일편인 <오제본기(五帝本紀)>를 지었다.

508.維禹之功(유우지공),

우임금의 가장 큰 공적은

509.九州攸同(구주유동),

구주에 고루 혜택을 주어

▶구주(九州)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중국 전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아홉 주의 이름은 기(冀), 예(豫),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연( ), 양(梁), 옹(雍)이다.

기주(冀州) : <하본기(夏本紀)> " 冀州:冀載壺口,治梁及岐" 하북성 동남, 산동 서북부, 하남과 산서 경계 중 하수 이북, 산서와 섬서 경계 중 하수 동쪽의 땅을 관할했다.

예주(豫州) : <하본기(夏本紀)> " 荊河惟豫州" 관할 구역으로 남쪽으로는 지금의 호북성 형산<지금의 호북성 남장(南 ) 서>, 북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렀다.

청주(靑州) : <하본기(夏本紀)> " 海垈維靑州" 해(海)는 발해를 말하고 대(垈)는 즉 태산(泰山)을 말한다. 구주(九州) 중 가장 동쪽에 있었던 주. 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은 청(靑)을 뜻했기 때문에 청주라 한 것이다. 관할 구역은 동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하북(河北) 오교(吳橋) 이동, 마협하(馬頰河) 이남, 산동성 북부와 동부지구에 이르렀다.

서주(徐州) : <하본기(夏本紀)> " 海垈及淮維徐州" 해(海)는 황해를 말하며 대(垈)는 태산(泰山), 회(淮)는 회수(淮水)를 말한다. 동쪽으로는 황해(黃海), 서쪽으로는 태산(泰山), 남쪽으로는 회수(淮水) 즉, 서주의 북쪽은 태산을 경계로 청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회수를 경계로 양주(揚州)와 접했다.

양주(揚州) : <하본기(夏本紀)>" 淮海維揚州" 회는 회수(淮水)를 말하며, 해는 동해(東海)다. 양주의 관할 구역은 회수 이남과 장강 유역 중 하류의 월인(越人)들이 활동하던 땅이다.

형주(荊州) : <하본기(夏本紀)> " 荊及衡陽維荊州 " 형(衡)은 형산(衡山)으로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南 縣)을 말한다. 대체로 호북성 중부, 남부, 호남성 북부, 중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일부를 관할했다.

연주( 州) : 연주(沇州)라고도 한다. <하본기(夏本紀)> " 濟, 河維沇州 " 연주(沇州)는 연수(沇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濟)는 즉 제수(濟水), 하(河)는 즉 하수(河水)를 말하며 산동성 서북부, 하남 동북과 하북 동남부를 관할했다.

양주(梁州) : <하본기(夏本紀)> " 華陽黑水惟梁州 " 흑수에 대한 설은 분명하지 않다. 란창강(瀾滄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장액하(張掖河), 대통하(大通河) 등 설이 다양하다.

옹주(雍州) : <하본기(夏本紀)> " 黑水西河惟雍州" 하(河)는 지금의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를 흐르는 하수(河水)를 말하나 흑수는 확실하지 않다

510.光唐虞際(광당우제),

당우(唐虞) 시대를 빛내어

511.德流苗裔(덕유묘예);

그 덕이 후세들에게 이르게 한 것이다.

512.夏桀淫驕(하걸음교),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음탕하고 교만하여

513.乃放鳴條(내방명조).

이어서 명조(鳴條)로 추방되었다.

▶명조(鳴條)/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북 봉구현(封丘縣) 서.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이 은나라의 탕(湯)임금과 싸워 패하고 도망간 곳이다.(桀奔於鳴條)

514.作<夏本紀>第二(작<하본기>제이)

이에 하본기(夏本紀) 제이를 지었다.

515.維契作商(유설작상),

설(薛)은 상을 세웠고

▶설(薛)/제곡(帝 )의 아들로 상족(商族)의 시조이다. 우(禹)임금이 황하를 치수할 때 옆에서 도와 공을 도와 순임금에 의해 사도(司徒)로 임명되어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인 상(商)에 봉해졌다. 그 후예인 탕임금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웠다.

516.爰及成湯(원급성탕);

이어서 성탕에 이르러 하왕조를 대신하였다.

517.太甲居桐(태갑거동),

태갑(太甲)은 동(桐)으로 쫓겨나 살던 끝에

▶태갑(太甲)/ 성탕(成湯)의 장자인 태정(太丁)의 큰아들이다. 즉위 3년만에 탕이 세운 법을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히며 전횡하자 이윤(伊尹)에 의해 동궁(桐宮)으로 추방되었다. 동궁에 3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하자 이윤이 다시 그를 데려와 정권을 넘겨주었다. 왕위에 복귀 후 태갑은 성탕의 유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자 제후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며 백성들의 생활은 편안해 졌다. 이윤이 이를 찬미하여 <태갑훈(太甲訓)> 삼 편을 지었다.

▶동(桐)/ 동궁을 말하며 여러 설이 있다.

사기집해(史記集解) : 탕임금이 묻힌 곳으로 제음(濟陰)의 박현( 縣)으로 지 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동쪽을 말한다고 했으며

사기정의(史記正義) : 하남성 언사시(偃師市) 서쪽 등 이외에 몇 가지 설이 더 있다.

518.德盛阿衡(덕성아형);

깨달아 아형(阿衡)의 도움으로 세상에 덕을 펼칠 수 있었다.

▶아형(阿衡)/ 상(商) 왕조를 세운 성탕(成湯)의 창업공신인 이윤(伊尹)의 이름이다. 원래 탕임금의 비(妃)인 유신씨(有辛氏)가 시집올 때 데려온 노예였으나 탕임금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정사를 맡겼다. 이윤은 탕임금을 도와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탕임금이 죽자 그의 이자(二子)인 외병(外丙)과 삼자(三子)인 중임(中任)을 차례로 섬기다가, 중임이 죽자 탕임금이 장자인 태정(太丁)의 아들 태갑(太甲)을 왕위에 앉혀 그에게 정치의 근본과 법도를 가르쳤다. 태갑이 즉위하여 삼 년이 되자 탕이 세운 법을 문란하게 하였다. 이에 이윤은 태갑을 동궁(桐宮)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통치했다. 태갑은 동궁에서 삼 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윤이 태갑을 다시 불러 들여 상나라 임금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제위(帝位)에 다시 오른 태갑은 정치를 쇄신하고 덕정을 베풀어 치세를 이루었다. 이윤(伊尹)은 태갑이 죽고 그의 아들 옥정(沃丁) 치세 때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윤은 7년만에 돌아와 스스로 왕위에 복귀한 태갑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519.武丁得說(무정득열),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등용하여 치세를 이루어

▶무정(武丁)/상왕조의 제 23대 왕으로 기원전 1325년부터 1266년까지 59년간 재위에 있었다. 일설에는 기원전 1329년 제위에 올랐다고 했다. 묘호(廟號)는 고종(高宗)이다. 소을(小乙)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버지다. 전설에 의하면 무정이 어렸을 때 그의 부왕인 소을이 그를 민가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서 노역들과 함께 살게 하고, 다시 그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국경 밖의 이민족을 정벌하게 했다고 했다. 소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무정은 상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찾다가 부암(傅岩)이란 곳에서 노역을 하던 노예 출신의 부열을 얻어 재상으로 삼았다. 부열의 도움으로 정치를 쇄신하고 덕을 베풀었으며 서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을 정벌하였으며 남쪽의 형만(荊蠻)을 공격하여 상나라의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상나라는 부열의 도움으로 무정 치세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부열(傅說)/다음은 <은본기(殷本紀)>에 나오는 무정(武丁)과 부열에 관한 기사이다.

< 소을제(小乙帝)>가 죽자 그 아들 무정(武丁)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무정은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인을 널리 구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 宰)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의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은 성밖으로 나가 자다가 꿈속에서 성인을 봤다. 무정이 관리들에게 자기가 꿈속에서 본 성인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다시 성밖에서 찾아보라고 명하여 드디어 부험(傅險)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도로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던 열(說)을 찾아냈다. 무정이 열을 불러 대화를 해보니 과연 그는 성인이었다. 열을 그 자리에서 상나라의 제상을 삼고 부험(傅險)에서 찾았다고 해서 부(傅)성을 하사하여 부열이라 부르게 했다.>

< 帝小乙崩, 子帝武丁立. 帝武丁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 政事決定于 宰, 以觀國風. 武丁野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于是乃使百工營求之野, 得說于傅險中. 是時說爲胥靡, 築于傅險. 見于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 擧以爲相, 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

520.乃稱高宗(내칭고종);

무정은 은나라를 부흥시킨 공으로 후세들로부터 고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521.帝辛湛 (제신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 신(辛)은 주색에 빠졌기 때문에

522.諸侯不亨(제후불형).

천하의 제후들이 와서 받들지 않았다.

523.作<殷本紀>第三(작<은본기>제삼)

이에 <은본기> 제삼을 이었다.

524.維棄作稷(유기작직),

기(棄)가 자라 순임금 때 후직(后稷)이 되어

후직(后稷)/ 순임금 때 농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벼슬 이름이었으나 후에 기의 이름이 되었다..

525.德盛西伯(덕성서백);

덕을 베풀자, 그 후손이 번성하여 서백(西伯)이 되었다.

526.武王牧野(무왕목야),

서백의 아들 무왕은 목야(牧野)에서 승전하여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부근에 있었던 땅 이름으로 이곳에서 제후들을 규합한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과 결전을 벌려 승리하였다. 주왕은 녹대에 몸을 던져 불에 타 죽고 천하는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527.實撫天下(실무천하);

천하를 위무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528.幽 昏亂(유려혼란),

유왕(幽王)과 려왕( 王)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

▶유왕(幽王)/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 )라는 미인에게 탐닉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폭정을 행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강융(羌戎)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점령하고 유왕은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나라는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옮긴 것이다.

▶려왕( 王)/서주의 10대 왕으로, 즉위연도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841년에 죽었다. 려왕이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공포정치를 행하자 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려왕은 체( ) 땅으로 도망가서 살고 주나라는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섭정을 행했다. 주공과 소공 두 사람은 려왕이 체 땅에서 14년만에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이 14년간의 기간을 공화(共和)라 하고 려왕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기원전 841년을 공화 원년이라 한다. 중국의 역사기록은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 해를 기점으로 분명해 지며 사마천 사기(史記)의 제후연표도 이 해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국인 역사학자 진순신(陳舜臣)은 이 해를 중국역사 기원 1년으로 삼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529.旣喪 鎬(기상풍호);

풍호( 鎬)를 잃었다

▶풍호( 鎬)/동주가 하남성의 낙읍으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長安) 서남의 풍수( 水) 강안에 있었기 때문에 풍호( 鎬)라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서주 망하자 풍호를 버리고 낙읍으로 동천한 것을 말한다.

530.陵遲之 (능지지난),

주나라는 차츰 쇠약해지더니 난왕( 王) 때 이르러

▶난왕( 王)/ 동주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315년에서 즉위하여 기원전 256년에 죽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는 진(秦)나라에 병합되었는데 사마천은 이 해를 주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531.洛邑不祀(락읍불사).

락읍에서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

532.作<周本紀>第四(작<주본기>제사)

이에 <주본기> 제사를 지었다.

533.維秦之先(유진지선),

진나라의 선조는

534.伯 佐禹(백예좌우);

백예인데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을 보좌했다.

535.穆公思義(목공은의),

진목공(秦穆公)은 의(義)를 생각하여

▶진목공(秦穆公)/재위 기원전 660-621년. 춘추오패 중 하나이다. 재위시 진나라의 제도와 풍속을 개혁시켜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죽을 때 진나라의 주요 관리들 170명을 순장시켰다. 그 후유증으로 진나라는 국세가 쇠미해져 전국시대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진나라가 중권세력으로 대두된 것은 진목공(秦穆公)으로부터 약 300년 후인 효공(孝公 : 재위 기원전 362-338년)이 법가인 상앙(商 )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여 국세가 회복되고 나서부터이다.

536.悼豪之旅(도호지려);

효산( 山)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애도하였으나

▶호(豪)는 즉 효산( 山)을 말한다. 지금의 하남성 북서의 황하 연안의 삼문협시(三門峽市)와 민지( 池) 사이에 있다. 기원전 627년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출동했던 섬진(陝秦)의 군사들이 별다른 전공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하다가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던 당진(唐晉) 군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전멸 당했다. 진목공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세 번의 공격 끝에 3년만에 당진을 굴복시키고 효산( 山)으로 나아가 섬진군의 잔해(殘骸)를 수습하고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537.以人爲殉(이인위순),

그러나 목공이 죽으면서 사람으로 순장을 지내게 하니

538.詩歌<黃鳥>(시가<황조>),

그 두려움을 <황조(黃鳥)>라는 시가로 노래했고

▶황조(黃鳥)/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진풍(秦風)>에 나오는 시가의 제목으로 진나라의 국세를 괄목하게 신장시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 된 진목공이 죽을 때 그의 측근에 있던 신하들 170명이 순장되었다. 일시에 진나라 대부분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던 관리들이 순장을 당하자 진나라의 국세는 갑자기 쇠약해지고, 그 후로는 진(秦)나라는 중원의 세력 다툼에서 뒤 처지게 되었다. 그 순장된 170여 명의 인사들 중 차씨 삼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진나라의 삼량(三良)이라고 호칭되던 어진 사람들이었다. 진나라 백성들이 차씨 삼 형제를 순장시킨 진목공을 원망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부른 노래가 <황조(黃鳥)> 가이다. 그러나 남송의 문장가인 소동파는 차씨 삼 형제가 순장된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뜻에 의해 진목공과 함께 죽은 것이지 강제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글을 썼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539.昭襄業帝(소양업제).

후에 소양왕 때에 이르러서야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소양왕(昭襄王)/ 기원전 307년 - 251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범수(范 )와 백기를 등용하여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는 사천성을 점령하여 당시 진나라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초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사천성의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수로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인 지금의 호북성 강릉인 영성( 城)을 점령하여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하고 진나라 땅으로 삼았다. 초나라는 영성에서 쫓겨나 지금의 하남성 진성현(陳城縣)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장군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40만의 조나라 대군을 몰살 시켜 전국시대 나머지 여섯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막강한 진나라의 국력을 바탕으로 소양왕은 제나라의 민왕( 王)에게 제의하여 자기는 서제(西帝), 민왕은 동제(東帝)로 각각 호칭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얼마 후에 제민왕이 동제라는 칭호를 버리자 소양왕도 더 이상 제(帝)란 칭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소양왕(昭襄王)이 제업을 이루었던 말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540.作<秦本紀>第五(작<진본기>제오)

이에 <진본기> 제오를 지었다.

541.始皇卽位(시황즉위),

진시황이 즉위하자

542.竝兼六國(병겸육국);

나머지 육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543.銷鋒鑄 (소봉주거),

무기를 녹여 쇠북을 만들어

544.維偃干革(유언간혁),

군사들을 쉬게 하고 전쟁을 막고

545.尊號稱帝(존호칭제),

호칭을 높여 제(帝)라 칭하며

546.矜武任力(긍무임력);

무력을 과시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547.二世受運(이세수운),

이세에 이르자 그 운이 다하여

548.子 降虜(자영항로).

자영(子 )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자영(子 )/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기원전 206년에 죽었다. 진시황의 장남 부소(扶蘇)의 아들,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혹은 진시황 동생의 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살해하고 자영을 세웠으나 자영은 제호(帝號)를 버리고 조고를 죽였다. 조고의 삼족도 같이 멸했다. 재위 46일 만에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항복하여 항우(項羽)에게 보내졌다. 후에 항우에 의해 살해 당했다.

549.作<秦始皇本紀>第六(작<진시황본기>제육)

이에 <진시황본기> 제육을 지었다.

550.秦失其道(진실기도),

진나라가 그 도를 상실하자

551.豪傑幷擾(호걸병요);

천하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더니

552.項梁業之(항량업지),

항량이 제일 먼저 공업을 세우고

553.子羽接之(자우접지);

항우가 그 뒤를 계승하였다.

554.殺慶救趙(살경구조),

이어서 항우는 조나라를 구한 다음 경자관군(慶子冠軍)을 죽이자

▶경자장군(慶子將軍)/ 송의가 지휘하던 군사들을 부르던 이름.

▶송의(宋義)/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에 죽었다. 진나라 말에 반진의 기치를 들고 일어 난 농민군의 장군.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기 전 초나라의 영윤을 지냈었기 때문에 당시 반진 세력의 지도자 격이었던 항량(項梁)을 따랐다. 항량이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같이 종군하다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 항량이 교만한 기색을 보이자 송의가 간하기를 " 싸움에 이겼다고 장수들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고 군사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군사들은 다음 번 싸움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했으나 항량은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이어서 항량은 계속해서 벌어진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초회왕이 송의가 군사를 잘 부리는 것을 알고 그를 상장군에 명하고 항우(項羽)를 차장으로, 여러 장수들은 그의 휘하에 두도록 하였다. 회왕은 송의를 경자장군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조나라를 구하라는 초회왕의 명을 받은 두 사람이 출병하여 조나라를 구원했으나 항우가 초회왕의 거짓 명으로 군중에서 송의를 살해하고 반군의 수장이 되었다.

555.諸侯立之(제후립지);

제후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556.誅 背懷(주영배회),

이어서 항우는 진나라의 왕 자영(子 )을 죽이고 회왕을 배신하니

557.天下非之(천하비지).

천하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558.作<項羽本紀>第七(작<항우본기>제칠)

이에 항우본기 제칠을 지었다.

559.子羽暴虐(자우포학),

항우는 포학하였으나

560.漢行功德(한생공덕);

한왕 유방은 공을 세우고 덕을 베풀었으며

561.憤發蜀漢(분발촉한),

촉과 한 땅에서 분발하여

▶촉(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지방을 말함.

▶한(漢)/ 지금의 한중시(漢中市) 일대를 말함.

562.還定三秦(환정삼진);

관중으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삼진(三秦)/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옹(雍), 색(塞), 적(翟) 등으로 삼분하여 다스렸다. 함양 이서의 섬서성과 감숙성 동부는 장한(章邯)에게 맡겨 옹왕(雍王)에, 함양 이동지역은 사마흔(司馬欣)에 맡겨 색왕(塞王)에, 섬서성 북쪽은 동예(董 )에 맡겨 적왕(翟王)에 봉했다. 후에 한신의 전격작전에 의해 모두 한왕의 소유가 되어 후에 항우와의 결전에서 유방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

563.誅籍業帝(주적업제),

항우를 죽이고 제업을 이루자

564.天下惟寧(천하유녕),

천하는 비로소 안정되었고

565.改制易俗(개제이속).

엄혹한 진나라의 법제를 고치고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었다.

566.作<高祖本紀>第八(작<고조본기>제팔).

이에 고조본기(高祖本紀) 제8을 지었다.

567.惠之早 (혜지조운),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가 일찍 죽은 뒤

▶ 혜제(惠帝) 유영(劉盈)/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그의 나이 23세 때 죽었다. 기원전 195 - 188년으로 7년간 재위에 있었다.

568.諸呂不台(제려부태),

여씨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569.崇强祿, 産,(궁강록, 산)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을 높여 강력한 권세를 주자

▶여록(呂祿)/ 여후의 둘째 오빠 건성후(建成侯) 여석지(呂釋之) 아들로서 여후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여태후(呂太后) 섭정 원년(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메 봉해지고 무신후(武信侯)라 불리웠다. 섭정 8년 기원전 180년에 여태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상장군에 임명되어 도성의 북군(北軍)을 관장하였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여산(呂産)과 함께 란을 일으켜 여씨 왕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주발(周勃), 진평(陳平) 등에게 살해되고 그가 이끌던 여씨 일족들은 멸족되었다.

▶여산(呂産)/ 여태후의 큰오빠 여주(呂周)의 차자. 혜제 원년 기원전 194년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여태후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에 봉해졌다. 여태후에 의해 도성의 남군을 관장하는 장군에 임명되고 다시 여태후가 죽자 여록과 함께 란을 일으켰으나 주발과 진평에 의해 살해되었다.

570.諸侯謨之(제후모지);

제후들이 도모하려고 하였다.

571.殺隱幽友(살은유우),

여태후가 조나라의 은왕(隱王) 여의(如意)와 유왕(趙幽王) 우(友)를 죽이자

▶은(隱)/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를 말하며 유여의는 고조의 총비 척비(戚妃) 소생으로 고조가 죽자 여태후가 불러 독약을 먹여 죽이고 척비는 눈알을 뽑고, 팔다리를 자른 다음 우리에 가두어 돼지처럼 키우다 죽였다.

▶유우(幽友)/ 고조 유방의 아들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에 다시 봉해졌다. 혜제가 죽고 여태후의 전힁에 반대하자 살해되었다.

572.大臣洞疑(대신통의),

모든 대신들이 여씨들을 의심하게 되어

573.遂及宗禍(수급종화).

결국은 그 종족들이 멸족의 화를 입게 되었다.

574.作<呂太后本紀>第九(작<여태후본기>제구)

이에 여태후본기를 제 9를 지었다.

575.漢旣初興(한기초흥),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576.繼嗣不明(계사불명),

제위를 잇는 순서가 확실하지 않아

577.迎王踐祚(영왕천조),

대왕(代王)을 모셔 와 제위(帝位)에 앉히자

▶대왕(代王)/ 고조의 4남 유항(劉恒)이며 문제(文帝)이다. 재위에 오르자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고 산업을 장려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몸소 행하여 뒤를 이은 경제(景帝)와 함께 치세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이 때를 가리켜 문경(文景)의 치(治)라 부른다.

578.天下歸心(천하귀심);

비로소 천하의 인심이 안정이 되었다.

579. 除肉刑(견제육형),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을 없애고,

580.開通關梁(개통관량),

통행의 요로에 설치한 관(關)과 나루터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581.廣恩博施(광은박시),

그 은혜를 널리 베풀자

582.厥稱太宗(궐칭태종),

그를 일컫어 태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83.作<孝文本紀>第十(작<효문본기>제십)

이에 <효문본기(孝文本紀)> 제 10을 지었다.

584.諸侯驕恣(제후교자),

제후들이 교만 방자해진 결과

585.吳首爲亂(오수위란),

오왕이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586.京師行誅(경사행주),

황제의 군사를 보내어 반란자들을 주살하니

587.七國伏辜(칠국복고),

칠국이 그 죄에 굴복하였다.

588.天下翕然(천하흡연),

천하는 화평하게 되었고

589.大安殷富(대안은부).

백성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이 되어 풍요롭게 되었다.

590.作<孝景本紀>第十一(작<효경본기>제십일)

이에 <효경본기(孝景本紀)> 제 11을 지었다.

591.漢興五世(한흥오세),

한나라가 흥기한 지 오세에 이르러

592.隆載建元(융재건원),

건원(建元) 연간에 융성해 졌다.

▶건원(建元)/ 한무제가 시작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연호이다.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부터 무제 5년 기원전 13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593.外攘夷狄(외양이적),

나라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594.內脩法度(내수법도),

나라 안으로는 법규를 정비하였고

595.封禪,改正朔, 易服色(봉선, 개정삭, 이복색).

봉선을 행했으며, 역법을 고치고 , 복색을 바꾸었다.

596.作<今上本紀>第十二(작<금상본기>제십이

이에 금상본기(今上本紀) 제 12를 지었다.

597.維三代尙矣(유삼대상의),

하상주(夏商周) 삼대는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598.年紀不可考(연기불가고),

구체적인 연대기를 고찰할 수 없어

599. 盖取之譜牒舊聞(개취지보첩구문),

대체적으로 보첩이나 전언에

600.本于玆(본우자),

근거하여

601.于是略推(우시략추),

대략적인 추측으로

602. 作<三代世表>第一(작<삼대세표> 제일).

삼대세표(三代世表) 제일을 지었다.

603. 幽 之后(유려지후),

주나라의 려왕( 王)과 유왕(幽王) 이후에

604. 周室衰微(주실쇠미),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605. 諸侯專政(제후전정),

제후들이 그 정치를 스스로 행하였으나

606. <春秋>有所不紀(<춘추>유소불기);

춘추에도 그 기록이 빠진 것이 있다.

607.而譜牒經略(이보첩경략),

그러나 보첩에 기록된 경의 간단한 기록들을 보면

606. 五覇更盛衰(오패갱성쇠),

오패가 번갈아 가며 흥하고 망했다.

607. 慾睹周世相先后之意(욕도주세상선후지의),

그래서 주나라 시대에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한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608. 作<十二諸侯年表>第二(작<십이제후연표>)

<십이제후연표> 제이를 지었다.

609. 春秋之后(춘추지후),

춘추시대 이후로

610. 陪臣秉改(배신병개),

배신들이 정권을 잡고

611. 强國相王(강국상왕);

강국이 되어 서로 왕호를 칭했다.

612. 以至于秦(이지우진),

이윽고 진나라에 이르러

613. 卒幷諸夏(졸병제하),

중원의 제후국들을 모조리 병합하고

614. 滅封地(멸봉지),

그들의 봉지를 없앤 다음

615. 擅其號(천기호).

제호(帝號)를 제멋대로 칭했다.

616. 作<六國年表>第三(작<육국연표>)

이에 <육국연표> 제삼을 지었다.

617. 秦旣暴虐(진기포학),

진나라가 이미 폭정을 행하매

618. 楚人發難(초인발난),

초나라 사람이 일어나 난을 일으켰다.

619. 項氏遂亂(항씨수란),

항우가 그 뒤를 이으니

620. 漢乃扶義征伐(한내부양정벌);

한나라는 의를 내세워 정벌군을 일으켰다.

621. 八年之間(팔년지간),

그 팔 년 동안

622. 天下三 (천하삼선),

천하는 주인이 세 번 바뀌었으며

▲ 삼선(三 )/ 세 번 바뀌었다는 말은 처음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陳勝)과 그 뒤를 이는 항우(項羽), 뒤이어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한왕조를 세운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623. 事繁變衆(사번변중),

사건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다.

624. 故詳著<秦楚之際月表>第四(고상저 <진초지제월표>제4)

이에 상세하게 진초쟁패월표 제4를 지었다.

625. 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626. 至于太初百年(지우태초백년)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 백년이 지나는 동안

▲태초(太初)/한무제 때 사용한 10개의 연호 중 7번째의 것으로 기원전 103년부터 101년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627. 諸侯廢立分削(제후폐립분삭),

제후들은 그 지위를 잃어버리거나 다시 세워지고, 그 봉지는 나뉘거나 깎였으나

628. 譜記不明(보기불명),

그 보첩(報牒)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629. 有司靡踵(유사미종),

사관이 그 행적을 쫓지 못하고

630. 强弱之原雲以世(강약지원운이세)

강약의 원리를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약지원운(强弱之原雲)/ 제후국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먼저 망하고 약하면 약할수록 요행히 살아 남은 현상을 말한다.

631. 作<漢興以來諸侯年表>第五(작<한흥이래제후연표>제오)

이에 <한흥이래제후연표> 제오를 지었다.

632. 維高祖元功(유고조원공),

고조(高祖)가 천하를 얻었을 때,

633. 輔臣股肱(보신고굉),

그를 보좌한 창업공신들은

644. 剖符而爵(부부이작),

모두가 신임을 받아 봉록과 작위를 얻어

645. 澤流苗裔(택류묘예),

그 은혜와 혜택이 후세에 전해졌으나

646. 忘其昭穆(망기소목),

그 중에는, 가깝고 먼 친분관계를 망각한 결과

▶소목(昭穆)/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로서 종묘(宗廟)와 묘지(墓地)에 모시는 신위(神位)의 순서로서, 그 시조(始祖)는 가운데에 두고 소(昭)라 칭했으며, 그 후손들 중 2, 4, 6 세 등의 후손들은 시조의 좌측에, 3, 5, 7 세 등의 후손들은 우측에 두고 목(穆)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소목(昭穆)이라는 말은 종족들 간의 가깝고 먼 관계를 말한다.

647. 惑殺身隕國(혹살신운국).

그 중에 어떤 제후들은 생명을 잃기도 하고 혹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648. 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작<고조공후자연표>제육)

이에 <고조공신후자연표> 제육을 지었다.

649. 北討强胡(북토강호),

북쪽으로는 강성한 흉노를 토벌하고

650. 南誅勁越(남주경월),

남쪽으로는 억센 월인들을 죽였으며

651. 征伐夷蠻(정벌이만),

다시 동이와 남만의 오랑캐를 정벌했다.

652. 武功爰列(무공원열)

그때 세운 무공의 순서에 따라 열후에 세워졌다.

653. 作<建元以來侯者年表>第八(작<건원이래후자연표>제팔)

이에 <건원이래제후연표> 제팔을 지었다.

654. 諸侯旣强(제후기강),

제후들이 이미 강성해지자

655. 七國爲從(칠국위종),

칠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칠국(七國)/ 오초(吳楚) 칠국의 란을 말함. 전한의 6대 황제인 경제(景帝 : 재위 기원전 157 - 141년으로 한무제는 그의 아들이다.) 때인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 )가 주도한 반란. 칠국이란 오왕 외에 초왕(楚王) 유무(劉戊), 교서왕(膠西王) 유앙(劉 ),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熊渠),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 光), 조왕(趙王) 유수(劉遂) 등을 말한다. 경제가 즉위하자 법가인 조착( 錯)을 기용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줄이려고 하자 칠왕이 령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夫), 란포(欒布), 두영(竇 ) 등의 장군을 보내어 진압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는 조착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칠국의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그 마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오초(吳楚) 연합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성(永城) 북서 쪽의 극벽(棘壁)이란 곳에서 양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그러나 오초 반란군도 양나라의 도성인 수양성( 陽城)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오초 연합군이 양나라의 수양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태위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주아부는 토벌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던 전략상의 요충지인 창읍(昌邑)으로 들어가 오초 연합군이 본국과의 연락로를 끊었다. 반란군이 창읍으로 달려와 토벌군을 공격했지만 주아부는 대응하지 않고 지구전을 벌렸다. 오초 반란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있었음으로 시간이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반란군은 곤경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주아부의 생각대로 이윽고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장병들이 잇달아 달아났다. 주아부가 창읍의 성에서 나와 반란군의 본군을 공격했다. 오왕은 친위대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초왕 유무(劉戊)는 자살하고 말았다. 한편 교서,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은 연합하여 오초에 호응하려고 했으나 제남왕이 중도에 마음을 바꿔 반란군에서 이탈하자 세 왕의 연합군이 그 도성인 임치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남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싸움은 교착상태로 빠졌다. 그 사이 오초 연합군이 주아부의 토벌군에 패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왕들은 임치성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토벌군이 추격하자 세 왕은 모두 자살했다. 한편 조왕 유수는 한단성(邯鄲城)에서 농성하며 저항했지만 한나라 장군 역기( 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창읍에서 달아난 오왕 유비는 장강을 도하하여 오나라 본국으로 들어가자 오왕의 요청에 응하여 출동한 동월군(東越軍)의 마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는 반란군에게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동월왕은 한나라 조정과 내통하고 있던 상태였다. 동월군은 오왕을 잡아죽이고 그 목을 한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윽고 오초칠국의 란은 조왕이 한단성에서 농성하다 자살한 시점을 그 끝으로 본다면 10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림. 8 오초칠국의 란 형세도.

656. 子弟衆多(자제다중),

그러나 제후들의 자제가 많아지자

657. 無爵封邑(무작봉읍),

그들에게 나누어 줄 작위에 봉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658. 推恩行義(추은행의),

이에 은혜를 베풀어 의를 행하도록 하여

▶추은(推恩)/ 한무제 14년 원삭 2년 즉 기원전 127년에 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건의에 따라 추은령(推恩令)내려 제후들의 작위를 계승한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제들에게도 그 봉토를 나누어주어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659. 其勢銷弱(기세소약),

그 세력을 약화시켰고

660. 德歸京師(덕귀경사).

그 덕은 모두 황실로 향하게 했다.

661. 作<王子侯者年表>第九(작<왕자후자연표>제구)

이에 <왕자후자연표>제구를 지었다.

662. 國有賢相良將(국유현상양장),

나라에 어진 재상과 훌륭한 장수가 있음은

663. 民之師表也(민지사표야).

백성들의 본보기다.

664. 維見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유견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장군과 재상 그리고 명신 연표를 보고

665. 賢者記其治(현자기기치),

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치적을 기록하고

666. 不賢者彰其事(불현자창기사).

어질지 못할 자에게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기록하여 널리 알렸다.

667. 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第十(작<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

이에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제십을 지었다.

668. 維三代之禮(유삼대지례),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예(禮)는

669. 所損益各殊務(소손익각수무),

덜하고 더한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각기 그 일의 사정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670. 然要以近性情(연요이근성정),

그러나 그 요지는 사람의 성정에 가까이 하고

671. 通王道(통왕도),

왕도에 통하고자 한 것이다.

672. 故禮因人質爲之節文(고예인인질위지절문),

그럼으로 예(禮)는 사람의 자질에 따라 화려함을 절제하고

673. 略協古今之變(약협고금지변).

대략 고금의 변을 참작하게 한다.

674. 作<禮書>第一.(작<예서>제일)

이에 <예서> 제일을 짓는다.

675. 樂者(악자),

음악이란 것은

676. 所以移風易俗也(소이이풍역속야).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것이다.

677. 自<雅><頌>聲興(자<아><송>성흥),

<아(雅)>와 <송(頌)>의 소리가 일어나면서부터

678. 則已好鄭衛之音(즉이호정위지음)

사람들은 이미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어,

679. 鄭衛之音所從來久矣(정위지음소종래구의).

정과 위 두 나라의 음악은 그 유래가 오래게 되었다.

680. 人情之所感(인정지소감),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으로서 감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681. 遠俗則懷(원속즉회).

풍속이 전혀 다른 먼 지방의 사람까지도 회유할 수 있다.

▶遠俗則懷(원속즉회) " 惡子所以感和人情. 人情旣感卽遠方殊俗莫不懷柔向化也" 懷, 人心歸向.-史記集解,

被人情所感發, 那遠方異俗之人就會歸附-文白對照

682. 比<樂書>以述來古(비<악서>이술래고),

악서를 참고하여 상고 이래의 음악에 대해 기술하였다.

683. 作<樂書>第二(작<악서> 제이)

이에 <악서> 제이를 지었다.

684. 非兵不强(비병불강),

군사가 없으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없고

685. 非德不昌(비덕불창),

나라 안에 덕이 없으면 번창하게 할 수 없다.

686. 黃帝, 湯, 武以興(황제, 탕, 무이흥),

황제와 탕임금, 주무왕은 나라를 일으켜 흥성하게 만들었으나

687. 桀, 紂, 二世以崩(걸, 주, 이세이붕)

하나라의 걸왕(桀王), 상나라의 주왕(紂王), 그리고 진나라의 이세(二世)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되었다.

688. 可不愼歟(가불신서).

이에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89. <司馬法>所從來尙矣(<사마법>소종래상의),

<사마병법>은 전해 온지 이미 오래 되었고

▶사마법(司馬法)/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威王: 재위 기원전 359- 319년)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여 과거 장군들이 써 놓았던 병서를 정리하게 했는데 그 중 제나라 경공(景公 : 재위 기원전 547- 490년) 때의 명장 사마양저(司馬穰 )의 병법이 포함되어 있어 사마양저병법이라고 칭하고 줄여서 사마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690 太公, 孫, 吳, 王子能紹而明之(태공, 손, 오, 왕자능소이명지),

태공(太公) 여상(呂尙), 손자(孫子), 오기(吳起), 왕자성보(王子成父) 등은 능히 그 원리를 이어 받아 병사의 일을 밝힐 수 있어

▶여상(呂尙)/ 병법서인 육도(六韜)를 지었다. 육도는 태공이 주문왕과 주무왕에게 경세제민(經世濟民)과 부국강병(富國强兵) 책에 대해 논한 것이다. 모두 3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 문무도(文武韜) 17편은 치국(治國) 관하여, 제2권 용호도(龍虎韜) 25편은 기변(奇變)과 용맹과단(勇猛果斷), 제3권 표견도(豹犬韜) 18편은 기계(奇計)와 돌진(突進)에 관해 서술했다.

손자(孫子)/ 손자는 오자서와 함께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한 손무(孫武)와, 후에 제위왕(齊威王) 밑에서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를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에서 대파한 제나라의 손빈(孫 ) 두 사람을 말한다. 두 사람은 각각 별도의 병법서를 저술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자(吳子)/ 오기(吳起)를 말한다. 전국시대 때 전략가로 원래 위(衛)나라 사람이다. 처음에는 노나라에서 장군을 했고 이어서 위(魏)나라로 옮겨 여러 번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위문후(魏文侯)에 의해 서하(西河) 태수로 임명되었다. 위문후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 초나라로 망명했다. 초도왕(楚悼王 : 재위 기원전 402-381년) 밑에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어 초나라의 법률을 개선하고 제도를 혁신시켜 초나라의 국력을 일신시켰다. 도왕이 죽자 오기의 개혁 정치에 불만을 품은 공족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왕자성보(王子成甫)/ 춘추 때 제나라 양공(襄公 : 재위 기원전 698-686년) 때 정경(正卿)으로, 유명한 군사전략가. 왕자성보(王子成父), 혹은 왕자성보(王子城父)라고도 한다. 제환공이 재위에 오르자 그를 제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그는 군법을 밝혔으며 신상필벌을 행하여 일단 정벌군을 일으키면 싸움에서 이겨 환공을 짧은 시간에 패자의 자리에 끌어 올렸다. 이에 사마천은 그를 태공, 손자, 오기와 같은 반열에 세웠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왕손(王孫)>의 작으로 병법 16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을 왕자성보의 병법서로 보고 있다.

691. 切近世(절근세),

근자의 정세를 살피는데 적합하고

692. 極人變(극인변),

인사의 변화에 대해 통하게 했다.

693. 作<律書>第三(작<율서>제삼)

이에 <율서> 제삼을 지었다.

694. 律居陰而治陽(율거음이치양),

율은 음(陰)에 근거로 하여 양(陽)을 다스리며

695. 曆居陽而治陰(역거양이치음),

력은 양을 근거로하여 음을 다스린다.

696. 律曆更相治(율력갱상치),

그래서 율과 역은 번갈아 가며 서로를 다스림으로

697. 間不容 忽(간불용표홀).

간발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

698. 五家之文 異(오가지문불이),

옛날 다섯 왕조에서 만든 역법은 서로 같지 않아 옳다고 여겨지지 않으나

▶오가지문(五家之文)/ 황제력(黃帝曆), 전욱력( 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을 말한다.

699. 維太初之元論(유태조이원론).

단지 태초 원년만이 바른 것이라고 논하는 바다.

700. 作<曆書>第四(작<역서>제사)

이에 <역서> 제사를 짓는다.

701. 星氣之書(성기지서),

별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에 대한 서적은

702. 多雜 祥(다잡기상),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를 잡다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703. 不經(불경);

황당하고 근거가 없어 상도가 아니다.

704. 推其文(추기문),

그 문장을 미루어 연구하여

705. 考其應(고기응),

그것의 효험을 고찰해 봤으나

706. 不殊(불수).

결코 특이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707. 比集論其行事(비집논기행사).

황제께서 전문가들을 불러 그 일에 대한 것들을 토론하여 규명하도록 명하여

708. 驗于軌度以次(험우궤도이차),

그 순서에 따라 운행되는 법도를 파악하였다.

709. 作<天官書>第五.(작<천관서>제오)

이에 <천관서>제오를 지었다.

710. 受命而王(수명이왕),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711. 封禪之符罕用(봉선지부한용),

봉선을 행하는데 소홀히 했다.

712. 用則萬靈罔不 祀(용즉만령망불인사).

만일 봉선을 한 번 행한다면 세상의 모든 신들이 따로 제사를 받지 않아도 됨으로

713. 追本諸神名山大川禮(추본제신명산대천례).

이에 명산대천의 여러 신들에 대한 제례에 대해 그 근본을 추구하여

714. 作<封禪書>第六(작<봉선서>제육)

<봉선서> 제육을 지었다.

715. 維禹浚川(유우준천),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이 하수(河水)를 뚫어

716. 九州攸寧(구주유녕);

구주가 평안하게 되었고

717. 爰及宣防(원급선방),

선방궁(宣房宮)을 건설할 때는

▶선방궁(宣房宮)/원광(元光) 3년 기원전 132년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범람하였다. 그후 20여 년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명하여 호자의 둑을 다시 만들고 그 자리에 궁을 짓고 선방궁이라 이름지었다.

▶호자(瓠子)

718. 決瀆通溝(결독통구).

도랑을 뚫어 강물을 통하게 만들었다.

719. 作<河渠書>第七(작<하거서>제칠)

이에 <하거서> 제칠을 짓는다.

720. 維幣之行(유폐지행),

화폐의 유통시키는 것은 단지

721. 以通農商(이통농상);

농사와 상업을 통하게 함이다.

722. 其極則玩巧(기극즉완교),

그러나 그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농단과 재주를 부리며

723. 竝兼玆殖(병겸자식),

남의 재산을 합쳐 증식시키기 위해

724. 爭于機利(쟁우기리),

서로 그 이익을 다투게 되어

725. 去本趨末(거본추말).

상업이 농업을 압도하게 되어 본말이 전도되게 된다.

726. 作<平準書>以觀事變, 第八(작<평준서>이관사변, 제팔)

이에 그 일의 변화를 보기 위해 <평준서> 제팔을 짓는다.

727. 太伯避歷(태백피력),

태백이 계력을 피해

▶태백(太伯)/ 주족(周族)의 족장.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고공단보가 계력의 아들인 창(昌)이 주족을 일으킬 재목임을 알고 그의 자리를 계력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계력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남만으로 달아나 만족의 습속을 하고 살다가 그곳의 군주가 되었다. 한편 주나라는 계력의 뒤를 이은 창(昌)이 주족의 족장이 되어 은나라로부터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인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의 시호가 주문왕(周文王)이다.

728. 江蠻是適(강만시적);

강수를 넘어 남만으로 달아났다.

729. 文武攸興(문무유흥),

이어 주나라는 주문왕과 주무왕의 치세에 힘입어 흥기하여

730. 古公王迹(고공왕적).

고공단보가 꿈꾸었던 왕업을 세웠다.

731. 闔廬弑僚(합려시료),

한편 태백의 후예들이 세운 남만의 오나라에서는 합려가 왕료(王僚)를 시해하여 그 군주를 차지하고

732. 賓服荊楚(빈복형초);

다시 초나라를 복종시켰으며

733. 夫差克齊(부차극제),

다시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734. 子胥 夷(자서치이);

다시 오자서를 죽여 말가죽 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735. 信 親越(신비친월),

부차는 백비(伯 )의 간사스러운 말을 믿고 월나라와 친해진 결과

736. 吳國旣滅(오국기멸).

오나라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737. 嘉伯之讓(가백지양),

태백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미덕을 기리어

738. 作<吳世家>第一(작<오세가>제일).

<오세가> 제일을 지었다.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신(申)/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백이(伯夷)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원래 신나라의 근거지는 섬서성 북쪽이었으나 주선왕 때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의 땅에 봉해졌다.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신의 땅은 초나라가 북진하는데 전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여(呂)/ 역시 강성(姜姓)의 일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사악(四嶽)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쪽에 있었다. 여나라도 역시 춘추 초기 초나라에 의해 병탄 당했다.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다가

741. 卒歸西伯(졸귀서백),

결국은 서백에게 귀의하여

742. 文武是師(문무시사);

주문왕과 주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743. 功冠群公(공관군공),

그가 세운 공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었고

744. 繆權于幽(무권우유);

권모술수에 제법 능했다.

745. 番番黃髮(번번황발),

그는 자기의 머리가 황백색으로 변한 90 노구에

746. 爰饗營口(원향영구).

제나라 땅인 영구(營口)를 봉지로 받았다.

747. 不背柯盟(불배가맹),

그의 후손 중 가(柯) 땅의 맹약을 배반하지 않았던

748. 桓公以昌(환공이창),

제환공은 그로 인하여 크게 일어나

749. 九合諸侯(구합제후),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회합시킬 수 있었고

750. 覇公顯彰(패공현창).

패자가 되어 그 업적이 만고에 빛나게 되었다.

751. 田 爭寵(전감쟁총),

후에 전상(田常)과 감지( 止)가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752. 姜姓解亡(강성해망).

이윽고 강성의 제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753. 嘉父之謀(가부지모),

상보(尙父)의 훌륭한 권모를 칭송하여

754. 作<齊太公世家>第二(작<제태공세가>제이)

<제태공세가>제이를 짓는다.

755. 依之違之(의지위지),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어떤 자들은 복종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따르지 않았다.

756. 周公綏之(주공수지);

주공단이 이것을 안정시키고

757. 憤發文德(분발문덕),

문덕을 베푸는데 한층 분발하자

758. 天下和之(천하화지);

천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759. 輔翼成王(보익성왕),

주공단이 어린 성왕을 보좌했음으로

760. 諸侯宗周(제후종주),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고

761. 隱桓之際(은환지제),

그러나 주공단의 자손들인 노은공(魯隱公)과 노환공(魯桓公) 시대 때는

762. 是獨何哉(시독하재)?

어찌하여 유독 편안하지 못했던가?

763. 三桓爭强(삼환쟁강),

삼환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삼환(三桓)/ 춘추시대 때 노나라의 국정을 전담했던 세 귀족 가문을 말하며 세 가문의 시조는 모두 노환공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삼환이라 부른 것이다. 노환공은 문강을 따라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제양공에게 살해당했다. 노환공이 두 사람의 간통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제양공(齊襄公)이 사람을 시켜 수레 안에서 살해 한 것이다. 노환공의 뒤는 적장자인 노장공(魯庄公) 동(同)이 이었다. 노장공의 서장자인 공자경보(公子慶父)와 숙아(叔牙) 그리고 계우(季友)의 후손들을 삼환이라 한 것이다. 삼환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桓公 x宮女

①孟孫氏/식읍은 성읍( 邑)이다.

公子慶父 ⇒公孫敖 ⇒公孫穀/公孫難 ⇒仲孫蔑

②叔孫氏/식읍은 후읍( 邑)이다.

公子牙(叔牙) ⇒ 公孫玆⇒叔仲彭生 ⇒叔孫得臣 ⇒叔孫僑如

桓公x文姜 ▶庄公(公子同)⇒ 東門遂(장공의 서자/仲遂)⇒

/仲孫氏

③季孫氏/식읍은 비읍(費邑)과 문양(汶陽)이다.

公子友(季友)⇒ 季无佚⇒ 季孫行夫(季文子)

764. 魯乃不昌(노내불창).

노나라는 결국은 크게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

765. 嘉旦<金 >(가단<금등>)

주공단이 행한 금등(金 )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금등(金 )/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일 년만에 병이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주공단은 주무왕 대신에 자기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를 들였다. 그리고 태사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고 축문을 쓰서 읽게하였다. 점의 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 점괘를 금괘 안에 보관하고 금으로 밀봉하였다. 금등이란 금을 녹여 그 물로 봉함한 궤를 말했으나 후에 그 안에 든 축문의 내용을 말하게 되었다. 그 축문은 <상서(尙書)> <주서(周書)>에 수록되어 있다.

766.作<周公世家>第三(작<주공세가>제삼)

<주공세가>제삼을 짓는다.

 

사마천-태사공자서 02

 

[태사공자서(5-2]

 

240.而太史公留滯周南(이태사공유체주남),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周南)에 머물러

 

♣주남(周南)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241.不得與從事(부득여종사), 봉선을 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간 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242.故發憤且卒(고발분차졸).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243.而子遷適使反,(이자천적사반) 이때 마침 그의 아들 사마천이 천자의 사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244.見父于河洛之間.(견부우하락지간) 하수와 락수 지간에 그의 부친을 뵙자

 

245.太史公執遷手而泣曰:(태사공집천수이읍왈) 태사공은 사마천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246.“ 余先周室之太史也.(여선주실지태사야) 우리들의 선조들은 주나라의 태사였다.

 

247.自上世嘗顯功名于虞夏, (자상세상현공명우우하) 우리 종족들은 까마득한 옛날인 하나라 때부터 공명을 세상에 들어낸 이래

 

248.典天官事. (전천관사) 하늘에 관한 일을 주관해왔다.

 

249.後世中衰, (후세중쇠)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쇠락해지기 시작하더니

 

250.絶于予乎?(절우예호) 나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려 하고 있지 않느냐?

 

251.汝復爲太史,(여복위태사) 너는 다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

 

252.則續吾祖矣. (즉송오조의) 우리들 조상들이 해 왔던 일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253.今天子接千歲之統, (금천자접천세지통) 지금 천자께서는 천년 대통을 이어 받아

 

254.封泰山, (봉태산) 태산에 봉선을 행하시려고 가셨는데

 

255.而余不得從行, (이여부득종행) 나는 부득이 따라가 수행할 수 없었다.

 

256.是命也夫, (시명야부) 이것은 단지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257.命也夫! (명야부) 진실로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258.余死, (여사) 내가 죽으면

 

259.汝必爲太史;(여필위태사) 너는 반드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260.爲太史, (위태사) 너는 태사가 되어

 

261.無忘吾所欲論著矣 (무망오소욕론저의),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결코 잊으면 안 될 것이다.

 

262.且夫孝始于事親, (차부효시우사친) 무릇 효도라는 것은 그 부친의 뜻을 받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263.中于事君, (중우사군) 출사하여 그 군주를 섬기다가

 

264.終于立身. (종우입신) 입신하는데서 끝나며

 

265.揚名于後世, (양명우후세) 후세에 이름을 남겨

 

266.以顯父母, (이현부모) 그 부모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267.此孝之大者. (차효지대자) 효도의 가장 큰 도리라 할 것이다.

 

 

태사공자서(8)

 

268.夫天下稱誦周公,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을 칭송하고 있는 것은

 

♣주공(周公)/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269.言其能論歌文武之德, 그가 능히 문왕과 무왕의 덕을 시가(詩歌)로서 논했으며

 

■문왕(文王)/원래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270.宣周邵之風,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노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시경 국풍(國風)에 실려 있는 장의 이름이며 주공(周公) 단(丹)과 소공(召公) 석(奭)이 함께 문왕의 명을 받들어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 원정을 나갔다가 그곳의 시가를 수집해 왔는데 주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주남, 소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소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271.達太王王季之思慮, 결국은 태왕(太王)과 왕계(王系)의 사려 깊은 지혜에 통하게 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태왕은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원래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의 빈( ) 땅에 살았으나 이민족인 훈육(燻 )의 침입을 받자 고공단보는 주족을 이끌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 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공단보는 아들을 셋을 두었다. 장자가 태백, 둘째는 우중이고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주족들을 번성하게 할 사람은 왕계의 아들인 창(昌)(후에 주문왕)이 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족장 자리를 계력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남쪽으로 달아나 오랑캐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272.爰及公劉, 마침내는 공유의 공적에 미치고

 

■공유(公劉)/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다음은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공유 부분이다.

<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 )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農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273.以尊后稷也. 후직까지 높인 까닭이다.

 

■후직(后稷)/ 주족의 시조로 요임금과 순임금 때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기(棄)를 말한다. 후직은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벼슬 이름이다. 다음은 사기 주본기의 후직에 관련된 부분이다.

<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이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부른 것이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 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 기(棄)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 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274.幽之后, 유왕과 려왕 이후

 

■유왕/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 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 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려왕(王)/ 서주의 11대 왕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기원전 841년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지금의 산서성 곽현인 체( ) 땅으로 달아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서주는 달아난 려왕을 대신해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대신 나라를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선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이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275.王道缺, 왕도가 무너지고

 

276.禮樂衰, 예악이 쇠하게 되자

 

277.孔子脩舊起廢, 공자께서 옛것을 고치고 버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278.論<詩>, <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논하셨고

 

279.作<春秋> 춘추(春秋)를 논하자

 

280.則學者至今則之. 후세의 학자들이 그것을 규범으로 삼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281.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 획린(獲麟)한 이래 400여 년 동안

 

♣획린(獲麟)/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기원전 722년에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 장(將) 39년 기원전481년에 끝나는 240년 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노애공 치세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자 공자는 그것은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獲麟)이라고 한다. 공자는 2년 후인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282.而諸侯相兼, 제후들은 서로 다투어 나라를 넓히는 일에만 몰두하여

 

283.史記放絶,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284.今漢興, 지금 한나라가 흥기하여

 

285.海內一統, 온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286.明主賢君忠信死義之士, 밝고 어진 임금과 충신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가득하니

 

287.余爲太史而弗論載, 내가 태사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논평하여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288.廢天下之史文,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폐하고 말았구나!

 

289.余甚懼焉,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290.余其念哉!” 너는 나의 이 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91.遷俯首流涕曰: 사마천이 머리를 수그리며 눈물을 흘리며 그의 부친에게 말했다.

 

292.“ 小子不敏, 소자가 불민하나

 

293.請悉論先人所次舊聞, 선조들이 정리하여 놓은 옛날의 기록들을 논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294.弗敢闕.”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309.卒三歲而遷爲太史公(졸삼세이천위태사공), 사마천은 그 부친이 세상을 뜬지 삼 년 후에 태사공이 되어,

 

310.紬史記石室金櫃之書(유사기석실금궤지서). 역사 기록과 석실의 금궤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들을 편철(編綴)하였다.

 

311.五年而當太初元年, 그리고 5년 뒤인 태초(太初) 원년,

 

■태초(太初) 원년/ 한무제 37년인 기원전 104년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역법은 그 시작을 매년 10월로 했으나 1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고쳐 태초력이라 하고 연호를 원봉(元封)에서 태초(太初)로 개원했다. 태초력은 그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까지 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陰曆)을 말한다. 한무제(漢武帝)는 그의 재위 54년 동안 연호를 모두 11번 바꿨다. 태초(太初)는 한무제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1까지 사용했던 한무제의 7번 째 연호이다.

 

312.十一月甲子朔旦冬至,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313.天曆始改, 역법을 개정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314.建于明堂, 명당을 세워

 

■명당(明堂)/중국 고대에 있어서 천자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조회, 제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명당을 노래한 명당부(明堂賦)이다.

‘ 빛나는 명당은 양지 녘에 자리 잡고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본다. 하늘 아래 한 명뿐인 천자가 정령을 발하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배알하며 조공을 바친다. 명당의 내부는 종횡(縱橫)으로 각각 세 개씩의 방을 만드니 모두 아홉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 가운데의 큰방에 태묘(太廟)를 모시고 태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태실(太室)을 두었다. 또한 각 태실의 한 가운데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溜)를 두었다. 열고 닫는 단짝 문으로 36개의 문을 내고 72개의 창문을 열을 지어 달았다.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그 직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명당의 윗 모습은 둥글고 아래 모양은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기수(奇數)와 우수(隅數)로 이루어진 법칙에 따른 것이다. 관리들이 서는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은 것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라 마땅히 명당의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여러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며, 작위가 후작(侯爵)인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伯爵)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천자에게 절을 올린다. 자작(子爵)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늘어서고, 남작(男爵)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도열한다. 융족은 금(金)이니 서문 밖에, 이(夷)족은 목(木)이니 동문 밖에, 북문 밖에는 화(火)의 종족인 적(狄)족이, 남문 밖에는 수(水)의 종족인 만(蠻)족이 선다. 천하 구주(九州)의 지방 관원들은 명당 담장 밖에서 오른 쪽으로 열을 서서 도열하고,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은 담장 밖에 도열하여 지방 관원들의 맞은편인 왼쪽에 서서 도열한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의장용 도끼들은 마치 수많은 나무들이 우뚝 솟아나서 앞 다투어 천자에게 배알하듯이 하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며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모습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룬 듯 하다. 연기가 걷히고 여러 백관들이 일제히 도열하면 하늘에서 태양이 나타나면, 천자께서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면류관을 쓰시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으신다. 비단에 도끼의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뒤에 둘러치시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천하 제후들과 구름 같은 관리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것을 굽어보시면서 온 천하가 복종하고 있음을 아신다.

 

315.諸神受紀. 여러 신들에게 기년이 바뀌어 천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고했다.

 

■제신수기(諸神受紀)/남북조 때 남송(南宋)의 배인(裵 馬+因)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의 “ 告于百神, 與天下更始, 著紀于是”를 따랐다.

 

316.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했다.

 

317.“ 先人有言: 돌아가신 부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318.‘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 주공이 죽고 5백 년이 지나 공자(孔子)가 태어나셨고

 

■주공(周公)의 정확한 사망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보며 고 공자의 탄생은 기원전 551년이다.

 

319.孔子卒后至于今五百歲, 다시 공자가 돌아가신 이래 지금 500년이 되었으니,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 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 113년의 일이니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이 아니라 사실은 363년 만의 일이다.

 

320.而能紹明歲, 누가 나타나 능히 그 뜻을 이어받아 밝은 시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321.正<易經>, 주역(周易)과 그 해설서들을 바르게 하고

 

322.繼<春秋>, 춘추를 계승하여 끊어진 역사기록을 잇게 할 것이며

 

323.本<詩>, <書>, <禮>, <樂>, 之際?’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의 근본을 밝히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324.意在斯乎! 意在斯乎! 아버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325.小子何敢讓言.” 소자가 어찌 감히 그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태사공자서(10)

 

312.上大夫壺遂曰(대부호수왈): 상대부 호수(壺遂)가 물었다.

 

■호수(壺遂)/전한 무제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313.“昔孔子何爲而作<春秋>哉(석공자하위이작)?” “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314.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대답했다.

 

315.“余聞董生曰(여문동생왈): “나는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듣기를

 

■동중서(董仲舒)/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한나라가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후로 유학은 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 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316.‘ 周道衰廢(주도쇠폐),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여 행하여지지 않으매

 

317.孔子爲魯司寇(공자위노사구),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으나

 

■사구(司寇)/춘추전국 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을 말한다.

 

318.諸侯害之(제후해지), 제후들은 해치려 하고

 

319.大夫雍之(대부옹지). 대부들은 공자님의 뜻을 펼치시려 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320.孔子知言之不用(공자지언지불용),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321.道之不行也(도지불행야), 추구하려는 도도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322.是非242年之中(시비242년지중), 242년에 걸친 역사의 시비를 따짐으로서

 

■242년/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는 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14년 기원전 481년까지의 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春夏秋冬)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한 것이고 이어서 동주가 시작된 기원전 771년부터 지금의 산서성에 있던 북방의 강국 당진(唐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어 전국시대가 열린 기원전 453년까지의 기간을 춘추시대라 명명한 것이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323.以爲天下儀表(이위천하의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셨다.

 

324.貶天子(폄천자),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325.退諸侯(퇴제후),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326.討大夫(토대부),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328.以達王事而已矣.’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329.子曰 : “我欲載之空言(자왈, 아욕재지공언),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330.不如見之于行事之深切著明也(불여견지우행사지심절저명야)”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함으로서, 그 결과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

 

331.夫<春秋>(부 <춘추>)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332.上明三王之道(상명삼왕지도),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삼왕(三王)/ 하(夏) 나라를 세운 우(禹)임금,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을 말한다.

 

333.下辯人事之紀(하변인사지기),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논하여

 

334.別嫌疑,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335.明是非,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336.定猶豫,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을 확실히 하게 했고

 

337.善善惡惡,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338.賢賢賤不肖,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불초한 자는 천하다고 했다.

 

339.存亡國, 망한 나라의 이름은 보존하게 하여

 

340.繼絶世, 그 끊어진 대를 계속 잇게 만들었으며

 

341.補弊起廢 낡아서 해진 것을 보충하고 폐하여 없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342.王道之大者也. 가장 큰 왕도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43.<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 역경(易經)을 저술한 것은 천지(天地), 음양(陰陽), 사시(四時), 오행(五行)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344.故長于變: 변화를 아는데 그 뛰어난 장점이 있고

 

345.<禮>經紀人倫,故長于行; 예경(禮經)은 인륜의 기강에 대해 서술하여, 인간의 행위를 밝히는데 뛰어나며

 

346.<書>記先王之事, 서경(書經)은 선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

 

347.故長于政; 정치 방면에 대한 기술이 뛰어난 것이다.

 

348.<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 또한 시경(詩經)은 산천(山川)과 계곡(溪谷), 들짐승과 날짐승, 초목, 빈모(牝牡)와 자웅(雌雄)에 관하여 기록을 한 것이기 때문에

 

349.故長于風; 풍토와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관한 기술에 장점이 있는 것이다.

 

350.<樂>樂所以立,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351.故長于和; 화목하게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다.

 

 

태사공자서(11)

 

352.<春秋>辯是非,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353.故長于治人.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며

 

354.是故<禮>節人, 그런 이유로 예경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들고

 

355.<樂>以發和, 악경은 그 소리로서 화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356.<書>以道事, 서경은 그 글로서 정사를 말하고

 

357.<詩>以達意,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편찬한 뜻이 있으며

 

358.<易>以道化, 주역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359.<春秋>以道義. 춘추는 세상의 도의를 논한 것이다.

 

360.撥亂世反之正,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돌려놓아 올바르게 만드는 데는

 

361.莫近于<春秋>. 춘추만한 책이 없다.

 

362.<春秋>文成數萬, 춘추는 수만 자의 글로 쓰여 진 것에 불과하나

 

■춘추는 실제로 16,500자에 불과하다.

 

363.其指數千. 그 뜻하는 바는 수천가지이다.

 

364.萬物之散聚皆在<春秋>.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으며

 

365.<春秋>之中, 춘추의 기록에는

 

366.弑君三十六 살해당한 군주는 36명이며

 

377.亡國五十二 망한 나라는 52개국에

 

368.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난 제후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369.察其所以, 그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370.皆失其本已. 모두가 그 본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371.故<易>曰‘失之豪厘, 그런 까닭에 역경에서 말하기를 ‘ 잃은 것은 터럭이나

 

372.差以千里’.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373.故曰‘臣弑君, 또한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374.子弑父,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인 것은

 

375. 非一旦一夕之故也,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76.其漸久矣.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였다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77.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 그런 까닭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위정자들은 춘추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78.前有讒而弗見, 춘추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서 아첨하는 자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379.後有賊而不知. 뒤에 숨어서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아지 못한다.

 

380.爲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 남의 신하가 되려고 하는 자도 춘추를 모르면 안 될 것이며

 

381.守經事而不知其宜, 춘추를 알지 못한 관계로 평상시의 일만을 알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382.遭變事而不知其權. 변고를 만났을 때는 그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할 줄 모른다.

 

383.爲人君父而不通于<春秋>之義者, 사람이 군주나 그 아비가 되었음에도 춘추가 말하는 대의에 통하지 못한다면

 

384.必蒙首惡之名. 그 사람은 필시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385.爲人臣子而不通于<春秋>之義者, 남의 신하나 자식이 된 자가 춘추를 읽어 대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386.必陷纂弑之誅, 필시 찬역이나 시해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387.死罪之名. 죽을죄를 지었다는 악명을 얻게 될 것이다.

 

388.其實皆以爲善, 사실은 그들은 옳다고 여겨 행한 것이지만

 

389.爲之不知其義, 춘추의 대의를 아지 못하고 행한 것이기 때문에

 

390.被之空言而不敢辭. 사가들로부터 사실이 아닌 말로 시역죄를 저질렀다고 단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391.夫不通禮義之旨, 무릇 예와 의의 요지를 모른다면

 

392.至于君不君, 결국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게 되고

 

393.臣不臣, 신하는 신하답지 못할 것이며

 

394.父不父, 아비 되는 자는 아비답지 못하고

 

395.子不子.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되어

 

396.夫君不君則犯, 대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들로부터 범함을 입게 되고

 

397.臣不臣則誅,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그 군주로부터 주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398.父不父則無道,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399.子不子則不孝.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다.

 

400.此四行者, 이 네 가지를 행위야말로

 

401.天下之大過也. 천하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 할 수 있다.

 

402.以天下之大過予之, 이 천하의 가장 큰 죄과를

 

403.則受而弗敢辭. 뒤집어쓰면서도 감히 아무런 대꾸도 못할 것이다.

 

404.故<春秋>者, 그런 까닭에 춘추는

 

405.禮義之大宗.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6.夫禮禁未然之前, 무릇 예란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407.法施已然之後; 법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408.法之所爲用者易見,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

 

409.而禮之所爲禁者難知.” 예란 것이 소용되는 바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태사공자서-12

 

410.壺遂曰(호수왈): 호수가 말했다.

 

411.“ 孔子之時(공자지시),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

 

412.上無明君(상무명군), 위에는 밝은 임금이 없었고

 

413.下不得任用(하부득임용), 아래로는 그 자신이 임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414.故作<春秋>(고작춘추), 춘추를 지어,

 

415.垂空文以斷禮義(수공문이단예의), 내용이 없는 글을 나열하여 예와 의를 규정지어

 

416.當一王之法(당일왕지법). 당대의 제왕들로 하여금 법전으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417.今夫子上遇明天子(금부자상우명천자), 그러나 지금 그대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만났고

 

418.下得守職(하득수직), 아래로는 관직에 있으니

 

419.萬事旣具(만사기구), 만사가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420.咸各序其宜(함각서기의),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각기 그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질서가 정연하게 적당함을 얻고 있는데,

 

423.夫子所論(부자소론), 그대가 지금 논하는 바는

 

424.欲以何明(욕이하명)?”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까?”

 

425.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했다.

 

426.“ 唯唯, 否否, 不然(유유, 부부, 불연). “ 아, 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427.余聞之先人曰(여문지선인왈): 저는 돌아가신 선친이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28.‘ 伏羲至純厚(복희지순후), 옛날 복희(伏羲)씨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복희(伏羲)/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 중 태호(太昊)를 말하며 그는 자기의 형매인 여왜(女?)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주역의 팔괘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어업과 목축을 가르쳤다. 삼황은 복희씨와, 신농(神農) 염제(炎帝), 황제(皇帝) 헌원(軒轅)을 말한다.

 

429.作<易>八卦(작역팔괘). 백성들을 위하여 주역의 팔괘를 만들고

 

430.堯舜之盛(요순지성), 요순시대의 번성함은

 

431.<尙書>載之(상서재지), 상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432.禮樂作焉(예악작언). 예와 악이 만들어 졌으며

 

433.湯武之隆(탕무지융), 탕임금과 무왕이 새로이 나라를 일으킨 것은

 

434.詩人歌之(시인가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다.

 

435.<春秋>采善貶惡(춘추채선폄악),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쳐

 

436.推三代之德(추삼대지덕),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덕을 추앙하고

 

437.褒周室(포주실), 주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438.非獨刺譏而已也(비독자기이이야).’ 단지 풍자와 비방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439.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새로 일어난 이래

 

440.至明天子(지명천자), 영명한 천자가 나타나시니

 

441.獲符瑞(획부서),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 있어

 

442.封禪(봉선),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에 봉선을 행하게 되었고

 

443.改正朔(개정삭), 해와 달의 시작하는 날을 바꿔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으며

 

■정삭(正朔)/ 정(正)은 한 해의 첫째 달이고, 삭(朔)은 한 달의 초하루이다.

 

444.易服色(역복색), 관복의 색을 바꿔

 

■관복의 색을 바꾼 것은 오행설에 의해 진나라 때 시작된 수덕(水德)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관복을 화덕(火德)을 의미하는 적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말한다.

 

445.受命于穆淸(수명우목청), 하늘로부터 미덕으로 교화를 이루라는 천명에 따라

 

■목청(穆淸)/미덕(美德)으로 교화(敎化)를 이루는 것을 이름

 

446.澤流罔極(택류망극), 사방으로 베푼 은혜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447.海外殊俗(해외수속), 나라 밖의 습속이 같지 않은 이민족 국가들이

 

448.重譯款塞(중역관색),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우리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관문에 당도한 다음

 

449.請來獻見者(청래헌견자), 천자께 조현을 드리고자 청한 자들의 숫자는

 

450.不可勝道(불가승도), 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451.臣下百官力誦聖德(신하백관력송성덕),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성상 폐하의 높으신 덕을 힘껏 칭송하고 있다고는 하나

 

452.猶不能宣盡其意(유불능선진기의). 아직도 그 뜻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453.且士賢能而不用(차사현능이불용),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을 불러서 다 쓰지 못하고 있음은

 

454.有國者之恥(유국자지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치욕이며

 

455.主上明聖而德不布聞(주상명성이덕불포문), 주상께서 밝고 성스러운 덕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고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456.有司之過也(유사지과야). 바로 관원들의 잘못입니다.

 

457.且余嘗掌其官(차여상장기관), 그러함에도 내가 이미 그 일을 맡아 하는 관리가 되었으나

 

458.廢明聖盛德不載(폐명성성덕부재), 밝고 어진 성상폐하의 크나 큰 성덕을 폐하고 기록하지 않으며

 

459.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멸공신세가현대부지업불술), 공신, 세가, 현대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인멸하고 기술하지 않는다면

 

460.墮先人所言(타선인소언), 선친께서 나에게 당부한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

 

461.罪莫大焉(죄막대언). 내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462.余所謂述故事(여소위술고사), 내가 기술하려고 하는 소위 옛날 일은

 

463.整齊其世傳(정제기세전), 대대로 전승해 온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지

 

464.非所謂作也(비소위작야), 내가 지어내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465.而君比之于<春秋>(이군비지우), 그런 까닭에 대부께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을 춘추와 대비하는 것은

 

466.謬矣(유의). 잘못 된 일입니다.

 

 

태사공자서(13)

 

467.于是論次其文, (우시논차기문) 그래서 그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게 된 것이다.

 

468.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칠년이태사공조이릉지화) 사서를 논하기 시작해서 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원전 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하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실려있다.

 

469.幽于縲紲(유우유설).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470.乃喟然而嘆曰:(내위연이탄왈)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471." 是余之罪也夫! (시여지죄야부) 이것은 나의 죄로다 !

 

472.身毁不用矣."(신훼불용의)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473.退而深惟曰: (퇴이심유왈) 태사공은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474." 夫<詩>, <書>隱約者, (부시서은약자) 무릇 시경과 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475.欲遂其志之思也.(욕수기지지사야)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476.昔西伯拘羑里,(석서백구유리)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 里)에 갇혀 있으면서

 

▶서백(西伯)/주문왕 창(昌)을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주무왕(周武王)에 이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리(羑里)/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남 탕음현(湯陰縣) 경내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성읍 이름.

 

477.演<周易>; (연주역) 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주역(周易)의 성립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복희씨(伏羲氏)가 8괘를 만들고 다시 신농씨(神農氏)가 64괘로 나누었으며 주문왕(周文王)은 각 괘에 사(辭)를 붙였다고 했다. 이어서 주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丹)이 효사(爻辭)를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고 했다. 주문왕이 유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역에 괘사(卦辭)를 만들어 붙인 것을 말한다.

 

478.孔子厄陳蔡, (공자액진채)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

 

▶주경왕(周敬王) 31년, 기원전 489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479.作<春秋>; (작춘추) <춘추>를 지었으며

 

480.屈原放逐, (굴원방축)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굴원(屈原)/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楚懷王) 밑에서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음으로 굴원은 자란을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 <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 <초혼(招魂)> 등이 있다.

 

481.著<離騷>; (저이소) 이소를 노래했다.

 

▶이소(離騷)/이소는 모두 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離)는 별(別), 소(騷)는 수(愁) 즉 '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 '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482.左丘失明, (좌구실명)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

 

▶좌구(左丘)/ 춘추 때 노나라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을 말한다. 공자 직전 혹은 동시대 인. 두 눈을 실명한 장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작자이며 또한 <국어(國語)>의 작자라는 설도 있다.

 

483.厥有 <國語>; (궐유국어) 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국어(國語)/국어(國語)가 사마천의 작품이라는 설은 본 구절 때문인데 본서의 기술 내용과는 달리 그 작자가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어의 집필 연대는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모두 21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周), 노(魯), 제(齊), 진(秦), 정(鄭), 초(楚), 오(吳), 월(越) 등의 나라로 나누어 편집되었으며 주나라 목왕(穆王 : 재위 기원전 10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노도공(魯悼公 : 기원전 466- 429)까지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서술방법은 춘추좌전과 같은 편년체이다.

 

484.孫子臏脚,(손자빈각)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손빈(孫)/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음모로 무릎의 슬개골(膝蓋骨)을 제거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후에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가 되어 계릉(桂陵)과 마릉(馬陵) 싸움에서 방연이 이끌던 위(魏)나라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위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전국시대 초반에 확보했던 주도권을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원래 손자라고 불리우던 춘추 초기의 손무(孫武)의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72년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 조성된 묘에서 손빈이 저술한 병서 13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손무의 병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병서이다.

*손빈(孫臏)(기원전 382년 ~ 기원전 316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전략가이다 손무의 5대손.

 

485.而論兵法; (이논병법) 책을 써 병법을 논했고

 

486.不韋遷蜀,(불위천촉)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여불위(呂不韋)/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 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 식읍으로 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만에 죽고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르다가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嫪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노애(嫪毐, ? ~ 기원전 238년)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秦) 가짜 환관이며 정치가이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 26권으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487.世傳<呂覽>; (세전여람) 만세에 전해질 여람을 편찬했고

 

▶여람(呂覽)/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함.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 3000여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 <서의편(序意篇)>에 '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 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 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 8편과 유시(有始)의 각 7편 씩을 합하여 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의 각 6편 씩의 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 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헤 자료이다.

 

488.韓非囚秦,(한비수진)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한비(韓非)/ 중국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원래 한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에게서 동문수학했다. 도가(道家), 유가(儒家), 묵가(墨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뒤에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한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변법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설에 능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여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도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이(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직인 법과 세에 의존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 상앙(商 )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 신도(愼到)의 세를 도모하였으며, 노자의 무위허정(無爲虛靜)을 근본으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화평사신으로 진나라에 갔을 때 진시황이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사(李斯), 요가(姚賈)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489.<說難><孤憤>;(세난고분) 세난과 고분을 저술했다.

 

▶세난(說難)/세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에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니 한비 또한 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이 글을 지었다.

▶고분(孤憤)/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이 처한 불만의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490.<詩>三百篇, (시삼백편) 시 삼백편도

 

▶시삼백편(詩三百篇)/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말한다. 정확히 시경에는 305 수의 시가(詩歌)가 실려있다.

 

491.大抵賢聖發憤之所爲作.(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책을 저술한 것며,

 

492.此人皆意有所郁結,(차인개의유소욱결) 그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힌 것이 있으나

 

493.不得通其道也, (부득통기도야)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소통할 수가 없어

 

494.故述往事, (고술왕사) 옛날 일을 말하여

 

495.思來者." (사래자) 미래의 일을 생각한 것이다."

 

496.于是卒述陶唐以來,(우시졸술도당이래) 그래서 결국은 요임금과 순임금이래

 

497.至于麟止,(지우린지)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저술했다.

 

▶획린/281번 주석 참조

 

498.自黃帝始.(자황제시) 그래서 본서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했다.

 

▶황제(黃帝)

중국이 원시사회를 벗어나려고 하던 시기의 부족국가의 추장으로 성은 희(姬)이고 씨는 헌원(軒轅) 혹은 유웅(有熊)이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다스리던 부족은 원래 중국의 서북 고원에 거주했던 소전씨(少典氏) 출신으로 염제(炎帝)와 같은 종족이다. 후에 동쪽으로 나아가 탁록( 鹿)에 살고 있던 구여족(九黎族)의 추장 치우(蚩尤)를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싸워 패퇴시키고 염제가 이끌던 종족을 규합하여 그들의 부족장이 되었다. 그 부락이 후에 발전하여 중화족(中華族)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라 받들어 졌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를 고안해 행한 것이 전설상으로 내려온다. 창힐(倉 )을 시켜 문자(文字)를 만들게 하였고, 누조( 祖)에게는 양잠술(養蠶術)을, 공(共)에게는 북 만드는 법을, 화적(貨狄)에게는 배 만드는 법을, 희화(羲和)에게는 해를 보고 점치는 법을, 상의(常儀)에게는 달을 보고 점치는 법을, 유구(臾區)에게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알아내게 하였다. 또한 예수(隸首)에게는 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내게 했으며, 용성(容成)에게는 달력을 만들게 하고 영(伶)에게는 도덕에 대한 규범을 만들게 했으며, 영장(榮將)에게는 음율(音律)을 만들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제를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神者生之本也  形者生之具也

편액의 전서체 글씨를 인쇄용 한자로 바꾸면 편액 아래의 적색 글씨가 됩니다. 

전서체는 해서체 이전의 붓글씨 글씨체이다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기 때문이요

206.所托者形也

       (소탁자형야).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체다. ........

214.神者生之本也

     (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

     (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 <太史公自序>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58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주]사마천은 사기 열전 70권 중 마지막 권을 자서전으로 채웠다.

사마천의 문학정신 곧 발분의 정신[현실비판의식]이 명료하게 표출된 <太史公自序>를 앞에서 소개한 바 있으나

其一의 일부 내용을 빠뜨린 것이 마음에 걸리고 그나마 498구에 그쳐 자서 전체를다시 정리해 본다.

본문은 첫머리에 부여한 번호를 따라 읽으면 된다.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1

태사공자서 2

이것은 천명이로다! /태사공자서3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했다 /태사공자서 4

이것은 나의 죄로다! -발분의 정신 /태사공자서 5

 

정신이 의탁하는 것은 그 육신이다 -태사공자서 1 /열전 제70

사마천의 주유천하 -태사공자서 2

이것은 천명이로다! -태사공자서3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했다 -태사공자서 4

이것은 나의 죄로다! -발분의 정신  태사공자서 5 

 

 

2010/06/02 사마천-태사공자서 03

2010/06/02  사마천-태사공자서 04

2010/06/02 사마천-태사공자서 05

 

2008.08.09

52만6천5백자로 130편의 <태사공서>를 짓다

 사기열전 제1-제30 자서  /열전70 

 사기열전 제31-제69 자서  /열전70

 

열전 70권의 창작 동기  /열전70

 

 

사마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5-1]

태사공자서는 53만여 자의 한자로 저술된 사기(史記)의 총 130편마지막 편으로 서문에 해당하며 사마천(司馬遷)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즉 사마천이 자신을 대상으로 저술한 사마천열전(司馬遷列傳)에 해당한다. 사마천은 이 자서에서 사기 전편(全篇)에 대한 집필 동기, 구성 및 각편의 서술 이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생에 대해 기술해 놓았다. 이 편은 또한 사마천이 사기의 각 장을 지은 이유를 밝힌 사기의 중요한 자료이다.

 

1.昔在颛頊

(석재전욱) 옛날 전욱 임금이

 

▶전욱/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침착하고 지략에 뛰어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알맞은 땅을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천지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幽陵), 남쪽으로는 교지(交趾), 서쪽으로는 유사(流沙), 동쪽으로는 반목(蟠木)에까지 이르렀다. 각종 동물, 식물, 그리고 크고 작은 산천의 아들,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평정하여 귀속시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출전 동서 오제본기 중 전욱 항)

▶유릉(幽陵)/지금의 북경지방인 유주(幽州)를 말함.

▶교지(交趾)/지금의 베트남과의 경계지방인 광서성(廣西省)과 운남성(雲南省)을 말함.

▶유사(流沙)/지금의 내몽고 고비사막을 말함.

▶반목(蟠木)/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없으나 일성에는 동해바다 가운데의 도색산(度塞山)이라고도 한다.

 

2.命南正重以司天

(명남정중이사천)

남정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맡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正)/전욱이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늘과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중(重)/사람 이름

 

3. 北正黎以司地.

(북정려이사지)

북정의 려(黎)에게는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북정(北正)/화정(火定)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땅을 관장하던 직책

▶려(黎)/사람 이름

 

3. 唐虞之際

(당우지제),

요와 우임금 시대에 이르기 까지

 

▶당(唐)/요(堯)임금이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익성현(翼城縣) 부근에 세운 나라 이름으로 당요(唐堯)를 말함.

▶우(虞)/순임금 요임금에게서 선양받아 지금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경내의 포판(蒲阪)에 세운 나라의 이름. 우순(虞舜)을 말함.

 

4. 紹重黎之后

(소중려지후),

중(重)과 려(黎)의 후손들에게 잇게 하고

 

5. 使復典之

(사복전지),

하늘과 땅의 일을 계속 맡아보게 하여

 

6. 至于夏商

(지우하상),

하(夏)와 상(商) 왕조에 이르렀다.

 

▶하(夏)/순임금 밑에서 황하의 치수 공사에 공을 세운 우(禹)가 세운 나라. 지금의 산서성 하현(夏縣)인 안읍(安邑)이 하나라의 수도였다.

▶상(商)/탕(湯)이 하를 멸하고 건국한 나라 이름. 상은 건국하여 주무왕(周武王)에게 멸망할 때까지 그 도읍을 7 번을 옮겼다. 마지막 도읍지가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인 은(殷)이었던 관계로 은(殷)나라라고 칭한 것이다. 즉 상나라는 반경(盤庚)이라는 왕이 지금의 곡부 부근인 엄(奄)이라는 곳에서 옮겨 망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은을 도읍으로 하였다. 즉 상(商)이라는 이름은 자칭이고 은(殷)이라는 이름은 타칭이다.

▶위의 하(夏), 상(商)에 주(周)나라를 더하여 삼대(三代)라고 한다.

 

7. 故重黎氏世序天地

( 고중려씨세서천지).

그런 이유로 중(重)과 려(黎)씨들은 대를 이어 하늘과 땅의 일을 맡아보았다.

 

8. 其在周

(기재주)

이어서 주 왕조 때

 

9.休甫其后也

(휴보기후야)

정백(程伯)에 봉해졌던 휴보(休甫)도 그 후예였다.

▶정(程)/지금의 섬서성 함양시(咸陽市) 경내의 동북에 있었던 서주(西周) 때의 제후국. 휴보(休甫)는 정나라 군주의 이름이다.

 

10. 當周宣王時

(당주선왕시)

주선왕 때에 이르자

주선왕(周宣王)/ 기원전 827년부터 782년까지 재위했던 주나라의 11대 왕. 그 부왕은 려왕( 王)으로서 위무(衛巫)를 시켜 공포정치를 한 결과 려왕은 국인들에게 쫓겨나 체( )라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 해가 공화(共和) 원년인 기원전 841년이다. 사마천의 사기 중 제후연표(諸侯年表)는 이 해부터 시작되고 중국 역사도 모든 것이 이 해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또한 려왕이 체로 달아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왕을 대신해서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태자 정(靜)을 주왕으로 추대하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태자 정이 주선왕이다. 한편 려왕이 달아나 왕 없이 다스린 기원전 841년부터 826년 까지의 14년간의 시기를 공화(共和)라 하여 지금 쓰고 있는 Rebpulic에 해당하는 공화국(共和國)의 어원이 되었다. 주나라는 주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대에 이르러 망하고 낙읍으로 동천하여 동주시대를 열었다.

 

11.失其守而爲司馬氏

(실기수이우사마씨)

정백(程伯)은 그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사마씨가 되었다.

 

사마(司馬) / 서주(西周) 때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관(夏官)인 대사마(大司馬)에 속한 관리. 군사마(軍司馬), 여사마(輿司馬), 행사마(行司馬) 등이 있어 군정과 군역을 담당했다.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자 제후국들도 그 제도를 따라 사마라는 관직을 두게 되었다. 춘추 때 당진(唐晋)에서 군사조직을 삼군(三軍)으로 할 때 매 군마다 사마라는 직을 두어 그 직위는 대장(大將)과 부장(副將)에 이서 세 번째로 하였다. 그 임무는 군사의 일에 대한 참모 역할과 군법의 시행을 관장하였다.

 

12.司馬氏世典周史

(사마씨세전주사)

후에 사마씨는 주나라의 사관이 되어 대대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13. 惠襄之間

(혜양지간)

주나라 혜왕(惠王)과 양왕(襄王)의 대에 이르러

혜왕(惠王)/ 재위 기원전 676-652. 동주의 삼대 왕으로 당시 중원의 패자는 제환공(齊桓公: 재위 기원전 686-643년)이었다.

양왕(襄王)/ 재위 기원전 651-619년. 혜왕이 그의 왕비가 일찍 죽자 후비를 얻어 왕자 숙대를 낳았다. 혜왕은 당시 태자였던 양왕을 폐하고 숙대를 새로이 그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제환공과 관중의 계획으로 양왕은 주나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13. 司馬氏去周適晉

(사마씨거주적진).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당진(唐晉)으로 갔다.

 

당진(唐晋)/ 고대 중국에 있어서 당(唐)이나 진(晉)이라는 말은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임금이 산서성 일대에 세운 나라 이름인 당(唐)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고 후에 주나라 성왕 때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 땅에 봉해 당숙우(唐叔虞)라 칭했다. 그러나 당 땅에서 반란이 일어난 결과 당(唐) 대신에 진(晉)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당제국은 당나라를 세운 이세연이 산서성의 태원을 세력 근거로하여 세웠기 때문에 그 나라 이름을 당이리고 이름 지은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나라 이름은 모두가 그 창건자나 그 나라를 세운 종족들이 거주하던 지방의 이름을 따르는 것을 전통으로 하였으나 이 관습은 금나라와 원나라로부터 관념적인 이름을 취하기 시작했다. 즉 원나라 이전의 중국 왕조 이름은 모두가 지명을 근거로 취한 것이다.

 

14. 晉中軍隨會奔秦

(중중군수회분진)

당진의 중군원수 수회가 섬진으로 달아나자

 

중군(中軍)/ 천자국인 주나라는 육군(六軍)을, 제후국들은 그 제후들의 작위에 따라 일군에서 삼군까지 두었다. 당시의 일군은 약 만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당지 진나라는 중군과 좌우 이군을 합하여 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회는 그 중 핵심에 해당하는 중군대장을 역임하게 되어 중군이라고 한 것이다.

▶ 수회(隨會)/ 당진의 상경(上卿)을 지낸 사회(士會)를 말한다. 그의 식읍이 수(隨)와 범(范)이었던 관계로 수회(隨會) 혹은 범회(范會)라고도 부른다. 주양왕 31년 기원전 621년 당진(唐晋)의 양공(襄公: 진문공의 아들)이 죽자 그는 당시 당진의 재상이었던 조돈의 명을 받고 섬진(陝秦)에 가있었던 양공의 동생 공자(公子) 옹(雍)을 데려와 당진의 군주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돈이 마음을 바꿔 당진의 군주를 양공의 아들인 이고로 세우고 군사를 내어 공자옹 일행을 공격하자 수회는 섬진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후에 조돈의 허락을 받아 다시 당진으로 돌아왔다. 사회의 후손들은 당진의 유력한 여섯 가문 중의 하나가 되어 그 세력을 다투다가 패하여 기원전 491년 순씨들과 함께 제나라로 이주하였다.

 

15. 而司馬氏入少梁

(이사마씨입소량)

사마씨도 그 뒤를 따라 섬진의 소량(少梁)으로 들어갔다.

소량(少梁)/ 지금의 산서성 한성현(韓城縣) 동남의 소량촌을 말한다. 이민족 국가였던 양나라의 도성이었으나 진목공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토가 되었다. 강공 4년 기원전 617년 당진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327년 섬진의 혜문왕이 위(魏)나라로부터 탈환하고 그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개명했다.

 

태사공자서(2)

16.自司馬氏去周適晋

(자사마씨거주적진)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당진(唐晋)으로 들어갈 때

 

17.分散

(분산)

그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18.或在衛

(혹재위)

일부는 위나라에

 

19. 或在趙

(혹재조),

일부는 조나라에

 

20. 或在秦

(혹재진).

그리고 일부는 섬진(陝秦)으로 들어가 살았다.

 

21. 其在衛者

(기재위자)

위나라에 들어가 살았던 사마씨는

 

22. 相中山

(상중산).

중산국의 재상이 되었고

중산국(中山國)

전국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과 당현(唐縣) 일대에 있었던 이족(夷族)의 제후국으로써 위나라 위문후(魏文侯) 19년 기원전 406년 위나라의 장수 악양(樂羊)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위(魏)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중산국의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인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인 영수(靈壽)라는 곳에 나라를 다시 세워 명맥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296년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조나라에 편입되었다. 위문후의 명을 받아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樂羊)의 아들을 죽인 후 끓여 만든 인육탕을 보내자 그 국물을 마시고 중산국을 정벌한 이야기가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 실려있다.

 

23.在趙者

(재조자),

조나라로 들어가 살았던 사마씨들은

 

24. 以傳劍論顯

(이전검논현)

검술을 논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25. 蒯聵其后也

(괴기후야)

괴외(蒯聵)는 그 후손이다.

 

괴외(蒯聵)/ 당조의 장수절(張守節) 이 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의하면 자객열전의 형가(荊軻)가 태자 단(丹)을 만나기 전 천하를 유랑할 때 유차(楡次)에 들려 검술을 논했던 개섭(蓋 )이라는 사람을 칭한 것이라 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림 1. 중산국, 위, 조 등의 위치도

 

26.在秦者名錯

(재진자명착)

섬진으로 들어간 사마씨 중에는 이름이 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27.與張儀爭論

(여장의논쟁)

장의와 더불어 논쟁하였다.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종횡가(縱橫家) 중의 한 사람인 장의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온 국력을 한(韓)나라를 정벌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마착은 그 보다는 진나라의 배후에 있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의 촉(蜀) 나라를 정벌하여 광활한 사천평원의 비옥한 농지를 확보하여 국력을 보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사마착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군사를 주어 촉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진왕이 사마착의 건의에 따라 촉(蜀) 땅을 점령한 결과 국력이 신장되고 지리적인 이점을 차지하게 되어,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남방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초나라를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사마착이 촉나라를 정벌한 것은 혜문왕 9년 기원전 316년의 일이었다. 이어서 그로부터 38년 후인 진 소양왕(昭陽王) 29년 기원전 278년에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촉 땅에서 기병하여 장강(長江)의 물길을 따라 진격하여 초나라의 도성이었던 영성(지금의 호북성 강릉)을 점령하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의 진성(陳城)으로 쫓겨갔다.

그림 2. 사마착과 장의 진나라 로선 논쟁도

그림 3. 무안군 백기의 초나라 정벌도 및 초나라의 이동

 

28.于是惠王使錯將伐蜀

(우시혜왕사착장벌촉)

섬진의 혜문왕은 사마착의 의견을 받아들여 촉 땅을 정벌하게 하였다.

 

29.遂拔

(수발),

사마착은 촉 땅을 점령하였다.

 

30.因而守之

(인이수지)

그 공로로 인하여 그는 촉 땅의 수장이 되었다.

 

31.錯孫靳

(착손근),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32. 事武安君白起

(사무안군백기)

무안군 백기를 섬겼다.

 

33.而少梁更名曰夏陽

(이소량갱명왈하양)

한편 섬진의 소량(少梁)은 그 이름이 바뀌어 하양(夏陽)이라 했다.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

 

34.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

(근여무안군갱조장평군)

사마근과 무안군은 장평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 장평(長平)/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 진나라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기원전 260년 이곳에서 조괄(趙括)이 이끌던 조나라의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서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 명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였다. 이 전투 이후로 진나라의 유일한 대항 세력이었던 조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5.還而與之俱賜死杜郵

(환이여지구사사두우)

진나라로 개선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두우에서 사사되었다.

▶ 두우(杜郵)/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경내의 북서쪽

 

36.葬于華池

(장우화지)

그 두 사람의 시신은 화지(華池)에 묻혔다

화지(華池)/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

그림 4. 기원전 260년 경의 중국의 정세도

 

37.靳孫昌

(근손창),

사마근의 손자가 사마창인데

 

38.昌爲秦主鐵官

(창위진주철관),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다.

 

39.當始皇之時

(당시황지시).

그때는 진시황이 재위에 있을 때였다.

 

40.蒯聵玄孫卬爲武信君將而徇朝歌.

(괴외현손앙위무신군장이순조가)

진나라가 망하고 한초(漢楚)가 서로 다툴 때 괴외(蒯聵)의 현손인 사마앙은 무신군의 장수가 되어 조가(朝歌)를 정복했다.

무신군(武信君)/ 사기에 무신군의 칭호를 갖은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를 대표했던 장의(張儀)와 진나라 폭정에 항거하여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난을 일으킬 때 같이 참여한 무신(武臣)이다. 여기서는 무신을 말한다. 무신은 진승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군(武信君)이라고 칭하고 조왕(趙王)이 되었으나 후에 부하 장수인 이량(李良)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을 말한다. 춘추 초기 위(衛)나라의 도읍이며 시경(詩經) 국풍(國風) 패풍( 風)에 나오는 이자승주(二子乘舟)의 무대이다.

 

41.諸侯之相王

(제후지상왕),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제후들이 서로 왕으로 봉해짐에

 

42.王卬于殷.

(왕앙우은),

사마앙은 항우에 의해 은왕(殷王)이 되었다.

은왕(殷王)/ 은왕조의 도읍은 하남성 안양시(安陽市)였다. 안양시는 조가 북쪽 50여키로에 있어 사마앙은 안양시를 포함한 조가 일대를 영지로 하는 제후가 된 것을 말한다.

 

43.漢之伐楚

(한지벌초),

한고조가 초패왕 항우를 정벌할 때

 

44.卬歸漢

(앙귀한),

사마앙은 한나라에 귀순하여

 

45.以其地爲河內郡

(이기지위하내군).

하내군(河內郡)을 영지로 받았다.

하내군(河內郡)/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른 군현이름. 관할지역은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안양시(安陽市), 서쪽으로는 제원현(濟源縣), 동쪽으로는 활현(滑縣), 남쪽으로는 황하를 경계로 했다. 치소는 지금이 무척현(武陟縣) 남의 회현(懷縣)이다.

 

46.昌生無澤

(창생무택),

사마창은 무택을 낳았는데

 

47.無澤爲漢市長

(무택위한시장).

무택은 한나라의 시장이 되었고

시장(市長)/ 전국시대 때 만들어져 당조 때까지 있었던 관직의 이름으로 성 안에 특정지역을 설정하여 상업지구로 지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한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안에 시장을 조성하고 그 감독을 위해 파견한 관리를 시령(市令)이라고 했으며, 기타 다른 지방의 감독관을 시장(市長)이라고 불렀다.

 

48.無澤生喜

(무택생희)

사마무택은 희를 낳았는데

 

49.喜爲五大夫

(희위오대부)

사마희는 그 봉작이 오대부까지 올랐다.

오대부(五大夫)/전국 때 진(秦)나라가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 20 등급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위로서 한나라도 그 제도를 받아 들여 시행했다. 세읍(稅邑) 300호를 받아 조세를 거둘 수 있고 죄를 짓게 될 경우 사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50.卒(졸)

이들은 모두 죽은 뒤에

 

51.皆葬高門

(개장고문)

고문이라는 곳에 묻혔다.

고문(高門)/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서남의 고문원(高門原)을 말함.

 

52.喜生談

(희생담)

사마희는담을 낳았는데

 

53.談爲太史公

(담위태사공)

사마담은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태사공/태사라는 관직은 은주(殷周) 교체기에 설치된 것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사서를 편찬하며, 국가의 중요한 전적(典籍), 천문(天文), 역법(曆法), 제사(祭祀) 등을 관장했던 조정의 대신이었다. 진한(秦漢) 때에는 태사령(太史令)이라고 했지만 그 지위는 매우 낮았다. 사마천은 자기 부친과 자기를 같이 태사공이라고 호칭하였고 여기서의 태사공은 자기 부친을 지칭한 것이다.

그림 3.1 기원전 1세기 경의 한초항쟁 정세도

 

 

 

태사공자서(4)

 

54.太史公學天官于唐都

(태사공학천관우당도)

태사공은 당도(唐都)로부터 천문학을 배우고

▶태사공/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을 칭한다.

▶당도(唐都)/한나라 문제(文帝 : BC180-157)와 무제(武帝 : BC141-87) 연간에 살았던 천문학자 겸 방술사. 일월오성(一月五星 : 해와 달 및 화, 수, 목, 금, 토 등의 행성) 즉 7개 별들 간의 거리와 머무는 장소 및 위도를 측정하여 하늘을 28개의 구역으로 나눴다. 그는 또한 무제의 명을 받아 원봉(元封) 연간 기원전 80년에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였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당도에게서 천문학을 수학했다.

 

55.

受<易>于楊何

(수<역>우양하)

양하로부터 <주역>을 전수받았으며

▶양하(楊何)/ 산동성 치천(淄川) 사람으로 자는 숙원(叔元)이다. 동무(東武) 사람 왕동(王同)에게서 주역을 배워 통달하였다.

 

56.習道論于黃子

(습도론우황자)

황자(黃子)에게서 도학을 익혔다.

▶황자(皇子)/ 서한(西漢) 때의 황노(黃老) 사상가. 황생(黃生)이라고도 한다. 황노의 도학을 연구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황제 앞에서 유생(儒生) 원고생(轅固生)과 은나라 탕(湯) 임금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주나라와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죽인 것은 토벌한 것이 아니라 윗 사람을 죽인 시해(弑害)의 죄를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마담은 황자로보터 도가의 학설을 배웠다.

 

57.太史公仕于建元元封之間

(태사공사우건원원봉지간)

태사공은 건원(建元)과 원봉(元封) 년간에 벼슬을 하면서

▶건원(建元)/ 기원전 140-136년의 한무제 때의 연호.

▶원봉(元封)/ 기원전 110-108년 “

 

58.愍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

(민학자지부달기의이사패)

학자들이 그 뜻에 통달하지 못하여 스승들의 본 뜻에 위배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59.乃論六家之要指曰

(내론육가지요지왈 ;

육가들이 세운 학설의 중요한 요지를 논했다.

 

60.<易.大典>

(<역대전>):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따르면

▶계사전(繫辭傳)/주역(周易) 64괘(卦)의 각각에 붙여진 점사(占辭)를 말한다. 각 괘에 붙여진 점사를 단사(彖辭) 혹은 괘사(卦辭)라 하고 괘의 구성 단위인 각 효(爻)에 붙여진 점사를 효사(爻辭)라 한다.

 

61.“天下一致而百慮

    (천하일치이백려),

천하 사람들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이치는 하나인데 그 생각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며

 

62.同歸而殊.

 (동귀이수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가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63.夫陰陽, 儒, 墨, 名, 法, 道德

  (부음양, 유, 묵, 명, 법, 도덕),

무릇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들은

 

64.此務爲治者也

   (차무위치자야),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65.直所從言之異路

  (직소송언지이로),

다만 말하는 바를 따르는 것은 서로 다르니

 

66.有聲不聲耳

   (유성불성이)

어떤 것은 살피고 또 어떤 것은 살피지 않는 것이 있다.

 

67.學竊觀陰陽之術

   (학절관음양지술),

일찍이 가만히 음양가의 술을 살펴 보건데

 

68.大祥而衆忌諱

   (대상이중기휘),

그것은 대체로 길흉의 징조를 나타내나, 여러 가지로 금지하는 것이 많아

 

69.使人拘而多所畏

   (사인구이다소외);

사람들을 억눌러 많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70.然其序四時之大順

    (연기서사시지대순),

그러나 일년 사시가 변하는 운행의 법칙은

 

71.不可失也

   (불가실야).

결코 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72.儒者博而寡要

   (유자박이과요),

유가의 설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빈약하고

 

73.勞而少功

   (노이소공),

노력은 많이 들고 그 효용성은 적다.

 

74.是以其事難盡從

   (시이기사난진종);

이것 때문에 유가들이 주장하는 것을 모두 따르기가 어렵다.

 

75.然其序君臣父子之禮

   (연기서군신부자지례),

그러나 유가의 설은 군신과 부자 사이의 예의를 바르게 하고

 

76.列夫婦長幼之別

   (열부부장유지별),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해 놓은 것은

 

77.不可易也

   (불가이야).

절대로 바꾸면 안될 것이다.

 

78.墨子儉而難遵

   (묵자검이난준),

묵가의 주장은 검약만을 지나치게 주장하여 지키기 어렵다고 해서

 

79.是以其事不可遍徇

   (시이기사불가편순);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따를 수는 없겠지만

 

80.然其强本節用

   (연기강본절용),

그러나 그 근본을 강조하고 재화의 사용을 아껴야 한다는 주장은

 

81.不可廢也

   (불가폐야).

결코 폐하면 안 되는 것이다.

 

82.法家嚴而少恩

   (법가엄이소은);

법가의 이론은 엄격하고 사람들에게 각박하지만

 

83.然其正君臣上下之分

   (연기정군신상하지분),

그러나 그 군신 상하간의 직분을 바르게 정하는 것은

 

84.不可改矣

   (불가개의).

절대 바꾸면 안 되는 것이다.

 

85.名家使人儉而善失眞

    (명가사인검이선실진);

명가의 이론은 사람으로 하여금 근검하도록 한 결과 진실성을 쉽게 잃게 하지만

 

86.然其正名實

   (연기정명실),

그러나 그 명분과 실리를 바르게 하는 것을

 

87.不可不察也

   (불가불찰야).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88.道家使人精神專一

   (도가사인정신전일),

도가의 학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고

 

89.動合無形

  (동합무형),

그 움직임을 무형의 도에 합치게 하며

 

90.瞻足萬物

   (첨족만물).

또한 세상의 만물을 풍성하게 한다.

 

91.其爲術也

  (기위술야),

그 학술은

 

92.因陰陽之大順

  (인음양지대순),

음양가의 큰 순리에 따른 것이지만

 

93.采儒墨之善

   (채유묵지선),

유가와 묵가의 선한 것을 취했으며

 

94.撮名法之要

   (촬명법지요),

명가의 법가의 요점을 채택했다.

 

95.與時遷移

   (여시천이),

시대와 더불어 옮겨지고

 

96.應物變化

  (응물변화),

사물에 응하여 변화하며

 

97.立俗施事

   (입속시사),

풍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니

 

98.無所不宜

 (무소불의),

옳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다.

 

99.指約而易操

  (지약이이조),

그 뜻하는 바가 간단하고 시행하기가 쉬워

 

100.事少而功多

   (사소이공다).

노력하는 정도는 적으면서 그 효과는 크다.

 

101.儒者卽不然

   (유자즉불연).

그러나 유가의 학설은 그렇지 않으니

 

102.以爲人主天下之儀表也

   (이위인주천하지의표야),

사람들에게 있어서 군주는 천하의 의표임으로

 

103.主倡而臣和

   (주창이신화),

임금이 주창하면 신하가 화답하고

 

104.主先而臣隨

   (주선이신수).

임금이 앞서가면 신하가 뒤를 따르는 것이며

 

105.如此則主勞而臣逸

   (여차즉주노이신일).

이와 같이 행한다면 즉 임금이 수고스럽겠지만 신하는 편안하게 될 것이다.

 

106.至于大道之要

   (지우대도지요),

대도의 요체에 이르게 되면

 

107.去健羨

   (거건선),

굳센 것과 탐욕하는 마음을 버리고

 

108.絀聰明

   (출총명),

밝은 지혜를 버리게 될 것인데

 

109.釋此而任術

   (석차이임술).

이것을 멀리함으로 해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110.夫神大用則竭

   (부신대용즉갈),

무릇 정신을 너무 많이 쓰게 되면 곧 마르게 되고

 

111.形大勞則幣

   (형대로즉폐).

신체를 크게 수고롭게 한다면 곧 몸이 쇠약해 질 것이다.

 

112.形神騷動

   (형신소동),

몸과 정신이 쇠미하게 되면 마음의 병이 나게 될 것이며

 

113.欲與天地長久

  (욕여천지장구),

만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함께 하려고 한다는 말은

 

114.非所聞也

   (비소문야).

내가 들은 바가 아니다.

 

115.夫陰陽四時

   (부음양사시),

무릇 음양가라는 것은 사시사철의 변화와

 

116. 八位(팔위),

    팔위와

♣팔위(八位)/주역에서 말하는 팔괘(八卦)에 따라 지칭하는 8가지 방향을 말함. 즉 각 팔괘가 칭하는 여덦 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다.

동/진(震?), 서/리(離?), 남/태(兌?), 북/감(坎?)

서북/건(乾?), 서남/ 곤(坤?), 동남/손(巽?),동북/간(艮?)

 

117. 十二度(십이도),

십이도와

♣십이도(十二度)/고대 중국 사람들은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하늘의 황도(黃道)를 12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십이차(十二次)라고도 부른다. 후에 한조(漢朝) 때에 이르러 그 명칭이 정해지고 12차는 다시 적도와 경도로 나뉘어 24절기가 생겼다. 12도의 각각 명칭은 다음과 같다.

성기(星紀), 현효(玄?)), 추자(??), 강루(降婁), 대량(大梁), 실심(實沈), 순수(?首), 순화(?火), 순미(?尾), 수성(壽星), 대화(大火), 석목(析木)

 

118.二十四節各有敎令

    (이십사절각유교령),

24절기 등은 모두가 각기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규범을 갖고 있어

♣ 이십사절(二十四節)/ 24절기를 말한다. 즉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등이다.

 

119.順之者昌

    (순지자창),

사람들이 이 규범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지만

 

120.逆之者不死則亡

     (역지자불사즉망),

거스리는 자는 죽지 않는다면 망한다고 했다.

 

121.未必然也

    (미필연야),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22. 故曰“ 使人拘而多畏.”

    (고왈‘사인구이다외’)

그래서 말하기를 “ 사람들로 하여금 구속을 받도록 해서 두려움을 느끼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123.夫春生夏長

   (부춘생하장),

무릇 세상의 사물은 봄에 태어나서 여름에 성장하고

 

124.秋收冬藏

   (추수동장),

가을에 수확했다가 겨울에 저장한다.

 

125.此天道之大經也

   (차천도지대경야),

이 천도야 말로 하늘의 가장 큰 법도이다.

 

126.弗順則無以爲天下綱紀

    (불순즉무이위천하기강),

만일 사람들이 이 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천하에 기강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127. 故曰“ 四時之大順,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사계절이 변화하는 하늘의 커다란 순리를

 

128.不可失也

   (불가실야).”

결코 버리면 안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29.夫儒者以<六藝>爲法

   (부유자이<육예>위법).

대저 유가들은 육예(六藝)로서 그 법도로 삼는다.

♣ 육예(六藝)/육경(六經)을 말한다. 즉 예(禮), 악(樂), 서(書), 시(詩), 역(易),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중 예경은 일실되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기도 한다.

 

120. <六藝>經傳以千萬數

    (<육예>경전이천만수),

<육예>에 관한 경(經)과 전(傳)의 종류는 천만 가지가 넘어

♣경(經)/육경(六經)을 말한다.

전(傳)/경의 해설서를 말한다. 즉 시경의 경우 모전(毛傳), 춘추의 경우, 춘추좌전, 춘추공양전 등과 같은 해설서를 가르킨다.

 

121.累世不能通其學

   (누세불능통기학),

누대에 걸쳐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122.當年不能究其禮

   (당년불능구기례),

평생을 바쳐 예경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 할지라도 다 구명할 수 없다.

 

123.故曰“ 博而寡要, 勞而少功.

    (고왈, 박이과요, 노이소공)”

그런 이유로 해서" 유학이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적고 노력은 많이 들지만 그 이루는 바는 적다" 한 것이다.

 

124.若夫列君臣父子之禮

   (약부열군신부자지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를 바르게 세우고

 

125.序夫婦長幼之別

   (서부부장유지별),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고 , 어른과 아이의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은

 

126.雖百家弗能易也

    (수백가불능영야).

비록 백가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127.墨子亦尙堯舜道

    (묵자역상요순도),

묵가(墨家)의 학설은 요순의 도를 따른 것이며

 

128.言其德行曰

    (언기덕행왈):

두 임금의 덕행을 칭송했다.

 

129. “ 堂高三尺

    (당고삼척),

요임금과 순임금이 살았던 집의 높이는 겨우 석자에 달했으며

 

130. 土階三等

    (토가삼등),

그 마루로 올라가는 흙으로 만든 섬돌은 세 계단 밖에 되지 않았다.

 

131.茅茨不翦

   (모자불전)

모자(茅茨)로 이어서 올린 지붕은 그 끝을 쳐서 가지런히 정리도 하지 않았고

 

133. 采椽不刮

    (채연불괄)

서까래는 그 겉을 다듬지도 않았다.

 

134.食土簋

    (식토궤),

식사는, 흙으로 빚어 만든 밥그릇과

 

135.啜土刑

    (철토형),

국그릇에 담아서 먹었다.

 

136.糲粱之食

    (여량지식),

현미나 기장으로 밥을 짓고

 

137.藜藿之羨

    (여곽지선).

명아주잎과 콩잎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138.夏日葛衣

    (하일갈의),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139.冬日鹿裘

    (동일녹구).”

겨울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다녔다.

 

140.其送死

    (기송사),

두 임금이 죽자

 

141.棟棺三寸

   (동관삼촌),

그들을 위해 준비한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치를 넘지 않았으며

 

142.擧音不盡其哀

    (거음불진기애).

백성들이 소리는 높여 곡을 했으나 그 슬픔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

 

143.敎喪禮

   (교상례),

그리고 상례를 가르칠 때는

 

144.必以此爲萬民之率

    (필이차위만진지솔).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함으로서 만백성들을 다스렸다.

 

145.使天下法若此

    (사천하법약차),

만약에 천하의 법이 이와 같이 행해진다면

 

146.則尊卑無別也

   (즉존비무별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귀하고 천한 구별이 없어질 것이다.

 

147.夫世異時移

    (부세이시이),

대저 세상의 풍속이 변한다면

 

148.事業不必同

    (사업불필동),

사람이 행하는 것도 항상 같을 필요가 없다.

 

149.故曰 “ 儉而難遵.”

    (고왈, 검이난준)

그런 이유로 “ 검약이란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150.要曰强本節用

    (요왈강본절용),

묵가의 요체는 근본을 강화하고 사물을 아껴 씀으로서

 

151.則人給家足之道也

    (즉인급가족지도야).

사람들이나 가정을 풍족하게 만드는 도인 것이다.

 

152.此墨子之所長(차묵자지소장),

이것은 묵가의 뛰어난 점으로서

 

153.雖百家弗能廢也

    (수백가불능폐야).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폐할 수 없는 점일 것이다.

 

155.法家不別親疎

    (법가부별친소),

법가의 설은 그 사이가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하지 않고

 

156.不殊貴賤

   (불수귀천),

귀하고 천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157.一斷于法

   (일단우법),

오로지 법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하니

 

158.則親親尊尊之恩絶矣

   (즉친친존존지은절의).

이는 곧 친할 사람은 친하고 높여야 할 사람은 높이는 은혜를 끊게 만드는 것이다.

 

159.可以行一時之計

   (가이행일시지계),

이렇게 행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뜻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160.而不可長用也

   (이불가장용야),

결코 오래도록 쓰지는 못할 것이다.

 

161.故曰“ 嚴而少恩

    (고왈, 엄이소은)”.

그런 이유로 “ 법가의 도는 엄하기만 하고 그 베푸는 은혜가 적다”라고 한 것이다.

 

162.若尊主卑臣

    (약존주비신),

그러나 임금을 높이고 신하는 낮추며

 

163.明分職不得相逾越

    (명분직부득상유월),

각각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상하간이 서로가 범할 수 없도록 한 점은

 

164.雖百家弗能改也

    (수백가불능개야).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165.名家苛察繳繞

    (명가가찰격요),

명가는 뒤엉켜서 복잡하게 된 사물을 철저하게 살펴봄으로서

 

166.使人不得反其意

    (사인부득반기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뜻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167.專決于名而失人情

    (전결우명이실인정),

오로지 명분에 따라서만이 일을 행함으로서 사람으로서의 정을 잃게 만든다.

 

168.故曰“ 使人儉而善失眞”

    (고왈, 사인검이선실진).

그런 이유로, “ 사람으로 하여금 명분에 구속되어 진실 된 마음을 잃게 만든다.”라고 한 것이다.

 

169.若夫控名責實

    (약부공명책실),

그러나 명실상부함을 구하기 위하여

 

170.參伍不失

    (삼오불실),

명과 실을 상호 비교함으로서 그것들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을

 

171.此不可不察

   (차불가불찰)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태사공자서(6)

171.道家無爲

    (도가무위),

도가의 설은 무위이면서

♣무위(無爲)/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72.又曰無不爲

    (우왈무불위),

또한 무불위라고도 말하고

♣ 무불위(無不爲)/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이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정정함을 지켜 나간다면, 만물은 장차 자화하여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173.其實易行

    (기실이행),

그 실제는 행하기는 쉬우나

 

174.其辭難知

    (기사난지).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175.其術以虛無爲本

    (기술이허무위본),

도가의 이론을 시행하는 방법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176.以因徇爲用.

   이인순위용

인순(因循)을 수단으로 삼는다.

♣인순(因循)/ 자연에 순응한다는 뜻

 

177.無成勢

   (무성세),

고정된 세도 없고

 

178.無常形

    (무상형),

일정한 형상도 없다.

 

179.故能究萬物之情

    (고능구만물지정).

고로 만물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

 

180.不爲物先

    (불위물선),

사물에 앞서지도 않고

 

181.不爲物后

    (불위물후),

사물에 뒤지지도 않는다.

 

182.故能爲萬物主

    (고능위만물주).

고로 능히 만물을 주제 할 수 있다.

 

183.有法無法

    (유법무법),

법칙이 있으나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184.因時爲業

    (인시위업);

시대에 응하여 사업을 이루기도 한다.

 

185.有度無度

    (유도무도),

사물을 재는 척도가 있으나 일정한 것이 없어

 

186.因物與合

    (인물여합).

사물에 따라 더불어 합친다.

 

187.故曰 “ 聖人不朽

    (고왈, 성인불후),

그런 연유로 “ 성인의 사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188.時變是守

    (시변시수).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켜진다.

 

189.虛者道之常也

    (허자도지상야),

허무는 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고

 

190.因者君之綱”也

    (인자군지강야).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임금이 지켜야 할 강령이다."라고도 말해진다.

 

191.君臣幷至

    (군신병지),

임금이 신하와 같이 이르게 되면

 

192.使各自明也

    (사각자명야).

임금은 신하들 각자가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193.其實中其聲者謂之端

    (기실중기성자위지단),

이때 신하들의 실제가 그 명성에 부합하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194.實不中其聲者謂之窾

    (실부중기성자위지관).

그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관(窾)이라 한다.

 

195.窾言不聽

    (관언불청),

신하들의 헛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196.奸乃不生

    (간내불생),

간사스러운 신하가 생기지 않으며

 

197.賢不肖自分

    (현불초자분),

어진 자와 불초한 자는 스스로 분별되어

 

198.白黑乃形

   (백흑내형).

흑백과 같이 형체를 확연히 드러낼 것이다.

 

199.在所欲用耳

(재소욕용이),

단언(端言)과 관언(窾言)을 적재적소에 따라 쓰기만 한다면

 

200.何事不成

    (하사불성).

무슨 일인들 이루어 내지 못하겠으며

 

201.乃合大道

    (내합대도),

이것은 곧 대도에 부합되는 일이 될 것이며

 

202.混混冥冥

    (혼돈명명).

어지러우며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203.光耀天下

    (광요천하),

천하를 빛낼 수 있어

 

204.復反無名

    (반복무명).

반복해서 무명(無名)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명(無名)/ 노자의 도가 사상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도란 것도 무명인 것이다. 인위적인 예악, 인의 등을 반대하는 노자의 무명론은 유가의 정명론(正名論)과 대립된다.

 

205.凡人所生者神也

    (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음을 말하며

 

206.所托者形也

    (소탁자형야).

정신이 맡기고 있는 것은 그 육체이다.

 

207.神大用則竭

    (신대용즉갈),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쇠갈(衰竭) 하고

 

208.形大勞則幣

    (형대노즉폐),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피로해 진다.

 

209.形神離則死

    (형신리즉사).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210.死者不可復生

    (사자불가복생),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211.離者不可復反

    (이자불가복반),

육체를 떠난 정신은 다시 돌아와 결합할 수 없다.

 

212.故聖人重之

   (고성인중지).

고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 것이다.

 

213.由是觀之

   (유시관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214.神者生之本也

   (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

    (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이 깃들게 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216.不先定其神形

    (불선정기신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를 먼저 안정시키지 않고서

 

217.而曰 “ 我有以治天下”何由哉?”

   (이왈, 아유이치천하, 하유재)

오히려 “ 내게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라고 말하니 그것은 무슨 이치에서인가?

 

태사공자서(7)

 

218.太史公旣掌天官

    (태사공기장천관),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219.不治民

   (불치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20.有子曰遷

   (유자왈천).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221.遷生龍門

    (천생용문),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서

♣용문(龍門)/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으로 태원 북쪽에서 발원하여 산서성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분수(汾水)가 하수(河水)와 만나는 곳이다. 그 북쪽에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222.耕牧河山之陽

    (경목하산지양).

그는 하수의 근처의 태항산(太行山) 남쪽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살다가

 

223.年十歲則通古文

    (연십세즉통고문).

나이가 10 살이 되자 고문(古文)을 익혀 통달하게 되었으며

♣고문(古文)/진시황이 중국의 문자를 금문(今文)으로 통일하기 전에 사용했던 선진시대의 문자.

 

224.二十而南游江, 淮,

     (이십이남유강회)

나이가 20세에 이르자 남쪽의 강회(江淮) 사이를 유람하고,

♣강, 회(江淮)/강수(江水) 즉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를 말한다.

 

225.上會稽

    (상회계),

월(越) 땅의 회계산에 올라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하(夏)왕조를 세운 우(禹) 임금이 그곳에 올라 천하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회계라 지은 것이다. 회계(會稽)는 곧 회계(會計)이다. 춘추 말기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부차(夫差)에게 쫓겨 회계산으로 달아나 농성하다가 결국은 항복하였으나 후에 권토중래하여 부차를 멸망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226.探禹穴

    (탐우혈),

우(禹)임금이 묻혔다는 굴을 찾아 보고

♣ 우혈(禹穴)/ 우임금이 회계에 순수(巡狩)차 회계산에 들렸다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우임금은 죽은 것이 아니라 회계산 산중에 있는 굴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우혈이란 그것을 말한다.

 

227.窺九疑

      (규구의),

다시 구의산에 올라 순임금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며

♣그의산(九疑山)/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순임금이 순수를 나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 영원현은 광동성과 인접해 있는 호남성 남쪽에 있는 산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이다.

 

228.浮于沅, 湘

    ( 부우완,상);

그곳을 흐르던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두 강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원수(沅水)/귀주성과 호남성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동서로 가로질러 동정호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상수(湘水)/광서성, 광동성, 호남성과의 접경지대의 구억산(九 山)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상담시(湘潭市)와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를 지나 동정호(洞庭湖)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장사시에서 50여 키로 남쪽에 있는 상담시(湘潭市)는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또한 순임금이 구억산으로 순수 나왔다가 그곳에서 죽자 요임금이 딸이었던 순임금의 두 부인이 상심한 나머지 상수에 빠져 죽은 전설이 있다. 상군(湘君)은 상수에 빠져 죽은 순임금의 두 부인을 말한다.

 

229.北涉汶, 泗,

    (북섭문,사)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문수(汶水)/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 이름. 시경의 제풍(齊風)과 노풍(魯風)에 나오는 시가의 무대로 많이 나온다.

♣사수(泗水)/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노나라의 도성이었던 곡부를 거쳐 회수와 합쳐지는 회수의 지류.

 

230.講業齊,魯之都

    (강업제, 노지도),

제(齊)와 노(魯) 두 나라의 도성에서 학문을 논했으며

 

231.觀孔子之遺風

    (관공자지유풍),

공자가 남긴 유풍을 살펴보고,

 

232.鄕射鄒,嶧;

    (향사추,역);

추(鄒)와 역(嶧) 땅의 향사(鄕射)를 참관했다.

♣추(鄒)/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에 있었던 고을 이름으로 맹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역(嶧)/추현 동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이 산에 올라 자기의 공적비를 세웠다.

 

233.厄困鄱, 薛, 彭城,

     (액곤파, 설, 팽성)

파(鄱)와, 설(薛), 팽성(彭城)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파(鄱)/지금의 산동성 등현( 縣)을 말하고

♣설(薛)은 등현 경내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 때 중소제후국이었다가 제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맹상군(孟嘗君)의 아버지인 전영(田 )이 이곳에 봉해져 설공(薛公)이라 했고 다시 맹상군이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를 말한다. 진시황이 죽고 한초(漢楚)가 천하를 놓고 다툴 때 초의 항우(項羽)가 도성으로 삼은 곳이다.

 

234.過梁, 楚以歸

     (과량, 초이귀).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도성으로 들어갔다.

♣양(梁)/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처음 수도는 지금의 산서성 남쪽의 하현(夏縣)에 있었던 안읍(安邑)이었으나 후에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그 도읍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로 옮기고 그 이름을 대량(大梁)이라 불렀다. 이어서 위나라는 나라이름을 양(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맹자의 양혜왕(梁惠王)이란 위혜왕을 가리킨다.

♣초(楚)/춘추전국시대 때 호북과 호남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름. 처음에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를 도읍으로 했으나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쫓겨 갔다. 다시 안휘성 거양(巨陽)을 거쳐 다시 지금의 수현(壽縣)인 수춘성(壽春城)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그림 7-1> 기원전 110년 경 사마천의 중국 주유도

 

235.于是遷仕爲郎中

    (우시천사위낭중),

그리고 천(遷)은 조정에 나가 낭중이 되어

♣낭중(郎中)/진한시대 때 황제의 시위(侍衛)를 담당했던 관직명. 진나라 때 시위의 직분을 셋으로 나누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外朗)이라 했다.

 

236.奉使西征巴,蜀以南

    (봉사서정파,촉이남),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 이남 지방을 정벌한 다음,

♣ 파촉(巴蜀)/(巴)파는 지금의 중경시(重慶市)를 말하고 촉은 성도(成都)를 가리킨다.

 

237.南略邛,窄,昆明

     (남략공,착,곤명),

다시 남쪽으로는 공, 착, 곤명을 공략하고,

♣공()/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漢武帝) 때 이곳에 월수군(越 郡)을 두었다.

♣착()/사천성 한원(漢源)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 때인 기원전 110년에 이곳에 심려군(沈黎郡)을 설치했다.

♣곤명(昆明)/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주(大理州) 일대에 살았던 이민족 이름이다. 운남성의 주도(州都)인 곤명(昆明)은 이 민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38.還報命.

    (환보명)

돌아와 복명하였다.

 

239.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

(시세천자시건한가지봉),

이해에 천자는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봉선(封禪)/태산(泰山)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봉(封), 낮은 구릉인 양보산(梁父山)에 단을 만들어 땅에 지내는 의식을 선(禪)이라 하여 합하여 봉선(封禪)이라 한다. 봉선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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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자서 2 -사마천의 주유천하

태사공자서 2 -사마천 http://giant.x-y.net/sagi/etc/preface_1.htm 218.太史公旣掌天官(태사공기장천관),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219.不治民(불치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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