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뉴델리에서 연꽃사원도 관광하였지만 대신 이슬람사원을 적었으니 연꽃사원은 제8일차 귀로에 소개하기로 하고 바라나시로 이동하기로 한다. 이동수단은 18:18분에 뉴델리역을 출발하여 빨라야 13시간이 걸린다는 동북부 고속열차 침대칸을 탔다. 은자는 3층 맨꼭대기층이었는데 오르내릴 때는 거의 유격훈련수준이었고, 천정이 코에 닿아 납작 업드려 이동이 가능한데다 허리를 반쯤 펀 공간밖에 없으니 갑갑하기 그지 없었다. 더군다나 남들은 취침중인데 바닥을 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통로 건너편의 덩치가 큰 젊은 인도인 하나가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은자는 1시, 3시반, 6시에 그를 깨웠다. 달려들까봐 겁도 약간 났지만 은자는 그를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Because of your nose sounds, another passengers can't sleep."

"Your nose sounds very high. and we can't sleep."

그의 어깨를 흔들며 내가 중얼거린 말들이다. 문법적으로 틀린지는 모르지만 소통은 되었는지 그가 두터운 손바닥을 폈다가 떨구며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두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그를 흔들어 깨워야 했다.

문득,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밤에/ 어이해 나홀로 잠못 이루나"로 시작하는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콧수염을 달고 있던 이장희는 그 얼굴 인상이 꼭 인도인 같기도 했다. 이장희는 조영남, 송창식연배의 미국으로 이민간 가수이다.

기차는 반시간쯤 더 걸려 바라나시역에 도착했다. 동승자들이 냇가에 남녀의 무리가 따로 떨어져 앉아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대변보는 풍경을 얘기했지만 은자는 침대가 3층이어서 목격하지는 못했다. 한길 가까운 노천화장실(?)에서 그런 자세로 뒤 보는 풍경을 자이푸르에서 한 번 목격한 적은 있었는데 녀석은 태연스레 한길을 향해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이장희/ 그건 너

https://www.youtube.com/watch?v=9t8M26W8s4Y&list=PL3111C88BE233EF7B

 





http://www.youtube.com/watch?v=UzQWlma6K4w

UzQWlma6K4w&amp;amp;hl=ko&amp;amp;fs=1

AqXSQahrnQM&amp;amp;hl=ko&amp;amp;fs=1

 

http://www.youtube.com/watch?v=pt_592w2g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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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화장된 곳 라지가트(Raj Ghat), 정방형의 비석을 세우고 꽃잎과 꽃엮음으로 평면 비석을 장식했다. 사원처럼 신발은 벗어야 했다. 백과사전 몇 부분을 발췌했다. 둥근 빵떡모자를 쓴 이들은 힌두교도들이다.

Gandhi, Mohandas Karamchand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

넷째 아내였던 어머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공국(公國) 포르반다르의 데완(dewan:총리)이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공적인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유능한 행정가로 변덕스러운 군주들과 그들에게 오랫동안 고통당해온 백성과 권력을 쥐고 있는 고집불통의 영국 관리들 사이에서 잘 처신했다.

어머니 푸틀리바이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힌두신 비슈누를 신봉하는 비슈누파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 파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우주만물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의 경향을 많이 가졌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그는 아힝사(ahiṃsā: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1888년 9월 영국으로 건너가 도착 10일 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지만 봄베이 고등학교의 시간제 교사직조차 얻기 어려워 그는 라지코트로 돌아와 소송인의 탄원서를 작성해주며 생활했으나 이 일마저도 영국인 관리의 비위에 거슬리자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의 어느 인도인 회사로부터 1년 기한의 계약 요청을 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다.

민족지도자로서의 활동
1915~18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탄압법인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의 암리차르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1년 안에 다시 투지를 갖고 1920년 가을 그는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35년 된 인도 국민회의당을 인도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기구로 바꾸어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영국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마지막 투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인도 민족주의운동은 마지막 국면에 들어섰다. 그는 파시즘을 증오했으며 전쟁 또한 싫어했다. 인도 국민회의당은 자치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인도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역사적 평가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간디를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로 여기거나, 가장 나쁘게는, 영국인에 대한 우애를 설교하면서 뒤로는 영국을 쫓아내려고 하는 위선자로 여겼다. 간디는 이러한 편견의 벽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 벽을 '사티아그라하'로 뚫으려고 했다. 1920~22년, 1930~34년, 1940~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간디에 대한 비판은 인도인 가운데에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가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반대로 영국의 축출과 국내 기득권층의 제거 또는 카스트의 철폐 등과 같은 사회개혁에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했고 이슬람교에 편견을 가졌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건 정치인과 급진주의자, 테러리스트와 의회정치주의자, 도시의 지식인과 농촌의 대중들, 힌두교의 카스트와 불가촉천민,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시켰던 간디의 위대한 역할은 최근에 와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간디는 분명히 정치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 있었다. 그가 "30년 동안 열망한 것은 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형식주의나 교리, 의식, 또는 종파주의를 뜻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는 개인적인 수도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생활 속에서 도전하며 확인되는 것이었다. 그는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는 "마하트마의 고뇌는 마하트마만이 아는 것"이라고 썼다.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파의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 동료들 중에 비폭력을 신조로 받아들이고 그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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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외관외의 다른 건축물은 없었고 광장뿐이었다. 전면 건물에7-8개의 문없는 감실 형태의 기도실[3rd 사진]에는 코란 경전이 쌓여 있었고, 후면에는 회랑처럼 지붕을 얹은 공간만[5th사진 하단 부분] 마련되어 있었다. 컴퓨터 용량 때문인지 핸드폰 사진을 읽을 수 없어 퍼다가 싣는다.

인도까지 지배했던 몽골족의 무골왕조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무굴 왕조 (인도 왕조) [── 王朝, Mughal dynasty]

(아)Mongol. Mogul이라고도 씀.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의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카타이와 투르크 정복자 티무르(태머레인)의 후손 바부르(1526~30 재위)가 무굴 왕조를 세웠다. 거의 2세기에 걸쳐 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했고, 일곱 황제들이 모두 남다른 재능을 가진 능력있는 통치자였으며, 그 행정조직이 매우 훌륭했던 점 등으로 유명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융화하여 통일 인도를 만들고자 했던 점이었다.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1556~1605 재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또 남북으로는 구자라트에서 데칸까지 영토를 확장해 무굴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무굴 제국은 악바르의 아들 자한기르(1605~27 재위)와 손자 샤 자한(1628~58 재위)까지 지속되었다. 샤 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1658~1707 재위)는 비자푸르와 골콘다의 이슬람 데칸 왕국을 합병했다.

무하마드 샤(1719~48 재위)의 재위중에 무굴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에는 델리 근처의 매우 좁은 지역만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이후 마라타족(1785), 그뒤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1803).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1837~57 재위)는 1857년에 폭동과 반란에 연루되어 양곤으로 추방되었다.→ 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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