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229화 - 부인의 지혜로 도적을 속이다 (智婦瞞盜)
서울에 사는 한 선비가
조실부모하고 집이 무척 가난했다.
그런데 20세 때
영남 지역 처녀에게 장가를 드니,
아내가 아름답고 재능이 많아서
혼인한 지 1년쯤 지나자
가정을 잘 이끌어
집안 살림이 넉넉해졌다.
세월이 흘러 혼인한 지
여러 해가 되니,
아내는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가고 싶어했다.
때마침 세모가 가까울 무렵,
선비는 가마를 세내어
아내를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
그렇게 집을 떠난 지
5,6일쯤 되었을 때였다.
날이 저물자
한 주점에 들어 밤을 지내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잠이 깨어 일어나 불을 켜니,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많은 부하를 거느린 채
선비가 자는 방으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이에 선비가 놀라 두려워하면서
그 사람을 보니,
나이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데
매우 건장하고 늠름했으며
몸에는 남색 천릭(天翼)을 입어
마치 장군같았다.
이 사람은 곧
선비를 향해 절을 하고
인사를 올리기에,
선비도 절을 하고는 물었다.
"관원께서는 일찍이
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야심한 밤중에 무슨 일로
이 사람을 방문한 것인지요?"
"예, 나는
산속에 은거해 사는 사람으로
천명이 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관찰사도 부럽지 않은
부귀를 누리고 살지만,
나이 서른에 아직
아내를 얻지 못했습니다.
시골 여인들은 모두
내 배필로 합당하지 않아서
여기저기 물색하던 중,
선비가 가솔들을 거느리고
시골로 행차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부인 또한 매우 아름답고
현숙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중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례한 요구 같지만
선비는 서울에서
다시 장가드는 일도
어렵지 않을 터인즉,
부인을 내가 데려가고자 하여
이렇게 온 것입니다.
5천 냥의 돈을 드리겠으니
부인을 내주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 말에 선비는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세상에 이런 억지로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돈을 받고 아내를 팔다니요?
국법이 있거늘
어떻게 이런 짓을 한답니까?"
"그것 참,
선비는 생각이 많이 모자라십니다.
내 비록 무례한 행동이지만,
이렇게 결심하고 왔는데
그런 말로 물러갈 줄 아는지요.
선비는 이 거금으로
얼마든지 다시
현숙한 규수에게 장가들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선비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내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억지로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돈 5천 냥도 잃고 낭패를 당해,
생명에도 지장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요?"
도적 두목의 말에
선비는 말문이 막혀 눈물만 흘리니,
이 때 벽 너머
옆방에 있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선비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비가 울먹이면서
아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가자,
도적 두목은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려고
가만히 벽에 귀를 기울였다.
"서방님, 이 일은 큰 변고입니다.
어찌 말로 설득하여
해결될 일이옵니까?
저들은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도적떼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당신 집안에 들어와
춥고 배고픔을 견뎌야 했고,
또 아직 자녀도 없으니
저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여
부귀를 누리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방님은
저 사람들이 주는 돈 5천 냥으로
다시 장가를 들어
많은 전답을 사서
부자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잘 되는 일이오니,
이 몸을 두고
공연한 희생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부인은 옆방에 들리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면서
도적 두목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하는데
선비는 오열을 하며,
"뭐라고? 당신이 도적에게 가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내 이 자리에서 죽어도
당신과 생이별은 할 수가 없소."
선비는 아내의 손을 잡고 흐느끼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내는 다시 뿌리치고
냉정하게 꾸짖었다.
"뭐라고요?
사내대장부가 왜 이렇게 못났어요.
나 역시 즐거운 건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속히 보내준다고 허락하세요."
이에 선비는
비분을 금할 수 없었으나,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아내를 주겠노라고 허락했다.
이 말을 들은
도적 두목은 좋아하면서
선비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내 잠시 대화를 엿들어 보니
부인은 정말 현숙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큰 재앙을 자초하지 않는 것이 좋지요.
부인의 현명한 판단을 따른 것은
정말 잘한 처사입니다."
선비는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듯하여
풀썩 주저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 선비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내 지금 수습하여
장군을 따라 나설 것이니
서둘러 가마를 준비하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선비의 아내는 몸단장을 하고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출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도적 두목은 매우 기뻐하면서
5천 냥을 들여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속히 떠날 준비를 하라고 호령하니,
선비는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선비의 아내는
얼굴을 덮어 가리고 나와서
가마에 올라탔다.
두목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선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무리를 호령하며 가마를 따라
쏜살같이 떠나갔다.
이 때 선비는 통곡을 하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다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방안에는 아내가 단정하게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비는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
아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여보, 이게 어찌된 일이요?
정말 당신이 맞소?"
"예. 서방님은 여기 앉아
제 말을 들으소서.
저 무도한 두목이 무리를 거느리고
깊은 밤중에 나타났는데
억지로 빼앗아 가려는 것을
서방님과 저의 힘으로
어찌 당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5천 냥을 준다는 건
도적으로서 서방님을 대접하여
선심을 쓴 것이랍니다.
그 상황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강제로 빼앗아 갔을 것이고,
서방님의 몸 또한
온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방님을 불러 놓고,
일부러 저들이 듣도록
큰소리로 말해
안심을 시킨 것이지요.
그리고는 예쁘장하고
나이도 저와 비슷한
몸종을 타일러서,
잘 치장을 시켜
대신 태워 보낸 것입니다.
두목은 여종을 저로 알고
기뻐할 것이고,
여종 또한 남의 종노릇만 하다가
부귀를 누리며
호강할 수 있으니 좋고,
서방님 역시 저를 잃지 않았으니
다행일 뿐만 아니라.
돈을 받아
집안이 넉넉해지게 되었으니
더욱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여보, 당신의 지혜에
나는 일만분의 일도 못 따르겠소.
마치 꿈을 깬 듯하오., 여보!"
"서방님, 위급한 상황에서
겨우 작은 계책 하나 써본 것뿐이니
너무 칭찬하지 마십시오.
이만한 꾀도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이후 선비는 돈을 싣고
시골로 내려가 전답을 사서
마침내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고,
부부가 함께 백수해로(白首偕老)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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