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연암은 이 편지에서 한글은 한 자도 모른다고 했는데, 한글의 기록적 문자로서의 가치를 부인한 겁입니다.그는 진짜로 한글로 남긴 기록문장이 없습니다.힌글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점은 연암사상의 유일한 약점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농서를 모아 정리한 <과농소초>에서는 곡식명과 농기구명 50여개를 적긴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남긴 한글기록물의 전부입니다.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주C-001]홍수(弘壽) : 박홍수(1751 ~ 1808)는 자가 사능(士能)으로, 박상로(朴相魯)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연암의 4대조 박세교(朴世橋) 이후 갈라진 집안이다. 그의 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외조부가 바로 연암의 고조 박필균(朴弼均)이었다.


뜻밖에 종놈이 왔기에 그가 가져온 편지를 뜯어 반도 채 읽지 않아서 글자 한 자마다 눈물이 한 번 흘러 천 마디 말이 모두 눈물로 변하니 종이가 다 젖어 버렸구나. 이런 일들은 내가 지난날에 두루 겪었던 일들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려 팥알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아,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 중에는 천 가지 원통함과 만 가지 억울함을 품고도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릇 성(城) 하나를 맡아 국가의 보루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강성한 이웃나라의 오만한 적군이 번갈아 침략하여, 운제(雲梯)와 충거(衝車) 등으로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 오는데도,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미미한 원조도 끊어지고 안으로는 참새나 쥐, 말 고기와 첩의 인육까지 다 떨어져 필경에는 간과 뇌가 성과 함께 으스러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뜻을 꺾고 몸을 굽히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D-001]운제(雲梯)와 충거(衝車) : 성을 공격하는 무기들로, 운제는 높은 사다리이고, 충거는 충돌하여 성을 무너뜨리는 병거(兵車)이다.
[주D-002]참새나 …… 말았지만 :
당 나라 안사(安史)의 난 때 어사중승(御史中丞) 장순(張巡)은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睢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곡식이 다 떨어져 많은 병사들이 굶어 죽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였고, 허원은 종을 죽여서 군사들을 먹였다. 또 참새나 쥐 등도 모조리 잡아서 먹도록 하고 갑옷, 쇠뇌 등도 삶아서 먹게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끝내 함락되면서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新唐書 卷192 張巡傳》


그러므로 살아서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되었으며, 아내는 봉작(封爵)되고 자손들은 음직(蔭職)을 얻어 만대에 길이 부귀를 누렸으며, 이름이 역사에 남겨지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가 굳은 절조를 지킨 경우, 그가 겪은 곤란과 우환이 어찌 열사(烈士)가 고립된 성을 지킨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적이 있었겠는가. 그 또한 오직 ‘나에게는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평생을 헤아려 보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는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고, 종국에 성취한 것이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는 것을 흉내낸 데 불과하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못난 사내요 죽어서는 궁한 귀신이 되며, 종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처자는 보존되지 못하며, 제 이름자는 묻혀 없어지고 무덤은 적막할 뿐이다.


[주D-003]작은 …… 것 :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는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로잡게 한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되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행동하겠는가.” 하였다.


아, 슬프다! 하늘이 백성들에게 선(善)을 부여하실 때 어찌 그토록 다르게 했겠으며, 뜻의 독실함 또한 어찌 남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끝내 풀어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논자들은 선뜻 한마디 말로 마감하여 말하기를, “가난이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마침내 옛 성현들이 남긴 교훈을 뒤적여 보았더니, 공자는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君子固窮〕” 했고, 맹자는 “선비는 뜻을 높이 가진다.〔士尙志〕” 하였다.


[주D-004]군자는 본디 궁하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진(陳) 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子)들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자로(子路)가 성난 얼굴로 공자에게 “군자(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외람된 짓을 한다.” 하였다.
[주D-005]선비는 …… 가진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제 나라 왕자(王子) 점(墊)이 “선비는 무엇을 일삼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뜻을 높이 가진다.”라고 답하였다.


천하에서 본디 곤궁하고 뜻을 높이 가지는 선비 중에 이 사람〔若人 가난한 선비〕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는데도, 성인은 이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은 말을 준비하여 거듭 훈계하신 듯하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계(蘇季)는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글을 읽고 곤궁한 매고(枚皐)는 독서에 더욱 매진했으니 이는 바로 그들이 원통함을 씻고 억울함을 푸는 밑천이 되었지.


[주D-006]소계(蘇季)는 …… 읽고 : 소계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으로, 그의 자가 계자(季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진은 글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잠을 쫓아, 피가 발까지 흘러내리곤 했다 한다. 《戰國策 秦策》
[주D-007]곤궁한 …… 매진했으니 :
매고(枚皐)는 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의 저명한 문인 매승(枚乘)의 서자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함께 곤궁하게 살다가, 나중에 대궐에 글을 올려 자신이 무제(武帝)가 초빙하고 싶어했으나 작고한 매승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벼슬을 얻게 되었다. 부송(賦頌)에 뛰어나고 또 글을 빨리 지었기 때문에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漢書 卷51 枚皐傳》 단 그가 독서에 매진했다는 고사는 출전을 알 수 없다.


종놈을 붙잡아 두어 무엇 하리오마는, 부득불 장날을 기다려 베도 사와야 하고, 겸하여 솜도 타야 하겠기에 자못 날짜를 허비하게 되었고, 또 비와 눈이 연달아 내려 즉시 떠나보내지 못했을 뿐이다. 둘째 아이 혼사는 아직 정한 곳도 없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느냐. 아마도 내가 평소에 물정에 어두운 줄을 잘 알 텐데, 오히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도리어 절로 웃음이 난다.


[주D-008]둘째 아이 …… 없는데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는 1795년(정조 19)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주D-009]내행(內行) : 먼 길을 나들이한 집안의 부녀자들을 가리킨다.
[주D-010]50년 동안 해로한 아내 :
연암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연암과 동갑으로, 16세 되던 1752년(영조 28)에 시집 와서 1787년(정조 11)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해로한 햇수는 35년인데, 아마 부인의 향년을 들어 대략 ‘50년’이라 말한 듯하다.


현수(玄壽)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약간의 물자를 보내어 도와주고 싶지만 애닯게도 인편이 없어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무엇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이 종놈에게 주어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놈의 생김새가 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우선 그만두고 다른 인편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부 정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환곡을 다 받아들이면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


[주D-011]현수(玄壽) : 박현수(1754 ~ 1816)는 자가 사문(士門)으로, 박상규(朴相圭)의 아들이고 박홍수의 사촌 동생이다. 벼슬은 하지 못했다.
[주D-012]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
원문은 ‘若不信實’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苦不信實’ 즉 ‘몹시 신실하지 않기에’로 되어 있다. 이 역시 문리는 통한다.
[주D-013]장부 …… 끝났으니 :
1792년(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에게 그간 환곡을 횡령한 사실을 자수하도록 권하고, 처벌을 가하는 대신 자진하여 변상하게 하니, 아전들이 몇 년 안에 완납하여 장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이제 막 안경을 걸치고 이 편지 쓰기를 다 못 마쳤는데, 통진(通津)에서 편지 두 통이 또 왔구나. 아직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사연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이만 줄인다.


[주D-014]통진(通津)에서 …… 왔구나 : 통진은 경기도 김포(金浦)의 한강 입구에 있던 현(縣)이다. 그곳에 사는 연암의 친척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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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은자주]이 글을 문집에 챙겨 넣은 아들 종채의 주석도 흥미롭겨니와 사마천의 <사기>, 유학 경전의 인용까지 국역번역원의 꼼꼼한 주석은 연암의 사고의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篇)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뭉쳐진 두루마리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아들 종채(宗采)가 삼가 쓰다.

[주D-001]뭉쳐진 두루마리 : 원문은 ‘局縛’인데, 이본들에는 ‘卷縛’으로도 되어 있으나, 뜻은 비슷하다.
[주D-002]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주D-003]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권4에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무릇 선비〔士〕란 아래로 농(農) · 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주D-004]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즉, 노(魯)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D-005]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사(士)’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士)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을 ‘사’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秦)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주D-006]송 광평(宋廣平)이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 ~ 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 ~ 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주D-007]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송(宋)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주D-008]노중련(魯仲連)이 …… 물러갔으니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주D-009]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제 5 장의 한 구절이다. 단 《시경》에는 ‘疹’ 자가 ‘殄’ 자로 되어 있다.
[주D-010]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제 3 장의 한 구절이다.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孝)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悌〕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統〕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雅〕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이랴?

[주D-011]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禮)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주D-012]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善)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는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주D-013]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素’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統’ 자, ‘본디’로 번역한 ‘雅’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요,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주D-014]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雅’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雅〕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術)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주D-015]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를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주D-016]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과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禮)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雅’ 자를 ‘바르다〔正〕’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고 하는데, 안로(顔路)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

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주D-017]안자(顔子)는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주D-018]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노(路)는 그의 자(字)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槨)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주D-019]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권2 치사(致思)에,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道)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性)과 명(命)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理)와 기(氣)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性)과 정(情)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
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註)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주D-020]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주D-021]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反’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아마도 주공(周公)의 저술인저!”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주D-022]《주례(周禮)》는 …… 저술인저 : 정현(鄭玄)은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注)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즉,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주D-023]왕망(王莽)은 …… 그르쳤다 :
한(漢)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

“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주D-024]중니(仲尼)가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를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5]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6]내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D-027]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주D-028]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칭찬을 들은 이는 오직 안로(顔路)의 아들 안자(顔子)일 것이다. 안자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D-029]중니(仲尼)의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를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30]《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善)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역(易)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말이다.

[주D-031]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
이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주D-032]대숙(大叔) : 누구의 자(字)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주D-033]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주D-034]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주D-035]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런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상(喪)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喪)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일찍이 어려움을 함께 겪은 사람의 상을 만나면 탄식하고, 조문을 가야 할지 주저되는 경우를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알게 된 사람이면 탄식한다.

[주D-036]기공(朞功)의 …… 경우 : 상기(喪期)가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喪)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傳)에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주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주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주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에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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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우록서(會友錄序)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연암집 제1권


[주C-001]회우록서(會友錄序) : 담헌(潭軒) 홍대용(洪大容 : 1731 ~ 1783)이 편찬한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 부친 서문이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항주(杭州) 출신의 선비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筠) · 육비(陸飛)와 교분을 맺고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衕)에 있던 그들의 여사(旅舍)에서 수만 언(言)의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귀국한 뒤인 1766년 음력 6월 15일 엄성 · 반정균 · 육비와 나눈 필담과 그들을 만나게 된 시말 및 왕복 편지들을 3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 곧 《건정동회우록》이라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

庭筠書》 《담헌서》 외집(外集) 권1에 연암과 민백순(閔百順)이 지은 2종의 회우록서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36도(都)의 땅을 돌아보면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여 바닷물이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고 이름난 산과 큰 멧부리들이 그 중앙에 서리어 있어, 들판은 백 리가 트이어 있는 곳이 드물고 고을은 천 호가 모여 있는 곳이 없으니 그 지역 자체가 벌써 편협하다 하겠다.


[주D-001]36도(都) :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동국지지(東國地誌)》에 의거하여 단군조선의 왕검성부터 고려의 개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의 왕도(王都)를 노래한 시이다. 이로 미루어 36도(都) 역시 36개의 왕도(王都)를 뜻하는 듯하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나라에 상고 이후 모두 36개 왕국의 도읍지가 있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02]천 호 :
원문은 ‘千室’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萬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옛날의 이른바 양(楊) · 묵(墨) · 노(老) · 불(佛)이 아닌데도 의론의 유파가 넷이며, 옛날의 이른바 사(士) · 농(農) · 공(工) · 상(商)이 아닌데도 명분의 유파가 넷이다. 이것은 단지 숭상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을 뿐인데도 의론이 서로 부딪치다 보니 진(秦)과 월(越)의 거리보다 멀어진 것이요, 단지 처한 바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도 명분이 비교하고 따지는 사이에 화(華)와 이(夷)의 구분보다 엄하게 된 것이다.


[주D-003]양(楊) · 묵(墨) · 노(老) · 불(佛) :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학파, 노자(老子)의 도가(道家)와 불타(佛陀)의 불교를 말한다. 유교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하는 네가지 유파이다.
[주D-004]의론의 유파(流派)가 넷이며 :
김택영(金澤榮)의 《중편연암집(重篇燕巖集)》의 주(注)에 노론(老論), 소론(小論),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사색당파(四色黨派)를 말한다고 하였다.
[주D-005]명분의 유파가 넷이다 :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의 주에 사당인(四黨人), 비사당인(非四黨人), 중인(中人), 서족(庶族)을 말한다고 하였다.
[주D-006]진(秦)과 월(越) :
춘추(春秋) 시대에 진 나라는 중국의 서북에 있고 월 나라는 동남에 있어 서로 거리가 지극히 멀므로 소원한 사이를 말할 때 진월(秦越)이라 이른다.


그리하여 형적이 드러남을 꺼려서 서로 소문은 들으면서도 알고 지내지 못하며, 신분상의 위엄에 구애되어 서로 교류를 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한다. 마을도 같고 종족도 같고 언어와 의관(衣冠)도 나와 다른 것이 극히 적은데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으니 혼인이 이루어지겠으며, 감히 벗도 못 하는데 함께 도를 도모하겠는가? 이러한 몇몇 유파가 아득한 수백 년 동안 진과 월, 화와 이처럼 서로 대하면서 집을 나란히 하고 담을 잇대어 살고 있으니, 그 습속이 또 어찌 그리도 편협한가.


[주D-007]함께 도를 도모하겠는가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는 “군자는 도(道)를 도모하지 먹고 사는 문제는 도모하지 않는다.〔君子謀道 不謀食〕”고 하였고, “도가 같지 않으면 그와 더불어 도를 도모하지 못한다.〔道不同 不相爲謀〕”고 하였다.


홍군 덕보(洪君德保)
가 어느 날 갑자기 한 필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서, 시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너절한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항주(杭州)에서 온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틈을 엿보아 여사(旅舍)에 걸음하여 마치 옛 친구나 만난 것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D-008]홍군 덕보(洪君德保) : 덕보는 홍대용의 자(字)이다.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근원이며, 주자학(朱子學)과 육왕학(陸王學)의 차이며,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시기며, 출처(出處)와 영욕(榮辱)의 분별 등을 한껏 토론하였는데, 고증하고 증명함에 있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서로 충고하고 이끌어 주는 말들이 모두 지극한 정성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지기로 허여하였다가 마침내 결의하여 형제가 되었다.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기를 여색을 탐하듯이 하고, 서로 저버리지 말자 하기를 마치 동맹을 맺기로 서약하듯 하니 그 의기가 사람을 눈물겹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주D-009]
진퇴(進退)와 소장(消長) : 진퇴는 군자와 소인의 교체, 소장은 음양(陰陽)의 변화를 가리킨다. 군자가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는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는 시기이며, 군자가 진출하고 소인이 물러나는 것은 음이 쇠하고 양이 성하는 시기이다.
[주D-010]출처(出處)와 영욕(榮辱) :
출처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벼슬할 때와 은거할 때를 잘 분별해야 영예를 누리고 치욕을 면할 수 있다.


아, 우리나라와 오(吳)의 거리가 몇 만 리라 홍군이 세 선비와는 또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한마을에서 살면서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더니 지금은 만 리나 먼 나라 사람과 사귀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같은 종족이면서도 서로 사귀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과 벗을 하였으며, 전에 제 나라에 있을 때는 언어와 의관이 똑같아도 서로 벗하려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느닷없이 언어가 다르고 복색이 다른 속인들과 서로 마음을 허락함은 웬일인가?


[주D-011]오(吳) : 항주(杭州)가 있는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홍군이 우수 어린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내 감히 우리나라에 벗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벗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오. 실로 처지에 제한되고 습속에 구속되어 그런 것이니 마음속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소. 내 어찌 중국이 옛날 중국이 아니며 그 사람들이 선왕의 법복(法服)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겠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가 밟던 땅이 왜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사귀는 선비들이 어찌 제(齊), 노(魯), 연(燕), 조(趙), 오(吳), 초(楚), 민(閩), 촉(蜀)의 널리 보고 멀리 노닌 선비들이 아니겠으며, 그 사람들이 읽는 글들이 어찌 삼대(三代) 이래 사해만국(四海萬國)의 극히 많은 전적(典籍)이 아니겠소. 제도는 비록 바뀌었으나 도의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른바 옛 중국이 아닌 지금 중국에도 그 나라의 백성으로는 살고 있을망정 그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없겠소.


[주D-012]선왕의 법복(法服) : 고대의 성왕(聖王)이 예법에 맞게 차등을 두어 제정했다는 옷을 말한다. 천자 이하 다섯 등급으로 나눈 오복(五服)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경(孝經)》 경대부장(卿大夫章)에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고 하였다. 청 나라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한족에게 만주족의 옷을 입도록 강제하였다.
[주D-013]극히 많은 전적(典籍) :
원문은 ‘極博之載籍’인데, 《사기(史記)》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무릇 학식 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그래도 육경(六經)에서 진실을 찾는 법이다.〔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라고 한 구절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그렇다면 저들 세 사람이 나를 볼 때에도 화(華)가 아닌 이(夷)라고 차별하며 형적이 드러나고 신분의 위엄이 손상될까 꺼리는 마음이 어찌 없을 수 있겠소. 그러나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절 따위는 타파해 버리고서 진정을 토로하고 간담을 피력하니, 그 통이 매우 큰 점으로 볼 때 어찌 명성과 세리(勢利)를 좇느라 쩨쩨하고 악착스러워진 자들이겠소.”


[주D-014]그 통이 …… 때 : 원문은 “其規模之廣大”인데, 홍대용은 그의 연행록(燕行錄)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통이 크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세심한 점을 들었다. 《湛軒書 外集 卷8 燕記 沿路記略》


그러고는 드디어 세 선비와 필담한 것을 모아 세 권으로 만든 책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면서,

“그대가 서문을 써 주시오.”

하였다. 나는 다 읽고 나서 이렇게 감탄하였다.

“통달했구나, 홍군의 벗함이여! 내 지금에야 벗 사귀는 도리를 알았도다. 그가 누구를 벗하는지 살펴보고, 누구의 벗이 되는지 살펴보며, 또한 누구와 벗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내가 벗을 사귀는 방법이다.”

[흑산도]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주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은자주]달밤에 탑골공원 주위에 모여살던 북학파 인사들이 술을 마시고 종각이 있는 종루로 나와 수표교까지 거닐며 새벽 닭이 울 때까지 흥청거린 풍류가 예나 이제나 별반 차이가 없다. 1920년대 양주동 오상순 선생팀은 우이동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해거름에 알몸으로 소를 타고 동대문으로 진출했고, 서정주 선생은 이상 등과 어울리며 불켜진 술집을 만나면 한 잔씩 들이키며 서울역에서 동대문까지거닐며 밤시간을 허비했으며, 1960년대 후반엔 나도 쥐뿔도 없으면서 가끔 착한 '악동' 주당들과 어울리며 필동을 출발하여 세운상가를 거쳐 광화문까지 비틀거리며 밤시간을 탕진했다. 젊음의 객기로 인해서 청춘은 아름다운 건가?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떠난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주D-001]박성언(朴聖彦) : 1743 ~ 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로, 성언은 그의 자이다.
[주D-002]서원덕(徐元德) :
1738 ~ 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 · 병조 · 호조 · 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진(秦)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주D-003]진(秦)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앉아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주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상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련(柳璉))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은자주]수표교: 삼일빌딩 가가이 잇는 삼일교 아래 다리가 수표교이다

[주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

[중국이 재구한삼선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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