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을 호가하는 초간본 시집의 작품

*[운영자 생각]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제에게 말살당한 민족혼을 일깨우고 주권회복의 염원을 토로한 작품으로 해석함이 맞을 것 같네요. 술에 취해 아편 복용으로 이승을 마감한 것은 절망의 끝에서의 마지막 선택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독도를 지네 땅이라고 아이들 교과서에 싣는 쪽바리들 생각하면 이갈린다.

나는 문학이다

 

나는 문학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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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 ]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

출생 - 사망 1902년 8월 6일 ~ 1934년 12월 24일

 

목차

  1. “우리 시대의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민족시인, 김소월
  2. 우리 서정시의 원류, 혹은 민족시의 발원지
  3. 김소월의 작품 리스트

[본문 중 발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장에 들러 아편을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귀가해서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장에서 구해온 아편을 삼키고 영원한 잠에 빠져든다. 그다음 날인 1934년 12월 24일 새벽에 그 남자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게 금생에서 소월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植)으로 음력 1902년 8월 6일(양력 9월 7일)에 태어난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인데, 그곳은 일찍부터 공주 김씨들만 백여 호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소월은 그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성도(性燾)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인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폭행을 당한다. 당시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공사에 일본 낭인(떠돌아다니는 사람들, 浪人)들이 투입되는데, 김성도는 음식 선물을 말에 싣고 처가 나들이를 나섰다가 그것을 뺏으려는 이들과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진달래꽃’, <개벽>, 1923

('진달래꽃' 해설과 함께 감상하기)

 

또한,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노래’ 외에 연대미상의 작품 ‘봄’, ‘남의 나라 땅’, ‘전망’, ‘물마름’, ‘옷과 밥과 자유’, ‘가을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 등을 보면 민족적 저항의식이 은근히 깔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빼앗긴 땅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갈.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벽>, 1923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다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김억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허무를 짐작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龜城)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자신에게 상속된 전답을 팔아 식솔을 끌고 처가인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것은 1924년이다. 그곳에서 <동아일보> 남시지국(南市支局)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배포, 수금, 경영을 모두 책임지고 경영한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전무하고 세속적인 처세에 서툴렀던 그는 곧 파산해버리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보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 조선문단> 1927년 2월호 ‘문단소식’ 난에 의하면 그때까지 소월이 남시지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학도, 생활도,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 세월을 보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소월 [金素月] -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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