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4.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20장-4.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1, 五者天下之達道也. 知ㆍ仁ㆍ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다섯이 있고, 그 길을 실천하게 하는 인간의 조건은 셋이 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 사이의 사귐이 그 다섯이고, 知·仁·勇 이 셋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지키지 않을 수 없는 德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은 하나(곧 誠)다.

達道者, 天下古今所共由之路, 卽『書』所謂五典,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是也.

達道는 천하고금의 공유하는 길로 곧 『서경』에서 말한 ‘五典’이고, 맹자가 「등문공」상4에서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라 말한 게 이것이다.

 

知, 所以知此也. 仁, 所以禮此也. 勇, 所以强此也. 謂之達德者,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

知는 達道를 알게 하고, 仁은 이것을 체현하게 하며, 勇은 이것을 힘쓰게 한다. 達德이라 말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공통으로 획득해야 하는 이치다.

 

一, 則誠而已矣. 達道雖人所共由, 然無是三德, 則無以行之.

一이란 것은 誠일 뿐이다. 達道가 비록 사람들이 공유해야 하는 것이지만 三德이 없으면 행하여지지 않는다.

 

達德雖人所同得, 然一有不誠, 則人欲間之, 而德非其德矣.

達德이 비록 사람이 함께 획득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라도 誠이 없으면 人欲이 끼어들어 덕이 덕이 아닌 게 된다.

 

程子曰: “所謂誠者, 止是誠實此三者. 三者之外, 更別無誠.”

정자가 “이른바 誠이란 오직 이 세 가지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세 가지 외엔 다시 별도의 誠은 없다.”라고 말했다. 


는 이미 주어진 것이고 은 이루어나가는 것이다1장에서 말한 이란 말이 다시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達과 道, 達과 德이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노자 『道德經』의 道德과 같은 것이죠. 達道, 達德을 말하는 中庸에 『道德經』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道德經』을 한글로 푼 책의 제목으로 道德을 일컬어서 『길과 얻음』이라고 했듯이, 道의 세계는 길이요, 어떤 의미에서 사실fact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德이라는 것은 ‘得也’, ‘畜之accumulation’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길道로부터 얻어서 쌓아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꽁푸工夫라고 하는 것이 바로 몸의 德의 문제인데, 온갖 형태의 꽁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道라고 하는 것은, ‘君臣 父子 夫婦 兄弟 朋友’라고 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임의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바로 주어져 있는 사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뜻으로 부모를 골라서 택한 것도 아니요, 이미 그렇게 태어난 마당에 내가 싫다고 나의 부모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타고나는 부모의 조건이 일단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 자식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집에 3만권의 장서가 이미 구비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서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재수일 뿐입니다. 道인 것이죠. “나에게는 왜 3만권의 장서가 없느냐”고 아무리 탓해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져 있는 그 道를 가지고서 내 몸에 쌓아가면서 실천하며 이루어가는 것은 德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덕성(moral virtue)인 것이죠.

 

德의 세 가지, 知. 仁. 勇 

이 도덕적 덕성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知·仁·勇이라는 겁니다. 知·仁·勇의 문제에서 주자는 知·仁·勇 각각을 다른 어떤 것에다가 대입시키고 있는데, 中庸의 저자는 대입관계에서 이 말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 앎, 知 

知라고 하는 것은 지식knowledgy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에 차별성을 두지 않아도 좋겠으나, 굳이 분별을 한다면, 지혜와 지식이 서로 대적적인 관계는 아니면서도 반비례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증가하면 지혜가 줄어들고, 지혜가 늘어나면 지식이 불필요해지게 되는 것이죠. 점점 지식에 대한 갈망이 적어진다는 겁니다. 지식과 지혜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은 부분적인 앎이지만 지혜는 전체적인 앎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항상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앎이 폐하리라”, “내가 어리숙하고 미숙할 때는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했으나, 장성하여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사랑은 성내지 아니 하며,.”은 사실 이 ‘사랑장‘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요. 여기서 말하는 거울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거울이 아니라, 청동거울銅鏡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옛날에 아무리 청동거울을 빤질빤질하게 잘 만들었어도 거기에 비친 모습은 부옇고 희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어렸을 적에는 (청동)거울로 보는 것 같이 모든 것이 부옇게 흐릿했으나, 장성하여 지혜가 들고 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막바로 보는 것처럼 명백해졌다”는 말입니다. 고린도는 희랍의 도시 이름으로서(코린트식. 이오니아식. 도리아식 할 때의 그 코린트를 말한다), 그곳은 유명한 거울생산지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코린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가 그곳 사람들이 잘 알아들 수 있도록 거울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죠.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보게 하는 힘이요, 부분적인 앎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왜 온유하고 참느냐, 전체를 보기 위해서 온유하고 참고 시기하지 말고 그러라는 겁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제대로 해석하는 목사를 여태 본 적이 없어요. 고전을 모르니까 그렇지요. 그저 한다는 소리가 “사랑은 온유하다, 남편이 화낼 때 참고 어쩌고, 서로 싸우지 말아라 그게 사랑이다” 맨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해석을 하고 있으니 성경이 제대로 눈에 보일리가 있겠습니까? 고전학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사랑이죠. 사도 바울이 쓴 사랑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항상 전체를 보는 눈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이 없어도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지식은 없을지라도 삶의 본질을 터득하고 있는 위대한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민감성의 仁 

仁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센시티비티이고, 勇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용기입니다. 뒤에 나오는 ··용에 대한 설명문장을 보면,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이라고 했는데, 知와 仁을 풀어 설명하면,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전체적 앎으로의 나아감이고, 힘들여 행하는 것이 仁이다”는 말입니다. 실행하는 것, 실천하는 것은 센시티비티가 없으면 못합니다. 걷는 것조차도 걷는 것에 대한 지적인 앎이 있어서가 아니라, 막상 걸을 때는 걸음걸음에 대해 仁해야 걸을 수 있습니다. 力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감성적인 것이고 센시티비티의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을 힘들여 행한다는 것, 행동이라는 것은 막상 해볼려고 하면 감성의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표한 것에 도달하는 勇 

그런데, “용기라는 것은 知恥也”라고 했습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수치를 알 적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수치를 알 적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 실천의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勇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힘Driving power, 즉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죠. 도올서원에 등록했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은 용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간에 불가피한 일이나 그럴 만한 핑계도 많을 수 있으나 용기 있는 자, 드라이빙 파워를 지닌 자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所以行之者 一也’ 여기의 이 ‘一’은 뒤에서 誠으로 나타납니다. 中庸의 ‘誠論’이 도입되는 지점인 것이지요. 天下之達道의 5가지, 知仁勇 3가지에서 誠 하나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 中庸의 진짜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www.youtube.com/watch?v=qzXzaQ7dc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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