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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 법정이 부처님께 올립니다! - 불교포커스

이 글은 1964년 10월 11, 18일과 25일 3회에 걸쳐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에 실린 법정스님의 글 <부처님 前 上書>를 풀어 옮긴 것입니다. 이 글에서 법정스님은 당시 한국 불교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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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懺悔)를 드립니다.
제 1신 : 1964년 10월 11일(음력 9월 6일)

   머리말[序章] 
   부처님!                                                               

아무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깊은 산[深山]에 수목처럼 덤덤히 서서 한세상 없는 듯이 살려고 했는데, 무심(無心)한 바위라도 되어 벙어리처럼 묵묵히 지내려했는데, 이렇게 또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 울적한 심회(心懷)를 당신에게라도 목소리 하지 않고는 답답해 배기어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먼저 저는 당신 앞에 당신을 욕되게 하고 있는 오늘 한국 불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엎드려 참회(懺悔)를 드립니다. 당신의 제자 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이름을 팔아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다는 처지에서.

오늘 우리들 주변이 이처럼 혼탁하고 살벌한 것도 저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연유(緣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이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망명해버린 지 오래 되었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름은 마치 투쟁견고(鬪爭堅固)시대의 표본(標本)같은 무리[群像]들로 채워져 있다고도 합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이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마치 타락된 정치가들처럼 불신을 받고 있는 점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과 수획(收獲)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우리에게는 결실할 밑천도 거두어들일 만한 열매도 없습니다.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불모(不毛)의 황무지에 밝은 씨앗이라도 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저는 이제 제 주변을 샅샅이 뒤져 헤치는 작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앓고 있는 자신의 질환에 대한 진단 같은 작업을 - .

   교육에 관하여[敎育의 章]

부처님!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깃발[旗幟] 아래에서는 걸핏하면 3대사업이 어떻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마 만큼 그 일은 시급한 저희들의 과업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긴요한 것이 당신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교육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이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일들은 지금껏 입으로만 축문처럼 외워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몇몇 절[寺院]에서 벌리고 있는 강당이나 선방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당신의 뜻을 이어받을 눈 밝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낱 도량 장엄(道場莊嚴) 정도로 차려 놓은 것에 불과한 인상들입니다.

그것은 실로 ‘교육’이라는 말조차 무색하리만큼 전(前)근대적인 유물로서, 박물관 진열장으로나 들어가야 할 쓸모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타당한 방법론도 구체적인 계획성도 없습니다. 사제. 교육의 기초기관인 강당에서 현재 수행되고 있는 그 방법이란 철저하게 훈화(訓話)적인 그러니까 한문서당에서 상투 틀고 가르치던 그 습속을 소중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물려받고 있습니다.

한 강사가 여러 클라스(class)를 전담해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으니, 전체 학인을 명령 한 마디에 통솔하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강사 자신의 육체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실조(失調), 그리고 강의를 받은 사람들의 섭취할 건덕지가 얼마나 있을는지 뻔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수[履歷] 과목이라는 것이 조선 중엽에 비롯된 것이라는데, 지금의 형편이나 피(被)교육자의 지능 따위는 전혀 무리하고 또 시대적인 요구도 아랑곳없이 하나의 타성으로서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나마 얼마 동안에 배워 마친다는 정해진 기간도 없이 -. 이처럼 무모한 <교육?>이 어느 다른 사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의 경우,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종교>가 무엇인지, 혼미한 오늘의 현실에 <종교인>으로서 어떠한 사명을 해야 할 것인지를, 풍문(風聞)으로나마 가르치고 배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깨친 목소리를 듣기위한 훈고적인 문자의 전달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대라는 시점에서 소위 일체중생의 길잡이가 될 인재를 기르기 위한 종교교육이라면, 생동(生動)할 수 있는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주는 것도 철학이 두뇌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심장의 영역일 것입니다. 메마른 심장으로서야 자신은 고사하고 어떻게 이웃을 울려줄 수 있겠습니까?

또 당신의 제자 된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비좁은 자기 나름의 소견에만 사로잡힌 이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선방이란 곳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본래 의지(意志)를 곡해한 듯 전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 교육도 없는 이들을 함부로 받아들여 선 자체에 대한 오해마저 초래케 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선(禪)이 수행의 구경(究竟) 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깨달음(覺)으로 向한 한낱 방편일진대, 보다 탄력 있는 시야쯤은 갖추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첫 문에 들어선 초발심자(初發心者)에게 있어서는 -.

<막존지해(莫存知解)>라는 말과 ‘배우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는 그 귀(軌)가 분명히 다른 줄 압니다. 흔히 참선자가 선에 <참(參)>하기보다는 선에 <착(着)>하기가 일쑤이고, 따라서 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벽(壁)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도, 그것으로서 오히려 자기위안[自樂]을 삼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결함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만약 오늘 이 사회에 계신다더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이렇게 무모한 방법으로 가르치시겠습니까?

   어설픈 화신(化身)들

이러한 교육 이전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 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市井]에 있는 절간에 가면 기이한 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우리 사미승들이 그늘진 표정으로 2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합니다. 절에서는 승복[緇衣]을 입고 절문 밖에서는 세속 옷[俗衣]를 입는 -. 마치 낮과 밤을 사이하여 치장을 달리하는 박쥐라는 동물처럼. 부처님 앞에서 목탁을 치던 한낮의 손이 해가 기울면 학원[學館]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이처럼 어설픈 향학(向學)의 욕구를 절간에서는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또 그들 학비[學資]의 출구[出路]란 것이 대개 떳떳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3보에 희사한 정재(淨財)가 잘못 유실될 수도 있을 것이며, <낯을 익혀 둔> 신도들이 떨어뜨리고 간 지폐에 의존하는 수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도가 돈을 쥐어줄 때 그것으로서 세속의 업(業)을 익히라고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할 수 없는 조업(造業)으로 그 건전한 회향(廻向)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잘못하면 주는 편이나 받는 편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업(業)만 익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모처럼 어린 마음으로 구도(求道)의 문안에 들어섰던 그들이 도업(道業; 佛道 修行)을 이루기에 앞서 다시 세속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산사에서 간신히 이수과정을 마친 학인들이 불교 외부 학문[外典]을 갖추기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하산한 뒤로는 거의가 돌아오지 않는 승려[不歸의 僧]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해야 할 젊은 세대 사이에 -.
이와 같은 유쾌하지 못한 현상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고 모른 체 하고만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너무나 잘못된

부처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불교계에는 ‘급조 승려[急造僧]’이라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낱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승려라면 일반의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한다 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질 여부는 고사하고 일정한 수업도 거치지 않고 활짝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기가 바쁘게 삭발과 의상 교체가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로서의 품위나 처신이 말할 수 없이 진흙탕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낙후된 경제사회에서 부도가 나버린 공(空)수표처럼 -.
더구나 이들이 절을 주관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그저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이 언제 수도(修道) 비슷한 거라도 치를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출 이전의 세속적인 행동거지가 그대로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가끔 ‘사이비 승려’라는 기사거리와 더불어 세상의 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절에서는 처음 입산하려는 사람의 학력이 대학 출신이거나 좀 머리가 큰 사람이면 더 물을 것도 없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무슨 자랑스러운 가풍이나 되는 것처럼 -.
거절의 이유인 즉 “콧대가 세서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다루기가 벅차서일 것입니다. 우선 지적인 수준이 이쪽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등의식에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한 반증으로서 인간적인 기본 교양도 없는 만만한 연소자는, 그나마 노동력이 필요할 때 틈타서 받고 있는 실정이니 말입니다.

부처님!
이와 같이 구도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수도장을 경영하고 있는 동안, 당신의 가르침인 한국불교의 표정은 갈수록 암담할 수밖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너무나 비대하게 설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종단의 의결기관인 중앙종회에서는 몇 군데 계획적인 수도장으로서 총림을 두기로 했다지만, 이러한 무질서가 건재하고 있는 소지(素地)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www.youtube.com/watch?v=uHxKF9RXyLo

 

 

www.youtube.com/watch?v=i5fJrmdSO24

 

 

www.youtube.com/watch?v=9d6svZxhf9A

 

 

 

 

www.youtube.com/watch?v=hPmdkEYk--k

 

 

 

www.youtube.com/watch?v=F9WfZcII6Lg

 

 

www.youtube.com/watch?v=8BomRbT_pmg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나무위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루기 힘든 가난한[1] 처지 때문에 쓸쓸하게 소주[2]를 마시며 그리움과 고독을 달래

namu.wiki

백석이 1938년에 발표한 시이다.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 그리고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국정취를 담은 시로 토속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도피적인 유랑 의식과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후기 시에 속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ㅡ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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