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45435.html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49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広島・長崎原子爆彈投下, 영어: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는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자폭탄 두 개를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간 미국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도시 67개에 전락상 집중하여 폭격하였다.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강요하였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 월요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명령하여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1][2]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이 원자폭탄 두 개는 인류사 최초로 전쟁에서 일반 시민 학살에 쓰인 원자폭탄이었다.[3]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4]
일본의 항복
미 전시 내각은 8월 9일까지 일본에게 네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8월 8일 소련이 얄타 협정에 근거를 두고 소-일 불가침 조약을 파기,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히로히토는 기도 고이치에게 “소련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니 즉시 상황을 수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1945년 9월에 일본을 공격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기도는 즉시 제국 회의를 열어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에게 연합군의 항복 요청을 기존의 네 가지 조건에서 한 가지 조건으로 축소시켜 수락하라고 이야기했으며 동시에 “천황의 지위에 흠이 갈 수 있는 요구에는 타협하지 말 것”이라고 전했다.[75] 8월 12일 히로히토가 황가에 항복의사를 밝혔으며 연합군 측에서 천황제를 방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틀 후 14일 히로히토는 연합군 측에 항복을 선언하는 내용을 일본 전역에 방송했다. 이에 다음날 군부 측에서는 항복 선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후 4만여 명의 미군이 히로시마를 점령했고, 2만 7천 명이 나가사키를 점령했다. 또한 9월에 연합국(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련)이 일본을 분할 점령할 목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다음은 최고책임자였던 히로히토의 조건없는 항복 방송 중 원자폭탄에 관한 부분이다.
"(중략)…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인한 폭탄으로 죄없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죽이니, 그 참혹함은 참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하여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일은,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 또한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리 되면 짐은 어찌 수많은 백성들을 지키고, 황실과 조상의 신령께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에게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명한 연유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모든 맹우(盟友)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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