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D-NmCD9xh8

 

 

https://www.youtube.com/watch?v=rV_zhhMnJBA

 

https://www.youtube.com/watch?v=yf0VgOznG90

 

https://www.youtube.com/watch?v=6NxmyacYtMQ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803

 

연산군(燕山君)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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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산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연산군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연산군(燕山君,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 이씨.[1] 조선 성종의 장자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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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자료의 발췌입니다.

무오사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무오사화입니다.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조의제문세조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국문장에서 김일손을 국문하자 김일손은 자신은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하며 스승과 스승의 동료 문하생들을 모두 발설했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南袞)·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유배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생모 추숭 시도와 좌절[편집]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한다. 강하게 반발하던 사림의 태도에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감정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다.

또한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다. 또한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 등 한성부의 일부 사찰은 연회장과 마굿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본래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던 연산군의 성품을 본 이극돈(李克墩), 임사홍훈구파 재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 및 정쟁에 이용하려 한다.

갑자사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갑자사화입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폐비 윤씨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 복위를 반대했고, 임사홍궁중파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부중파 역시 숙청한다.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 정여창(鄭汝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은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안군을 시켜 때려 죽이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어 산야에 버리고 아무에게도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 안양군봉안군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했다(두 사람은 중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쳤고(들이받았다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또는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름)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음란 행위[편집]

채청사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월하매 정도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치세 후반[편집]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4품직인 사인, 검상, 이조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 그는 정무를 보좌할 때 영의정이나 삼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했으며, 문묘에서 공자에게 작헌례를 할 때 그의 생전의 직분은 신하였다며 제배만 하게 했다.

폐위와 최후[편집]

폐위와 유배 생활[편집]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 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7] 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한다.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으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즉시 압송되어 폐위(廢位)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했다. 그러나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된다.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진다.

최후[편집]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다. 함께 유배되었던 그의 왕자들도 사사, 처형당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유배생활중 그는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 하였다.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강화 교동도에서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7] 사망 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

 

[참고] 후세에 부르는 왕의 호칭은 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다음 왕이 부여한 시호(諡號)다. 시호를 받지 못한 왕들은 왕자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君'으로 호칭한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成宗인데도 그 아들은 시호를 받지 못했다.  '成' 자는 그 나라 禮樂의 기틀이 완비되었다고 부여하는 시호인데도. 갑자사화를 일으킨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시호를 내릴 명분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정치판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다. 물론 역사의 정론에 가까운 판결은 후세 역사가의 몫이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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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호(諡號)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시호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이다. 시호는 국가가 부여하는 공적인 시(諡)로서, 개인이 붙이는 사시(私諡)와 구별되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諡)는 전자 쪽이다. 시호를 붙이는 제도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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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종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세종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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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총 22명 중 적자녀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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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성종(成宗, 1457년 8월 19일 (음력 7월 30일) ~ 1495년 1월 19일 (음력 1494년 12월 24일) , 재위 1469년 ~ 1495년)은 조선의 제9대 왕이며 시인, 유학자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혈(娎),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아무. 사후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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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16남 12녀(28명)로 자녀 복 많은 조선 군주 랭킹 2위.

자녀수 많은 조선 군주 랭킹

1위 태종. 부인 10명. 12남 17녀. 29명

2위 성종. 부인 12명. 16남 12녀. 28명

3위 선조 부인8명. 14남 11명. 25명

4위 정종 비빈 6명. 15남 8녀. 23명

5위 세종. 부인6명. 18남 4녀. 22명

6위  태조. 부인6명. 8남 5녀. 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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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청나라(후금)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립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자주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으나, 자기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반대했던 반대세력을 숙청하다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등 폐모살제(廢母殺弟)때문에 서인세력과 힘을 합치던 능양군 인조가 반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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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제왕의 금기사항 어기다

• 연산군, 제왕의 금기사항 어기다 • -사초(史草) 보기 [은자주] 조선왕조실록에는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 분이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자의 칭호를 유지한 채 그들의 사적마저도 "실록"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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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묘/ 북한산 둘레길 02

왕답지 않은 왕이라하여 사후에 받는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해 왕자시절의 이름을 고수한 채 왕릉으로 격상되지 못하고 일반인의 무덤 호칭인 묘에 머물렀다. 이것이 한자문화권의 역사의식이다. 참고로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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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원작 박종화  각본  임희재

감독 신상옥
출연 신영균 (연산군 역), 김동원 (성종 역), 전옥 (인수대비 역), 허장강

연산군 -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6bZqPbV6UJQ

연산군 -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1qIOycp9t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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