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220화 - 너그러워야 복을 받는다 (每事從寬)

 

어떤 사람이 남대문 근처에서

주점을 열었다.

이 주인은 매우 부지런하여

주점을 여는 날 아침,

파루1)종이 울리자마자

문을 열고

주점의 개시를 알리는

등불을 달았다.

1)파루(罷漏) - 새벽에 33번을 치는 치는 종,

이 파루 종이 울리면 사대문이 열려 사람이 통행하였음.

독음은 ‘바라’로 함.

 

그렇게 하고 돌아서서 들어오는데,

상복을 입은

상주 한 사람이

바로 뒤따라 들어와서는,

"주인장! 여기 술 한 잔과

국 한 그릇 좀 가져 오시오."

하고 시키는 것이었다.

곧 주인이 술과 국을 갖다주니,

이 사람은 맛있게 그릇을 비우고는

술 한 잔과 국 한 그릇을 또 시켰다.

 

이에 주인이 다시 내주자,

손님은 역시 금방

다 먹어 버리고는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지금 돈이 없으니

외상으로 해두었다가

내일 갚겠소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새벽에 주점 문을 열자마자

첫 번째로 들어와 술과 국을 먹고

외상으로 하자고 하면,

보통은 화를 내겠지만

주인은 너무나 태연하게,

"아, 손님! 그렇게 하시지요.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면서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보내는 것이었다.

 

이러고 나니

주점에는 하루 종일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주인은 그 접대를 하느라 바빠서

식사할 시간도 낼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역시 파루 종소리가 울리니,

주인은 곧 개시를 알리는

등불을 달았다.

그러자 또 어제 새벽에 처음 왔던

그 상주 손님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어제처럼

술 한 잔과 국 한 그릇을

시켜 먹은 다음,

"주인장! 오늘도

외상으로 달아 놓으시구려."

하고 일어서서 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주인은 역시

외상으로 해두어도 상관없다고

친절하게 말하고는 보냈는데,

이 날도 어제처럼 손님이 들끓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다음날 새벽에도,

또 그 다음날 새벽에도

상주 손님은 언제나 똑같이

새벽에 문을 열자마자

들어와서 외상술을 마셨고,

그 뒤에는 늘

손님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날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니

주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상주 손님은

필시 사람이 아니야.

아마도 도깨비거나

신령인 게 틀림없어.

분명히 조화를 부리고 있는거야...'

그래서 이후에는

그 손님을 더욱 친절히 대하고,

술안주를 특별히 잘 마련하여 대접했다.

 

이러고 며칠이 지나니,

하루는 그 상주 손님이

저녁때 주점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돈 2백 냥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이것은 그 동안

내가 먹은 외상값이니 받아 두시오."

이렇게 거금을 외상값이라면서 내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는 것이었다.

주인은 그 많은 돈에 크게 놀랐다.

 

그런 뒤에도 이 상주 손님은

매일 같이 새벽에

첫손님으로 들어와서

술과 국을 시켜 먹었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는 저녁때 와서

또 다시 2백 냥을 주고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1년이 넘어가니

주점 주인은

수만 냥의 돈을 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주점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상주 손님에게 상의를 했다.

"손님, 덕분에 제가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 이 주점을 청산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좋을는지요?"

"암, 주인장 좋고말고요.

그렇게 하시오."

 

곧 주인은 주점을 팔겠다고

널리 알리니,

돈에 욕심이 많은

혜청(惠廳)의 사령 하나가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평소 이 주점에

손님이 많은 것을 눈여겨보고

욕심을 내던 중이었는데,

팔겠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이에 사령은 집과 기물들을

주인이 달라는 대로

후하게 값을 치르고 모두 인수했다.

그리고는 새 단장을 한 다음

수십 독의 술을 빚어서

어느 날 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개점 첫날 새벽이었다.

국을 끓여 술과 함께 준비를 하고,

앞서 주인이 한 것처럼

새벽에 파루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주점 개시를 알리는 등불을 달았다.

그러자 제일 첫손님으로

상주 복장을 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이렇게 주문했다.

"주인장! 술 한 잔과

국 한 그릇 좀 주시구려."

주인은 개점 첫손님으로

상주가 들어온 것에

기분이 좀 상했다.

 

그러나 손님이 요구하는 대로

술과 국을 내다 주니

금방 그릇을 비우고,

다시 술 한 잔과

국 한 그릇을 요구했다.

이에 주인은 다시

술과 국을 내다 주었고,

상주 손님은 그것을

다 먹은 뒤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주인장!

내 상가에서 오는 길이라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외상으로 달아 두면

내일 돈을 가지고 와서

꼭 갚으리다."

"아니, 뭐라고요?

개점 첫날인데 안돼요,

속히 돈을 내시오!"

"주인장, 지금 내 주머니에

돈이 없는데 어쩝니까?"

"여보시오! 남의 주점 개시 첫날

첫손님으로 와서 외상이라니,

이게 되는 말입니까?

돈이 없으면

그 상복이라도 벗어 놓고 가시오."

주점 주인이 화를 내면서

상복이라도 벗어

전당을 잡히라고 윽박지르니,

상주 손님도 욕을 하면서 맞섰다.

 

"그 술값 4푼에

이 비싼 상복을 벗어

전당으로 잡히라니

말이 되는 소립니까?

무슨 그런 염치없는 소리를 해요?"

이 말에 주인은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상주 손님을 붙잡고

뺨을 때리려고 하니,

손님은 얼른

몸을 빼내 도망치면서

계속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주인은

달아나는 손님 뒤를

한참 쫓아가다가

마침내 한길 모퉁이에서 붙잡고는,

양쪽 뺨을 번갈아

때리면서 소리쳤다.

"남의 개점 첫날 첫손님으로 와서

돈도 내지 않고 술만 마시고

게다가 욕까지 하면서 달아나니,

너 같은 놈은 그냥 둘 수가 없다."

그러면서 덤벼들어

상복을 억지로 벗기고,

쓰고 있던 방갓마저 빼앗아 가지고

주점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상주 손님은,

앞서 주점을 판 주인에게 나타났던

그 정체불명의 상주 손님이 아니었다.

그는 관직을 맡고 있는 양반으로,

친척 대감댁 소상 제사에 참석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에 상복과 방갓을 빼앗기고

뺨까지 맞아

볼이 벌겋게 부은 상태로

그는 분이 나서,

소상 제사를 지낸

그 대감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그 댁에서 보고

놀라 물으니,

이 사람은 하도 분해서

주점 주인에게 고통을 주어

분풀이를 하려고,

일부러 한껏 부풀려서 거짓말을 했다.

"길을 가고 있는데

악한이 나타나서 마구 때리고는,

상복과 방갓을 빼앗아

남대문 옆 주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감댁에서는

그 주점으로 종들을 보내면서,

"속히 가서 주점 안을 수색하여

상복과 방갓이 있으면 빼앗아 오고,

주인도 이리로 끌고 오너라.

그 놈을 실컷 때려 주고,

날이 밝는 대로

형조에 고발하여

귀양을 보내야 겠다." 하며

속히 다녀오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끌려온

주점 주인은 매를 맞은 뒤,

형조로 불려가 무한한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많은 비용이 든데다

주점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들지 않으니,

마침내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말았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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