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군자는 誠을 귀하게 여긴다(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해석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고, 道는 스스로 길 내며 가는 것이다.
言誠者物之所以自成,
誠은 물건이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而道者人之所當自行也.
道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誠, 以心言, 本也; 道, 以理言, 用也.
誠은 心으로 말하였으니 本이고, 道는 理로 말하였으니 用이다.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誠은 물건의 끝과 시작이니, 誠하지 않으면 물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誠을 귀중하게 여긴다.
天下之物, 皆實理之所爲.
천하의 물건은 모두 실재하는 理의 행하는 바이다.
故必得是理, 然後有是物.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이치를 터득한 후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다.
所得之理旣盡, 則是物亦盡而無有矣.
터득한 이치가 이미 다하면 이 사물 또한 다하여 있지 않게 된다.
故人之心一有不實, 則雖有所爲,
그렇기 때문에 사람 마음에 하나라도 실재하지 않음이 있으면 비록 행하는 것이 있더라도
亦如無有, 而君子必以誠爲貴也.
또한 있지 않은 것과 같으니, 군자는 반드시 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蓋人之心能無不實,
대체로 사람의 마음은 실재하지 않음이 없어
乃爲有以自成,
곧 함이 스스로 이룸에 있고
而道之在我者亦無不行矣.
길이란 나에게 있으니, 또한 행하지 않음이 없다.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誠이란 스스로 자기에게 이룰 뿐만 아니라, 사물까지도 이루어준다.
誠雖所以成己, 然旣有以自成,
誠은 비록 나를 이루게 하는 것이지만 이미 자기로서 이루게 해줬다면
則自然及物, 而道亦行於彼矣.
자연히 사물에 미치며 도 또한 저기에서 행해진다.
成己, 仁也; 成物, 知也.
자기를 이루는 것은 仁이고, 사물을 이루어주는 것은 知다.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性의 덕이 안과 밖으로 道에 합치되기 때문에 때에 따라 조치함이 마땅하다.
仁者體之存, 知者用之發,
仁이란 體에 존재하고, 知란 用에서 발동하니
是皆吾性之固有, 而無內外之殊.
이것은 다 내 본성의 고유한 것으로 내외의 다름이 없다.
旣得於己, 則見於事者以時措之,
이미 나에게서 얻었다면 일에도 드러나 때에 따라 조치함이
而皆得其宜也.
모두 마땅함을 얻게 된다.
右第二十五章. 言人道也.
여기까지 25장이다. 人道를 말했다.
인용
핵심내용 |
天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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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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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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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誠은 쉬지 않기에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다
(故至誠無息)
故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天地之道: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星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ㆍ鼉ㆍ蛟ㆍ龍ㆍ魚ㆍ鼈生焉 貨財殖焉.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 純亦不已.
해석
故至誠無息.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誠은 쉼이 없다.
旣無虛假, 自無間斷.
이미 헛됨이나 거짓이 없이 스스로 한 순간이라도 끊어짐이 없다.
不息則久, 久則徵,
쉼이 없으니 오래가고 오래가니 징험된다.
久, 常於中也.
久는 내면에서 떳떳한 것이다.
徵, 驗於外也.
徵은 외면에서 징험되는 것이다.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징험되면 아득히 멀어지고, (땅이) 아득히 멀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하늘이) 넓고 두터우면 높고도 밝아진다.
此皆以其驗於外者言之.
이것은 모두 외부로 징험된 것으로 말한 것이다.
鄭氏所謂至誠之德著於四方者, 是也.
鄭玄이 ‘지극한 誠의 덕은 사방으로 드러난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存諸中者旣久,
내면에 보존된 것이 이미 오래되면
則驗於外者益悠遠而無窮矣.
외부로 징험된 것이 더욱 아득하고 멀어져 무궁해진다.
悠遠, 故其積也廣博而深厚.
아득하고 멀기 때문에 쌓인 것이 넓고도 심히 두터워진다.
博厚, 故其發也高大而光明.
넓고도 두텁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 높고 크며, 빛이 난다.
博厚, 所以載物也; 高明, 所以覆物也; 悠久, 所以成物也.
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실어주는 것이고, 높고 밝아짐은 만물을 덮어주는 것이며, 아득하고 멀어짐은 만물을 이루어지는 것이다.
悠久, 卽悠遠, 兼內外而言之也.
悠久란 곧 悠遠함이니 안과 밖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本以悠遠致高厚,
본래의 悠遠으로 높고 두터움에 이르지만,
而高厚又悠久也.
높고 두터움은 또한 아득하고 먼 것이다.
此言聖人與天地同用.
여기서는 성인이 천지와 같은 用임을 말했다.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넓고 두터움은 땅과 짝하고 높고 밝음은 하늘과 짝하며 아득하고 오래감은 한계가 없다.
此言聖人與天地同體.
여기서는 성인이 천지와 같은 體임을 말했다.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이와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드러나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되고 함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見, 猶視也. 不見而章, 以配地而言也.
見은 視와 같다. 不見而章은 땅과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不動而變, 以配天而言也.
不動而變은 하늘과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無爲而成, 以無彊而言也.
無爲而成은 한계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천지의 道는 한 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물건 됨은 둘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물건을 생성함을 헤아릴 수 없다.
此以下, 復以天地明至誠無息之功用.
여기서부터 이하는 다시 천지로 至誠無息의 공효를 밝혔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 不過曰誠而已.
천지의 道는 한 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誠’을 지나지 않는다.
不貳, 所以誠也.
不貳는 誠인 것이다.
誠故不息, 而生物之多,
誠하기 때문에 쉼이 없고 물건을 생성함이 많아
有莫知其所以然者.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天地之道: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
천지의 道는 넓고 두터우며 높고 밝고 아득하고 오래되도다.
言天地之道, 誠一不貳,
천지의 道가 誠하여 한 마디 말로 할 수 있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
故能各極其盛,
각각 그 성대함을 다 할 수 있고
而有下文生物之功.
아랫 문장의 물건을 생성하는 공효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星辰繫焉, 萬物覆焉.
지금의 하늘이란 미세한 밝음이 모인 것이지만 무궁함에 이르러선 해와 달과 별이 매어 있어 만물을 덮어준다.
昭昭, 猶耿耿, 小明也.
昭昭는 밝디 밝음과 같으니, 작은 밝음이다.
此指其一處而言之.
여기서는 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及其無窮,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
及其無窮이란 12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면’의 뜻과 같으니,
蓋擧全體而言也.
대체로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지금의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은 것이지만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선 華嶽을 싣고도 무거워하지 않고 河海를 거두어들이고도 세지 않아 만물을 실어준다.
振, 收也.
振은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지금의 산이란 한 덩이의 돌이 많은 것이지만 광대함에 이르러선 풀과 나무가 나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살며 보물이 창성한다.
卷, 區也.
卷은 구역이란 것이다.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ㆍ鼉ㆍ蛟ㆍ龍ㆍ魚ㆍ鼈生焉 貨財殖焉1.
지금의 물이란 한 잔의 물이 많은 것이지만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선 자라와 악어와 이무기와 용과 물고기와 거북이가 살며 재화가 번식한다.
此四條,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
네 가지 조항은 모두 ‘不貳不息’하여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
성대함에 이르러 물건을 생성하는 뜻을 발명한 것이다.
然天ㆍ地ㆍ山ㆍ川, 實非由積累而後大,
그러나 하늘과 땅과 산과 냇가는 실제로 쌓이고 누적된 후에 커진 것은 아니니,
讀者不以辭害意可也.
읽는 사람은 표현으로 속뜻을 해쳐선 안 된다.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시에서 “하늘의 命에 아름다워 그치지 않는구나.”라고 했으니, 대개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詩, 「周頌維天之命」篇. 於, 歎辭.
시는 「주송 유천지명」의 편이다. 於는 감탄사다.
穆, 深遠也.
穆은 심원하단 것이다.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
“아! 크게 나타남이로다. 문왕의 덕이 순전함이로다!”라고 했으니, 대개 문왕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不顯, 猶言豈不顯也.
不顯은 ‘어찌 나타나지 않으랴?’라는 말과 같다.
純, 純一不雜也.
純은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것이다.
純亦不已.
하늘과 문왕이 순수하여 또한 그치지 않음이로다.
引此以明至誠無息之意.
이것을 인용하여 ‘至誠無息’의 뜻을 밝힌 것이다.
程子曰: “天道不已,
程伊川이 말했다. “하늘의 도가 그치지 않으니
文王純於天, 道亦不已.
문왕은 하늘에 순수하여 도가 또한 그치지 않았다.
純則無二無雜,
순수하면 둘도 아니고 잡되지 않고
不已則無間斷先後.”
그치지 않으면 선후에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다.”
右第二十六章. 言天道也.
여기까지가 26장이다. 天道를 말했다.
인용
중용강의1: 故至誠 無息
중용강의2: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중용강의3: 今夫天 斯昭昭之多
핵심내용 |
天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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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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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k6p6IbP_CzI&t=1922s
www.youtube.com/watch?v=39HeDAbY0EQ
26장-3. 今夫天 斯昭昭之多
동양인에게 하늘은 평면의 모습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星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ㆍ鼉ㆍ蛟ㆍ龍ㆍ魚ㆍ鼈生焉 貨財殖焉. 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 하나가 반짝이는 것 같은 밝음이 많을 뿐인데, 그 무궁한 데 이르러서는 ‘日月星辰’이 다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을 덮고 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일 뿐인데, 넓고 후박한 데 이르러서는 華嶽을 등어리에 싣고도 무거운 줄 모르고 河海를 가슴에 안고도 새지 않는다. 그러니 만물을 실을 만하다. 대저 산이라 하는 것은 한 뭉치의 돌로부터 출발할 뿐이지만, 그것이 광대한 대 이르러서는 초목이 다 거기서 살며, ‘寶藏’이 많이 나온다. 물이라는 것은 一勺, 한 바가지의 물이 많은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不測한 데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용, 물고기, 자라 등이 살고, 많은 貨財가 그 물에서 불어나게 된다. 昭昭, 猶耿耿, 小明也. 此指其一處而言之. 及其無窮,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 蓋擧全體而言也. 振, 收也. 卷, 區也. 此四條,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 然天ㆍ地ㆍ山ㆍ川, 實非由積累而後大, 讀者不以辭害意可也. 昭昭는 밝디 밝음과 같으니, 작은 밝음이다. 여기서는 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及其無窮이란 12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면’의 뜻과 같으니, 대체로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振은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卷은 구역이란 것이다. 네 가지 조항은 모두 ‘不貳不息’하여 성대함에 이르러 물건을 생성하는 뜻을 발명한 것이다.그러나 하늘과 땅과 산과 냇가는 실제로 쌓이고 누적된 후에 커진 것은 아니니, 읽는 사람은 표현으로 속뜻을 해쳐선 안 된다. |
동양인이 말하는 天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주관으로 말한다면, 태양계의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보이는 모든 우주공간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天을 오늘날처럼 무궁한 우주공간(boundless four dimensional time space)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좌악 펼쳐서 평면화시켜 버렸습니다. 일월성신이 모두 동일한 평면 위에 있다고 본 것이죠.
‘天圓地方’이라고 할 때, 모든 일월성신은 서로 ‘近遠之差’가 없이 한 면에 좌악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주자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옛날 사람들의 우주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地 나는 中庸을 처음으로 읽을 때, 이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라는 말을 읽고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라는 것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中庸의 생각의 스케일! 그건 대단합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화악을 실고도 짜식이 무거운 줄을 모르고, 하해를 가슴에 안고도 하나도 새지가 않아! 야! 이거 스케일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참 멋있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어렸을 때 내 감성을 지극히 자극한 그런 문장이예요. 여러분들은 그런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짜릿한 느낌이 없어요?
‘華嶽’이라는 것은, ‘五嶽’ 중의 하나로 지금 협서성의 동부에 있는 ‘華山’을 일컫는다는 설도 있고, ‘華山’ ‘嶽山’이 따로 따로 있는데 그 중 하나라는 설도 있는데, 협서성 동부의 ‘華山’일 것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中庸은 노나라 사람이 쓴 것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도 몇 가지 근거를 대면서 말하였지만, 中庸은 진시황의 대륙통일 이후의 문장인 게 틀림없습니다.
『中庸』은 魯나라같은 시골 어느 구석에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요. 노나라 촌놈이 이 정도까지의 스케일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겁니다. 또한 ‘河海’의 ‘河’라는 말에서는 『中庸』의 성립 장소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쯔강 이북의 강에 대해서는 ‘河’라는 명칭을 쓰고, 양쯔강 이남에서는 ‘江’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黃河’가 그 용례죠. 따라서 ‘河’라는 용법은 中庸이 북방문화권에서 성립한 문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江의 上古音은 ‘가르’이고, 河의 上古音은 ‘가람’으로서 우리말 강의 어원과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우리말의 ‘강‘이라는 말은 ‘가르’보다는 ‘가람’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북방계열의 영향을 받은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도올논문집』에 최교수의 논문에 이런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동양인들에게 山과 水는 함께 한다
이 구절 전체의 구조를 보면, 天地가 나온 다음에 山水로 나가고 있죠? 이 山水의 문제는 『石濤畵論』을 읽으면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1, 우리가 ‘山畵’ 또는 ‘水畵’라고 하지 않고 흔히 ‘山水畵’라고 하듯이, 동양인들의 공간관으로는 반드시 山과 水가 같이 껴있어야 해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원칙이 山과 水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동여지도는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반도의 山과 水를 그린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대동여지도에는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전부 다 표현이 되어 있는데, 山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그 산들 사이로 계곡이 끼어 있고 그 계곡을 따라서 물이 흐르고 있으면, 반드시 이 山水가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니깐! 또한 마찬가지로 논리로 아무리 큰 산줄기라 할지라도 水가 가로 막고 있으면 이 물줄기를 건너뛰지 못합니다. 즉, 산줄기는 물이 합쳐지는 합수지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멈추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이 반드시 하나 있지요. 따라서 산줄기의 흐름은 조선 반도 끝에 와서야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일본의 우리나라 지형 왜곡 행태
그런데 요즘의 지도를 보면,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해서 무슨 산맥2들이 즐비하게 듬성듬성 금을 그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요. 이런 것은 일본놈들이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산자락 물줄기를 따라서 지도에다가 산줄기를 표시한 게 아니라, 즉 실질적인 자연 형세로 지도에다가 산줄기3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땅 속의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소위 ‘산맥’이라는 것을 마구 그려 놓은 거예요. 그래서 산줄기를 뚝뚝 잘라 놓게 되었죠. 山水가 흐르는 데 따라서, 백두산에서부터 쭈욱 백두대간이 뻗어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山水개념입니다.
그런데 묘향산맥, 차령산맥, 태백산맥 이런 식으로 뚝뚝 끊어 놓았어요. 자기네들이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산맥을 마치 사실상의 산줄기인 것처럼 억지로 규정해 버린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인 겁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 민족을 말살시킬려는 음모의 소산이었던 거죠. 완벽하게 땅부터 왜곡을 시켜버렸어요. 일본놈들의 식민지정책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릅니다! 엄청나게 교묘한 짓이었거든요. 도대체 이놈들은 안 해 본 짓이 없어요. 우리 조선땅에 와서 현대 지질학을 핑계로 땅을 마구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우리 산하를 파악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구조와 삶의 공간이라는 걸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 내가 흐르고 있을 때는 그 유수량이 아무리 작은 경우라 하더라도 두 마을 사이에는 어떤 격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山水를 같이 봐야만 인문지리학이 나오는 거예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훨씬 더 리얼하게 우리 삶의 양식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대동여지도를 안 갖고 다니면서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예요. 나는 반드시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다닙니다. 대동여지도가 현대의 지도보다 훨씬 더 낫거든요. 地勢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정확해요. 대동여지도를 꼭 사두시고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서 우리 강산에 대한 본래의 인식을 깨닫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산천이 다 망가지기는 했지만, 대동여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놀랍도록 정확하며 진짜 우리의 山水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사는 이 따님(大地)을 볼 때 반드시 山水를 같이 봐야 한다!
‘今夫山 一券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여기서 ‘一券’은 한 줌, 한 뭉치를 뜻하는데, 한 뭉치의 돌이 흙으로 되는 것이죠. 돌이 흙이 되기까지는 온갖 미생물의 엄청난 수고가 깃들어 있으며, 이외로도 모든 것이 다 작용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돌로부터 시작하여 광대함에 이른 산에서 모든 미네랄과 모든 유기·무기 물질이 나와서 초목이 거기서 살게 되고, 또한 禽獸가 거기서 살게 되는 거예요. ‘寶藏’이라는 것은 옥석, 보물들을 말합니다.
‘今夫水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 生焉 貨財殖焉’ 주자가 말하기를, “언뜻 보기에 이 글은 작은 데서 비롯하여 만물이 생장하도록 하는 지대한 데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마치 山川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것들이 쌓여서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 달라”는 재미있는 註를 달고 있습니다. 마치 조그만 것들이 쌓여서 거대하게 된다는 뜻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것은 표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儒家는 문명의 純을 통해 천지로 확장하려 함
詩云: “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 純亦不已. 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하늘의 命이여, 오! 심원하여 그침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하늘된 소이를 말한 것이요, “아!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文王의 순수함이여!”라고 하였으니, 이는 文王의 文됨을 말한 것으로서 純하여 그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詩, 「周頌維天之命」篇. 於, 歎辭. 穆, 深遠也. 不顯, 猶言豈不顯也. 純, 純一不雜也. 引此以明至誠無息之意. 시는 「주송 유천지명」의 편이다. 於는 감탄사다. 穆은 심원하단 것이다. 不顯은 ‘어찌 나타나지 않으랴?’라는 말과 같다. 純은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인용하여 ‘至誠無息’의 뜻을 밝힌 것이다.
程子曰: “天道不已, 文王純於天, 道亦不已. 純則無二無雜, 不已則無間斷先後.” 정자가 “하늘의 도가 그치지 않으니 문왕은 하늘에 순수하여 도가 또한 그치지 않았다. 순수하면 둘도 아니고 잡되지 않는다. 그치지 않으면 선후에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다.”라고 말했다.
右第二十六章. 言天道也. 여기까지가 26장이다. 天道를 말했다. |
여기 『詩經』의 구절은 「周頌 維天之命」편에 나오는 네 구절인데, 中庸의 저자는 그 네 구절을 두 구절씩 떼어서 둘로 나눴습니다. 즉, “아! 天之命이여, 오! 穆不已하여라!” 이것은 하늘이 하늘 된 바의 까닭을 표현한 것이고, “아!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文王之德의 순수함이여!” 이 말은 文王의 文됨을 나타낸 것이예요.
여기서 ‘純‘이라는 말은 ‘雜’하지 않다는 뜻인데, 宋明儒家에서는 이것 때문에 純·雜 논쟁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性命論’에도 순하다, 잡하다는 논쟁이 많이 나와요. 잡하지 않다는 문왕의 文됨은 뭐냐? 이 ‘文’은 추상적인 의미를 띠는 것으로서, 이 『詩經』의 네 구절이 ‘天’과 ‘文’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그 뜻을 풀어야 합니다. 즉, 天은 자연세계이고 文은 문명, 문명질서의 세계를 말해요. 天의 세계는 ‘至誠無息’하는 ‘穆不已’의 세계, 끊임없는 세계, 끊임없이 天命을 받는 세계로서, 中庸의 저자는 ‘이것이 곧 天이 天다운 것’임을 영탄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은 잡하면 안 되고 순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명에서는 순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고, 맑고 그래야 해요.
道家는 이런 문제에서 문명을 최소화시키는 ‘樸’의 세계, 심플한 세계를 지향했죠? 가장 좋은 문명의 형태는 심플한 것입니다. 모든 물리학의 법칙은 가장 단순한 일반법칙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상대성이론이든 통일장이론이든 뭐가 되었든 물리이론들이 깔고 있고 추구하는 대전제는 가장 단순한 법칙이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중력이 법칙이든 뭐든 원리에 있어서는 가장 단순한 그 무엇인가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거죠. 순해야지 잡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치 문명의 모습이 잡하면 잡할 수록 좋은 걸로만 알고 있는데 이건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적 삶은 가급적 순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대, 서양과 동양을 불문하고 잡하게 살면 안 되요!. 동양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간명한 게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는 겁니다. 단지 크기의 작음(Small is beautiful!)이 문제가 아니라, 單하고 純해야 한다는 것이죠.
조선은 단순함을 존중했으나 1세기 만에 망가졌다
일본놈들은 사이즈에 관심이 많지만, 조선문명은 단순성에 대한 淡泊한 감각을 추구합니다. 에도 문명과 조선문명의 차이가 여기에 있고, 또한 조선문명의 심플한 맛을 일본문명이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선조 木器같은 것을 보면, 거기에 깃들어 있는 단순미, 그 단순한 맛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문명도 당해낼 수 없는 ‘맛’이요 ‘멋’이죠4. 중국문명을 보면, ‘文王之道’를 말하면서도 그 잡스러움이 그지 없습니다. 심플한 맛은 조선 문명이 최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잡스러워져 버렸냐? 우리는 단 1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잡스러운 민족으로 둔갑해 버렸는데, 이제 다시 이 심플한 삶의 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27장 첫 머리에, “大哉라 聖人之道, 洋洋乎! 카아!” 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26장을 반드시 외워둬야 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이말이요? ‘至誠無息’에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純亦不已’라! 천지자연은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어야 하는 한편, 문명은 순수해야 하고 끊임이 없어야 한다 이겁니다. 맨 끝의 ‘純亦不已’가 맨 앞의 ‘至誠無息’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끝나고 있는데, 이 26장은 맨 처음과 맨 끝이 시종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中庸이 가지고 있는 자연예찬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예찬, 이 스케일, 그 문학성, 그 상상력 등등 이 모든 것이 곧 中庸의 맛이고 또한 中庸의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이 中庸을 읽을 때, 참으로 격정적으로 감동되어pacinated 中庸에 대해 열광했었어요. 나는 이 정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백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학교 때 이 中庸을 읽으면서 나의 상상력과 문장력을 키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오늘의 문필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中庸을 통해서 끊임없이 삶의 예지와 통찰력을 배우도록!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납니다. 中庸의 맛은 참으로 좋다! 집에 가서 자꾸 반복을 해서 보시도록! 눈으로만 보지 말고 반드시 입으로 낭독을 해 보세요. 입으로 읽으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읽는 소리가 귀로 다시 들어가고 또 선명하게 메모리에 남습니다. 그러니 낭독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29일부터 2월 5일까지는 명절 휴가이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과 이별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김용옥을 일주일 동안 안 보고 살아도 되고 하루에 4시간씩 책상다리하고서 앉아 있지 않아도 되지 참 신나죠? 아주 신날거야! 오늘은 남재하고 같이 점심을 먹겠습니다.
인용
1. 故至誠 無息
3. 今夫天 斯昭昭之多
- 김용옥, 『石濤畵論』(서울: 통나무, 1992), 100-114쪽, 「山川章第八」 참고. [본문으로]
- 재생 註: 일본인들에 의한 우리 강토의 왜곡과 유린은 조선지리학에는 그 족보가 없는 ‘山脈’이란 이름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 ‘산맥’이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 해가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의 지리학자 코토오분지로小藤文次郞가 붙인 이름이고, 16세기의 『朝鮮方域地圖』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대간’, ‘정맥’의 용어가 갖고 있는 내력에 비하면 그 역사가 하잘 것 없는 조작용어에 불과하다. ‘대간’, ‘정맥’ 등의 용어가 16세기에 이미 쓰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용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지리 인식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山水의 지리인식을 일본놈들은 고작 14개월 동안 단 두차례(1900년과 1902년)의 조사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왜곡시켜 놓았고, 우리는 대부분 지금까지도 이 뒤틀려진 지리인식의 지배 아래에서 너무도 무덤덤하게(不仁하게) 살고 있다. 일본인들의 산맥지형도는 땅 위에 실존하는 산과 강에 기초하여 산줄기를 그린 게 아니라,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규정에 의한 산맥선은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선이 아니라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질학적인 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낙동정맥, 한북정맥, 호남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10개의 큰 강에 물을 대는 젖줄이자, 또한 이 강들을 구획하는 울타리이다. 조석필, 『산경표를 찾아서』(서울: 산악문화, 1993) 참고. [본문으로]
- 여기서 말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산줄기는 등고선으로 나타나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일컫는 게 아니다. [본문으로]
- “淡泊以明知, 誠勤以日新!” 우리 아버지 60 평생의 깨달음이요, 우리 가족 하나하나의 귓전에서 항상 맴돌고 있는 ‘戒言’이다. 조선문명의 ‘멋’과 ‘맛’은 조선인민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왜곡시켜 버린 그릇된 패러다임에 젖어 있는 탓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단지 못보고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仁하면 이걸 볼 수 있으나, 不仁하면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사회 주변을 하찮게 생각했다. 뭔가 모자란 듯한 것으로 비하시켜버리는 시선을 고수하게 된다. 仁이란 인간의 신비적 감정(mithtical emotion)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과학적 자세와 방법이자 삶의 실천이다(scientific paradigm, methodology and practice). [본문으로]
www.youtube.com/watch?v=993CX6EOjUw
www.youtube.com/watch?v=8TVcWj0TY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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