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345화 - 제목을 바꾸어도 과거에 급제하다 (換題參科)
해남에 성품이 우직한
윤민(尹敏)이란 선비가 있어,
과거를 보는 날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 때 태인군(泰仁郡)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
고관(考官 : 시험관리관)들을 성토하고 있었다.
"근래 고관들이
과거에 출제할 제목을 사전에 누설하여
사사로이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많으니,
오늘은 이미 정해 놓은 제목을 버리고
다른 제목으로 급히 바꾸어
출제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외치니,
고관들이 처음에 정해 놓은 제목인
'현룡재전(現龍在田)'1)을 폐기하고,
'집극오(集戟烏)'2)라는
새 제목을 시제로 내걸었다.
1)현룡재전(現龍在田) :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
2)집극오(集戟烏) : 창으로 까마귀를 찌르다.
그러나 윤민은
부(賦)를 잘 지어 자신이 있는데다
성격이 조급하다 보니,
새로 내걸린 제목은 보지도 않은 채
과거장에 들어오기 전
미리 소문으로 퍼진
'현룡재전'이란 제목 그대로
능란하게 부를 짓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함께 온 친구들도
여러 명 앉아서 시험을 보고 있었으나,
모두들 자신의 과문(科文)을 작성하느라 열중하여
옆 사람에게 물어 본다거나
돌아보지 않았다.
윤민이 시험지를
반쯤 작성했을 때였다.
한 친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의 시험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제목은 '집극오(集戟烏)'인데
자네는 '현룡재전(現龍在田)'으로 작성하고 있나?"
이에 윤민은 고개도 들지 않고
나무라듯 말했다.
"무슨 소린가? '현룡재전'은
사관이 출제한 제목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었던 거 아닌가?
괜한 소리하지 말고,
어서 자네 시험지나 마저 작성하게!"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여러 친구들이 크게 웃으면서,
"이 사람아! 자네가 뭘 모르는구먼.
'현룡재전'은 앞서 출제한 제목이었고,
시험 시작 전에
태안의 선비들이 바꾸라고 성토해서
'집극오'란 새 제목으로 내걸었단 말일세.
그래서 모두들 그리 작성하고 있는데,
자네 혼자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모두들 말하는데도
윤민은 믿지 않고,
조금 떨어져 앉은
낯선 선비를 향해 물었다.
"이보시오, 오늘 제공(諸公)들은
어떤 부를 짓고 있는지요?"
"아니, 뭐라고요?
시험 끝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 와서 제목은 왜 묻는 거요?'
"아, 내 이상해서 묻는답니다.
나는 '현룡재전'으로 부를 짓고 있는데,
여기 친구들이 '집극오'가 제목이라고 하니
그래서 묻는다오."
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현룡재전'으로
몇 구나 지었느냐고 물어
거의 반쯤 지었다고 하니,
모두들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마치기 전에 발견했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려.'
이에 윤민은 비로소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미 절반 이상 써놓은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할 수 없다.
여기 쓰던 것을 마저 완성하고,
제목만 '집극오'로 바꿔 써넣어야 되겠구나.
이제 와서 다시 짓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부를 완성한 뒤 제목만 바꿔 써놓으니,
'집극오'란 제목에
내용은 '현룡재전'이 되어 버렸다.
그러자 이를 본 주위 사람들이
배를 쥐고 웃으면서 놀려댔다.
이 때 한 사람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로 제출하구려.
오늘 사관이 세 사람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사사로운 재주를 부려
부정을 저지르려다
선비들로부터 성토를 받고
정해 둔 제목을 바꾸게 되어
의기소침해 있고,
또 한 사람은
겨우 실용적인 학문을 익혀 급제를 했으나
이미 나이가 많아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여하려 하지 않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문장을 해득하지 못해
비록 닭을 그려 놓아도 좋게 보이면
합격을 시킬 사람이니,
용(龍)과 오(烏)를 어찌 구별하겠소?
그저 내용만 좋으면
제목에 상관없이 급제할 수도 있을 것이니,
걱정 말고 그대로 제출해 보구려.'
이에 윤민은 제목과 내용이 전혀 딴판인
그 시험지를 용기 있게 제출했다.
그러고 나서 급제자의 방이 내걸린 것을 보니,
윤민도 그 중에 이름이 끼어 있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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