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角山은 백운대(白雲臺),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鏡臺) 세 봉우리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백운대 (白雲臺) 835.6 : 인수봉 (仁壽峰) 810.5 : 만경봉 (萬景峰) 800.6
해발 800m 급 세 봉우리의 이름이 흥미롭다. 흰 구름 머무는 봉우리, 두번째 높은 봉우리, 만 가지가 넘는 온갖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봉우리.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D%95%9C%EC%82%B0
북한산(北漢山)은 서울특별시 강북구·도봉구·은평구·성북구·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양주시·의정부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5.6m(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산으로, 이름은 조선 후기시대때 한성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북한산은 1억 7천만년전에 형성되었으며, 최초로는 마한의 땅으로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한산(漢山)이라 불렸고 인수봉은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렸으며 시조 비류와 온조 형제가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1년 이후 횡악(橫嶽)이라고도 불렸다. 475년 고구려가 이곳을 정벌하여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 칭한다. 신라가 이곳을 정벌하고(553년) 난 후 557년에 일시적으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이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는 부아산(負兒山)이라고도 불렀고, 993년 이후 때 부아봉(현 인수봉 810.5m), 중봉(현 백운대 835.6m), 국망봉(현 만경대 800.6m, 국토지리정보원) 세 봉우리가 모여 있어 삼각(三角)처럼 보여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려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에 측성한 중흥산성을 보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한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일제강점기 이후로 점차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3년에 대한민국의 국립공원 북한산으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는 북한산 둘레길 코스가 개방되었다.
북한산 봉우리
현재 높이는 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1:25,000 지도상 고도이며 문헌에 나와 있는 자료이다.
백운대 (白雲臺) 835.6 : 인수봉 (仁壽峰) 810.5 : 만경봉 (萬景峰) 800.6 : 노적봉 (露積峰) 715.5 : 용암봉 (龍巖峰) : 일출봉 (日出峰) 617 : 월출봉 (月出峰) 600 : 기룡봉 (起龍峰) 588 : 반룡봉 (盤龍峰) 583 : 시단봉 (柴丹峰) 607 : 덕장봉 (德藏峰) 586 : 복덕봉 (福德峰) 594 : 석가봉 (釋迦峰) 598 : 성덕봉 (聖德峰) 631 : 화룡봉 (化龍峰) 644 : 잠룡봉 (潛龍峰) 701 : 문수봉 (文殊峰) 727 : 보현봉 (普賢峰) 714 : 716봉(구 나한봉 : 715.5m 삼각측량지점) : 나한봉(구 나월봉(蘿月峰) 688 : 나월봉(구 환희봉 (歡喜峰) 657 : 증취봉 (甑炊峰) 593 : 용혈봉 (龍穴峰) 581 : 용출봉 (龍出峰) 571 : 의상봉 (彌勒峰) 501.5 : 원효봉 (元曉峰) 510.3 : 염초봉 (廉峭峰) 662.2 : 시자봉 (侍者峰) 775 : 기린봉 (麒麟峰) 472.1 : 장군봉 (將軍峰) 431 : 등안봉 (登岸峰) 463 : 귀암봉 (龜巖峰) 520 : 상원봉 (上元峰) 684 : 휴암봉 (鵂巖峰) 594 : 형제봉(462.2m),족두리봉(367.3m), 응봉(332.9m) 등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W-Oy8Z_5tY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를 일컫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곧 아래 고지도를 참고하면 삼각산이란 한양을 대표하는, 하늘 높이 솟은 세 개의 산봉우리란 뜻입니다.
일제가 산 이름을 바꾼 데는 여러 說이 있지만 운영자는 왜놈들이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한 조치였다는 데 동의한다. 명산의 정기를 끊기 위한 일제의 흔적이 어디 한두 곳인가? 전국에 '삼각산' 산 이름이 많아서라는 건 핑게에 불과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3%81%ED%97%8C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쟈 漢江水야
故國山川을 ᄯᅥᄂᆞ고쟈 ᄒᆞ랴마ᄂᆞᆫ
時節이 하 殊常ᄒᆞ니 올 동 말 동 ᄒᆞ여라
《청구영언》(靑丘永言)은 1728년(조선 영조 4년) 김천택이 엮은 가곡집이다.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고려 말 이래 시조 998수를 싣고, 끝에 가사 17편을 붙여 곡조별로 엮었으며, 이름을 알 수 있는 작가만도 140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1948년 조선 진서 간행회에서 발행한 《청구영언》에는 시조 580수를 연대순으로 싣고 있으며, 유명씨(有名氏)의 작(作)은 앞에, 무명씨의 것은 뒤쪽에 실었다. 이를 진본이라 하며, 앞의 것은 흔히 대학본이라 한다. 진본이 원본인 듯하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385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3%91%EC%9E%90%ED%98%B8%EB%9E%80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병자란, 병란,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Manchu invasion of Korea), 청의 조선 침공(Qing invasion of Joseon)이라고도 부른다. 청 제국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https://younghwan12.tistory.com/4064
https://kydong77.tistory.com/17482
https://www.youtube.com/watch?v=n7-y0X5reVc
https://www.youtube.com/watch?v=kjrh2tcfEtY&list=RDkjrh2tcfEtY&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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