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 제 24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 ⑥

“또 선남자여,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마하살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아홉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하는가.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는 데는 처음에 다섯 가지 마음을 내어 모두 성취하나니,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信]과 곧은 마음[直心]과 계행[戒]과 선지식을 친근함[親近善友]과 많이 아는 것[多聞]이니라.
어떤 것을 믿음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삼보를 믿고, 보시에 과보가 있음을 믿고, 두 가지 진실한 이치[二諦]를 믿고, 1승의 도에 다른 길이 없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빨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과 보살들이 분별하여 3승을 만든 것을 믿고, 제일의제를 믿고, 좋은 방편을 믿음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믿음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믿는 이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모든 중생이 깨뜨리지 못하며, 이렇게 믿으므로 성인의 성품을 얻어 보시를 행하면, 많거나 적거나 모두 대반열반에 가까워지고 생사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 계행 가짐과 많이 들음과 지혜도 그와 같나니, 이것을 믿음이라 하느니라. 비록 이런 믿음이 있더라도 또한 견해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보살이 대반열반을 닦는 데, 첫 번째 일을 성취함이니라.
어떤 것을 곧은 마음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중생에게 대하여 질직한 마음을 짓나니, 모든 중생들은 인연을 만나면 아첨하고 굽은 마음을 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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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보살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이 다 인연인 줄을 아는 까닭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비록 중생들의 나쁜 허물을 보더라도 말하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번뇌가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만일 번뇌가 생기면 나쁜 갈래에 떨어지느니라. 보살이 만일 중생에게 선한 일이 있음을 보면 칭찬하나니, 무엇을 선한 일이라 하는가. 불성을 말함이니라. 불성을 칭찬하므로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게 하느니라.”
이 때에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보살마하살이 불성을 칭찬하여 한량없는 중생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게 한다 하시오나, 그 뜻이 그렇지는 않겠나이다. 왜냐 하면 여래께서 처음 열반경을 펴실 적에 세 가지를 말씀하셨으니, ‘하나는 어떤 병난 사람이 용한 의원과 약과 간병할 사람을 만나면 병이 쉽게 나으려니와, 만나지 못하면 나을 수 없고, 둘은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병이 나을 수 없고, 셋은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병이 나을 것이니라. 모든 중생도 그와 같아서 만일 선지식이나 부처님이나 보살을 만나서 묘한 법문을 들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려니와, 만나지 못하면 내지 못하나니, 이들은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이요, 둘은 아무리 선지식·부처님·보살을 만나서 법문을 들어도 보리심을 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여도 내지 못하나니 그들은 일천제요, 셋은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나니, 그들은 보살이라’ 하셨나이다. 만일 만나거나 만나서 못하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낸다고 할진댄, 어찌하여 지금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성을 칭찬함을 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게 한다 하시나이까.
세존이시여, 선지식·부처님·보살을 만나서 법문을 듣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지 못한다 하시거나, 이 이치도 옳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이런 사람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오니, 일천제들도 불성이 있으므로 법문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일천제라 하는가. 선근을 끊은 것이라’ 하였사오나, 이 이치도 그렇지 않사오니, 왜냐 하면 불성을 끊지 못하는 까닭이옵니다.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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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성은 끊을 수 없삽거늘,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근을 끊었다 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예전에 12부경을 말씀하실 적에 선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항상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무상한 것이라. 항상한 것은 끊어지지 않고 무상한 것은 끊어진다 하셨나이다. 무상한 것은 끊어질 수 있기에 지옥에 떨어지려니와, 항상한 것은 끊어지지 않는데, 어찌하여 지옥에 떨어짐을 막지 못하오리까. 불성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일천제가 아니온데, 여래께서는 어찌하여 일천제라는 말을 하시나이까.
세존이시여, 만일 불성을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낸다 하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중생들을 위하여 12부경을 말씀하셨나이까. 세존이시여, 마치 4대하가 아뇩달못에서 흘러내리는데, 천상 사람 세간 사람이나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근원으로 돌아간다 하오면, 옳지 않나이다. 보리심도 그와 같아서 불성이 있는 이는 법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계행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거나, 닦거나 닦지 않거나, 지혜롭거나 지혜롭지 못하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이다. 세존이시여, 우다연산에서 뜬 해가 남쪽까지 왔다가 생각하기를, 나는 서쪽을 가지 않고 도로 동쪽으로 가겠다 한다면 옳지 아니한 것이니, 불성도 그와 같아서 법을 듣지 않고 계율을 지니지 않고 보시하지 않고 닦지 않고 지혜롭지 않다고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함은 옳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여래께서 인과의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말씀하거니와, 그 이치도 옳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만일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없다면 타락이 생기지 못할 것이며, 니구타 씨에 다섯 길[五丈]만큼 자랄 성품이 없으면 다섯 길 되는 나무를 내지 못하리이다. 불성 가운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품이 없으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오리까. 이런 뜻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 과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하심이 이런 이치와 어떻게 어울리겠나이까?”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렇게 찬탄하였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여, 세상에는 두 사람이 매우 희유하여 우담화(優曇花)와 같으니라. 하나는 나쁜 법을 행하지 아니함이요, 다른 하나는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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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참회함이니, 이런 사람은 대단히 희유하니라. 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은혜를 짓는 이요, 하나는 은혜를 생각하는 이니라. 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새로운 법을 물어 배우는 이요, 하나는 옛것을 익히어 잊어버리지 않는 이다. 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새것을 짓는 이요, 하나는 옛것을 닦는 이다. 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법 듣기를 좋아하고 하나는 법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다. 또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질문을 잘하는 이요, 다른 하나는 답변을 잘하는 이다. 질문을 잘하는 이가 그대요, 답변을 잘하는 이는 여래니라. 선남자여, 잘 물음을 인하여 위없는 법수레를 운전하며, 12인연의 나무를 시들게 하며, 가없는 생사의 큰 강을 건너며, 마왕 파순과 더불어 싸우며 파순이 세운 전승의 깃발을 꺾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먼저 말한 것처럼 세 가지 병자 중에 용한 의원과 간병하는 이와 약을 만나거나 또 만나지 않고 병이 쾌차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만나거나 못 만나거나 간에 수명은 결정된 것이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지난 세월에 세 가지 선한 일을 닦았으니, 상품·중품·하품이니라. 이렇게 세 가지 선을 닦았으므로 수명이 결정된 것이니, 저 북구로주 사람이 수명이 천 년인 것 같아서, 병에 걸린 이가 용한 의원과 좋은 약과 간병하는 이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간에 모두 병이 낫는 것이니, 왜냐 하면 결정한 수명을 얻은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말한 것처럼 병난 이가 만일 용한 의원과 좋은 약과 간병할 이를 만나면 병이 낫고, 만나지 못하면 낫지 못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선남자여, 이런 사람은 수명이 결정되지 않았으니, 목숨은 비록 다하지 아니하였으나 아홉 가지 인연을 만나면 목숨이 단명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아홉인가. 하나는 먹어서 편안치 못할 줄을 알면서도 먹는 것이요, 둘은 많이 먹음이요, 셋은 먹은 것이 채 소화되기 전에 또 먹는 것이요, 넷은 대소변이 때를 따르지 못함이요, 다섯은 병이 났을 때에 의원의 말을 따르지 아니함이요, 여섯은 간병하는 이의 시킴을 따르지 않음이요, 일곱은 억지로 참고 토하지 않음이요, 여덟은 밤에 다님이니, 밤에 다니므로 나쁜 귀신이 침노함이요, 아홉은 방사(房事)가 너무 과도함이니, 이런 인연으로 내가 말하기를 용한 의원과 약을 만나면 병이 나을 것이요, 만나지 못하면 낫지 못한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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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먼저 말하기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모두 낫지 못한다 함은 무슨 뜻인가. 사람의 수명이 다하였으면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간에 쾌차할 수 없나니, 왜냐 하면 수명이 다한 연고니라. 이런 이치로 내가 말하기를 의원과 약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건, 병이 낫지 못한다는 것이니라. 중생도 그와 같아서 보리심을 낸 이는 선지식과 부처님과 보살을 만나서 깊은 법문을 듣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마땅히 보리를 이룬다는 것이니, 그 까닭은 능히 보리심을 낸 까닭이며, 북구로주 사람의 수명이 결정된 것 같으니라. 내가 말하기를, 수다원으로부터 내지 벽지불이 선지식이나 부처님과 보살이 말씀하는 깊은 법을 들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고, 만일 부처님이나 보살이 말씀하는 깊은 법을 듣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지 못한다 함은 저 수명이 결정되지 아니한 사람이 아홉 가지 인연으로 목숨이 단명하는 것과 같나니, 저 병난 사람이 의원과 약을 만나면 병이 쾌차하고, 만나지 못하면 낫지 못하는 것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부처님이나 보살을 만나서 깊은 법을 들으면 보리심을 내고, 만나지 못하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니라.
내가 먼저 말하기를, 만일 선지식이나 부처님이나 보살을 만나서 법문을 듣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간에, 모두 보리심을 내지 못한다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선남자여, 일천제들이 선지식·부처님·보살을 만나서 법문을 듣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간에 일천제의 마음을 여의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선한 법을 끊은 까닭이니라. 일천제들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함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보리심을 내면 다시 일천제라 이름하지 않음이니라. 선남자여, 무슨 인연으로 일천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하는가. 일천제들은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마치 수명이 다한 이는 비록 용한 의원과 좋은 약과 간병할 이를 만난다 하더라도 쾌차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수명이 다한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일천(一闡)은 믿음[信]이란 말이요, 제(提)는 갖추지 못하였다[不具]는 말이니, 믿음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이름하거니와, 불성은 믿음이 아니며 중생은 갖춤이 아니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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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겠는가. 일천은 좋은 방편[善方便]이란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단 말이니, 좋은 방편 닦음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거니와, 불성은 좋은 방편을 닦음이 아니며 중생은 갖춤이 아니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끊겠는가. 일천은 정진[進]이란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다는 말이니, 정진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거니와, 불성은 정진이 아니요 중생은 갖춤이 아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끊겠는가. 일천은 생각한다[念]는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단 말이니, 생각함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거니와, 불성은 생각함이 아니요 중생은 갖춤이 아니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끊겠는가. 일천은 선정이란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단 말이니, 선정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거니와, 불성은 선정이 아니요 중생은 갖춤이 아니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끊겠는가. 일천은 지혜란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단 말이니, 지혜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거니와, 불성은 지혜가 아니요 중생은 갖춤이 아니라, 갖추지 못하였거니 무엇을 끊겠는가. 일천은 무상한 선[無常善]이란 말이요 제는 갖추지 못하였단 말이니, 무상한 선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일천제라 하느니라. 불성은 무상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선하지 않음도 아니니, 왜냐 하면 선한 법은 반드시 방편으로부터 얻거니와, 불성은 방편으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선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선하지 않음도 아니라 하는가. 능히 선한 과보를 얻는 까닭이며, 선한 과보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또 선한 법은 나면서 얻는 것이거니와 불성은 나면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선이 아니며, 나면서 얻은 선한 법을 끊었으므로 일천제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만일 일천제가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지옥의 죄보를 막지 못하는가’ 하지만 선남자여, 일천제 가운데는 불성이 있지 아니하니라. 선남자여, 비유하건대 어떤 왕이 공후(箜篌)의 소리를 들으니 청아하고 미묘하여 마음이 쏠리고, 즐겁고 사랑하는 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에게 묻기를 ‘이 아름다운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 하였다. 대신은 ‘아름다운 소리가 공후에서 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또 소리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은 공후를 가져다가 왕의 앞에 놓고 말하기를 ‘대왕이여, 이것이 그 소리이니다’ 하였다. 왕은 공후에게 말하기를 ‘소리를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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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라’ 하였으나, 공후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후의 줄을 끊었으나 그래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그 가죽과 나무까지 모두 깨뜨리면서 소리를 찾아보았으나 소리는 없었다. 그러자 왕은 어째서 거짓말을 하느냐고 대신을 꾸짖었다.
대신은 왕에게 말하였다. ‘소리를 내게 하는 방법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니, 반드시 공교로운 수단과 여러 가지 인연을 말미암아서야 소리가 나나이다.’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머물러 있는 데가 없고, 공교로운 방편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찾아봄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니와 일천제는 불성을 보지 못하거니 어떻게 나쁜 갈래의 죄를 막을 수 있겠는가. 선남자여, 일천제가 만일 불성이 있는 줄을 믿으면 나쁜 갈래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일천제라고 이름하지도 아니하려니와, 자기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므로 3악도에 떨어지고, 3악도에 떨어지므로 일천제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만일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없으면 타락이 생기지 아니할 것이요, 니구다 씨에 다섯 길 될 성품이 없으면 다섯 길의 나무가 생기지 못하리라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하려니와, 지혜 있는 이는 그런 말을 하지 아니하리니, 왜냐 하면 성품이란 없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으면, 여러 가지 인연의 힘을 가자할 것이 아니니, 선남자여, 물과 우유를 섞어서 한 달 동안을 그냥 두어도 타락이 되지 못하거니와, 파구수(頗求樹)의 즙을 한 방울만 젖속에 떨어뜨리면 곧 타락이 되나니, 만일 본래 타락이 있었으면 어찌 다른 인연을 반연하겠느냐.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인연을 반연하므로 보게 되는 것이요, 모든 인연을 반연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느니라. 만일 모든 인연을 반연한 뒤에야 이룬다면 이것은 불성이 없음이니, 성품이 없음으로써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보살마하살이 남의 선한 인을 칭찬하고 남의 단처를 말하지 아니함을 말하여 질직한 마음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것을 보살의 질직한 마음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항상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며, 설사 허물이 있더라도 즉시 참회하고, 스승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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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들에게 숨기지 아니하며,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책망하여 다시 범하지 아니하며, 가벼운 허물에도 중한 죄를 지은 줄 생각하는 것이니라. 만일 다른 이가 물으면 참으로 범하였노라 대답하고, 그 죄가 좋으냐고 물으면 좋지 않다고 하며, 또 묻기를 잘한 짓이냐 하면 잘못한 짓이라 대답하고, 또 묻기를 그 죄가 선한 결과냐 선하지 아니한 결과냐 하면, 이 죄는 선한 결과가 아니라 대답하며, 또 묻기를 이 죄를 누가 지었는가, 부처님이나 교법이나 스님들이 지은 것 아니냐 하면, 부처님·교법·스님들이 지은 것이 아니요, 내가 지었노라 대답하느니라. 이것은 번뇌로 모여진 것이나 곧은 마음인 연고로 불성이 있는 줄을 믿고, 불성을 믿으므로 일천제라 이름할 수 없으며, 곧은 마음이 있으므로 부처님의 제자라 하리니, 설사 중생의 의복과 음식과 좌복과 의약(醫藥) 따위를 수없이 받더라도 많다 할 것이 아니니, 이런 것을 보살의 질직한 마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계행을 닦는다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받아 지님은 천상에 나기 위함이 아니며 공포를 위함이 아니며, 내지 외도들의 개의 계[狗戒]·닭의 계[鷄戒]·소의 계[牛戒]·꿩의 계[雉戒]를 받지 않고, 파계를 짓지 아니하며, 모자라는 계[缺戒]를 짓지 아니하며, 흠 있는 계를 짓지 아니하며, 잡계(雜戒)를 짓지 아니하며, 성문의 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의 계와 시라(尸羅)바라밀 계를 받아 가지어 구족계(具足戒)를 얻고도 교만을 내지 아니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을 닦는 데, 세 번째 계를 갖추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선지식을 친근한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항상 중생을 위하여 선한 도를 말하고 나쁜 도를 말하지 아니하며, 나쁜 도를 선한 과보가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나의 몸이 곧 모든 중생의 참된 선지식이니, 그러므로 부가라(富伽羅) 바라문이 가진 나쁜 소견을 끊었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이 나를 친근하는 이는 비록 지옥에 태어날 인연이 있더라도 천상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저 수나찰다(須那刹多) 등이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나를 보았으므로 지옥 인연을 끊고 색계천에 난 것과 같으니라. 사리불과 목건련이 있지만 중생의 진정한 선지식이라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일천제의 마음을 내게 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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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국에 있을 적에 사리불이 두 제자에게 하나는 백골을 관하게 하고, 하나는 숨을 세는 관법[數息觀]을 가르쳤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모두 선정을 얻지 못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잘못된 소견을 내어 열반이라는 무루의 법이 없다고 말하면서, 만일 있다면 내가 얻었어야 할 것이니, 왜냐 하면 나는 받은 계율을 잘 지킨 까닭이라고 하였다.
비구들이 잘못된 소견을 낸 것을 보고, 사리불을 불러서 이렇게 꾸중하였다. ‘네가 옳게 시키지 못하였으니, 두 제자에게 뒤바뀌게 법을 말한 것이다. 그 두 사람의 성품이 각각 다르니, 하나는 빨래하던 이요, 다른 하나는 은장이다. 은장이에는 숨을 세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빨래하던 이에게는 백골관을 시켜야 할 것인데, 네가 잘못 가르쳐서 그 두 사람이 잘못된 소견을 내었느니라.’ 그러고 내가 두 사람의 정도에 알맞게 법을 말하여 주었더니, 두 사람이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으므로 내가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선지식이 되는 것이요, 사리불이나 목건련이 아니니라.
만일 중생으로서 매우 중대한 번뇌에 속박된 이가 나를 만나면 나는 방편으로써 그를 끊게 하나니, 나의 동생 난타가 큰 탐욕이 있는 것을 내가 가지가지 방편으로 끊어 주었고, 앙굴마라는 지독하게 성내는 일이 있었는데, 나를 보고서 성내는 마음이 끊어졌고, 아사세왕은 매우 어리석었으나 나를 본 인연으로 우치한 생각이 없어졌고, 파희가(婆熙伽) 장자는 한량없는 겁 동안에 두터운 번뇌가 쌓였건만, 나는 보고서 끊어졌느니라. 아무리 추악하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나를 친근하여 제자가 된 이는, 그러한 인연으로 모든 천상 사람 세간 사람의 공경과 친애함을 받느니라.
시리국다(尸利鞠多)는 잘못된 소견이 치성하더니, 나를 본 인연으로 나쁜 소견이 소멸되었으며, 나를 봄으로써 지옥의 인을 끊어 버리고 천상에 태어나는 인연을 지은 이는 기허전다라(氣噓旃陀羅)요, 목숨을 마치려 할 적에 나를 보고 목숨을 이은 이는 교시가요, 마음이 미쳐서 산란하다가 나를 보고서 본마음을 회복한 이는 수구담미(瘦瞿曇彌)요, 백정의 아들로서 나쁜 업을 많이 짓다가 나를 보고 아주 버린 이는 천제(闡提) 비구요, 나를 본 인연으로 몸과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율을 범치 아니하려 한 이는 초계(草繫) 비구니라. 이런 뜻으로, 아난 비구는 반쯤 범행(梵行) 갖는 이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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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라 하였거니와, 나는 그렇지 아니하여 범행을 구족한 이라야 선지식이라 이름한다 하노라.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을 닦는 데, 네 번째 선지식 친근함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대반열반을 위하여 12부경을 쓰고 읽고 외우고 분별하여 해설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12부경은 그만두고 비불략(毘佛略)만을 배워 가지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함도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12부경은 그만두고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쓰고 읽고 외우고 분별하여 해설하면, 그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이 경전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네 글귀 한 게송만을 배워 가지거나, 다시 이 게송도 그만두고 여래가 항상 머물러 성품이 변하지 아니함을 배워 지니어도,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또 이 일은 그만두고 여래가 항상 법을 말씀하지 않는 줄을 알아도, 보살이 많이 앎을 구족하였다 하나니, 왜냐 하면 법이 성품 없음을 아는 까닭이니라. 여래가 비록 온갖 법을 말하여도 항상 말하지 않는 줄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을 닦는 데, 다섯 번째 많이 앎을 구족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선남자 선여인이 대반열반을 위하여 이 다섯 가지를 구족히 성취하면, 짓기 어려운 일을 지을 것이요, 참기 어려운 일을 참을 것이요, 보시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할 것이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짓기 어려운 일을 짓는다 하는가. 어떤 이가 참깨 하나를 먹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단 말을 들으면, 그 말을 믿어 한량없는 아승기겁이 되도록 항상 참깨 한 개를 먹고, 불에 들어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단 말을 들으면, 한량없는 겁 동안에 아비지옥에 있어서 맹렬한 불더미에 들어가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짓기 어려운 일을 짓는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참기 어려운 일을 참는다 하는가. 만일 손이나 작대기나 칼이나 돌로 때리는 고통을 받는 인연으로 대반열반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면,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몸으로 그런 일을 받으면서도 괴롭게 여기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보살이 참기 어려움을 참는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보시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한다 하는가. 만일 나라나 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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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처자나 머리나 눈이나 뇌수(腦髓)를 남에게 보시하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단 말을 들으면,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자기가 가진 나라나 성이나 처자나 머리·눈·뇌수를 다른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보시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한다 하느니라.
보살은 비록 짓기 어려운 일을 지었더라도 내가 그런 일을 하였다고 생각하지 아니하며, 보시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하고도 역시 그와 같이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부모가 외아들을 두었으면, 소중하게 사랑하여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으로 때를 따라 공급하고 모자람이 없게 하며, 설사 그 아들이 부모에게 버릇없는 마음으로 욕설을 하더라도,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여워하지 아니하고, 내가 아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 보기를 외아들같이 하나니, 아들이 병이 나면 부모도 병이 나고, 의원과 약을 구하여 정성으로 치료하며, 병이 나은 뒤에도 아들의 병을 치료하여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이 번뇌의 병에 걸린 것을 보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을 말해 주어 번뇌를 끊게 하고, 번뇌가 끊어진 뒤에도 내가 중생을 위하여 번뇌를 끊게 하였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나니, 만일 그런 생각을 내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오직 생각하기를 한 중생에게도 내가 법을 말하여 번뇌를 끊게 한 일이 없다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중생에게 대하여 성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공삼매(空三昧)를 잘 닦은 까닭이니라. 보살은 공삼매를 닦았거니 누구에게 성을 내고 기뻐함을 내겠는가. 선남자여, 마치 산에 있는 나무들이 불에 타거나 사람이 찍거나 물에 떠내려가더라도, 이 나무가 누구에게 성을 내며 기뻐함을 내겠는가.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에게 성도 내지 아니하고 기쁨도 내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공삼매를 닦은 까닭이니라.”
이 때에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나이까, 공으로써 공하게 하므로 공하나이까? 만일 성품이 스스로 공하다면, 공을 닦은 뒤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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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함을 볼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을 닦아서 공함을 본다 하시오며, 성품이 만일 공하지 않다면, 비록 공을 닦더라도 공하게 할 수 없으리이다.”
“선남자여, 모든 법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공한 것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의 성품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색의 성품을 얻을 수 없나니, 무엇을 색의 성품이라 하겠는가. 색의 성품은 지대·수대·화대·풍대가 아니며, 지대·수대·화대·풍대를 여의지도 아니하였고,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지도 아니하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을 여의지도 아니하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거늘, 어떻게 색이 제 성품이 있다 하겠는가. 성품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공이라 하느니라.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서로 비슷한 것이 서로 계속하므로 범부들이 보고는 모든 법의 성품이 공적하지 않다고 하거니와,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를 갖추었으므로 법의 성품이 본래 공적함을 보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이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하지 않은 줄로 본다면 이 사람은 사문이 아니며 바라문이 아니니, 반야바라밀을 닦지 못하며, 대반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며, 부처님과 보살들을 보지 못하리니, 그는 마군의 권속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법의 성품이 본래 공하거니와, 보살이 공을 닦음으로 인하여 법의 공함을 보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모든 법의 성품이 무상한 까닭으로 멸(滅)이란 것이 능히 멸하듯이 만일 무상하지 않으면 멸이란 것이 멸할 수 없느니라. 함이 있는 법에는 나는 모양[生相]이 있는 까닭으로 생이란 것이 능히 내는 것이요, 멸하는 모양[滅相]이 있는 까닭으로 멸하는 것이 능히 멸하느니라. 모든 법에는 괴로운 모양[苦相]이 있는 까닭으로 고(苦)라는 것이 능히 괴롭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소금의 성질이 짜기 때문에 다른 것을 짜게 자며, 사탕의 성질이 달기 때문에 다른 것을 달게 하며, 초의 성질이 시기 때문에 다른 것을 시게 하며, 새앙의 성질이 맵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맵게 하며, 가리륵(呵梨勒)의 성질이 쓰기 때문에 다른 것을 쓰게 하며, 암라 열매의 성질이 담백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담백하게 하며, 독약의 성질이 해치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해롭게 하며, 감로의 성질은 사람을 죽지 않게 하며, 다른 물건에 섞어도 죽지 않게 하느니라. 보살이 공을 닦음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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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아서 공함을 닦는 까닭으로 모든 법의 성품이 공적한 것을 보느니라.”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일 소금이 짜지 않은 물건을 짜게 하듯이, 공삼매를 닦는 것도 그와 같다면 이 삼매는 선한 것도 아니고 묘한 것도 아니어서, 성품이 뒤바뀌었을 것이며, 공삼매로써 공한 것만을 본다면 공이란 것은 없는 것이니 어떻게 보겠나이까?”
“선남자여, 이 공삼매로는 공하지 아니한 법을 보아서 공하게 하거니와, 그러나 뒤바뀐 것이 아니니라. 마치 소금이 짜지 않은 것을 짜게 하듯이, 공삼매도 그와 같아서 공하지 않은 것을 공하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탐욕은 있는 성품이요 공한 성품이 아니니, 탐욕이 만일 공하다면 중생이 그 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요, 지옥에 떨어진다면 어찌하여 탐욕의 성품이 공하다 하겠는가. 선남자여, 색의 성품은 있는 것이니, 무엇을 색의 성품이라 하는가. 뒤바뀐 것을 말함이니, 뒤바뀐 연고로 중생이 탐욕을 내느니라. 만일 색의 성품이 뒤바뀌지 않았다면,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탐욕을 내게 하겠는가. 탐욕을 내게 하므로 색의 성품이 있지 않은 것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이런 뜻으로 공삼매를 닦음은 뒤바뀐 것이 아니니라.
선남자여, 모든 범부들은 여인을 보면 여인이란 집착을 내거니와, 보살은 그렇지 아니하여 비록 여인을 보더라도 여인이란 집착을 내지 아니하며, 집착을 내지 아니하므로 탐욕이 생기지 아니하고, 탐욕이 생기지 아니하므로 뒤바뀐 것이 아니니라. 세상 사람들이 여인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보살도 따라서 여인이 있다고 말하나니, 만일 남자를 보면서 여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뒤바뀜이니라. 그래서 내가 천제(闡提) 비구에게 말하기를 ‘만일 낮을 가지고 밤이라 한다면 그것이 뒤바뀜이요, 밤을 가지고 낮이라 한다면 그것도 뒤바뀜이 되려니와, 낮을 낮의 모양이라 하고 밤을 밤의 모양이라 하는 것이야 어찌 뒤바뀜이라 하겠는가’ 하였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보살의 9지(地)에 머문 이는 법의 있는 성품[有性]을 보나니, 이렇게 봄으로써 불성을 보지 못하거니와, 만일 불성을 본다면 다시 모든 법의 성품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공삼매를 닦으므로 법의 성품을 보지 아니하며, 보지 아니하므로 불성을 보느니라. 불보살이 두 가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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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니, 하나는 성품이 있다 함이요, 또 하나는 성품이 없다 함이라. 중생을 위하여 법의 성품이 있다 말하고, 현성들을 위하여는 법의 성품이 없다 말하느니라. 공하지 아니한 이로 법의 공함을 보게 하기 위하여서, 공삼매를 닦아 공함을 보도록 하며, 법의 성품이 없다는 이도 공삼매를 닦으므로 공한 것이니, 이런 뜻으로 공을 닦아서 공을 보느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공한 것만을 본다면, 공이란 것은 없는 법이니 어떻게 보겠느냐’ 하거니와, 선남자여, 그러하니라. 보살마하살은 진실로 볼 것이 없으며, 볼 것이 없다 함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요, 있는 것이 없다 함은 곧 온갖 법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대반열반을 닦으므로 온갖 법에 대하여 보는 것이 없느니라. 만일 보는 것이 있다면 불성을 보지 못하며, 반야바라밀을 닦지 못하여 대반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법의 성품이 있는 바가 없음을 보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다만 삼매를 봄으로써 공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반야바라밀도 공하고, 선정바라밀도 공하고, 정진바라밀도 공하고, 인욕바라밀도 공하고, 지계바라밀도 공하고, 보시바라밀도 공하며, 빛도 공하고 눈도 공하고 알음알이도 공하며, 여래도 공하고 대반열반도 공하니,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법이 다 공한 줄로 보느니라. 그래서 내가 가비라성에 있으면서 아난에게 말하기를 ‘너는 걱정하지 말고 슬피 울지 말라’라고 하였더니, 아난은 ‘세존이시여, 지금 나의 친속들이 모두 죽었사온데 어떻게 울지 않겠나이까. 여래께서 저와 같이 이 성에 났사오며, 마찬가지로 석가족의 친척이며 권속이온데, 어찌하여 여래는 수심이 없으시고 안색이 화평하나이까’라고 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또 말하기를, ‘너는 가비라성이 참으로 있는 줄로 보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적하여 아무것도 없으며, 너는 석가족이 모두 친속인 줄로 보지만, 나는 공삼매를 닦았으므로 보는 것이 없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너는 걱정하거니와, 나는 안색이 화평한 것이다’ 하였느니라. 여래와 보살들은 공삼매를 닦으므로 수심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말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아홉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것을 말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최후로 열째 공덕을 구족한다 하는가. 선남자여, 보살이 37도품(道品)을 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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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대열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데 들어가고, 중생들을 위하여 대반열반경을 분별하여 해설하며 불성을 나타내나니,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이 이 말을 믿는 이는 모두 대반열반에 들어가려니와 믿지 않는 이는 생사에서 바퀴돌 듯 하느니라.”
이 때에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 경에 대하여 공경하지 아니하겠나이까?”
“선남자여,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성문 제자가 어리석어서 계율을 파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12부경을 버리고 여러 가지 외도의 경전을 읽고 외우며, 글짓고 글씨 쓰며, 모든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받아 두면서 부처님이 허락하였다 하리니, 이런 사람은 전단을 가지고 보통 나무로 바꾸며, 금을 놋쇠로 바꾸며, 은을 납으로 바꾸며, 비단을 삼베로 바꾸며, 감로를 독약으로 바꾸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전단을 보통 나무로 바꾼다 하는가. 나의 제자가 공양을 얻기 위하여 속인들에게 정법을 연설하거든 속인이 마음이 방일하여 들으려 하지 아니하면, 속인을 높은 곳에 앉게 하고 비구는 낮은 곳에 있으며, 여러 가지 맛나는 음식을 공급하더라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나니, 이런 것을 말하여 전단을 보통 나무로 바꾼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금을 놋쇠로 바꾼다 하는가. 놋쇠는 빛·소리·향기·맛·감촉에 비유하고 금은 계율에 비유한 것이니, 나의 제자들이 빛 따위의 인연으로 계율을 파하는 것을 말하여 금을 놋쇠로 바꾼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은을 납으로 바꾼다 하는가. 은은 열 가지 선한 일에 비유하고, 납은 열 가지 나쁜 일에 비유한 것이니, 나의 제자들이 열 가지 선한 일을 버리고 열 가지 나쁜 법을 행하는 것을 말하여 은을 놋쇠를 바꾼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말하여 비단을 삼베로 바꾼다 하는가. 삼베는 남부끄럼[慚]도 없고 제부끄럼[愧]도 없는 데 비유하고, 비단은 남부끄러워하고 제부끄러워하는 데 비유한 것이니, 나의 제자가 남부끄럽고 제부끄러운 것을 버리고 남부끄럼도 모르고 제부끄럼도 모름을 익히는 것을 이름하여 비단을 삼베로 바꾼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감로를 독약으로 바꾼다 하는가. 독약은 가지가지의 이양에 비유하고 감로는 무루법에 비유함이니, 나의 제자가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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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하여서 속인들을 향하여 자기가 무루를 얻었노라 하는 것을 말하여 감로를 독약으로 바꾼다 하느니라.
이런 나쁜 비구들을 위하여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염부제에 널리 유포하리니, 이 때에 나의 제자들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연설하여 선포하면 저 나쁜 비구들에게 살해를 받게 되리라. 그 나쁜 비구들도 여럿이 모이어 혹독한 규칙을 만들고 있으면서, 대반열반경을 받아 지니거나 쓰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는 이는, 모두 함께 있지도 아니하고 같이 앉아 말하지도 아니하면서, 그 이유를 말하기를 ‘열반경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견(邪見) 가진 자가 만든 것이니, 사견 가진 자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이고, 육사외도가 말한 것은 부처님의 경전이 아니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이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거움이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모든 법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과 보살은 비구에게 가지가지 물건을 받아 두라고 허락하시었고, 6사들은 제자에게 모든 물건을 받아 두지 못하게 하였거늘, 이런 말을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과 보살은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 우유[牛味]와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제정하지 아니하였고, 6사들은 다섯 가지 소금과 다섯 가지 우유와 비계와 피를 먹음을 허락하지 아니하는데, 이런 것을 먹지 말라 한 것을 어떻게 부처님의 경전이라 하겠는가. 또 부처님과 보살은 3승의 법을 말씀하였는데, 이 경에서는 1승만을 말하여 대열반이라 말하였으니, 이런 것을 어떻게 부처님의 옳은 경전이라 하며, 부처님께서는 필경에 열반에 드셨는데, 이 경에서는 부처님께서는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서 열반에 들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경은 12부 중에 들지 아니하며, 이것은 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이 아니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런 사람들은 나의 제자라고는 하더라도 이 열반경을 믿고 따르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런 때를 당하여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반구절만이라도 믿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은 참으로 내 제자며, 이렇게 믿음을 인하여 불성을 보아서 열반에 들게 되리라.”
그러나 광명변조고귀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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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여래께서 오늘에 대반열반경을 잘 열어 보이시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것을 인하여 대반열반경의 한 구절, 반구절이나마 깨달았사오며, 한 구절 반구절을 깨달았으므로 조그만치 불성을 보았사오니,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마땅히 대열반에 들어가겠사오며,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아서 열째 공덕을 구족하게 성취한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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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제 25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23.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 ①

그 때에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너희들이 만일 부처님이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승가가 있는지 없는지, 괴롬이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實]가 있는지 없는지, 내[我]가 있는지 없는지,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깨끗함이 있는지 없는지, 항상한지 무상한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인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지음이 있는지 없는지, 업이 있는지 없는지, 과보가 있는지 과보가 없는지를 의심하거든, 너희 마음대로 물으라. 내가 너희들에게 낱낱이 해설하리라. 선남자여, 나는 진실로 하늘이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내게 와서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노라.”
이 때에 그 회중에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하며 의복을 바로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쭙겠사오니, 여래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기시어 허락하시옵소서.”
이 때에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너희들은 이 보살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찬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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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각색 향과 꽃과 풍류와 영락과 번과 일산과 의복과 음식과 좌복과 의약과 집과 전당으로 공양하며, 영접하고 전송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이 보살은 지나간 부처님들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사자가 자기의 기운을 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뽐내며 네 발로 땅을 짚고 굴속에 있으면서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듯이, 이런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추면 이는 크게 사자후하려는 줄을 알 것이다. 참말 사자왕이 새벽에 굴 속에서 나와 몸을 다듬고 입을 벌리고 사방을 살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열한 가지 일을 위함이니라.
그 열한 가지란, 첫째는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 행세를 하는 무리를 부수려는 것이요, 둘째는 몸에 있는 기운을 시험함이요, 셋째는 있는 곳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요, 넷째는 새끼들로 하여금 있는 처소를 알게 하려는 것이요, 다섯째는 여러 동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요, 여섯째는 자는 놈을 깨우려 함이요, 일곱째는 마음 놓은 짐승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 함이요, 여덟째는 여러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복종케 하려는 것이요, 아홉째는 향상(香象)들을 조복하려 함이요, 열째는 새끼들을 가르치려는 것이요, 열한째는 자기의 권속들을 장엄하려는 것이니라. 모든 짐승이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상들은 넋을 잃고 똥을 싸느니라.
선남자들이여, 여우는 사자를 백 년 동안 따라다니어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는데, 사자의 새끼는 3년만 되어도 큰 사자처럼 사자후하느니라. 선남자여, 여래 정각(正覺)께서는 지혜의 이빨과 발톱이며, 4여의족(如意足)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10력이 용맹하고 대비로 꼬리를 삼아서 4선정의 청정한 굴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자후하나니, 마군을 쳐부수고 중생에게 10력을 보이며, 부처님이 행하는 곳을 나타내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바를 지으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무마하여 무명의 졸음에서 깨어나게 하며, 나쁜 짓을 행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깨우치느니라. 육사외도는 사자후가 아닌 줄을 알게 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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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연고며, 부란나(富蘭那)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려는 연고며, 2승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연고며, 5주(住) 보살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연고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사견을 가진 4부중에게 두려운 생각이 없게 하려는 까닭으로, 거룩한 행·청정한 행·하늘의 행을 하는 굴속으로부터 몸을 쭉 펴면서 나오는 것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입을 벌리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사방을 살피는 것은 중생들을 4무애(無礙)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며, 네 발로 땅을 짚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지계(持戒)바라밀에 구족히 머물게 하려는 까닭이니, 그러므로 사자후하는 것이니라. 사자후라 함은 결정한 말이니, 모든 중생이 모든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계시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성문이나 연각들은 한량없는 백천 아승기겁 동안에 여래 세존을 따라다니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거니와, 10주 보살이 이 세 가지 행을 닦기만 하면 능히 사자후할 것을 알지니라. 선남자여, 이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이제 이러한 대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깊은 마음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히 여기고 찬탄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사자후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그대가 물으려거든 이제 마음대로 물으라.”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불성이라 하오며,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 이름하오며, 무슨 까닭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 하나이까?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있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이까? 10주 보살은 무슨 법에 머물렀으므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무슨 법에 머물렀으므로 분명하게 보나이까?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께서는 무슨 눈이기에 분명하게 보나이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장하고 장하다. 어떤 사람이나 법을 위하여 물으면, 이는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나니, 하나는 지혜요 다른 하나는 복덕이니라. 만일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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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라면 곧 불성을 알며, 불성이라 이름하는 것도 알 것이며, 내지 10주 보살은 무슨 눈으로 보고, 부처님 세존들은 무슨 눈으로 보는 줄을 알 것이니라.”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또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지혜 장엄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복덕 장엄이라 하나이까?”
“선남자여, 지혜 장엄이라 함은, 1지(地)로부터 10지에 이르는 것을 지혜 장엄이라 하고, 복덕 장엄이라 함은 보시바라밀로부터 내지 반야에 이르는 것이요, 반야바라밀은 아니니라. 또 선남자여, 지혜 장엄은 부처님과 보살들을 말함이요, 복덕 장엄은 성문·연각과 9주 보살을 말하는 것이니라.
또 선남자여, 복덕 장엄은 함이 있는 것이요, 유루(有漏)요, 유(有)가 있고 과보가 있고 걸림이 있고 항상하지 아니한 것이니, 그는 범부의 법이요, 지혜 장엄은 함이 없는 것이요 무루요 유가 없고 과보가 없고 걸림이 없고 항상 머무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깊고 묘한 이치를 묻는 것이며, 나도 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이 이치를 대답하는 것이니라.”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이 이러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다면 한 가지 두 가지를 물을 것이 아니온데, 어찌하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가지 두 가지를 대답한다 하시나이까? 왜냐 하면 모든 법에는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는 까닭이니, 한 가지 두 가지라 함은 범부의 집착이니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만일 어떤 보살이 두 가지 장엄이 없다면, 한 가지 두가지를 알지 못하려니와, 보살이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하였으므로 한 가지 두 가지를 이해하느니라. 모든 법이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 함은 이치가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없다면, 모든 법은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선남자여, 만일 한 가지 두 가지가 범부의 집착이라 하면 이는 곧 10주 보살이라 이름할 것이요, 범부가 아니니라. 왜냐 하면 하나라 함은 열반이요 둘이라 함은 생사이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하나를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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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요, 어찌하여 둘을 생사라 하는가, 애(愛)와 무명인 까닭이니라. 항상함을 열반이라 함은 범부의 모양이 아니요, 생사를 둘이라 함도 범부의 모양이 아니니, 이런 뜻으로 두 가지 장엄을 구족한 이는 능히 묻고 능히 대답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묻기를 ‘어떤 것을 불성이라 하느냐’ 하였으니, 자세히 들으라. 내가 그대에게 하나하나 해설하리라. 선남자여, 불성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하고, 제일의공은 지혜라 이름하느니라. 공이라 말하는 것은 공한 것이니 공하지 아니한 것을 보지 않는 것이요, 지혜라 함은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아니한 것과, 항상한 것이나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과, 나인 것이나 내가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니라. 공이란 것은 온갖 생사요 공하지 않다는 것은 대열반이며, 내지 내가 없다는 것은 생사요 나라는 것은 대열반이니라. 온갖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中道)라 이름할 수 없으며, 내지 온갖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라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중도란 것은 불성이라 이름하나니, 이런 뜻으로 불성은 항상하여 변하지 아니하거니와, 무명에 덮이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하느니라. 성문과 연각은 모든 공한 것만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며, 내지 모든 내가 없는 것만 보고 나인 것은 보지 못하나니, 이런 뜻으로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며,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가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중도를 보지 못하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결정코 즐거운 행이요, 둘은 결정코 괴로운 행이요, 셋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苦樂行]이니라. 결정코 즐거운 행이라 함은,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비록 아비지옥에 있더라도 3선천락과 같이 여김이요, 결정코 괴로운 행이라 함은 범부들을 말함이요,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이라 함은 성문과 연각이니, 성문과 연각은 괴롬과 즐거움을 행하면서 중도라는 생각을 하나니, 이런 뜻으로 비록 불성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대가 묻기를 ‘무슨 뜻으로 불성이라 이름하느냐’ 하나니 선남자여, 불성이라 함은 곧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중도 종자니라.
또 선남자여, 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하와 상과 중이니라. 하라 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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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천이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는 것이요, 상이라 함은 생사가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고, 삼보가 항상함을 무상하다고 잘못 여기나니, 어찌하여 상이라 하는가. 가장 위 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음이니라. 중이라 함은 제일의공이라 이름하나니, 무상한 것은 무상하다 보고 항상한 것은 항상하다 보느니라. 제일의공은 하라고 이름하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온갖 범부들이 얻지 못하는 까닭이며,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곧 상인 까닭이니라. 부처님과 보살들의 닦는 도는 상도 아니고 하도 아니니, 이런 뜻으로 중도라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생사의 본고장[本際]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명이요 하나는 애(愛)니라. 이 두 가지 중간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나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중도가 생사를 깨뜨리므로 중도라 하며, 이런 뜻으로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 이름하며, 그러므로 불성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건만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다 하거니와, 불성은 진실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라.
선남자여, 마치 가난한 집에 숨은 보배[寶藏]가 있지만 이 사람이 보지 못하는 연고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다가, 어떤 선지식이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숨은 보배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빈궁하고 곤고하여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아니한가’ 하면서 방편으로 보게 하거든, 이 사람이 보았으므로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이 보지 못하며,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아니하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하거니와, 선지식인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방편으로써 가지가지로 가르쳐 보게 하면, 보았으므로 중생이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느니라.
또 선남자여, 중생들이 소견을 일으킴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이요 둘은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이니라. 이러한 두 소견은 중도라 이름하지 아니하니라. 항상함도 없고 아주 없다는 것도 없음은 곧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니, 이것을 불성이라 하니라. 2승들은 비록 12인연을 관찰하여도 불성이라 이름하지 못하나니, 불성이 항상하지만 모든 중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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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무명에 덮였으므로 보지 못하느니라. 또 12인연의 강을 건너지 못함은 토끼나 말과 같나니, 왜냐 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12인연을 관찰하는 지혜는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종자니,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오이[胡苽]를 열병이라 이름하나니, 왜냐 하면 열병의 인연이 되는 연고며, 12인연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불성은 인이 있고 인의 인[因因]이 있으며, 과가 있고 과의 과[果果]가 있느니라. 인은 12인연이요 인의 인은 곧 지혜며, 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과의 과는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무명이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식(識)이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나니, 불성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12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며 인도 아니요 과도 아니니라. 선남자여, 인이요 과가 아님은 불성과 같고, 과요 인이 아님은 대반열반과 같고, 인도 되고 과도 됨은 12인연으로 생긴 법과 같거니와, 인도 아니요 과도 아님을 불성이라 이름하나니, 인도 과도 아니므로 항상하여 변함이 없느니라.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서 말하기를 ’12인연은 그 뜻이 매우 깊어서,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부처님과 보살의 경계요, 성문이나 연각으로 미칠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무슨 까닭으로 매우 깊다 하는가. 중생의 업행(業行)은 항상하지도 않고 아주 없지도 않지만 과보를 얻으며 비록 잠깐잠깐에 멸하지만 잃어지지 아니하며, 짓는 이는 없지만 짓는 업은 있으며, 받을 이는 없지만 과보는 있으며, 받는 이가 멸하더라도 과보는 없어지지 아니하며, 생각하여 앎이 없지만 화합하여 있느니라. 모든 중생들은 12인연과 함께 행하면서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나중과 처음이 없느니라. 10주 보살은 나중만 보고 처음을 보지 못하거니와, 부처님 세존은 처음도 보고 나중도 보나니, 이런 뜻으로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불성을 본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은 12인연을 보지 못하므로 바퀴돌 듯 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서 스스로 나고 스스로 죽듯이 모든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스스로 번뇌의 업을 짓고는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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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데서 헤매나니, 공을 치는 것 같으니라. 선남자여,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12인연을 보는 이는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곧 부처님을 본다 하였으니, 부처님께서는 곧 불성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이 이것으로 성품을 삼는 연고니라. 선남자여, 12인연을 보는 지혜에 네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하(下)요 둘은 중이요 셋은 상이요 넷은 상상이니라. 하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니, 보지 못하는 연고로 성문의 도를 얻고, 중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불성을 보지 못하나니, 보지 못하는 연고로 연각의 도를 얻고, 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보아도 분명치 못하나니, 분명치 못하므로 10주지(住地)에 머물고, 상상품 지혜로 관하는 이는 분명히 보나니,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를 얻느니라. 이런 뜻으로 12인연을 불성이라 이름하나니, 불성은 곧 제일의공이요,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이름하며 부처는 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그 때에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부처님과 불성이 차별이 없다면, 모든 중생들은 도를 닦아서 무엇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그대가 물은 것은 옳지 아니하다. 부처님과 불성이 비록 차별이 없으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족하지 못하였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어미를 살해하고 해한 뒤에 뉘우침을 내었다면, 두 가지 업이 비록 선하더라도 이 사람은 지옥 사람이라 이름하나니, 왜냐 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에게 비록 지옥의 5음과 18계와 6입이 없더라도 오히려 지옥 사람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그러므로 내가 여러 경전에서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이가 선한 일을 닦으면 하늘 사람을 본다 하고 나쁜 일을 행하면 지옥을 본다 하나니, 왜냐 하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 하였으나, 모든 중생이 참으로 32상과 80종호를 갖추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이 경에서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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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며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니
이 세상 앞세상 지난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나니.

선남자여, 있다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다음에 있는 것이요 둘은 지금에 있는 것이요 셋은 지난적에 있는 것이니라. 모든 중생이 오는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이것을 불성이라 하고, 모든 중생이 지금에 번뇌의 결박이 있으므로 현재에 32상과 80종호가 없으며, 모든 중생이 지나간 세상에 번뇌를 끊은 일이 있었으므로 현재에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니라.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으며, 내지 일천제들도 불성이 있다고 하였느니라. 일천제들은 선한 법이 없으며 불성도 선한 법이거니와, 오는 세상에 있을 것이므로 일천제들이 불성이 있다 하나니, 왜냐 하면 일천제들도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어떤 집에 우유와 타락이 있는데, 다른 이가 묻기를 그대에게 소(酥)가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있노라 함과 같나니, 타락이 실로 소는 아니지만, 공교한 방편으로 소를 만들 수 있으므로 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중생도 그와 같아서 모두 마음이 있으며, 마음이 있는 이는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나니, 이런 뜻으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떳떳하게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필경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장엄필경(莊嚴畢竟)이요 둘은 구경(究竟)필경이며, 하나는 세간필경이요 둘은 출세간필경이니라. 장엄필경은 6바라밀이요 구경필경은 모든 중생이 얻을 1승(乘)이며, 1승은 불성이라 하나니, 이런 이치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다 1승이 있건만 무명에 덮이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북구로주나 33천은 과보가 덮이어서 여기 있는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불성도 그러하여 번뇌에 덮이었으므로 중생들이 보지 못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불성은 곧 수릉엄삼매니 성품이 제호(醍醐)와 같으며,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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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어머니이니, 수릉엄삼매의 힘으로써 부처님들로 하여금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게 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다 수릉엄삼매가 있건만 닦아 행하지 않으므로 보지 못하며,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수릉엄삼매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하나는 수릉엄삼매요 둘은 반야바라밀이요 셋은 금강삼매요 넷은 사자후삼매요 다섯은 불성이다. 그 짓는 대로 따라서 곳곳마다 이름을 얻느니라. 선남자여, 한 삼매가 가지가지 이름을 얻나니, 마치 선(禪)에는 4선이라 하고, 근(根)에는 정근(定根)이라 하고, 역(力)에는 정력이라 하고, 각(覺)에는 정각(正覺)이라 하고 정(正)에는 정정(正定)이라 하고, 8대인각에는 정각(正覺)이라 하는 것과 같아서, 수릉엄삼매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세 가지 정(定)을 구족하였으니 상과 중과 하니라. 상정은 불성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며, 중정은 모든 중생이 초선(初禪)을 구족한 것이니, 인연이 있으면 닦아 익히고 인연이 없으면 닦지 못하느니라. 인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화재(火災)요, 둘은 욕계의 결박을 깨뜨리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모두 중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하느니라. 하정은 10대지(大地) 중에 심수정(心數定)이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다 하정을 구족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지만, 번뇌에 덮이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며, 10주 보살이 비록 1승을 보지만 여래가 항상 머무는 법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10주 보살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치 못하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수릉(首楞)이라 함은 온갖 일이 필경이란 말이요, 엄(嚴)은 견고하단 말이니, 온갖 일이 필경에 견고함을 얻으므로 수릉엄이라 하며, 그러므로 수릉엄정(首楞嚴定)을 불성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어느 때 니련선하에서 아난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목욕하려 하니 너는 옷과 비누를 가져오라 하고 물에 들어갔더니, 온갖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붙이들이 모두 와서 나를 보고, 또 5백의 범지(梵志)들이 강가에 왔다가 나에게 와서 서로 말하기를 ‘어떻게 금강 같은 몸을 얻었는가, 만일 구담이 아주 없다는 소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따라서 재계하는 법을 받으리라’ 하거늘, 내가 그 때에 타심통[他心智]으로 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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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음을 알고 범지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말한다 하는가?’
범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담이여, 먼저부터 여러 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모두 내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없다고 하였으니 어찌 아주 없다는 소견이 아니라 하겠는가. 만일 내가 없다면 계행을 갖는 이는 누구며, 계행을 파하는 이는 누구겠는가?’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모든 중생이 모두 내가 없다고 말하지 아니하였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불성이 어찌 내가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나는 아주 없다고 말하지 않았건만, 모든 중생이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을 아주 없다는 소견이라 하느니라.’
이 때에 여러 범지들은 불성이 곧 나라고 말함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고는 마침내 출가하여 보리도를 닦았으며, 나는 새와 물에 살고 뭍에 사는 붙이들도 위없는 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마음을 내고는 곧 몸을 버리었느니라. 선남자여, 이 불성이 실로는 내가 아니지만 중생을 위하여 나라고 이름한 것이니라. 선남자여, 여래는 인연이 있으므로 내가 없는 것을 말하여 나라 하였으나, 실로는 내가 없으며 비록 이런 말을 하였으나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선남자여, 인연이 있으므로 나를 말하여 내가 없다 하였으나, 실로는 내가 있는 것이며, 세계를 위하여서 내가 없다 하였으나,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불성은 내가 없건만 여래가 나라 말한 것은 이것이 항상한 까닭이며, 여래는 나건만 내가 없다고 말한 것은 자재함을 얻은 까닭이니라.”
그때에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는 것이 금강역사와 같을진댄 무슨 이치로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마치 색법(色法)이 비록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이 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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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모양이 있지만,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이며, 소경이 보지 못한다 하여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길고 짧은 모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 하면 소경은 비록 보지 못하나 눈이 있는 이는 보는 까닭이니,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은 보지 못하나 10주 보살은 일부분을 보고 여래는 전부를 보나니, 10주 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은 밤에 빛깔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가 보는 것은 낮에 빛깔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애꾸눈이 물체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지만, 용한 의원이 눈병을 치료하면 약의 효력으로 분명하게 보게 되듯이 10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치 못하지만, 수릉엄삼매의 힘으로 분명하게 볼 수 있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어떤 사람이 온갖 법[一切法]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로 본다면, 이런 사람은 불성을 보지 못하느니라. 온갖 법은 생사라 이름하고, 온갖 법 아닌 것은 삼보를 이름한 것이니, 성문과 연각은 온갖 법이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도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로 보나니, 이런 뜻으로 불성을 보지 못하느니라. 10주 보살은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을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부분적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보나니, 이런 뜻으로 십분 가운데서 일분을 보느니라. 부처님 세존은 온갖 법은 무상하고 내가 없고 즐겁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줄로 보고, 온갖 법 아닌 것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줄로 보느니라. 이런 뜻으로 불성 보기를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하나니, 이런 뜻으로 수릉엄정을 필경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초하루 달을 볼 수는 없으나 없다고 할 수도 없나니,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범부들이 보지 못하지만 불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느니라.
선남자여, 불성이라 함은 10력과 4무소외(無所畏)와 크게 불쌍히 여김과 3념처(念處)니라. 모든 중생은 모두 세 가지로 번뇌를 깨뜨림이 있으므로, 그런 뒤에야 보는 것이요, 일천제들은 일천제를 깨뜨린 뒤에, 10력과 4무소외와 크게 가엾이 여김과 3념처를 얻나니, 이런 뜻으로 내가 항상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12인연은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가진 것이며, 안에도 있고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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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있느니라.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과거의 번뇌를 무명이라 하고, 과거의 업을 행(行)이라 하고, 현재 세상에 처음으로 태에 드는 것을 식(識)이라 하고, 태에 들어서 5분(分)과 4근(根)이 구족하지 못한 것을 명색(名色)이라 하고, 4근을 구족하였으나, 촉(觸)이라 이름할 수 없는 때를 6입(入)이라 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이라 하고, 한 가지 사랑[一愛]에 물드는 것을 수(受)라 하고, 5욕을 익히어 가까이함을 애(愛)라 하고, 안과 밖으로 탐하여 구함을 취(取)라 하고, 안과 밖의 일을 위하여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일으킴을 유(有)라 하고, 현재 세상의 식을 미래의 생(生)이라 하고, 현재의 명색·6입·촉·수를 미래 세상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라 하나니, 이것을 12인연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비록 12인연을 가지었으나 혹은 구족하지 못하니, 가라라(歌羅羅) 때에 죽으면 12인연이 없고, 생으로부터 늙고 죽는 데 이르면 12인연을 구족하는 것이니라. 색계의 중생들은 세 가지 수와 세 가지 촉과 세 가지 애가 없고, 늙고 병드는 일이 없지만, 12인연을 구족하였다 이름하며, 무색계의 중생들은 색도 없고 내지 늙고 죽음도 없지만 역시 12인연을 구족하였다 이름하나니, 반드시 얻을 것인 까닭이며, 그러므로 중생들이 평등하게 12인연을 구족하였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불성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다고 내가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설산에 이름을 인욕(忍辱)이라 하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나는 것이요, 또 이상한 풀이 있으니 소가 먹으면 제호가 없어지느니라. 비록 제호가 없어지더라도 설산에 인욕초가 없다고 말할 수 없나니, 불성도 그와 같으니라. 설산이라 함은 여래를 말함이요 인욕초는 대반열반을 말함이요, 이상한 풀은 12부경을 말함이니라. 중생이 만일 대반열반을 듣고 물으면 불성을 볼 것이니, 12부경 가운데서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불성은 색(色)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고,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며, 모양이기도 하고 모양이 아니기도 하고,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 아니기도 하고, 하나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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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아님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고 아주 없음[斷]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며,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고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며, 인이기도 하고 과이기도 하고,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기도 하며,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고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며, 글자이기도 하고 글자 아니기도 하고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니라.
어찌하여 색이라 하는가. 금강 같은 몸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색이 아니라 하는가. 18불공법(不共法)은 색법이 아닌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색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닌가. 색과 색 아닌 데에 일정한 모양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모양이라 하는가. 32상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모양이 아니라 하는가. 모든 중생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모양과 모양 아닌 데에 결정치 못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하나라 하는가. 모든 중생이 다 1승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하나가 아니라 하는가. 3승을 말하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하나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세는 법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항상함이 아니라 하는가. 인연을 따라 보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아주 없음이 아니라 하는가. 아주 없다는 소견을 여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항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아주 없지 않음도 아니라 하는가. 나중과 처음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있다 하는가. 모든 중생이 모두 가진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없다 하는가. 알맞은 방편을 따라서 보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 하는가. 허공의 성품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다한다 하는가. 수릉엄삼매를 얻은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다하지 않는다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다함도 아니고 다하지 않음도 아니라 하는가. 모든 다했다는 모양이 없어진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인이라 하는가. 요인(了因)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과라 하는가. 결정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라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뜻이라 하는가. 뜻에 장애 없음[義無礙]을 모두 거두어 가진[攝取]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뜻이 아니라 하는가.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뜻도 아니고 뜻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필경까지 공한 까닭이니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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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하여 글자라 하는가. 이름이 있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글자가 아니라 하는가. 이름하는 것이 이름이 없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글자도 아니고 글자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온갖 글자가 없어진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괴롬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 하는가. 온갖 받는 것[受]을 없앤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내가 아니라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함[八自在]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나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나도 아니고 나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공이라 하는가. 제일의공인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공이 아니라 하는가. 항상한 까닭이니라. 어찌하여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니라 하는가. 선한 법을 위하여 종자가 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대반열반의 이러한 뜻을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성을 본 것이니, 불성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부처님 여래의 경계요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가 아니니라. 선남자여, 불성은 5음도 18계도 6입도 아니요, 본래는 없다가 지금은 있는 것도 아니며, 있었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선한 인연으로야 중생들이 보게 되느니라. 마치 검은 쇠[黑鐵]가 불에 들어가면 붉어지고, 나와서 식어지면 도로 검어지는 것과 같나니, 이 검은 빛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인연으로 있는 것이니라. 불성도 그러하여 모든 중생의 번뇌의 불이 꺼지면 보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 대반열반의 미묘한 경전은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히 성취하였나니, 불성도 그러하여 한량없고 그지없는 공덕으로 성취하였느니라.”
이 때에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몇 가지 법을 구족히 성취하였길래,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며, 부처님들은 몇 가지 법을 성취하셨길래 분명하게 보나이까?”
“선남자여, 보살은 열 가지 법을 구족히 성취하였으므로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니라. 무엇이 열인가. 하나는 욕심이 적고[少欲] 둘은 만족함을 알고[知足] 셋은 고요함[寂靜]이요 넷은 정진이요 다섯은 바른 생각[正念]이요 여섯은 바른 정[正定]이요 일곱은 바른 지혜[正慧]요 여덟은 해탈이요 아홉은 해탈을 찬탄함이요, 열은 대반열반으로 중생을 교화함이니라.”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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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욕심이 적은 것과 만족함을 아는 것이 어떻게 다르나이까?”
“선남자여, 욕심이 적은 것은 구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음이요, 만족함을 아는 것은 적게 얻었을 적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라. 욕심이 적은 것은 하고자 함이 적음이요 만족함을 아는 것은 불법의 일만 위하고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욕심은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나쁜 욕심이요, 둘은 큰 욕심이요, 셋은 욕망의 욕심[欲欲]이다. 나쁜 욕심이란 것은 만일 비구가 탐욕을 내어서, 모든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비구들이 나의 뒤에 따르고, 여러 사부대중이 모두 나에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존중하기를 바라며, 내가 가장 먼저 사부대중에게 법을 말하거든 모든 사람들이 나의 말을 믿으며, 국왕·대신·장자들도 모두 나에게 공양하여 나로 하여금 의복과 음식과 와구(臥具)와 의약과 훌륭한 가옥을 많이 얻어서, 생사의 욕망을 만족하려 하면 이것은 나쁜 욕심이니라.
어떤 것이 큰 욕심인가. 만일 비구가 욕심을 내어서, ‘어찌하면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내가 초주(初住)에서부터 내지 10주를 얻었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아라한과에서부터 내지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4선(禪)과 4무애지(無礙智)를 얻은 줄을 알게 하리요’ 하며, 이양을 위한다면 이것은 큰 욕심이니라.
욕망의 욕심이라 함은, 만일 비구가 범천에나 마왕천에나 자재천에나 전륜성왕이나 찰제리나 바라문으로 태어나서 자재하려 하면, 이는 이양을 위하는 것이므로 욕망의 욕심이라 하느니라. 만일 이런 세 가지 나쁜 욕심의 해가 되지 아니한다면, 이는 욕심이 적다고 이름하느니라. 욕심은 25애(愛)라 하나니, 25애가 없으면 욕심이 적다 하고, 미래에 하고자 하는 일을 구하지 아니하면 욕심이 적다 하고, 얻고도 집착하지 아니하면 만족한 줄 안다 하며, 공경을 구하지 아니하면 욕심이 적다 하고, 얻고도 쌓아 두지 아니하면 만족함을 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또 욕심은 적으나 만족함을 안다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 있으며, 만족할 줄은 아나 욕심이 적다고 이름하지 못할 것도 있으며,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안다고 할 것이 있으며, 만족한 줄도 모르고 욕심도 적지 않다고 할 것이 있느니라. 욕심이 적은 이는 수다원이요, 만족함을 아는 이는 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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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요, 욕심도 적고 만족함도 아는 이는 아라한이요, 욕심도 적지 않고 만족함도 모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선남자여,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데 또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선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선하지 않은 것이니라. 선하지 않은 것은 범부요 선한 것은 성인과 보살이니라. 모든 성인은 비록 도과(道果)를 얻었으나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며, 말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시끄럽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만족함을 안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대승 대열반경을 닦아서 불성을 보려 하나니, 그러므로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아는 것을 닦아 익혔다 하느니라.
어떤 것을 고요함이라 하는가. 고요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고요하고 둘은 몸이 고요함이니라. 몸이 고요함은 몸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아니함이고, 마음이 고요함은 뜻으로 하는 세 가지 나쁜 짓을 짓지 아니함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 하느니라. 몸이 고요한 이는 사부대중을 친근하지 아니하고, 사부대중의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고요한 이는 마침내 탐욕·성내는 일·어리석음을 익히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 하느니라.
어떤 비구는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이가 있고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도 있고,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도 있느니라.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고요한 데서 좌선(坐禪)하느라고 사부대중을 멀리하였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쌓아 두나니, 이를 일러 몸은 고요하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다 하느니라. 마음은 고요하나 몸이 고요하지 못한 것은, 어떤 비구가 사부대중과 국왕과 대신을 친근하면서도, 마음에는 탐욕·성내는 일·어리석음을 끊었으면, 이것을 말하여 마음은 고요하나 몸은 고요하지 못하다 하느니라. 몸과 마음이 고요한 이는 부처님과 보살이요,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하지 못한 이는 모든 범부들이니라. 왜냐 하면 범부들은 몸과 마음이 비록 고요하더라도, 무상하고 즐겁지 않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음을 깊이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런 뜻으로 범부들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법을 고요하게 하지 못하고, 일천제들은 4중금을 범하고 5역죄를 지으므로, 이런 사람들도 몸과 마음이 고요하다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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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하지 못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진이라 하는가. 어떤 비구가 몸과 입과 뜻으로 하는 업이 깨끗하기 위하여, 온갖 선하지 못한 업을 멀리 여의고, 모든 선한 업을 닦는 것을 정진이라 이름하느니라.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는 이는 여섯 군데에 생각을 두나니, 부처님과 법과 승가와 계율과 보시와 하늘이니라. 이것을 바른 생각[正念]이라 하느니라.
바른 생각을 갖춘 이가 얻는 삼매는 이것을 바른 정[正定]이라 하느니라.
바른 정을 갖춘 이는 모든 법을 관찰하되 허공과 같이 하나니, 이것을 바른 지혜[正慧]라 하느니라.
바른 지혜를 갖춘 이는 온갖 번뇌의 결박을 여의었나니 이것을 해탈이라 하느니라.
해탈을 얻은 이는 중생들을 위하여 해탈을 칭찬하면서, 이 해탈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는다 하나니, 이것을 해탈을 찬탄한다 하느니라.
해탈은 곧 위없는 대반열반이요, 열반은 곧 번뇌로 결박한 불이 꺼지는 것이니라. 또 열반은 집이라 이름하나니, 왜냐 하면 번뇌라는 사나운 비바람을 막는 까닭이니라. 또 열반은 귀의할 데라 하나니, 왜냐 하면 능히 모든 공포를 없애는 까닭이니라. 또 열반은 섬이라 이름하나니, 왜냐 하면 네 가지 빠른 물결[四暴流]로도 떠내려 보낼 수 없는 까닭이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나는 욕심 빠른 물결[欲暴流]이요 둘은 유(有)의 빠른 물결이요 셋은 소견의 빠른 물결이요, 넷은 무명의 빠른 물결이니라. 그러므로 열반을 섬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열반은 필경에 돌아갈 데니, 왜냐 하면 모든 필경의 낙을 얻는 까닭이니라. 만일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여 갖추면 불성을 보기는 하나 분명치 못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출가한 사람에게 네 가지 병이 있어서 네 가지 사문의 과를 얻지 못하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병이라 하는가. 네 가지 나쁜 탐욕이니, 하나는 의복을 위한 탐욕이요 둘은 음식을 위한 탐욕이요 셋은 와구를 위한 탐욕이요 넷은 유(有)의 탐욕이니, 이것을 네 가지 나쁜 탐욕이라 하느니라. 이 출가한 이의 병은 네 가지 좋은 약이 있어 치료하나니, 누더기옷[糞掃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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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비구의 의복을 위하는 탐욕을 고치고, 걸식함으로는 음식을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나무 밑에 앉음으로는 와구를 위한 탐욕을 깨뜨리고, 몸과 마음이 고요함으로는 비구들의 유의 탐욕을 깨뜨린다. 이 네 가지 약으로 네 가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성인의 행이라 하며, 이런 성인의 행을 이름하여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안다고 하느니라. 고요함은 네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하나는 출가한 즐거움이요 둘은 고요한 즐거움이요 셋은 영원히 멸하는 즐거움이요 넷은 끝까지 즐거움이라. 이 네 즐거움을 얻었으므로 고요하다 이름하느니라.
4정진을 갖추었으므로 정진이라 하고, 4념처(念處)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생각이라 하고, 4선정을 갖추었으므로 바른 정이라 하고, 네 가지 진실한 이치[四聖實]를 갖추었으므로 바른 지혜라 하고, 모든 번뇌의 결박을 영원히 여의었으므로 해탈이라 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꾸짖으므로 해탈을 찬탄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이 경을 듣고 친근하고 닦아서 모든 세상일을 멀리 여의면 욕심이 적다 하고, 출가한 뒤에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면 만족함을 안다 하고, 고요한 곳을 가까이하고 시끄러운 데를 멀리 여의면 고요하다 하느니라.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하지 못하거니와, 만족함을 아는 이는 고요한 데를 좋아하고, 고요한 데서 항상 생각하기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말하여 사문의 도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얻지 못하였거늘, 어찌 사람을 속이리요’ 이렇게 생각하고 부지런히 사문의 도과를 닦는 것을 정진이라 하고, 대반열반을 친근하여 익힘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하늘의 행을 따라 익힘을 바른 정이라 하고, 이 정에 편안하게 머물러 옳게 보고 옳게 아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옳게 보고 옳게 아는 이가 번뇌의 결박을 멀리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10주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서 열반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물러 구족하면,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욕심이 적다는 것은 비구가 고요한 데 있어서 단정하게 앉아 눕지 않거나, 나무 밑에 있거나 무덤 곁에 있거나 한데에 있거나 풀밭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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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앉았으며, 걸식하여 먹으면서 얻는 대로 만족하고, 혹은 한 자리에서 먹으면서 한 때만 먹고, 세 가지 가사와 누더기옷과 취의(毳衣)만을 가지면, 이것을 욕심이 적다 하고,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으면 만족함을 안다 하고, 공삼매(空三昧)를 닦는 것을 고요하다고 하고, 4과를 얻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쉬지 아니함을 정진이라 하고, 여래는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고 마음을 두어 생각함을 바른 생각이라 하고, 8해탈을 닦음을 바른 정이라 하고, 4무애를 얻는 것을 바른 지혜라 하고, 일곱 가지 누(漏)를 여의는 것을 해탈이라 하고, 열반에는 열 가지 모양이 없다고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 하나니, 열 가지 모양은 낳는 것·늙는 것·병나는 것·죽는 것·빛·소리·향기·맛·닿임·무상이라, 이 열 가지를 여의는 것을 대반열반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머물러 구족하면, 불성을 보면서도 분명하지 못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탐욕이 많아서 국왕·대신·장자·찰제리·바라문·비사·수타를 친근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나, 내지 아라한과를 얻었노라 하여 이양을 위하며, 가고 서고 앉고 눕거나 내지 대소변을 하다가도 단월을 만나면 공경을 행하거나 상대하여 말을 하여 나쁜 욕심을 파하는 이는 욕심이 적다고 이름하며, 모든 번뇌를 깨뜨리지 못하였더라도, 여래의 행하는 곳과 같이 하면 만족함을 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두 가지 법은 바른 생각과 바른 정에 가까워지는 인연이며, 스승이나 함께 공부하는 이의 칭찬을 받으며, 나도 항상 여러 경전에서 이 두 가지 법을 찬탄하였으니, 이 두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는 대반열반과 다섯 가지 낙에 가까워지리니 이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계행을 굳게 지니는 이를 정진이라 하고, 부끄러움이 있는 이를 바른 생각이라 하고, 마음의 모양을 보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 하고, 모양이 없어져서 번뇌가 끊어짐을 해탈이라 하고, 이러한 대반열반을 칭찬함을 해탈을 찬탄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에 편안히 머문다 하나니, 비록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아니하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묻기를 10주 보살은 무슨 눈이길래, 불성을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고, 부처님 세존은 무슨 눈이길래 불성 보기를 분명히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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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나니, 선남자여, 혜안(慧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불안(佛眼)으로 보는 까닭으로 분명한 것이며, 보리행을 하는 까닭으로 분명하지 못하고, 행함이 없으므로 분명한 것이며, 10주에 머물렀으므로 보는데도 분명하지 못하고,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므로 분명한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지혜의 인이므로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인과를 끊었으므로 분명하게 보느니라. 온갖 것을 깨달은 것을 불성이라 하거니와, 10주 보살은 온갖 것을 깨달았다 이름할 수 없으므로, 비록 보더라도 분명하지 못하니라.
선남자여, 보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요 둘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부처님 세존은 눈으로 불성을 보시므로,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하고, 10주 보살은 불성을 들어서 보므로 분명치 못하니라. 10주 보살은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줄을 스스로는 알지만,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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