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54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6. 受法 - 법을 받음

 

五祖夜知三更에 喚惠能堂内하야 説金剛經이어늘 惠能이 一聞하고 言下에 便悟(伍)하야 其夜受法하니 人盡不知러라

오조스님께서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시었다. 혜능이 한 번 듣고 말끝에 문득 깨쳐서(言下便悟)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便傳頓法及衣하되 汝爲六代祖하니 衣將爲信하라 禀代代相傳에 法以心傳心하야 當令自悟케하라

이내 오조스님은 단박 깨치는 법(頓法)과 가사를 전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로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五祖言하되 惠能아 自古傳法에 命(氣)如懸絲하야 若住此間하면 有人害汝하리니 汝即須速去하라

오조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혜능아,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能이 得衣法하고 三更에 發去할새 五祖自送能於九江驛하야 登時에 便悟祖處分하되 汝去努力하야 將法向南하야 三年을 勿弘此法하라 難起(去)하리니 在後弘化하야 善誘迷人하야 若得心開하면 汝悟로 無別하리라 辭違已了하고 便發向南하니라.

혜능이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떠나려 하니 오조스님께서 몸소 구강역까지 혜능을 전송해 주시며, 떠날 때 문득 오조께서 처분을 내리시되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 하지 말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미혹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하셨다.

이에 혜능은 오조스님을 하직하고 곧 떠나서 남쪽으로 갔다.

兩月中間에 至大庚嶺이러니 不知向後에 有數百人來하야 欲擬害(頭)惠能하야 奪於法이러니 來至半路하야 盡總却迴하고 唯有一僧 姓陳 名惠明(順)하니 先은 是三品將軍이라 性行이 麁惡하야 直至嶺上하야 來趁犯著이어늘 惠能이 即還法衣하되 又不肯取하고 我故遠來는 求法이요 不要其衣니다

두 달 가량 되어서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는데, 뒤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고자 하다가 반쯤 와서 다들 돌아간 것을 몰랐었다. 오직 한 스님만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성은 진(陳)이요 이름은 혜명(惠明)이며, 선조는 삼품장군으로, 성품과 행동이 거칠고 포악하여 바로 고갯마루까지 쫓아 올라와서 덮치려 하였다. 혜능이 곧 가사를 돌려주었으나 또한 받으려 하지 않고 "제가 짐짓 멀리 온 것은 법을 구함이요 그 가사는 필요치 않습니다"하였다.

能이 於嶺上에 便傳法惠明(順)한대 惠明(順)이 得聞하고 言下心開어늘 能이 使惠明(順)으로 即却向北化人來케하니라.

혜능이 고갯마루에서 문득 법을 혜명에게 전하니 혜명이 법문을 듣고 말끝에 마음이 열이었으므로,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곧 북쪽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하였다.

 

 

7. 定慧 - 정과 혜

惠能이 來衣此地하니 與諸官奪道俗으로 亦有累劫之因이로다 教是先性所傳이요 不是惠能自知니 願聞先性教者는 各須淨心하야 聞了願自餘迷하야 於先代悟하라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서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下是法)惠能大師喚言하되 善知識아 菩提般若之知는 世人이 本自有之로되 即縁心迷하야 不能自悟하니 須求大善知識하야 示導(道)로 見性하라. 善知識아 遇悟成智로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以定惠爲本하나니 第一勿迷言惠定이 別하라 定惠는 體一不二라 即定是惠體요 即惠是定用이니 即惠慧(之)時에 定在惠하고 即定之時에 慧在定이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善知識아 此義는 即是慧等이니 學道之人은 作意하되 莫言先定發慧하며 先惠發定하야 定惠各別하라. 作此見者는 法有二相이니 口説善하고 心不善하면 惠定不等이요 心口倶善하야 内外一衆種이면 定惠即等이니라

혜능이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自悟修行은 不在口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即是人이라 不斷勝負니 却生法我하야 不離四相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

一行三昧者는 於一切時中 行住座臥에 常行眞(眞眞)心이 是니 淨名經에 云眞心이 是道場이요

일행삼매(一行三昧)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항상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라고 하였느니라.

 

直(眞)心이 是淨土라하니라 莫心行諂曲(典)하고 口説法直하라 口説一行三昧하고 不行直(眞)心하면 非佛弟子니라 但行直(眞)心하야 於一切法에 上無有執著이 名一行三昧어늘 迷人은 著法相하야 執一行三昧하야 直(眞)心을 坐(座)不動이라하며 除妄不起心이 即是一行三昧라하나니 若如是하면 此法은 同無清이라 却是障道因縁이니라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가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坐不動)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妄心)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無情)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道須(順)通流니 何以却滯리오 心[不]住在하면 即通流니 住即彼縛이라 若座不動이 是면 維摩詰이 不合呵舍利弗의 宴座林中이니라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유마힐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리불을 꾸짖었던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라.

善知識아 又見有人이 教人座하야 看心看淨하며 不動不起라하야 從此置功하나니 迷人은 不悟하고 便執成顛하야 即有數百盤하니 如此教道者는 故之大錯이로다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거나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善知識아 定惠는 猶如何等고 如燈光하니 有燈即有光이요 無燈即無光이라 燈是光之(知)體요 光是燈之用이니 [名]即有二나 體無兩般이라 此定惠法도 亦復如是니라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8. 無念 - 생각이 없음

善知識아 法無頓漸이로되 人有利鈍이라 迷(明)即漸契(勸)하고 悟人은 頓修하나니 識自本[心]이 是見本性이라 悟即元無差別이로되 不悟면 即長劫輪迴니라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에 깨침(頓)과 점차로 깨침(漸)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見性)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

善知識아 我自法門은 從上已來로 [頓漸]皆立無念爲(無)宗하야 武(無)相爲無體하며 無住無爲本이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何名(明)無(爲)相고 無相者는 於相而離相이요 無念者는 於念而不念이요 無住者는 爲人本性이 念念不住하나 前念今(念)念後念이 念念相讀하야 無有斷絶하나니 若一念斷絶하면 法身이 即是離色身이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前念)과 지금의 생각(今念)과 다음의 생각(後念)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法身)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念念時中에 於一切法上無住니 一念若住하면 念念即住라 名繋縛이요 於一切法上에 念念不住하면 即無縛也일새 [是]以無住로 爲本이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善知識아 外離一切相이 是無相이나 但能離相하면 性體清淨이라 是 是以無相爲體니라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相)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於一切境(鏡)上에 不染이 名爲無念이니 於自念上離境(鏡)하야 不不於法上念生이니라 莫百物不思하야 念盡除却하라 一念이 斷하면 即無別處受生이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無念)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境界)를 떠나고 법(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學道者는 用心하야 莫不息法意하라 自錯은 尚可어니와 更勸他人가 迷不自見하고 迷 又謗經法하니 是以立無念爲宗이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귄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르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無念爲宗).

即縁迷(名)人이 於境(鏡)上에 有念하고 念上에 便起邪(去耶)見하야 一切塵勞妄念이 從此而生하니라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然此教門은 立無念爲宗하나니 世人이 離見하야 不起於念하야 若無有念하면 無念도 亦不立이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無者는 無何事며 念者는 [念]何物고 無者는 離二相諸塵勞요 眞如는 是念之體요 念是眞如之用이라 姓起念하야 雖即見聞覺知(之)나 不染萬境(鏡)而常自在로다

없다 함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고 생각함이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없다 함은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體)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自在)하느니라.

維摩經에 云 外能善分別諸法相하고 内於第一義而不動이라 하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 

 

9. 坐禪 - 좌선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眞如)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깨끗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

망상은 처소가 없다(忘無處所).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느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道)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自性)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서 스스로 지음(自修自作)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이며, 스스로 행함(自行)이 부처님의 행위(佛行)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自作自成佛道)."

  

10. 三身 - 세 몸

善知識아 總須自體하야 以(與)受無相戒하되 一時에 逐惠能口道하라 令善知識으로 見自三身佛케하리라

"선지식들아, 모두 모름지기 자기의 몸으로 모양 없는 계(無相戒)를 받되, 다 함께 혜능의 입을 따라 말하라.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삼신불(三身佛)을 보게 하리라.

於自色身에 歸依(衣)清淨法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衣)千百億化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衣)當來圓滿報身佛하라 

'나의 색신(自色身)의 청정 법신불(法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에 귀의하오며, 나의 색신의 당래원만 보신불(報身佛)에 귀의합니다'하라.(이상을 세 번 한다)

已上三唱 色身은 是舍宅이라 不可言歸니 向者三身이 在自法性하야 世人盡有하되 爲迷(名)不見하야 外覓三[身]如來하고 不見自色身中三性佛하나니라

색신(色身)은 집이므로 귀의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앞의 세 몸은 자기의 법성 속에 있고 세상 사람이 다 가진 것이다. 그러나 미혹하여 보지 못하고 밖으로 세 몸의 부처를 찾고 자기 색신 속의 세 성품의 부처는 보지 못하느니라.

善知識아 聽하라 與(汝)善知識説하야 令善知識으로 衣自色身에 見自法性이 有三世身佛케하리라

선지식들은 들어라. 선지식들에게 말하여 선지식들로 하여금 자기의 색신에 있는 자기의 법성(法性)이 세 몸의 부처를 가졌음을 보게 하리라.

此三身佛은 從性上生이니 何名清淨[法]身佛고

이 세 몸의 부처는 자성으로부터 생긴다. 어떤 것을 깨끗한 법신(法身)의 부처라고 하는가?

善知識아 世人의 性이 本自淨하야 萬法이 在自姓이라 思量一切[惡]事하면 即行衣惡하고 思量一切善事하면 便修於善行하나니 知如是一切法이 盡在自姓하야 自姓이 常清淨하니라 

선지식들아, 세상 사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깨끗하여 만 가지 법이 자기의 성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을 행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문득 착한 행동을 닦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 속에 있어서 자성은 항상 깨끗함을 알라.

日月常明(名)하되 只爲雲覆蓋하야 上明(名)下暗하야 不能了見日月西辰이라가 忽遇惠風이 吹散하야 卷盡雲霧하면 萬像參羅가 一時皆現하나니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서 일월성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나느니라.

世人性淨이 猶如清天하야 惠如日 智如月하니 智惠常明(名)하되 於外著境(看敬)하야 妄念浮雲이 蓋覆하야 自姓이 不能明이라 故遇善知識이 開眞法하야 吹却迷(名)妄하면 内外明(名)徹하야 於自姓中에 萬法이 皆見하야 一切法의 自在姓이 名爲清淨法身이니라 自歸衣者除不善行이 是名歸依니라

세상 사람의 자성이 깨끗함도 맑은 하늘과 같아서, 혜(慧)는 해와 같고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념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한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 법문을 열어 주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밝아 사무쳐 자기의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나니,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이름하느니라.]

스스로 돌아가 의지함(自歸依)이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돌아가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何名爲千百億化身佛인고 不思量하면 性即空寂이로되 思量하면 即是自化라 思量惡法하면 化爲地獄이요. 思量善法하면 化爲天堂하고 毒害는 化爲畜生이요 慈悲는 化爲菩薩이며 智惠는 化爲上界하고 愚癡는 化爲下方하야 自姓變化甚多(名)어늘 迷人은 自不知見이로다 一念善하면 知惠即生하나니 [此名自性化身이니라]

어떤 것을 천백억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는가?

생각하지 않으면 자성은 곧 비어 고요(空寂)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착한 법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고 독과 해침은 변화하여 축생이 되고 자비는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윗 세계가 되고 우치함은 변화하여 아랫 나라가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거늘,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를 못한다.

한 생각이 착하면 지혜가 곧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자성(自性)의 화신(化身)이라 하니라.

[何名圓滿報身佛고] 一燈이 能除千年闇하고 一智能滅萬年愚하나니 莫思向前하고 常思於後하라 常後念善이 名爲報身이니라 一念惡報는 却千年善心하고 一念善報는 却千年惡滅하나니 無始(常)已來로 後念善이 名爲報身이니라 從法身思量이 即是化身이요 念念善이 即是報身이요 自悟自修 即名歸依(衣)也라 皮肉은 是色身이며 是舍宅이라 不在歸依也니 但悟三身하면 即識大意(億)로다

어떤 것을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물리쳐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이라고 이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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