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 (1996년) 김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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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전한 뒤 혜능(慧能)·신수(神秀) 등에 의해 선양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선종의 종류
1.도의(道義)의 가지산문(迦知山門)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 道一)의 제자인 서당(西堂, 智藏)의 법을 받아,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진전사(陳田寺)에 머물렀다.
이때에는 교학(敎學)불교가 성하여 세상이 경전의 가르침에 젖어 있었으므로, 무위(無爲)한 선종은 허탄하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산림에 은거하고 말았다.
도의는 화엄의 4종법계와 55선지식(善知識)의 행포법문(行布法門) 외에 따로 조사선도(祖師禪道)를 설하였는데, 화엄의 4종법계를 손안에 든 법계라 하고, 55선지식의 행포법을 냇물 중의 포말이라고 하였다. 그는 법을 염거(廉居)에게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법을 체증에게 전하였다.
체증은 837년(희강왕 2) 중국에 들어갔다가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무주의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寶林寺)에 이주하였다.
2.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9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은 실상산문이다. 개조 홍척의 자세한 행적은 알기 어렵다. 그도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하였는데, 선강태자의 도움을 받았다.
지증대사비문에 의하면 “정(靜)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 무위의 이익됨은 다투지 않고 이긴다.”라고 하였듯이, 홍척의 선풍은 무위하여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운찬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남종선을 받아 왔다고는 하더라도,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제자에 편운(片雲)과 수철이 있는데, 수철도 역시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 9산선문 중 실상산문이 왕실과 가장 밀착되었던 듯한 인상을 준다.
3.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나머지 하나는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은 839년(신무왕 1)에 중국에서 돌아와서 태안사를 건립하여 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성왕이 그에게 나라를 다스릴 시책을 묻자 봉사(封事) 몇 조를 올렸는데, 그것이 모두 시정의 급무라고 하였다. 혜철의 제자로는 도선(道詵)이 있었다.
도선은 태안사에 머물지 않고 광양에 옥룡사(玉龍寺)를 다시 건립하였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도선의 행적은 신비에 쌓여 있는 면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도선은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함으로써,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이념을 제공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풍수지리설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방을 명당이라 함으로써 지방호족 세력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에, 지방호족은 저마다의 풍수지리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도선의 제자인 경보(慶甫)는 892년(진성왕 6)에 중국에 들어가 동산(洞山)의 제자인 광인(匡仁)의 법을 받았고, 921년(경명왕 5)에 견훤의 도움을 받고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고 있다.
이때 그는 분명히 견훤에게 유리한 풍수지리설을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 도선 계통의 풍수지리가 일찍부터 개성 중심이었다는 데 대하여 의심을 제기할 수 있다.
936년에 경보가 왕건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왕건과 연결되는 것은 아마 뒤에 다시 백계산(白鷄山) 옥룡사로 이주하고 난 뒤였으며, 어쩌면 견훤의 귀순 전까지는 왕건과 연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4.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사자산문은 도윤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도윤은 825년(헌덕왕 17)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南泉, 普願)의 법을 받아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하였다. 한때 풍악(楓嶽)에 거주하면서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으나 능주(綾州)의 쌍봉사(雙峯寺)로 이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절중(折中)이 있는데, 사자산 선사 석운(釋雲)의 청으로 흥녕선원(興寧禪院)에 머물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사자산문으로 크게 발족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절중의 제자에 경유(慶猷)·여종(如宗) 등이 있다.
5. 낭혜(朗慧)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나말여초에 성주산문이 가장 번창하여 낭혜의 제자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여엄·대통·심광·자인(慈忍)·영원(靈源)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대통은 856년에 중국에 들어가 앙산(仰山, 澄虛)의 법을 받고 866년(경문왕 1)에 귀국하여, 충주 월광사(月光寺)에 거주하였다. 월광사는 무열왕계 후손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도증(道證)이 창건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성주산문과 연결된 절이다.
여엄은 중국에 들어가 운거(雲居)의 법을 받아 709년(효광왕 13)에 귀국하면서, 강훤(康萱) 및 왕건과 연결되었다. 낭혜의 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는 심광인데,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적을 알기 힘들다.
심광의 제자인 현휘는 906년(효공왕 10)에 중국에 들어가, 도건(道乾, 아마 道虔)의 법을 받아 922년(태조 7)에 귀국하였는데, 왕건의 귀의를 받아 국사에 봉해졌고 충주 정토사에 거주하였다. 그는 “진공(眞空)은 상이 없으며, 실제는 절언(絶言)이다.”라고 하였으며, 특히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6. 범일(梵日)의 사굴산문(闍崛山門)
사굴산문은 범일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鹽官, 齊安)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하였다.
그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 하였는데,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그 뒤 진귀대사(眞歸大師)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라고 하여,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에 행적·개청·신의(信義) 등이 있었다.
행적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石霜, 慶諸)의 법을 받아 85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에 신덕왕의 요청으로 실제사(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사상 경향을 가져, “일심을 보존하라.”든가 “한 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개청은 범일 문하에 있다가 889년(진성왕 3)에 강릉 보현사(普賢寺)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명주군사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뒤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한편, 범일의 문인인 신의가 오대산 자장의 구거(舊居)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사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7.지증(智證)의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문의 개창자는 지증이다. 지증은 9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켰다. 일찍이 신라의 법랑(法郎)은 중국 4조 쌍봉(雙峰)의 법맥을 받아 와서 신행(信行)에게 전하였고, 그는 다시 준범(遵範)에게, 준범은 다시 혜은(惠隱)에게 전하였다. 지증은 혜은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긍양대사(兢讓大師)의 비문에 의하면 지증은 마조의 제자인 신감(神監)의 법을 받아 온 혜소(慧昭, 雙谿)의 법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6이(異)와 6시(是)를 제창하였다.
6이는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데, 탄생·금기·출가 및 율계와 훈계 등을 받는 특이함을 말한다.
6시는 불사의 당연성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왕실의 청을 거절하면서 단월 세력과 연결되는 면과 사원경제의 당연성을 말한다.
그의 제자에 양부(楊孚)가 있으나 행적이 자세하지 않고, 양부의 제자에 긍양이 있다.
그는 90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의 제자인 도연(道緣, 谷山)의 법을 받아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으며,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그 뒤 그는 혜종·정종·광종의 귀의를 계속 받으면서 왕정을 돕기도 하였다.
긍양의 제자에 형초(逈超)가 있으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제자에 지종(智宗)이 있다. 지종은 고려 광종 때 중국 연수(延壽)의 문하에 들어가 법안종(法眼宗)을 받아 왔다.
8.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이다. 현욱은 824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章敬, 懷暉)의 법을 받아 837년(희강왕 2)에 귀국한 뒤, 경문왕의 청으로 혜목산(慧目山)의 고달사(高達寺)에 거주하였다. 그의 제자에 심희가 있다.
심희는 진성여왕의 청을 거절하고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김율희와 김인광 등과 연결되어 봉림사를 열었고, 곧이어 왕건과 연결되어 918년에는 고려왕실에 나가기도 하였다.
심희의 제자에 찬유가 있다. 그는 892년에 중국에 들어가, 무학(無學)의 제자인 대동(大同, 子祥)의 법을 받아 921년(태조 4)에 귀국하고,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에 거처하였다. 그도 일심을 강조하여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고, 천태사상에 접하기도 하였다.
9.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
9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이다. 이엄은 896년 중국에 들어가, 청원(靑原, 行思)의 법맥을 이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 15)에 귀국하였다. 그는 처음 김해부 지군부사인 소율희의 도움을 받았으나, 뒤에 왕건의 소청으로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 거주하였다.
광조사는 왕건 및 그의 외척 세력인 황보씨 세력의 후원으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엄의 재가(在家) 제자로 황보 제공(皇甫悌恭)과 왕유(王儒)·이척량(李陟良) 등 전직과 현직 고관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엄·경유·형미 등 4인은 모두 운거의 법을 받아와 왕건과 연결되고 있어서, 당시에 이들을 4무외사(四無畏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당시 고려의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리하여 이엄은 “왕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에 처광(處光)과 도인(道忍) 등이 있으나 모두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 기타 산문
9산선문 외에 혜소는 도의나 홍척과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쌍계사(雙磎寺)에서 산문을 이루어 번창하고 있었다. 혜소는 804년에 중국에 들어가, 신감의 법을 받아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였으며, 어산범패(魚山梵唄)를 전하였다. 특히, 쌍계사에는 6조의 영당(影堂)이 있는데, 신라 김대비가 혜능의 머리를 취해 오는 연기설화와 연고되어 있다.
고려 왕건의 선대 세력과 연결을 가진 순지(順之)는 오관산(五冠山)서운사(瑞雲寺)에서 위앙선풍을 펴고 있었다. 그는 4대8상·양대4상·4대5상 등의 상론(相論)과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삼편실제론(三遍實際論) 등의 선종사상을 남겼다.
왕건과 연결된 보양은 청도의 운문사에서 산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의 선풍은 운문종 계통이었다. 이들 외에도 9산선문 중에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산문을 이루고 있었던 자들이 많았다.
선종의 경향
나말여초 선종사상의 경향은 진성여왕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고 있다. 진성여왕 이전의 그것은 개인주의적이었고, 왕실과 지방호족의 쌍방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성여왕 이후가 되면, 그것은 왕실과 결별하면서 점차 지방호족과 연결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후삼국 정립기가 되면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면보다 ‘외화(外化)’에 비중을 두었고, 따라서 지방의 대호족이 주위의 군소 지방 세력을 포섭동화하는 것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의 경향은 왕건이 고려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 교선일치사상이 등장되어 갔다. 고려 초의 교선일치사상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경향과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전자에 속한 자로 현휘를 들 수 있으며, 광종대의 법안종사상은 이러한 경향과 맥락이 닿을 수 있다. 후자에 속한 자로는 탄문(坦文)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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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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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선종구산파의 성립-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중심으로-」(최병헌,『한국사연구』 7,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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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혜(朗慧)와 그의 선사상」(김두진,『역사학보』 57,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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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선초선종의 사회적성격」(최병헌,『사학연구』 25,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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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오선사순지(了悟禪師順之)의 선사상」(김두진,『역사학보』 65,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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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선사상」(한기두,『한국불교학』 1,1975)
-
「신라말 김해지방의 호족세력과 선종」(최병헌,『한국사론』4,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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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굴산문(掘山門)의 형성과 그 사상」(김두진,『성곡론총』 17,1986)
-
「라말려초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성립과 그 사상」(김두진,『동방학지』 57,198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8805555
신규탁
나옹혜근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재 고찰
한국에서는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에 대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연구 보고되어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위와 같은 사실을 필자 자신의 논문을 비롯하여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분석적으로 조사하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필자는 나옹 선사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런 반성적 비평을 통하여, 필자는 이 논문에서 그의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재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나옹 선사는 기본적으로는 당 나라에서 시작한 ‘南宗禪’ 전통을 수용하지만, 직접적 영향은 元 나라의 선 불교계에서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원 나라에서 유행하던 ‘無字話頭’에 특별하게 주목하는 禪 수행을 수용하면서도, 당시 고려의 불교계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다양한 ‘話頭’를 參究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는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한다.
그 중요한 변화란, 조선시대의 중기 이전에는 다양한 화두를 참선하는 ‘看話’ 수행이 지속되지만 중기를 거치면서 부터는 그런 화두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오직 ‘無字話頭’에만 집중하는 參禪으로 이행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점이다.
懶翁禪師는 바로 이런 변화의 과도기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은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나 혹은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5) 선사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옹혜근의 선 사상은 태고보우를 중흥시조로 하는 현재의 ‘大韓佛敎曹溪宗’의 계보와 사승관계를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선 사상은 현재의 ‘大韓佛敎曹溪宗’이 추구하는 선 사상과는 매우 밀접하다.
www.dbpia.co.kr/journal/voisDetail?voisId=VOIS00543841
blog.daum.net/windada11/876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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