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 26~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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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제 26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23. 사자후보살품 ②

“선남자여, 또 눈으로 보는[眼見] 일이 있으니, 부처님 여래와 10주 보살은 불성을 눈으로 보느니라. 또 들어서 보는[聞見] 일이 있으니 모든 중생과 9지 보살들은 불성을 들어서 보느니라. 보살이 만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함을 듣고, 마음에 믿음을 내지 아니하면, 들어서 본다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하거든 마땅히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할지니라.”
사자후보살마하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오니, 어떻게 관찰하여야 알게 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진실로 여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거니와, 만일 관찰하여 알고자 하면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이요 둘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만일 여래의 몸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을 눈으로 본다 하느니라. 만일 여래의 입으로 하는 업을 본다면, 이것이 곧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을 들어서 본다 하느니라. 만일 얼굴빛이 모든 중생으로는 같을 수 없는 줄을 본다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니라. 만일 음성이 미묘하고 훌륭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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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의 음성과 같지 않음을 들으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만일 여래의 짓는 신통이 중생을 위함인가 이양을 위함인가 하여, 중생을 위함이요 이양을 위함이 아닌 줄을 보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니라. 만일 여래가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智]로 중생을 관찰할 때에, 이양을 위하여 말함인가 중생을 위하여 말함인가 하여, 중생을 위함이요 이양을 위함이 아닌 줄을 보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여래가 어떻게 이 몸을 받았으며 무슨 까닭으로 몸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하여 몸을 받았는가 하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요, 만일 여래가 어떻게 법을 말하며 무슨 까닭으로 법을 말하며 누구를 위하여 법을 말하는가 관찰하면,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몸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나에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니라. 입으로 짓는 나쁜 업으로 내게 더하여도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인 줄을 알지니 이것은 들어서 보는 것이니라.
만일 보살이 처음 태어날 적에 시방으로 일곱 걸음씩 다녔고, 마니발타(摩尼跋陀)·부나발타(富那跋陀) 신장들이 깃발과 일산을 들고 한량없는 세계를 진동하매 금빛이 찬란하게 허공에 가득하였으며, 난타(難陀)용왕과 발난타(跋難陀)용왕이 신통의 힘으로 보살의 몸을 목욕시켰고, 모든 하늘의 형상들이 영접하여 예배하였으며,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합장하여 공경하였고, 청년시절에는 욕락을 버리기를 침뱉듯 하여 세상 향락에 미혹하지 아니하였으며, 출가하여 수도하면서 고요한 데를 좋아하였고, 삿된 소견을 깨뜨리기 위하여 6년 동안 고행하였으며, 여러 중생에게 평등하여 둘이 없었고, 마음은 항상 선정에 있어 애초부터 산란치 아니하였으며, 얼굴과 몸매가 단정하고 그 몸을 장엄하였고, 다니는 곳마다 언덕이나 구렁이 평탄하였으며, 옷은 몸에서 네 치쯤 떨어져 있어도 흘러내리지 아니하고, 다닐 적에는 앞만 보고 좌우로 살피지 아니하며, 음식은 항상 갖춰져 있어 거르는 일이 없고, 앉고 일어나는 곳에는 풀이 요동하거나 어지럽지 아니하며,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가서 법을 말하되 마음에 교만이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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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보살이 일곱 걸음을 다니면서 말하기를, 이번에 나의 몸은 마지막 몸이라 하였고, 아사타 선인도 합장하고 말하기를 ‘대왕은 아십시오. 실달 태자는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요, 집에 있으면서 전륜왕이 되지 아니하리니, 왜냐 하면 32상과 80종호(種好)가 분명한 까닭입니다. 전륜왕은 상호가 분명치 못하지만 태자의 상호는 매우 분명하시니,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입니다’ 하였으며, 늙고 병들고 죽은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은 참으로 가련하다. 이렇게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므로 함께 따라다니면서도 보지 못하고 항상 괴로움만 행하니 내가 마땅히 끊으리라’ 하였고, 아라라(阿羅邏) 5통 선인에게서 무상정(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는 옳지 못함을 말하고, 울다(鬱陀) 선인에게서는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정[非有想非無想定]을 받아 성취하고는 열반이 아니고 생사하는 법이라 말하였으며, 6년 동안 고행하고서도 얻은 바가 없어 말하기를 ‘고행을 하는 일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실지가 있다면 내가 마땅히 얻었을 터인데, 허망한 연고로 얻은 바가 없으니 그것은 삿된 술법이요, 바른 도가 아니라’ 하였으며, 성도한 뒤에 범천이 권청하기를 ‘바라옵건대, 여래께서 중생을 위하여 감로의 문을 열어 위없는 법을 말씀하소서’ 하니, 여래가 말하기를 ‘범왕이여, 모든 중생들이 번뇌에 가리워져서 내가 말하는 바른 법을 듣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범천은 다시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은 세 가지가 있으니, 영리한 근성과 중품 근성과 둔한 근성입니다. 영리한 근성은 받을 수 있사오니 말씀하시옵소서’ 하였다.
여래는 말하기를 ‘범왕이여, 자세히 들으라. 내가 지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감로문을 열리라’ 하고, 바라나국에 나아가 바른 법륜을 운전하여 중도를 말하였느니라. 모든 중생이 여러 가지 결박을 깨뜨리지 아니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한 것이 아니니, 깨뜨린 것도 아니요 깨뜨리지 못한 것도 아니므로 중도라 하느니라. 중생을 제도하지 아니하였으나 제도하지 못한 것이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온갖 것을 이룬 것도 아니요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무릇 말한 것이 있으나 스스로 스승이라 말하지도 않고 제자라 말하지도 아니하므로 중도라 이름하느니라. 말하는 것이 이양을 위함이 아니나 과를 얻지 못함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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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바른 말이요 진실한 말이요 때에 맞는 말이요 참된 말이며, 말을 헛되이 내지 아니하여 미묘하기가 제일이니, 이런 법을 들어서 본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여래의 마음은 실로 볼 수 없거니와,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를 보고자 할진댄 마땅히 이 두 가지 인연을 의지할 것이니라.”
이 때에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앞서 말씀하신 암라 열매는 네 가지 사람에 비유한 것이오니, 어떤 사람은 행은 세밀하나 마음이 정당[正實]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은 세밀하나 행이 정당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도 세밀하고 행도 정당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이 세밀하지도 못하고 행이 정당하지도 못하나이다. 이 처음의 두 가지를 어떻게 아오리까?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이 두 인연에 의지하여도 알 수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여, 암라의 열매를 두 가지 사람에게 비유한 것은 진실로 알기 어려우니라. 알기 어려우므로 나의 경에 말하기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함께 있어도 모르겠거든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거든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거든 깊이 관찰하여야 하나니, 관찰하는 까닭으로 계행을 가짐과 파함을 아느니라. 선남자여, 함께 있고 오래 있고 지혜를 쓰고 깊이 관찰하는 네 가지를 구족한 후에야, 계행을 가지고 계행을 파함을 아느니라. 선남자여, 계행에 두 가지가 있고 가지는 것도 두 가지니, 하나는 끝까지의 계행이요 다른 하나는 끝까지 아닌 계행이니라. 어떤 사람이 인연이 있어서 계율을 받아 가지거든 지혜 있는 사람이면 이 사람이 가지는 계행이 이양을 위함인지 끝까지 가짐인지를 관찰할지니라. 선남자여, 여래의 계율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의 계율[究竟戒]이라 이름하니라. 이런 뜻으로 보살은 비록 나쁜 중생들의 상해함을 받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여래는 필경까지 가지는 계행과 끝까지 가지는 계행을 성취하였다 이름하니라.
선남자여, 내가 예전에 한 번은 사리불과 5백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첨파(瞻婆)성에 있었다. 그 때에 사냥꾼이 비둘기 한 마리를 따라오는데, 그 비둘기가 무서워서 사리불의 그림자 속에 들어와서도 파초나무처럼 떨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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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나의 그림자 속에 와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무서운 마음이 없어졌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끝까지 가지는 계행이어서 그림자까지도 이런 힘이 있느니라. 선남자여, 끝까지 아닌 계행으로는 성문이나 연각도 얻지 못하거든,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는가.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이양을 위함이요 하나는 정법(正法)을 위함이니라. 이양을 위하여서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은 그 계행으로는 불성이나 여래를 보지 못할 줄을 알지니, 비록 불성과 여래의 이름을 듣는다 하더라도 들어서 본다고 이름하지 못하거니와, 만일 정법을 위하여 계율을 받아 가지면, 이 계는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는 줄을 알지니,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며 들어서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려운 것이요, 하나는 뿌리가 얕아서 흔들리기 쉬운 것이니라. 만일 공하고 모양 없고[無相] 원이 없음[無願]을 닦아 익히면, 이를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렵다 하고, 이 3삼매를 닦지 아니하면, 비록 25유(有)를 닦더라도 이는 뿌리가 얕아 흔들리기 쉽다고 이름하느니라.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제 몸을 위함이요 둘은 중생을 위함이니라. 중생을 위하는 이는 불성과 여래를 보느니라. 계행을 가지는 사람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제 성품으로 가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함이라. 만일 계를 받은 뒤에 한량없는 세월을 지내면서도 잃어버리지 않거나, 나쁜 나라에 나거나 나쁜 친구와 나쁜 때와 나쁜 세상을 만나거나 나쁜 법을 듣거나 나쁜 소견 가진 이와 함께 있을 적에, 계를 받는 법이 없더라도 본래와 같이 계율을 가지고 범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제 성품으로 가진다 하느니라. 만일 계사(戒師)를 만나서 네 번 아뢰어 갈마[白四羯磨]한 뒤에 계를 얻는 것은, 비록 계를 얻은 뒤에라도 모름지기 화상이나 승가나 함께 공부하는 동무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야 행동할 줄을 알며, 법을 듣고 법을 말하는 데 모든 위의를 갖추나니, 이것은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함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제 성품으로 가지는 이는 불성과 여래를 눈으로 보는 것이며 또 들어서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계율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의 계요 둘은 보살의 계니라.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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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마음을 낼 적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때까지를 보살의 계라 하고, 백골을 관하거나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까지를 성문의 계라 하나니, 성문의 계를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불성과 여래를 보지 못하는 줄을 알아야 하고, 보살의 계를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불성과 여래와 열반을 볼 것임을 알지니라.”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선남자여, 마음으로 뉘우치지 아니하기 위함이니라. 어찌하여 뉘우치지 아니하는가. 낙을 받으려 함이니라. 어찌하여 낙을 받는가. 멀리 여의기 위함이니라. 어찌하여 멀리 여의는가. 편안하기 위함이니라. 어찌하여 편안한가. 선정을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선정에 드는가. 진실하게 알고 보기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진실하게 알고 보는가. 생사의 모든 근심을 보기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생사의 근심을 보려 하는가. 마음이 탐착하지 않으려 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마음이 탐착하지 않는가. 해탈을 얻기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해탈을 얻으려 하는가. 위없는 대반열반을 얻기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대반열반을 얻으려 하는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법을 얻으려 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으려 하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을 얻기 위함이니라. 무슨 연고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을 얻으려 하는가. 불성을 보기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제 성품으로 끝까지 깨끗한 계율을 가지느니라.
선남자여, 계율을 지니는 비구는, 비록 원을 세우고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구하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마음을 저절로 얻나니, 왜냐 하면 법의 성품이 그러한 까닭이니라. 비록 낙과 멀리 여읨과 편안함과 진실하게 알고 보는 것과 생사의 근심을 보는 것과 마음이 탐착하지 않음과 해탈과 열반과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과 불성을 보려 함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얻나니, 왜냐 하면 법의 성품이 그러한 까닭이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세존께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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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만일 계행을 가짐으로 인하여 후회하지 않는 과를 얻고, 해탈로 인하여 열반의 과를 얻는다면 계행은 인이 없고 열반은 과가 없겠나이다. 계행이 만일 인이 없다면 항상하다 이름할 것이요, 열반이 인이 있으면 이는 무상함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열반은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은 있는 것이니 본래 없던 것이 지금은 있다면 이는 무상한 것입니다. 마치 등불을 켜는 것과 같을 것이며, 열반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나이고 즐겁고 깨끗하다 하오리까?”
“선남자여, 참으로 훌륭하다. 그대는 일찍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으므로 여래에게 이러한 깊은 이치를 묻는구나. 선남자여, 본래의 생각을 잃지 않고 이렇게 물음이로다. 내가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한량없는 겁 전에, 바라나성에 부처님이 나셨으니 이름이 선득(善得)이었다. 그 때에 그 부처님이 3억 년 동안에 이 대반열반경을 연설하시었고, 나는 그대와 더불어 저 부처님 회상에 있으면서 내가 이런 일을 그 부처님께 물었느니라. 그 때에 여래께서 중생을 위하여서 삼매에 드시고 이 뜻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대사가 능히 이러한 지난 생의 일을 기억하나니, 자세히 들으라. 그대에게 말하리라. 계행에도 인이 있으니 바른 법을 들은 것이다. 바른 법을 듣는 것도 인이 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함이다. 선지식을 가까이 함에도 인이 있으니 믿는 마음이 있음이다. 믿는 마음이 있음도 인이 있는데,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을 들음[聽法]이요 둘은 뜻을 생각함[思性義]이니라.
선남자여, 믿는 마음은 법문 들음을 인하고 법문 들음은 믿는 마음을 인함이니, 이 두 법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니건외도(尼乾外道)들이 틀[拒]을 세워 병(甁)을 드는 것이 인과가 되어 서로 여의지 못함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무명의 연(緣)으로 행이 있고 행의 연으로 무명이 있음과 같아서, 무명과 행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느니라. 내지 생(生)은 능히 법을 내지만 스스로 나지는 못하나니, 스스로 나지 못하므로 생생(生生)을 말미암아 나는 것이며, 생생도 스스로 나지 못하고 생을 의지하여 나느니라. 그러므로 두 생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되느니라. 선남자여, 믿는 마음과 법문을 들음도 그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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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과이고 인이 아닌 것은 대반열반이니, 무슨 까닭으로 과라 하는가. 으뜸가는 과[上果]인 까닭이며, 사문의 과며 바라문의 과며 생사를 끊었으며 번뇌를 깨뜨렸으므로 과라 하며, 모든 번뇌의 꾸짖음이 되므로 열반을 과라 이름하고, 번뇌를 허물의 허물[過過]이라 이름하니라. 선남자여, 열반은 인이 없으나 그 자체는 과이니, 왜냐 하면 났다 없어졌다 함이 없는 연고며, 지음이 없는 연고며 함이 있음이 아닌 연고며 함이 없는 법인 연고며 항상 변하지 않는 연고며 처소가 없는 연고며 처음과 나중이 없는 연고니라. 선남자여, 만일 열반이 인이 있다면 열반이라 하지 못하리라. 반(槃)은 인(因)이란 말이요 반열(般涅)은 없다[無]는 말이니, 인이 없으므로 열반이라 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열반이 인이 없다 하시나, 이치가 그렇지 않나이다. 만일 없다고 한다면 여섯 가지 뜻에 맞아야 하리이다. 첫째는 끝까지 없으므로 없다고 이름하나니, 온갖 법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음과 같음이요, 둘째는 어떤 때에 없으므로 없다고 하나니, 마치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못이나 내에 물이 없다거나, 해와 달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음이요, 셋째는 적으므로 없다고 하나니, 세상 사람들이 음식에 간이 적은 것을 간이 안 됐다 하고, 설탕물에 설탕이 적은 것을 달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음이요, 넷째는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없다고 함이니, 전다라가 바라문 법을 받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바라문이 없다는 것과 같음이요, 다섯째는 나쁜 법을 받았으므로 없다고 함이니, 세상 사람들이 나쁜 법을 받은 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라 이름하지 아니하며, 그러므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없다고 함과 같음이요, 여섯째는 상대가 되지 아니하므로 없다고 하나니, 마치 희지 아니한 것을 검다고, 밝음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 함과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열반도 그와 같아서 어떤 때에 인이 없으므로 열반이라 이름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그대가 지금 말하는 여섯 가지 뜻은, 어찌하여 끝까지 없는 것을 가져다가 열반에 비유하지 아니하고, 어떤 때에 없는 것을 취하였는가? 선남자여, 열반의 자체는 끝까지 인이 없음이, 마치 내가 없고 내 것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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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세상 법과 열반과는 마침내 상대가 되지 아니하므로, 여섯 가지 일은 비유가 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온갖 법은 모두 내가 없지만, 이 열반은 진실로 내가 있나니, 그런 뜻으로 열반은 인이 없지만 그 자체는 과라는 것이니라. 인이요 과가 아닌 것을 불성이라 이름하나니, 인으로 생긴 것이 아니므로 인이요 과가 아니라 하며, 사문의 과가 아니므로 과가 아니라 하느니라.
무슨 까닭으로 인이라 하는가. 아는 인[了因]인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는 인[生因]이요 하나는 아는 인이다. 능히 법을 내는 것을 내는 인이라 이름하고, 등불이 물건을 비치듯 함을 아는 인이라 하느니라. 번뇌의 결박은 내는 인이라 하고, 중생·부모는 아는 인이라 하느니라. 곡식의 씨는 내는 인이라 하고, 땅과 물과 거름은 아는 인이라 하느니라. 또 내는 인이 있으니, 6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함이요, 또 아는 인이 있으니, 불성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함이니라. 또 아는 인이 있으니, 6바라밀 불성이요, 또 내는 인이 있으니 수릉엄삼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또 아는 인이 있으니 8정도(正道)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또 내는 인이 있으니 믿는 마음의 6바라밀이니라.”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여래와 불성을 본다는 것은 뜻이 어떠하오니까?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은 형상이 없사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며, 있는 곳이 없어 삼계에 있지 아니하며, 함이 있는 모양이 아니며 안식(眼識)으로 볼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보겠나이까? 불성도 그러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부처의 몸이 두 가지니, 하나는 항상하고 둘은 무상하니라. 무상한 것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요, 항상한 것은 여래 세존의 해탈한 몸이니, 눈으로 본다고도 하고 들어서 본다고도 하느니라. 불성도 두 가지니, 하나는 볼 수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은 10주 보살과 부처님 세존이요, 볼 수 없는 것은 모든 중생이니라. 눈으로 본다 함은 10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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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나 부처님 여래가 중생에게 있는 불성을 눈으로 보는 것이요, 들어서 본다는 것은 온갖 중생이나 9주 보살이 불성이 있음을 듣는 것이니라. 여래의 몸이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빛[色]이요 둘은 빛이 아니니라[非色]. 빛이라 함은 여래의 해탈이요, 빛이 아니라 함은 여래가 모든 빛 모양을 영원히 끊은 까닭이니라. 불성도 두 가지니, 하나는 빛이요 둘은 빛이 아니니라. 빛이라 함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빛이 아니라 함은 범부나 내지 10주 보살이니, 10주 보살이 보기를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빛이 아니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불성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빛이요 둘은 빛이 아니니라. 빛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을 말함이요, 빛이 아니라 함은 모든 중생이니라. 빛인 것은 눈으로 본다 하고, 빛이 아닌 것은 들어서 본다 이름하니라.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비록 안도 바깥도 아니나 잃어지거나 부서지는 것도 아니므로,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것은, 젖 속에 타락이 있는 것이나 금강역사와 같고, 부처님들의 불성은 청정한 제호와 같다고 하셨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 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나도 젖 속에 타락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타락이 젖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타락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모든 생기는 법은 제각기 시절이 있나이다.”
“선남자여, 젖 상태일 때에는 타락이 없고 생소(生酥)와 숙소(熟酥)와, 제호도 없느니라. 모든 중생도 젖이라 할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젖 속에 타락이 없다 한 것이니라. 만일에 있다면 어찌하여 두 가지 이름을 얻지 못하여, 두 가지 기능이 있는 사람을 은장이·대장장이라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타락 상태일 때에는 젖과 생소와 숙소와 제호가 없나니, 중생도 타락이라 하면, 젖도 아니고 생소나 숙소나 제호도 아니며, 내지 제호일 때에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이다. 정인이라 함은 젖에서 타락이 생기는 것과 같고, 연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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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효모[酵]나 따뜻함 등이니 젖에서 생기므로 젖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 같으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젖에 타락의 성품이 없다면 각(角) 가운데도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각 가운데서는 나지 않나이까?”
“선남자여, 각에서도 타락이 나느니라. 왜냐 하면 내가 말하기를 연인에 두 가지가 있다 하였으니, 하나는 효모요 다른 하나는 따뜻함이다. 각의 성품이 따뜻하므로 역시 타락을 내느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이렇게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각이 타락을 낸다면 타락을 구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젖만 구하고 각은 찾지 않나이까?”
“선남자여, 그러기에 내가 말하기를 정인과 연인이 있다 하였느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여쭈었다.
“만일 젖 속에 본래는 타락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생긴다면, 젖 속에 본래 암마라나무가 없었으니, 어찌하여 암마라나무는 나지 않나이까? 두 가지가 모두 없었던 까닭이옵니다.”
“선남자여, 젖에서도 암마라나무가 나나니, 만일 젖을 부어 주면 하룻밤 동안에 다섯 자쯤 자라느니라. 그런 뜻으로 내가 두 가지 인을 말하였나니, 선남자여, 만일 온갖 법이 한 가지 인으로만 난다면, 젖 속에서 어찌하여 암마라나무는 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4대가 온갖 색법(色法)의 인연이 되거니와, 빛이 제각기 달라서 같지 않나니 그런 이치로 젖 속에서 암마라나무가 나지 않느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정인과 연인의 두 가지 인이 있다 하오면, 중생의 불성은 무슨 인이라 하오리까?”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도 두 가지 인이니, 하나는 정인이요 하나는 연인이니라. 정인은 모든 중생을 말함이요 연인은 6바라밀을 말함이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젖에 타락의 성품이 있음을 아나이다. 왜냐 하면 세상에서 타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젖만 찾고 물은 찾지 않는 것을 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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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젖에 타락의 성품이 있는 줄을 알겠나이다.”
“선남자여, 그대가 물은 것이 뜻이 그렇지 아니하니, 왜냐 하면 마치 사람들이 얼굴을 보려고 칼을 드는 것과 같으니라.”
“세존이시여, 그런 뜻으로 젖에 타락의 성품이 있나이다. 칼에 만일 얼굴 모양이 없으면 무슨 까닭으로 칼을 들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만일 칼 가운데 얼굴 모양이 있다면, 어찌하여 뒤바뀌겠느냐? 칼을 세우면 얼굴이 길게 보고 뉘면 얼굴이 넓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자기의 얼굴이라면 어째서 길게 보이며, 만일 다른 이의 얼굴이라면 어찌하여 자기의 얼굴 그림자라 하느냐? 만일 자기의 얼굴로 인하여 다른 이의 얼굴을 본다면, 어찌하여 나귀나 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느냐?”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얼굴이 길게 보이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눈의 광명이 실제로 저기 이르는 것이 아니니, 왜냐 하면 먼 데와 가까운 데를 일시에 다 보는 까닭이며 중간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본다면 모든 중생이 모두 불을 볼 적에 어찌하여 타지 않느냐? 사람이 멀리 있는 흰 물건을 볼 적에 따오기인지 깃발인지 사람인지 나무인지 의심하지 아니하리라. 광명이 이르러 간다면 어떻게 수정 속에 있는 물건이나, 물 속에 있는 고기와 돌을 보게 되느냐? 만일 이르지 않고서 본다면 어찌하여 수정 속의 물건을 보면서, 담 바깥 물건은 보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길게 본다는 말이 옳지 아니하니라. 선남자여, 그대의 말과 같이 젖에 타락이 있다면, 젖을 파는 사람이 어째서 젖 값만 받고 타락 값은 받지 않으며, 피마[騲馬]를 파는 사람이 말 값만 받고 망아지 값은 달라 하지 않느냐.
선남자여, 세상 사람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아내를 맞았는데, 아내가 만일 아기를 배면 처녀라 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 여자에게 아기를 낳을 성품[兒性]이 있었기에 맞았다면 이치가 그렇지 아니하니, 왜냐 하면 만일 아기를 낳을 성품이 있다면 손자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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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낳는다면, 이는 곧 형제이니, 왜냐 하면 한배에서 나온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여자에게 아기의 성품이 없다 하느니라. 만일 젖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한꺼번에 다섯 가지 맛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만일 나무의 씨 속에 니구타의 다섯 길 되는 성질이 있다면 어찌하여 한꺼번에 움과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과실의 다른 모양을 보지 못하는가. 선남자여, 잎과 꽃과 과실의 다른 모양을 보지 못하는가. 선남자여, 젖빛이 때를 따라 다르고, 맛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며, 내지 제호도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젖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 하겠느냐.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내일 생소를 먹을 터인데, 오늘 벌써 냄새를 걱정하는 것과 같나니, 젖 속에 결정코 타락의 성품이 있다는 것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사람이 붓과 종이와 먹으로써 글자를 이루거니와, 이 종이에는 본래 글자가 없었느니라. 본래는 없었으므로 연을 반연하여 글자를 이루는 것이니 만일 본래부터 있었다면 어찌하여 여러 가지 연을 반연하겠느냐. 마치 푸르고 누른 것이 화합하여 초록빛을 이루는 것 같아서 이 두 가지 빛에는 본래 초록빛 성품이 없는 것이니, 만일 본래 있었다면 어찌하여 화합하여서야 이루겠는가. 선남자여, 마치 중생들이 먹음을 인하여 목숨을 얻거니와 음식 속에는 실로 목숨이 없나니, 만일 본래 있었다면 먹기 전에는 음식이 목숨일 것이니라. 선남자여, 온갖 법들이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니, 그런 뜻으로 내가 이런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며
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니
이 세상 앞세상 지나간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나니.

선남자여, 온갖 법이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없어지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들 속에 불성이 있다면, 모든 중생은 지금의 나와 같이 부처의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니라. 중생의 불성은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속박되지 아니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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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가운데 허공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모든 중생에게 다 허공이 있건만, 장애되지 아니하므로 제각기 허공 있음을 보지 못하거니와, 만일 중생에게 허공이 없다면, 가고 오고 다니고 서고 앉고 누움이 없을 것이며, 나지도 못하고 자라지도 못할 것이니라. 이런 뜻으로 나의 경 가운데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게 허공계가 있다 하였으니 허공계를 이름하여 허공이라 한다. 중생의 불성도 이와 같아 10주 보살이라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으니, 마치 금강주(金剛珠)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은 부처님의 경계요, 성문·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니라. 모든 중생들은 불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번뇌에 얽매여서 생사에 헤매는 것이며, 불성을 보는 연고로 모든 번뇌가 속박하지 못하여 생사에서 해탈하여 대열반을 얻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에게 불성의 성질이 있는 것이, 마치 젖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나이다. 만일 젖에 타락의 성품이 없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인이 있으니 하나는 정인이요 하나는 연인인데, 연인이라 함은 효모와 따뜻함이니, 허공은 성품이 없으므로 연인이 없다’ 하셨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선남자여, 만일 젖 속에 결정코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연인(緣因)을 필요로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성품이 있는 연고로 연인을 구하나니, 왜냐 하면 분명하게 보려 함입니다. 연인은 곧 아는 인이오니, 세존이시여, 마치 어둠 속에 먼저 물건이 있었기에 물건을 보려고 등불로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본래 없었으면 무엇을 등불로 비치오리까. 마치 진흙 속에 병이 있으므로, 사람과 물과 물레와 노끈과 작대기 따위로 아는 인을 삼는 것이며, 니구타의 씨가 땅과 물과 거름을 추구하여, 아는 인을 짓는 것과 같나니, 젖 속에 있는 효모와 따뜻함도 이와 같아서, 아는 인을 짓나이다. 그러므로 비록 먼저부터 성품이 있어도 아는 인을 빌려서야 보게 되나니, 젖 속에 먼저 타락의 성품이 있는 줄을 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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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만일 젖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이것이 곧 아는 인일 것이요, 만일 아는 인이라면 어찌하여 다시 알려 하겠는가. 선남자여, 만일 이 아는 인의 성품이 아는 것이라면, 항상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요, 만일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알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아는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아는 것이요, 하나는 다른 것을 아는 것이라 하면 그 뜻이 옳지 아니하니라. 왜냐 하면 아는 인은 한 법인데 어떻게 둘이 있겠는가. 만일 둘이 있다면 젖도 마땅히 둘일 것이며, 만일 젖 속에 두 가지 모양이 없다면, 어찌하여 아는 인에만 둘이 있다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까지 모두 여덟 사람이다’ 하는 것과 같이, 아는 인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도 알고 다른 이도 아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아는 인이 만일 그렇다면 아는 인이 아니니, 왜냐 하면 세는 이는 제 몸[自色]과 다른 몸을 셀 수 있으므로, 여덟 사람이라 말하거니와, 이 몸의 성품은 스스로 아는 상[了相]이 없으며, 아는 상이 없으므로 지혜의 성품을 의지하여야 저와 다른 것을 셀 수 있나니, 그러므로 아는 인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알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의 불성 있는 이가 무슨 까닭으로 한량없는 공덕을 닦는가. 만일 닦는 것이 아는 인이라 한다면, 이미 타락이 없어짐[壞]과 같으니라. 만일 인 가운데 결정코 과가 있다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증장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없다가 스승에게서 받고 나서는 점점 증장하니, 만일 스승의 가르치는 것이 아는 인이라 한다면 스승이 가르칠 때에는 받는 사람에게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있지 않았을 것이니라. 만일 이것이 아는 인이라면 아는 것이 있지 않았을 터이니, 어떻게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알아서 증장케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는 인이 없다면, 어떻게 젖이 있는 것이 타락이 있다고 이름하오리까?”
“선남자여, 세상에서 물음을 대답하는 데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차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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츰 대답함[轉]이니, 앞에서 말함과 같이 무슨 인연으로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는가. 뉘우치지 아니하기 위함이니라. 내지 대반열반을 얻기 위함이니라 하는 따위요, 둘은 잠자코[黙然] 대답함이니, 범지가 나에게 와서 묻기를, 내가 항상합니까 하기에, 내가 잠자코 있음과 같은 것이요, 셋은 반문하는[疑] 대답이니, 이 경에서 말한 것처럼 ‘만일 아는 인이 둘이 있다면, 젖 속에는 어찌하여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하는 등이니라. 선남자여, 나는 지금 차츰차츰 대답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젖이 있으면 타락이 있다고 하는 것은, 결정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젖이 있는 것을 타락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느니라.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이 있으면 불성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볼 수 있는 연고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나이다.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오지 아니하였사온데, 어떻게 있다 하오리까. 만일 마땅히 있으리라 하여서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나이다. 마치 세상 사람이 현재에 아들이 없으면, 아들이 없노라 말하는 것이온데,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지나간 것을 있다고 함은, 가령 귤을 심어서 싹이 나고 씨가 없어졌으나, 싹도 달고 풋과일 맛도 달다가, 익고 나면 이에 시어지느니라. 선남자여, 이 신맛이 씨나 싹이나 풋과일 때에는 없었다가 익을 때의 빛과 모양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니, 이 신맛은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 있는 것이다.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에 있지만 근본을 인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라. 이와 같이 본래의 씨가 비록 지나갔으나 있었다고 이름할 것이니, 이런 이치로 지나간 것을 있었다고 이름하니라. 또 어찌하여 미래를 있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참깨를 심을 적에, 누가 묻기를 무엇하려고 심는가 하면, 기름이 있기에 심노라 하는 것 같나니, 실로 기름이 있는 것 아니지만 참깨가 여문 뒤에 깨를 받아서 찌고 누르면 기름이 생길 터이므로, 이 사람의 말이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이런 뜻으로 미래를 있다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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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찌하여 과거를 있다고 하는가.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외딴 데서 임금을 욕하였더니, 여러 해 뒤에 임금이 듣고 불러 묻기를 ‘어찌하여 나를 욕하였느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왕이여, 저는 욕하지 않았나이다. 왜냐 하면 욕한 일은 이미 없어진 까닭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욕을 한 너와 내가 모두 있는데, 어찌하여 없어졌다 하느냐?’ 이리하여 목숨을 잃었느니라. 선남자여, 이 둘이 실로 없지만 결과는 없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을 말하여 지나간 것이 있다 하느니라.
또 어찌하여 미래를 있다 하느냐. 어떤 사람이 옹기장이에게 가서 병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옹기장이는 있다고 대답하였다. 옹기장이에게 실상은 병이 없었지만 진흙이 있으므로 병이 있다고 한 것이니, 이 사람의 말이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젖 속에 타락이 있다는 것이나,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라. 불성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시절과 인연을 관찰할 것이니,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허망하지 아니하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나이까. 정인이 있는 까닭입니다. 무엇이 정인인가 하오면, 불성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니구타 씨에 니구타나무가 없다면 어찌하여 니구타 성씨라 하고, 가타라(佉陀羅) 씨라 이름하지 않나이까. 세존이시여, 마치 구담 씨를 아지야(阿坻耶) 성씨라 일컫지 못하고, 아지야도 구담이라고 일컬을 수 없는 것처럼, 니구타 씨도 그와 같아서 가타라 씨라 일컫지 못하고, 가타라 씨도 니구타 씨라고 일컬을 수 없나이다. 마치 세존이 구담 성씨를 버릴 수 없듯이,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사오니, 이런 뜻으로 중생에게 모든 불성이 있는 줄을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씨 속에 니구타가 있다고 말하면, 그 뜻이 그렇지 아니하니, 만일에 있다면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선남자여, 세간의 물건들은 인연이 있어서 보이지 않나니,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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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국이요, 가까워서 보이지 않음은 사람의 속눈썹이요, 망그러져서 보지 않음은 눈이 먼 이요, 생각이 어지러워서 보지 못함은 마음이 전일하지 못한 이와 같고, 작아서 보지 못함은 가는 티끌이요, 가리워서 보지 못함은 구름에 덮인 별이요, 많아서 보지 못함은 볏단 속의 삼씨와 같고, 비슷하여서 보지 못함은 콩더미에 있는 콩과 같거니와, 니구타나무는 이러한 여덟 가지와는 같지 않거늘, 만일 있다면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만일 작아서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뜻이 그렇지 아니하니, 왜냐 하면 나무의 모양이 큰[麤] 까닭이니라. 만일 성품이 가늘다면 어떻게 자라겠는가. 만일 가리워서 보이지 않는다면, 항상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본디는 큰 모양이 없었는데, 지금에 큰 것을 본다 하면 이 큰 것이 본디는 보이는 성품이 없음을 알 것이며, 본디는 보이는 성품이 없었는데 지금에 볼 수 있다면 이 보는 것도 본디는 성품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니라. 씨도 그와 같아서 본디는 나무가 없던 것이 지금에 있다고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두 가지 인이 있으니, 하나는 정인이요 다른 하나는 아는 인[了因]이라 하겠나이다. 니구타의 씨가 땅과 물과 거름으로 아는 인을 삼는 연고로, 작던 것이 커진다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본래 있었다면, 어찌 아는 인을 요구하겠는가. 만일 본디 성품이 없다면, 아는 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만일 니구타에 본래 큰 모양이 없건만 아는 인을 인하여 큰 모양을 내었다 하면, 어찌하여 가타라나무는 내지 않는가. 둘이 다 없던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작아서 보지 못한다면 큰 것은 볼 수 있으리라. 마치 한 티끌은 보지 못하더라도, 여러 티끌이 화합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니, 그와 같이 씨 가운데 큰 모양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속에 이미 싹과 줄기와 꽃과 과실이 있고, 낱낱 과실마다 한량없는 씨가 있고, 낱낱 씨 속에 한량없는 나무가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크다고 하느니라. 이러한 큰 것이 있으므로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니구타 씨에 니구타의 성품이 있어서 나무를 자라게 한다고 하면, 이 씨가 불에 타는 것을 볼 적에는, 이러한 타는 성품도 본래 있었다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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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며, 만일 본래 있다면 나무는 자라지 못할 것이니라. 만일 온갖 법이 본래 나고 없어짐이 있다면 어찌하여 먼저 났다가 나중에 없어지고, 한꺼번에 나고 없어지지 않는가. 이런 뜻으로 성품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니구타 씨에 본래 나무의 성품이 없는데 나무를 내었다면, 이 씨에서 어찌하여 기름은 나오지 않나이까? 둘이 마찬가지로 없는 까닭입니다.”
“선남자여, 이 씨 속에서 기름도 낼 수 있나니, 본래는 성품이 없었으나 인연으로 하여서 있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어찌하여 참깨 기름이라고 이름하지 않나이까?”
“선남자여, 참깨가 아닌 연고니라. 선남자여, 불의 인연으로는 불을 내고, 물의 인연으로는 물을 내는 것이어서, 모두 인연을 따르지만 상대되는 것이 함께 있지는 못하는 것이니라. 니구타의 씨와 참깨 기름도 그와 같아서, 모두 인연을 따르지만 제각기 서로 내지는 못하나니, 니구타 씨의 성품은 냉(冷)을 다스리고, 참깨 기름의 성품은 풍(風)을 다스리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사탕수수[甘蔗]의 인연으로 석밀(石蜜)과 흑설탕이 생기나니, 비록 한 가지 인연이지만 빛과 모양이 제각기 달라서, 석밀은 열(熱)을 다스리고 흑설탕은 냉을 다스리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젖 속에 타락의 성품이 없고 참깨에 기름의 성품이 없고, 니구타 씨에 나무의 성품이 없고, 진흙에 병의 성품이 없고,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면,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바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한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겠나이다. 왜냐 하면 사람과 하늘이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도 되고 하늘이 사람도 되거니와, 이는 업의 인연으로 되는 것이요, 성품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사오며 보살마하살도 업의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겠나이다. 만일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무슨 인연으로 일천제(一闡提)들은 선근을 끊어 버리고 지옥에 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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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까?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면 일천제들이 끊지 못하여야 할 것이요, 만일 끊을 수 있다면 어떻게 불성이 항상하다고 말하겠나이까. 만일 항상함이 아니라면 불성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처음으로 보리심을 낸다고 하오며, 어찌하여 비발치(毗跋致)·아비발치(阿毗跋致)라 하겠나이까? 비발치라 하면 이 사람에게는 불성이 없는 줄을 알 것이니이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며, 대자대비로 나고 늙고 죽음과 번뇌의 걱정을 보았고, 대반열반에는 나고 늙고 죽음과 번뇌의 걱정이 없음을 보았으며, 삼보와 업과 과보를 믿고, 계율을 받아 지니는 따위의 법을 불성이라 하리니, 만일 이런 법을 여의고 불성이 있다면, 무슨 필요로 이런 법으로써 인연을 삼았겠나이까?
세존이시여, 마치 젖은 인연을 의지하지 않고도, 반드시 타락을 이루려니와, 생소(生酥)는 그렇지 아니하여 모름지기 인연을 의지하여야 하나니, 사람의 공력과 물병과 혼합시키는 것과 노끈입니다. 중생도 그러하여 불성이 있다면, 인연을 여의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만일 결정코 있을진댄 수행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3악도의 고통과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보고, 퇴타하는 마음을 내나이까? 그리고 6바라밀을 닦지 않고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니, 마치 젖이 인연이 아니고도 타락을 이루는 것 같으리이다. 그러나 6바라밀을 인하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오니, 이런 뜻으로 중생들에게 불성이 없음을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승보가 항상하다 하였사온데, 만일 항상하다면 무상이 아닐 것이며, 무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이까? 승보가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온갖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나이까?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들이 본래부터 보리심이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도 없었다가 뒤에 있다 하오면, 중생들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본래는 없다가 뒤에 있을 것이오니, 이런 이치로 온갖 중생이 마땅히 불성이 없으리라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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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여, 그대는 오래전부터 불성의 이치를 알았지만 중생들을 위하여서 짐짓 이렇게 물음이리라. 모든 중생이 진실로 불성이 있건만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처음 보리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하거니와, 선남자여,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불성은 항상한 까닭이니라. 그대의 말이 어찌하여 마음이 퇴타하는가 하지만, 실로는 퇴타하는 마음이 없나니 마음이 퇴타한다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려니와, 더디게 얻게 되므로 퇴타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니라. 이 보리심은 실로 불성이 아니니, 왜냐 하면 일천제들이 선근을 끊고 지옥에 떨어지는 연고니라.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 하면 일천제들을 일천제라고 이름할 수 없으며, 보리심도 무상하다고 이름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보리심이 결정코 불성이 아닌 것을 알지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인연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 젖이 타락되는 것과 같다고 함은, 이치가 옳지 아니하니라. 왜냐 하면 만일 다섯 가지 인연이 생소를 이룬다 하면, 불성도 그와 같은 줄을 알기 때문이니라. 마치 여러 가지 돌에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구리[銅]도 있고 철도 있는데, 모두 4대로 되었으며, 이름도 같고 실상도 같으나 내는 것은 각각 같지 아니하며, 반드시 중생의 복덕과 용광로와 사람의 공력 따위의 여러 가지 인연을 의지한 뒤에야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본래 금의 성품이 없음을 알 것이니라. 중생의 불성도 부처라 이름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공덕과 인연이 화합하여 불성을 본 뒤에야 부처를 얻게 되느니라.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 함은, 이치가 그렇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인연이 화합하지 못한 연고니라.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내가 두 가지 인을 말하였으니,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이니라. 정인은 불성이요 연인은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마치 돌에서 금이 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승보가 항상하다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으리라 하거니와, 선남자여, 승가라 함은 화합(和合)이란 말이요, 화합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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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세간의 화합이요 하나는 제일의의 화합이니라. 세간의 화합은 성문승이라 하고, 제일의의 화합은 보살승이라 하나니, 세간승은 무상하고 불성은 항상하며 불성이 항상한 것처럼 제일의의 승도 그러하니라. 또 승가가 있으니 법 화합을 말하는 것이다. 법 화합은 12부경을 말함이니, 12부경이 항상한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법승도 항상하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승가는 화합이라 이름하고, 화합은 12인연이라 하나니, 12인연 가운데도 불성이 있으며, 12인연은 항상한 것이요 불성도 그러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승가에게 불성이 있다 하느니라. 또 승가란 것은 부처님의 화합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승가에게 불성이 있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의 말이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퇴타하는 이가 있고 퇴타하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나니, 자세히 들으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세 가지 법이 있으면 퇴타하느니라. 무엇을 열세 가지라 하는가. 하나는 마음에 믿지 않음이요, 둘은 마음을 짓지 않음이요, 셋은 의심하는 마음이요, 넷은 몸과 재물을 아낌이요, 다섯은 열반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어서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멸하게 하겠는가 함이요, 여섯은 마음에 견디지 못함이요, 일곱은 마음이 조복되지 못함이요, 여덟은 수심함이요, 아홉은 즐거워하지 않음이요, 열은 방일함이요, 열하나는 제몸을 가벼이 여김이요, 열둘은 스스로 번뇌를 보고 깨뜨릴 수 없다 함이요, 열셋은 보리에 나아가는 법을 좋아하지 아니함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열세 가지 법이라 하나니, 보살로 하여금 보리에서 퇴타하게 하느니라.
또 여섯 가지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파괴하나니, 무엇이 여섯인가. 하나는 법을 아낌이요, 둘은 모든 중생에게 선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셋은 나쁜 동무를 친근함이요, 넷은 부지런히 정진하지 아니함이요, 다섯은 스스로 교만함이요, 여섯은 세상 사업을 경영함이니라.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이 보리심을 파괴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부처님 세존은 인간 천상의 스승이며, 중생 중에 가장 높아서 비길 이 없으며,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훌륭하며, 법에 대한 눈이 밝아서 걸림없이 법을 보며, 큰 고통 바다에서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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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는 곧 서원을 내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도 마땅히 얻으리라 하고, 이런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의 가르침을 듣고 보리심을 내기도 하였으나, 혹은 보살이 아승기겁 동안에 고행을 닦은 뒤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런 고행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떻게 얻으리요’ 하고 퇴타하는 마음을 내느니라.
선남자여, 또 다섯 가지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퇴타케 하나니, 무엇이 다섯인가. 하나는 외도에 출가하기를 좋아함이요, 둘은 대자대비의 마음을 닦지 않음이요, 셋은 법사의 허물 보기를 좋아함이요, 넷은 항상 생사에 있기를 좋아함이요, 다섯은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 법으로 보리심을 퇴타케 한다 하느니라. 또 두 가지 법으로 보리심을 퇴타케 하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5욕락을 탐함이요, 둘은 3보를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음이니라.
이런 인연으로 보리심이 퇴타하느니라.
어떤 것을 퇴타하지 않는 마음이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스승에게 묻지 않고도 자연히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는, 만일 보리의 도를 얻을 수 있다면, 나도 닦아서 반드시 얻으리라 하여 이 인연으로 보리심을 내고, 짓는 공덕이 많거나 적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서, 서원을 세우되 내가 항상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친근하며, 항상 깊은 법을 듣고 다섯 가지 근[五情]이 구족하며, 설사 괴롭고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이 마음을 잃지 말아지이다 하며, 또 원하기를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에게 항상 환희한 마음을 내되, 다섯 가지 선근을 갖추어지니이다 하며, 만일 중생들이 나의 몸을 찍으며 나의 수족과 머리와 눈과 사지를 베더라도 이런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스스로 기뻐하며, 이런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보리심이 증장케 하나니, 만일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무슨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으리요 하느니라.
또 원을 세우되, 나는 근(根)이 없거나 근이 둘이거나 여인의 몸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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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며, 남에게 얽매이지 말며 악한 주인을 만나지 말며 악한 임금에게 소속되지 말며 나쁜 나라에 나지 않게 하여지이다. 만일 좋은 몸을 얻으면 문벌이 훌륭하고 재물이 많더라도 교만을 내지 않게 하며, 내가 항상 12부경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만일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면 듣는 이가 공경하고 믿고 의심이 없으며, 나에게 대하여 나쁜 마음을 내지 않게 하여지이다. 차라리 조금 듣고 뜻을 많이 이해할지언정, 많이 듣고 뜻을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며 마음의 스승이 되기를 원하고 마음을 스승함을 원치 아니하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악한 일과 어울리지 아니하며, 모든 중생에게 안락함을 베풀고,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가 산과 같아서 동하지 아니하며, 위없는 바른 법을 받아 지니기 위하여서는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지 아니하며 부정한 물건은 복업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정당한 생업[正命]으로 살아가고 삿된 마음이 없어지이다.
은혜를 받은 때에는 작은 은혜라도 크게 갚기를 생각하며, 세상에 있는 사업과 기술을 잘 알고, 중생들의 각 지방 말을 잘 알아서 12부경을 읽고 외우고 쓰면서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아니하며, 만일 중생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방편으로 인도하여 듣기를 좋아하게 하며, 말이 항상 부드러워서 나쁜 말을 하지 아니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대중은 화합하게 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가 있으면 근심과 두려움을 여의게 하며, 흉년 드는 세상에는 풍족하게 하고, 병이 도는 세상에선 용한 의원이 되어 병에 쓰는 약이나 재물을 마음대로 하여, 앓는 이로 하여금 쾌차하게 하며, 도병겁(刀兵劫)이 생길 적에는 큰 세력이 있어서 상하고 해하려는 것을 끊어 버리고 남는 일이 없게 하며, 중생들의 가지가지 공포를 덜어 줄 것이니, 이른바 죽는 공포, 가두고 얽어매고 때리는 일, 수재, 화재, 법률을 범하고 난리가 생기는 일, 빈궁하고 파계하는 일, 나쁜 소문, 나쁜 갈래, 이런 따위의 공포를 모두 끊을 것이니라.
부모와 스승과 어른에게는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원수들에게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며, 항상 여섯 가지 생각함[六念]과 공삼매문(空三昧門)과 12인연과 생멸하는 관[生滅等觀]과 숨을 내쉬고[出息] 들이쉬는 것[入息]과 하늘의 행과 범행과 성행(聖行)과 금강삼매와 수릉엄정을 닦으며, 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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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는 데서는 스스로 고요한 마음을 얻게 하며, 설사 몸과 마음으로 큰 고통을 받을 때라도 위없는 보리심을 잃지 말게 하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으로 만족한 줄을 알지 못하게 하며, 삼보가 없는 곳에서는 삿된 소견을 파할지언정 그의 도를 익히지 아니하며, 법에 자재함을 얻고 마음에 자재함을 얻으며, 함이 있는 법에는 분명하게 허물을 보고 나로 하여금 2승의 도과를 무서워하기를 목숨을 아끼는 이가 몸 버리기를 무서워하듯 하며, 중생을 위하여 세 나쁜 갈래에 있기를 좋아하기를 중생들이 도리천에 나기를 좋아하듯 하며, 낱낱 사람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에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음에 뉘우치지 않게 하며, 다른 이가 이익 얻음을 보고도 질투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항상 기뻐하기를 자기가 낙을 얻은 듯이 할지니라.
삼보를 만나거든 외복과 음식과 와구와 가옥과 의약과 등과 꽃과 향과 풍악과 깃발과 일산과 7보로 공양할 것이며, 부처님의 계율을 받거든 견고하게 보호하고 범할 생각을 내지 말며, 보살들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한다는 말을 듣거든, 환희한 마음으로 후회함을 내지 말며, 지나간 세상의 숙명(宿命)을 알고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업을 짓지 말며, 과보를 받기 위하여 인연을 모으지 말고, 현재의 낙에 탐착함을 내지 말지니라.
선남자여, 만일 이러한 서원을 내는 이가 있으면 보살이라 이름할 것이니, 보리심을 퇴타하지 아니할 것이며, 시주라고도 이름할 것이니, 여래를 뵈옵고 불성을 분명히 알 것이며, 중생들을 조복하여 생사에서 해탈케 하며, 위없는 바른 법을 보호하여 가지고, 6바라밀을 구족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런 뜻으로 퇴타하지 않는 마음을 불성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퇴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비유하여 말하면 어떤 두 사람이 이런 말을 들었다. ‘다른 지방에 7보로 된 산이 있고, 산에 맑은 샘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고, 그 산에 가는 사람은 빈궁을 영원히 면하고 그 물을 먹으면 만년을 살 수 있거니와, 길이 멀고 험하여서 가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나는데, 한 사람은 가지가지 행구를 준비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빈손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함께 앞으로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보물을 많이 가지고 오는데 7보가 구족하였다. 두 사람은 앞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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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물었다. ‘여보시오. 그 지방에 참으로 7보 산이 있더이까?’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참으로 있고 거짓말이 아니며 나는 보물을 많이 얻어 가졌고, 그 물도 먹었소만, 길이 험하고 도적이 많고 자갈밭 가시밭뿐이요, 물도 풀도 없어서 가는 사람은 천명 만명이나 도착한 사람은 대단히 적소.’
이 사실을 듣고 한 사람은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길이 그렇게 멀고 고생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는 사람은 많으나 도착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하니, 난들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살림은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 거기를 가다가는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 몸을 보전하지 못하면 장수가 무슨 소용인가’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이도 도착한 사람이 있으니, 나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가기만 하면 소원이 만족하여 보물도 많이 얻고 장수하는 물도 마실 것이요, 만일 이르지 못하면 죽기로 한정하리라.’ 이 때에 두 사람이 하나는 후회하여 돌아서고, 한 사람은 앞으로 가서 그 산에 당도하였다. 그래서 보물을 많이 얻었고 물도 마음껏 먹었으며, 많은 보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봉양하고 친척들까지 이바지하였다. 후회하면서 먼저 돌아왔던 사람이 이 일을 보고는 마음에 열이 나서, 저 사람이 갔다 왔는데, 난들 어찌 그냥 있으리요 하고, 곧 행장을 차려서 길을 떠났다.
7보 산은 대반열반에 비유하고, 맛나는 물을 불성에 비유하고, 두 사람은 초발심한 두 보살에 비유하고, 험악한 길은 생사에 비유하고, 길에서 만난 사람은 부처님 세존에 비유하고, 도적이 있는 것은 네 마군에 비유하고, 자갈밭 가시밭은 번뇌에 비유하고 물도 풀도 없다는 것은 보리의 도를 익히지 않는 데 비유하고, 한 사람이 돌아선 것은 퇴타한 보살에 비유하고 곧장 간 사람은 퇴타하지 않는 보살에 비유한 것이니라.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이 항상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저 험한 길과 같거든, 어떤 사람이 후회하고 돌아왔다고 하여서, 도가 무상하다고 말할 수 없나니, 불성도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보리의 길에 마침내 퇴타하는 이가 없나니, 선남자여, 그 때에 후회하고 돌아왔던 사람도 저번에 같이 가던 사람이 보배를 얻어 가지고 와서 형제가 자재하게 부모를 봉양하고 친척들을 도와주면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열이 나서 즉시 행장을 차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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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다시 떠나서, 몸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곤란을 참아가면서 마침내 7보 산에 이르렀으니 퇴타하였던 보살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니,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나 내지 5역죄나 4중금을 범한 이와 일천제들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퇴전하는 이와 퇴전하지 않는 이가 있나이까?”
“선남자여, 만일 보살이 여래의 32상을 얻는 업의 인연을 닦아 익히는 이는 퇴전하지 않는다 이름하며, 보살마하살이라 이름하며, 불퇴전이라 이름하며,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긴다 이름하며, 모든 성문·연각보다 훌륭하다 이름하며, 아비발치라 이름하니라. 선남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계행을 가지어 흔들리지 아니하며 보시하는 마음을 옮기지 아니하며, 진실한 말에 머물기를 수미산같이 하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발바닥이 상자 바닥처럼 평평한 모양[奩底相]을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부모에게나 화상(和上)에게나 어른에게나 내지 축생에게까지 법다운 재물로 공양하거나 공급하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 무늬[千輻輪相]가 있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명을 죽이지 아니하고 훔치지 아니하고 부모와 스승에게 항상 환희한 마음을 내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세 가지 잘 생긴 몸매[相好]를 얻느니라. 하나는 손가락이 가늘고 길며, 둘은 발꿈치가 길며, 셋은 몸이 방정하고 곧나니, 이 세 가지 모양은 같은 업의 인연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4섭법[攝法]으로 중생을 이끌어들이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흰 거위와 같은 비단결 같은 막이 있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부모나 스승의 병들었을 적에 손수 씻고 붙들고 안마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손과 발이 보드랍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가지고 법을 듣고 보시하기를 만족함이 없이 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관절이나 복사뼈가 통통하고 원만하며, 몸의 털이 위로 쏠리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전심으로 법을 듣고 바른 교법을 연설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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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가 사슴의 다리 같으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에게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음식에는 만족함을 알며, 보시하기를 항상 좋아하고 병든 이를 보살피고 약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원만하기가 니구타나무와 같고, 손이 무릎을 지나고, 정수리에 육계가 있으며, 정상을 볼 수 없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두려워하는 이를 보면 구호하여 주고, 헐벗은 이를 보고는 옷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남근이 몸안에 숨어 있는 모양[陰藏相]을 얻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지혜 있는 이를 친근하고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며, 묻는 일에 대답하기 좋아하고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살결이 보드랍고 몸의 털이 오른쪽으로 쏠리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의복·음식·와구·의약·향·꽃·등불 따위로 남에게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금빛 같고 늘 광명이 빛나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적에, 보배로운 것들을 아낌없이 버리되 복밭인가 아닌가를 보지 아니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일곱 군데가 원만한 모양[七處滿相]을 얻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적에 마음에 의심을 내지 아니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부드러운 음성을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법답게 재물을 구하여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뼈마디가 원만하고 사자의 웃통 같고 팔과 팔꿈치가 원만하고 가늘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간하는 말과 욕설하는 말과 성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40개의 이가 희고 깨끗하고 가지런하고 조밀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에게 대자비를 닦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두 송곳니가 희고 크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원하기를 와서 달라는 이에게 달라는 대로 주리라 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사자와 같은 빰을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이 달라는 대로 음식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맛 가운데 좋은 맛을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열 가지 선한 일을 행하고 남에게까지 교화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넓고 긴 혀를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다른 이의 단점을 들추어내지 않고,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범(梵) 음성을 얻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원수나 미운 이를 보고 기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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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내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속눈썹이 검붉게 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다른 이의 덕을 숨기지 않고, 잘한 일을 드날리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양미간의 백호상을 얻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32상을 얻을 업의 인연을 닦으면 보리심이 퇴전하지 않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온갖 중생들을 헤아릴 수 없으며, 부처님의 경계와 업의 과보와 불성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 네 가지 법은 모두 항상한 것이며, 항상한 연고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온갖 중생은 번뇌가 덮이었으므로 항상하다 이름하며, 항상한 번뇌를 끊으므로 무상하다 하느니라. 만일 온갖 중생이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8성도를 닦아서 모든 괴로움을 끊겠는가. 모든 괴로움이 만일 끊어지면 무상하다 이름하고, 받는 낙은 항상하다 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번뇌가 덮이어서 불성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연고로 열반을 보지 못한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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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제 27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23. 사자후보살 ③

사자후보살이 또 이렇게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말씀과 같이 모든 법에 두 가지 인이 있으니, 하나는 정인(正因)이요 하나는 연인(緣因)이오나, 이 두 가지 인으로는 묶고 푸는 것이 없으리이다. 이 5음은 잠깐잠깐 사이에 났다 없어졌다 하나니, 만일 났다 없어졌다 한다면, 누가 묶고 누가 푸나이까? 세존이시여, 이 5음으로 인하여 뒤의 5음을 내거니와, 이 5음은 스스로 멸하고 저 5음에 이르지 않으며, 비록 저 5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능히 저 5음을 내나이다. 마치 씨를 인하여 싹이 나거니와 씨는 싹에 이르지 않으며, 비록 싹에 이르지 않더라도 능히 싹을 내는 것 같나이다. 중생도 그러하옵거늘 어찌하여 묶고 푼다 하오리까?”
“선남자여, 자세히 잘 들으라. 내가 그대에게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선남자여, 마치 사람이 목숨을 버리려고 크게 괴로울 적에 일가 친척들이 둘러앉아 울고불고 슬퍼하거든 그 사람이 공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비록 다섯 가지 정(情)이 있으나 감각이 없고, 팔 다리는 떨리어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며, 몸은 식어가고 더운 기운은 다하려 하거든, 먼저 닦아 익혔던 선과 악의 과보를 보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해가 지려 할 적에는 산이나 언덕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나타나고, 서쪽으로 기울어질 이치가 없느니라. 중생의 업과 과보도 그와 같아서 이 5음이 없어질 때에 저 5음이 계속하여 생기나니,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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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등불이 켜지면 어둠이 없어지고, 등불이 꺼지면 어둠이 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밀랍으로 만든 인[蠟印]을 인주[泥]에 찍으면 인과 인주가 합하였다가, 인은 없어지고 글씨가 생기거니와, 밀랍으로 만든 인이 변하여서 인주에 있지도 아니하고 글씨가 인주에서 나오지도 아니하고, 다른 데서 오는 것도 아니요, 밀랍으로 만든 인의 인연으로 글씨가 생기느니라. 현재의 5음이 없어지면 중음신의 5음이 생기거니와, 이 현재의 5음이 변하여서 중음신의 5음이 되지도 아니하고, 중음신의 5음이 스스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다른 데서 오는 것도 아니요, 현재의 5음을 인해서 중음의 5음이 생기는 것이니, 마치 밀랍으로 만든 인을 인주에 찍으면, 인이 망그러지면서 글씨가 생기는 것과 같아서 이름은 비록 차별이 없으나 시절이 제각기 다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중음신의 5음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고, 천안(天眼)으로야 본다고 하느니라.
이 중음신에는 세 가지 먹는 것이 있으니, 하나는 생각으로 먹음[思食]이요 둘은 닿이어서 먹음[觸食]이요 셋은 뜻으로 먹음[意食]이니라. 중음신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선한 업의 과보요, 둘은 악한 업의 과보니라. 선한 업을 인해서는 선한 알음알이[覺觀]를 얻고, 악한 업을 인해서는 악한 알음알이를 얻나니, 부모가 교접할 적에 업의 인연을 따라서 태에 들게 되는데, 어미에게는 사랑함을 내고, 아비에게는 미워함을 내며, 아비의 정수가 나올 적에는 자기의 것이라 여기고, 보고서는 기뻐서 환희한 마음을 내나니, 이 세 가지 번뇌의 인연으로 중음신의 5음이 없어지고 후생(後生)의 5음을 내는 것이, 마치 인주에 찍었던 인이 망그러지고, 글씨가 생기는 것과 같으니라. 태어날 적에 모든 근이 구족하기도 하고 구족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구족한 이는 색을 보고 탐심을 내며, 탐심을 내므로 사랑이라 하며, 광란(狂亂)하여 탐심을 내는 것을 무명이라 하느니라. 탐애(貪愛)와 무명의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는 경계가 모두 뒤바뀌어서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 보고, 내가 없는 것을 내가 있다 보고, 낙이 없는 것을 즐겁다 보고,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 보느니라. 네 가지 뒤바뀜으로 말미암아 선한 행과 악한 행을 짓나니, 번뇌는 업을 짓고 업은 번뇌를 짓는 것을 속박이라 이름하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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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5음이 생긴다 이름하느니라.
이 사람이 만일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나 선지식을 친근하면, 문득 12부경을 듣게 되고, 법문을 들었으므로 선한 경계를 관찰하고, 선한 경계를 관찰하므로 큰 지혜를 얻고, 지혜를 얻은 이는 바른 지견[正知見]이라 하고, 바른 지견을 얻었으므로 생사 중에서 뉘우치는 마음을 내고, 뉘우치는 마음을 내었으므로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않고, 즐거움을 내지 아니하므로 탐심을 깨뜨리고, 탐심을 깨뜨렸으므로 8성도를 닦고, 8성도를 닦으므로 생사가 없어지고, 생사가 없어지므로 해탈을 얻었다 하나니, 불이 섶을 만나지 못한 것을 꺼졌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라. 생사를 멸하였으므로 멸도(滅度)라 이름하나니, 이런 뜻으로 5음이 멸하였다 이름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허공 가운데 가시가 없거늘 무엇을 뽑는다 하오며, 5음에 속박하는 이가 없다면, 어찌하여 속박이라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번뇌의 사슬로 5음을 속박하나니, 5음을 여의고 따로 번뇌가 없고, 번뇌를 여의고 따로 5음이 없느니라. 선남자여, 기둥이 집을 지탱함과 같아서, 집을 여의고 기둥이 없으며, 기둥을 여의고 집이 없나니, 중생의 5음도 그와 같아서, 번뇌가 있으므로 속박이라 하고 번뇌가 없으므로 해탈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주먹과 손바닥을 모으는 것과 결박하는 것 등 세 가지는 합하고 흩어져서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요, 다시 다른 법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중생의 5음도 그와 같아서, 번뇌가 있으므로 속박이라 하고 번뇌가 없으므로 해탈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명과 색[名色]이 중생을 속박하였다는 말과 같나니, 명과 색이 멸하면 중생이 없거니와 명과 색을 여의고 따로 중생이 없으며, 중생을 여의고 따로 명과 색이 없지만, 명과 색이 중생을 속박한다고도 이름하고, 중생이 명과 색을 속박한다고도 이름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마치 눈이 스스로 보지 못하고, 손가락이 스스로 찌르지 못하고, 칼이 스스로 깎지 못하고, 수(受)가 스스로 받지 못하옵거늘, 어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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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래께서 명과 색이 명과 색을 속박한다 말씀하시나이까? 왜냐 하면 명과 색이라 말하면 곧 중생이요, 중생이라 말하면 곧 명과 색이기 때문이니, 만약 명과 색이 중생을 속박한다 말하면 이는 곧 명과 색이 명과 색을 속박한다 함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두 손을 합할 적에 다른 법이 와서 합함이 없느니라. 명과 색도 그와 같나니, 이런 뜻으로 내가 말하기를 명과 색이 중생을 속박한다 하는 것이며, 만일 명과 색을 여의면 곧 해탈이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중생이 해탈한다고 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명과 색이 있는 것을 속박이라 한다면, 아라한들이 아직 명과 색을 여의지 못한 것도 속박이라 하겠나이다.”
“선남자여, 해탈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종자를 끊음[子斷]이요, 둘은 과보를 끊음[果斷]이니라. 종자를 끊음은 번뇌를 끊음이라 하나니, 아라한은 이미 번뇌를 끊었으므로 모든 속박[結]이 무너졌느니라. 그러므로 종자의 번뇌는 속박하지 못하거니와, 과보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과보의 속박이라 이름하니라. 아라한들이 불성을 보지 못하였나니, 보지 못한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이런 뜻으로 과보의 속박이라고는 말할지언정, 명과 색의 속박이라고는 말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등불을 켜는 것과 같아서, 기름이 다하기 전에는 밝은 빛이 꺼지지 않거니와, 기름이 다하면 꺼질 것이 의심없느니라. 선남자여, 기름은 번뇌에 비유하고 등은 중생에 비유한 것이니, 모든 중생들이 번뇌의 기름인 연고로 열반에 들지 못하거니와, 만일 번뇌를 끊는다면 열반에 드느니라.”
사자후보살이 또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등과 기름은 두 성품이 각각 다르거니와, 중생과 번뇌는 그렇지 아니하여, 중생이 곧 번뇌요 번뇌가 곧 중생이며, 중생을 5음이라 하고 5음을 중생이라 하며, 5음을 번뇌라 하고 번뇌를 5음이라 하옵거늘 어찌하여 여래께서 등에 비유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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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자여, 비유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수순하는 비유[順喩]요, 둘은 거슬러 하는 비유[逆喩]요, 셋은 현재에 있는 비유[現喩]요, 넷은 실제가 아닌 비유[非喩]요, 다섯은 먼저 하는 비유[先喩]요, 여섯은 뒤에 하는 비유[後喩]요, 일곱은 앞과 뒤에 하는 비유[先後喩]요, 여덟은 두루하는 비유[遍喩]니라. 어떤 것을 수순하는 비유라 하는가. 경에 말하기를 ‘하늘에서 큰비가 오면 도랑이 넘치고, 도랑이 넘치므로 작은 구렁이 넘치고, 작은 구렁이 넘치므로 큰 구렁이 넘치고, 큰 구렁이 넘치므로 큰 샘이 넘치고, 큰 샘이 넘치므로, 작은 못이 넘치고, 작은 못이 넘치므로 큰 못이 넘치고, 큰 못이 넘치므로 작은 강이 넘치고, 작은 강이 넘치므로 큰 강이 넘치고, 큰 강이 넘치므로 큰 바다가 넘치나니, 여래의 법비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계행이 만족하고, 계행이 만족하므로 후회하지 않는 마음이 만족하고, 후회하지 않는 마음이 만족하므로 환희한 마음이 만족하고, 환희가 만족하므로 멀리 여의는 것이 만족하고, 멀리 여의는 일이 만족하므로 편안함이 만족하고, 편안함이 만족하므로 삼매가 만족하고, 삼매가 만족하므로 바른 지견이 만족하고 바른 지견이 만족하므로 싫어함이 만족하고, 싫어함이 만족하므로 꾸짖음이 만족하고, 꾸짖음이 만족하므로 해탈이 만족하고, 해탈이 만족하므로 열반이 만족하니라’ 한 것을 수순하는 비유라 이름하니라.
어떤 것을 거슬러 하는 비유라 하는가. 큰 바다의 근본이 있으니 큰 강이요, 큰 강의 근본이 있으니 작은 강이요, 작은 강의 근본은 큰 못이요, 큰 못의 근본은 작은 못이요, 작은 못의 근본은 큰 샘이요, 큰 샘의 근본은 작은 샘이요, 작은 샘의 근복은 큰 구렁이요, 큰 구렁의 근본은 작은 구렁이요, 작은 구렁의 근본은 도랑이요, 도랑의 근본은 큰비인 것처럼, 열반의 근본이 있으니 해탈이요, 해탈의 근본이 있으니 꾸짖음이요, 꾸짖음의 근본은 싫어함이요, 싫어함의 근본은 바른 지견이요, 바른 지견의 근본은 삼매요, 삼매의 근본은 편안함이요, 편안함의 근본은 멀리 여의는 일이요, 멀리 여의는 일의 근본은 환희한 마음이요, 환희한 마음의 근본은 후회하지 아니함이요, 후회하지 않는 근본은 계행을 가짐이요, 계행을 가지는 근본은 법비니라 하는 것은, 거슬러 하는 비유라 하느니라.
어떠한 것을 현재에 있는 비유라 하는가. 경에서 말하기를 중생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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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같나니, 원숭이의 성품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가짐이니라. 중생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빛과 소리와 향과 맛과 닿임과 법에 취착하여 잠시도 머무는 때가 없다고 함은 현재에 있는 비유라 하느니라.
어떠한 것을 실제가 아닌 비유라 하는가. 내가 예전에 바사닉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대왕이여, 어떤 믿는 사람이 사방에서 와서 각각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네 개의 큰 산이 사방으로부터 백성들을 해하려 한다고 하면 왕은 이 말을 듣고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설사 이런 일이 있어도 도피할 곳이 없으니, 다만 전심으로 계율을 지키고 보시할 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찬탄하였노라.
‘훌륭합니다. 대왕이여, 내가 말한 네 개의 산이라 함은, 곧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데 비유한 것입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항상 와서 사람을 침노하거늘, 대왕은 어찌하여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지 않습니까?’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하여 어떠한 과보를 얻나이까?’
나는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인간에나 천상에 태어나서 훌륭한 쾌락을 받나이다.’
왕은 또 말하기를 ‘니구타나무가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하여도, 인간에나 천상에서 쾌락을 받겠나이까?’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니구타 나무는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할 수가 없거니와, 그렇게 하기만 하면 쾌락을 받을 것이 다를 것 없습니다.’ 이런 것을 실제가 아닌 비유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먼저 하는 비유라 하는가. 내가 경 가운데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탐내어 꽃을 꺾다가 물에 떠내려갔으니,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5욕락에 탐착하다가 나고 늙고 죽음의 물에 떠내려가느니라’ 하였으니, 이런 것을 먼저 하는 비유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뒤에 하는 비유라 하는가. 『법구경』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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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악을 가벼이 여겨
재앙이 없다 말하지 말라.
물방울이 작지만
큰 그릇을 채우느니라.

이런 것을 뒤에 하는 비유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앞과 뒤에 하는 비유라 하는가. ‘마치 파초가 열매를 맺으면 죽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이양을 얻는 것도 그와 같나니, 노새가 새끼를 배면 생명을 오래 보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하는 것이, 앞과 뒤에 하는 비유니라.
어떤 것을 두루하는 비유라 하는가. 경에 말하기를 ’33천에 파리질다나무가 있는데, 뿌리는 땅속으로 5유순이나 깊이 들어가고 높이는 1백 유순이요 가지와 잎은 사방으로 50유순이나 퍼지었다. 잎이 성숙하면 누렇게 되므로 하늘 사람들이 보고 환희한 마음을 내어, 이 잎은 오래지 않아 반드시 떨어지리라 하고, 잎이 떨어지면 또 환희심을 내어 이 가지가 오래지 않아 빛이 변하리라 하고, 가지의 빛이 변하면 또 환희심을 내어 이 빛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포(皰)가 생기리라 하고, 포를 보고는 또 기뻐서 이 포가 오래지 않아 꽃봉오리가 생기리라 하고, 꽃봉오리를 보고는 또 기뻐서 이 꽃봉오리가 오래지 않아 활짝 피리라 하나니, 필 적에는 향기가 50유순까지 퍼지고 광명이 80유순까지 비치나니, 그 때에 하늘 사람들이 여름 석 달 동안 그 아래서 낙을 받느니라.
선남자여, 나의 제자들도 그와 같나니, 잎이 누렇게 되는 것은 나의 제자가 출가하려는 데 비유하고, 잎이 떨어짐은 나의 제자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는 데 비유하고, 빛이 변함은 나의 제자의 네 번 고하는 갈마[白四羯磨]를 하여 구족계를 받는 데 비유하고, 처음으로 포가 생기는 것은 나의 제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는 데 비유하고, 꽃봉오리는 10주 보살이 불성을 보는 데 비유하고, 꽃이 피는 것은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데 비유하고, 향기는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이 계율을 받아 갖는 데 비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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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광명은 여래의 명호가 걸림없이 시방에 두루 퍼짐에 비유하고, 여름 석 달은 세 가지 삼매에 비유하고, 33천이 쾌락을 받음은 부처님들이 대열반에 계시면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것을 두루하는 비유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릇 비유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 취할 것이 아니요, 혹 조금만 취하기도 하고, 혹 많이 취하기도 하고, 혹은 전부를 취하기도 하나니, 마치 여래의 얼굴이 보름달 같다고 함은, 조금만 취한 비유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애초에 젖은 알지 못하여서 다른 이에게 젖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물과 같고 꿀과 같고 조개와 같다고 하였으니, 물은 습한 모양이고 꿀은 단 성품이고 조개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비유를 말하였으나 젖의 실상은 아니니라. 선남자여, 내가 등불을 이끌어서 중생에게 비유한 것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물을 떠나서는 강이 없나니, 중생도 그러하여 5음을 떠나서는 따로 중생이 없느니라.
선남자여, 수레 바탕과 바퀴와 바퀴살과 굴대와 덧바퀴와 수레 지붕을 떠나서는 따로 수레가 없듯이, 중생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만일 저 등불의 비유를 법에 합치하려면 자세히 잘 들으라, 내가 이제 말하리라. 심지는 25유에 비유하고, 기름은 애욕에 비유하고, 밝은 빛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둠을 깨뜨림은 무명을 없애는 데 비유하고, 더움은 성인이 도에 비유하고, 기름이 다하면 밝은 불꽃이 꺼지는 것은 중생의 애욕이 다하면 불성을 보는 데 비유한 것이다. 비록 명과 색이 있어도 속박하지 못하나니, 비록 25유에 있더라도 모든 유의 더럽힘을 받지 않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5음이 공하여 있지 않다면, 누가 가르침을 받고 도를 닦겠나이까?”
“선남자여, 온갖 중생이 모두 생각하는 마음, 지혜의 마음, 처음 내는 마음[發心], 정진하는 마음, 믿는 마음, 선정의 마음이 있나니, 이런 따위의 법이 비록 순간순간 생멸하더라도, 오히려 비슷하게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도를 닦는다 이름하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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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이 모두 순간순간 멸하나이다. 이 잠깐잠깐 사이에 멸하는 것도 비슷하게 서로 계속하오나, 어떻게 닦아 익히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마치 등불이 비록 순간순간 멸하지만 광명이 있어 어둠을 깨뜨리나니, 생각하는 마음 등의 여러 가지 법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중생의 먹는 것이 비록 순간순간 멸하지만 굶주린 이로 하여금 배가 부르게 하며, 좋은 약도 순간순간 멸하지만 능히 병을 다스리며, 해와 달의 광명도 순간순간 멸하지만, 초목들을 자라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가 말하기를 잠깐잠깐 사이에 멸하는데 어떻게 자라게 하겠는가 하지만, 마음이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자란다고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사람이 글을 읽을 적에 읽는 구절이나 글자가 한꺼번에 읽는 것이 아니어서, 앞의 것이 중간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 것이 뒤에 이르지 못하여, 사람과 글자와 마음이 모두 순간순간 멸하지만 오래오래 닦으므로 통달하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은장이가 처음 견습할 적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비록 순간순간 멸하여서 앞의 것이 뒤에 이르지 못하지만, 오래오래 익힌 연고로 교묘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잘하는 은장이라 하나니, 글을 읽고 외우는 것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씨앗을 보고 ‘네가 싹을 내라’고 땅이 가르치지 않지만, 법의 성품인 연고로 싹이 스스로 나는 것이며, 내지 꽃도 네가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는 것 아니지만, 법의 성품인 연고로 열매가 저절로 생기나니, 중생의 도를 닦음도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셈하는 법[數法]이 하나가 둘에 이르지 아니하고 둘이 셋에 이르지 아니하며 순간순간 멸하지만, 천과 만에 이르나니, 중생이 도를 닦음도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저 등불이 순간순간 멸하거니와, 처음 멸하는 불꽃이 뒤의 불꽃에게 가르치기를 ‘내가 멸하거든 네가 나서 어둠을 깨뜨리라’ 하지 아니하니라. 선남자여, 마치 송아지가 나면서 문득 젖을 찾는데 젖을 찾는 지혜는 누가 가르친 적이 없으며, 비록 순간순간 멸하지만, 처음은 주리었으나 나중에 배부르니라. 이러므로 서로 같지 않음을 많이 알지니, 만일 서로 같다면 마땅히 다른 데서 나지 않을 것이니라. 중생의 도를 닦음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는 증장하지 못하지만, 오래오래 닦으므로 모든 번뇌를 능히 깨뜨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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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수다원이 과를 증득한 뒤에는, 비록 나쁜 나라에 태어나더라도 오히려 계율을 지키어 살생과 도적질과 음행과 이간하는 말과 술을 마시는 일을 하지 아니한다 하오니, 수다원의 5음이 여기서 멸하고 나쁜 나라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도를 닦는 것도 그와 같아서 나쁜 나라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만일 서로 같다면 무슨 연고로 깨끗한 나라에 나지 않나이까? 만일 나쁜 나라의 5음은 수다원의 5음이 아니라 하오면, 어찌하여 나쁜 법을 짓지 아니할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수다원은 비록 나쁜 나라에 나더라도, 수다원의 이름을 잃지 아니하거니와, 5음은 서로 같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송아지로 비유하였느니라. 수다원은 비록 나쁜 나라에 나더라도 도력으로 말미암아 나쁜 업을 짓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향산에 사자왕이 있으므로, 모든 새와 짐승들이 이 산에는 종적을 감추고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더니, 어느 때에 이 사자왕이 설산으로 갔는데도, 온갖 새와 짐승들이 오히려 있지 못하는 것처럼, 수다원도 그와 같아서, 비록 도를 닦지 아니하더라도 도력으로 말미암아 나쁜 일을 짓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감로를 먹었으면, 감로는 비록 멸하였으나 그 세력으로 이 사람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선남자여, 수미산에 능가리(楞伽利)라 하는 좋은 약이 있는데, 사람이 먹으면 비록 그것은 순간순간 없어지나 그 약의 효력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전륜왕이 앉는 자리에는 왕이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왕의 위력이 있는 까닭이니라. 수다원도 그와 같아서 비록 나쁜 나라에서 나서 도를 닦지 않더라도, 도력으로 말미암아 나쁜 업을 짓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수다원의 5음이 여기서 없어지고 다른 5음이 생겼다 할지라도 여전히 수다원의 5음은 잃지 않느니라. 어떤 중생이 과일을 얻기 위하여 종자를 심느라고 애를 많이 쓰며 거름을 주고 물을 대었으나 과일을 얻기 전에 종자까지 없어졌지만, 그래도 종자로 인하여 과일을 얻는다 이름하나니, 수다원의 5음도 그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재산이 매우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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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은 먼저 죽었고, 그 아들의 아들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 살았다. 그 사람이 홀연히 죽으매, 손자가 기별을 듣고 그 재산을 모두 차지하였느니라. 비록 그 재산이 자기가 모은 것이 아니지만, 그 재산을 차지하는 것을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왜냐 하면 그 내림[姓]이 같은 연고니, 수다원의 5음도 그와 같으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이런 게송을 말씀하였나이다.

비구들이 만일에
계와 정과 지혜를 닦으면
그것은 언제나 물러가지 않고
대열반에 친근하게 되리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계를 닦는 것이며, 어떤 것이 정을 닦는 것이며, 어떤 것이 지혜를 닦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어떤 사람이 계율을 받아 지니더라도 다만 제 몸만 위하여 인간이나 천상에서 쾌락을 받으려 하고,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지 않으며, 위없는 정법을 보호하지 않고, 자기의 이양을 위하여 3악도를 무서워하거나, 생명과 색신(色身)과 힘과 편안함과 걸림없는 변재를 위하거나, 국법과 나쁜 이름과 나쁜 소문이 두려워서, 세간 사업만을 한다면, 이렇게 계율을 가지는 것은 계를 닦는다 할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것을 참으로 계를 닦는다 하는가. 계율을 받아 지닐 때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고 정법을 보호하기 위하며,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고 알지 못하는 일을 알게 하고, 귀의할 데 없는 이를 귀의하게 하고 열반에 들지 못한 이를 열반에 들게 하기 위하며, 이렇게 계를 닦으면서도 계도 보지 않고 계의 모양도 보지 않고 계를 가지는 사람도 보지 않고 과보도 보지 않고 파계함도 보지 아니한다면, 선남자여, 이렇게 하는 이는 계를 닦는다고 이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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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삼매를 닦는다 하는가. 삼매를 닦을 때에 스스로 해탈하기를 위하여 이양만을 위하고, 중생을 위하지 아니하며 법을 보호하기를 위하지 아니하고, 탐욕과 더러운 음식 따위의 허물을 보기 위하며, 남녀의 근(根)이나 아홉 구멍이 부정함과 소송하고 때리고 서로 살해함을 보기 위한다면, 이런 일을 위하여 삼매를 닦는 이는, 삼매를 닦는다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것을 참으로 삼매를 닦는다 하는가. 만일 중생을 위하여 삼매를 닦되, 중생들 가운데서 평등한 마음을 얻으며, 중생으로 하여금 물러가지 않는 법을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성인의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을 얻게 하기 위하며, 위없는 법을 두호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수릉엄삼매를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금강삼매를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다라니를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4무애를 얻게 하기 위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을 닦을 적에, 삼매를 보지 아니하며 삼매라는 모양을 보지 아니하며 닦는 사람도 보지 아니하며 과보도 보지 아니하나니, 선남자여, 만일 능히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삼매를 닦는다 할 것이니라.
어떤 것을 이름하여 지혜를 닦는다 하는가. 만일 지혜를 닦는 이가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이러한 지혜를 닦으면 해탈함을 얻어 3악도에서 벗어나리니, 누가 능히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며, 누가 능히 생사하는 갈래에서 사람을 제도하리요. 부처님께서 나시기 어려움이 우담꽃과 같나니, 내가 이제 번뇌의 결박을 끊고 해탈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마땅히 부지런히 지혜를 닦아 빨리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으리라 하여, 이렇게 닦는 이는 지혜를 닦는다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어떤 것을 이름하여 지혜를 닦는다 하겠는가. 만일 나고 늙고 죽는 고통을 관하되,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덮이어서 위없는 바른 도를 닦을 줄 알지 못하나니, 나의 이 몸으로 중생들을 대신하여 이 큰 고통을 받기 원하며, 중생들의 빈궁함과 미천함과 파계하는 마음과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은 죄업이 모두 나의 한 몸에 모이기를 원하며, 중생들이 탐욕으로 취(取)함을 내지 아니하여, 명과 색의 속박이 되지 아니함을 원하며, 중생들은 하루 빨리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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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벗어나고 나의 한 몸이 그 자리에 처하여 싫어하지 아니하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들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원하며, 이렇게 닦을 때에 지혜를 보지 아니하고 지혜의 모양을 보지 아니하고 닦는 이도 보지 아니하고 과보도 보지 아니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를 닦는다 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렇게 계와 정과 지혜를 닦으면, 보살이라 이름할 것이요, 이렇게 계와 정과 지혜를 닦지 못하면, 성문이라 이름하니라.
또 선남자여, 어떤 것을 다시 이름하여 계를 닦는다 하겠는가. 모든 중생의 16가지 나쁜 율의[惡律儀]를 깨뜨릴 것이니, 무엇을 16가지라 하는가. 하나는 이익을 위하여 양이나 염소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이요, 둘은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이요, 셋은 이익을 위하여 돼지 따위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이요, 넷은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이요, 다섯은 이익을 위하여 소와 송아지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이요, 여섯은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이요, 일곱은 이익을 위하여 닭이나 오리를 길러서 살찌워 파는 것이요, 여덟은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들을 사서 잡는 것이요, 아홉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요, 열은 사냥함이요, 열하나는 겁탈함이요, 열둘은 푸줏간을 경영함이요, 열셋은 새를 잡는 것이요, 열넷은 이간하는 말을 함이요, 열다섯은 옥사장이요, 열여섯은 용을 주문으로 길들이는 것이니라. 만일 중생을 위하여 이런 16가지 나쁜 직업을 끊게 하면 이것을 계를 닦는다 이름할 것이니라.
무엇을 일컬어 정을 닦는다 하는가. 모든 세간의 삼매를 능히 끊는 것이니, 이른바 무신(無身)삼매는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뀐 마음을 내어 열반이라 생각하게 함이요, 또 무변심(無邊心)삼매와 정취(淨聚)삼매와 세변(世邊)삼매와 세단(世斷)삼매와 세성(世性)삼매와 세장부(世丈夫)삼매와 비상비비상삼매들도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뀐 마음을 내어 열반이라 생각하게 하느니라. 만일 이런 삼매들을 영원히 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을 닦는다 할 것이니라.
어떤 것을 다시 이름하여 지혜를 닦는다 하는가. 세간에 있는 나쁜 소견들을 깨뜨림이니라. 모든 중생이 다 나쁜 소견을 가지었으니, 이른바 색(色)이 곧 나이고, 또한 나의 것이며, 색 가운데 내가 있고, 내 가운데 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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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내지 식(識)도 그러하다 하느니라. 항상함이 곧 나이니, 색은 멸하나 나는 존재한다 하고, 색이 곧 나이니, 색이 멸하면 나도 멸한다 하는데, 어떤 사람은 짓는 이는 나라 하고 받는 이를 색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짓는 이는 색이라 하고 받는 이는 나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어 스스로 나고 스스로 멸하는 것이므로 모두 인연이 아니라 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은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어서 모두 자재천의 조작이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어서, 모두가 시절(時節)로 되는 것이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짓는 이나 받는 이가 모두 없고 지대[地] 등의 5대를 중생이라 이름한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만일 모든 중생들의 이러한 나쁜 소견을 깨뜨리면, 이런 것을 이름하여 지혜를 닦는다 하느니라.
선남자여, 계를 닦는 것은 몸이 고요하기 위함이요, 삼매를 닦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기 위함이요, 지혜를 닦는 것은 의심을 깨뜨리기 위함이며, 의심을 깨뜨림은 도를 닦아 익히기 위함이요, 도를 닦음은 불성을 보기 위함이요, 불성을 보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함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은 위없는 대열반을 얻기 위함이며, 대열반을 얻음은 중생들의 모든 생사와 온갖 번뇌와 모든 유[一切諸有]와 모든 경계[界]와 모든 진리[諦]를 끊기 위함이며, 생사를 끊고 내지 모든 진리를 끊는 것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법을 얻기 위함이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만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을 대반열반이라 이름한다면, 나는[生] 것도 그러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겠거늘, 어찌하여 열반이라 이름하지 못하나이까?”
“선남자여,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그대가 말한 것처럼, 나는 것이 비록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나 처음과 나중은 있느니라.”
“세존이시여, 이 생사하는 법도 처음과 나중이 없나이다. 만일 처음과 나중이 없다면 항상하다 이름할 것이며, 항상하면 곧 열반이온데 어찌하여 생사를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지는 않나이까?”
“선남자여, 생사하는 법은 모두 인과 과가 있나니, 인과 과가 있으므로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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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라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열반의 자체에는 인도 과도 없는 연고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열반에도 인과 과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을 따라서 천상에 나고
인을 따라서 나쁜 갈래에 나고
인을 따라서 열반하나니
그러므로 모두 인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예전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사문의 도과(道果)를 말하리라. 사문이라 함은 계와 정과 지혜를 갖추고 닦는 것이요, 도라 함은 8성도요, 사문의 과는 열반이니라’ 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열반이 이러하옵거늘, 어찌 과가 아니오니까? 어찌하여 말씀하시기를, 열반의 자체에는 인도 과도 없다 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남자여, 내가 말한 열반의 인이라 함은 불성을 말한 것인데, 불성의 자성은 열반을 내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열반은 인이 없다는 것이며, 능히 번뇌를 깨뜨리므로 대과(大果)라 하는데, 도(道)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므로 과가 없다 하나니, 그러므로 열반은 인도 없고 과도 없다 하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불성은 모두 함께 가졌나이까, 각각 가졌나이까? 함께 가졌다면 한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모든 중생들도 함께 얻어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20명이 함께 원수진 사람이 있는데 만일 한 사람이 원수를 없앴다면, 다른 19명도 함께 원수가 없어진 것이니, 불성도 그와 같아서, 한 사람이 얻을 적에 다른 사람들도 얻을 것입니다. 만일 각각 가졌다면 곧 무상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셀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불성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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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각각 가졌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고, 불성이 허공과 같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남자여, 중생의 불성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평등하고 허공과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공동으로 가졌으니, 만일 8성도를 닦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은 분명히 보게 될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설산에 풀이 있으니 이름이 인욕(忍辱)이라. 소가 먹으면 제호가 되나니, 중생의 불성이 이와 같으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욕초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 만일 하나라면 소가 먹으면 끝날 것이요, 여럿이라면 어떻게 중생의 불성도 이와 같다 하시나이까? 부처님 말씀과 같이 8성도를 닦는 이는 불성을 보리라 하시나, 이치가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왜냐 하면 도가 만일 하나라면, 인욕초와 같아서 끝남이 있을 것이요, 만일 끝난다면 한 사람이 닦고 나면 다른 이는 닦을 분이 없을 것입니다. 도가 만일 여럿이라면 어찌하여 구족하게 닦는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한 살바야 지혜[薩婆若智]라고는 이름하지 못한다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치 평탄한 큰길은, 모든 중생들이 모두 그 위로 다니고 장애할 것이 없으며, 중간에 나무가 있어 그늘이 매우 서늘하여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수레를 멈추고 그 아래서 쉬어가거니와, 그 나무 그늘은 항상 있어서 옮겨가지 아니하며 없어지지도 아니하고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길은 성인의 도에 비유하고, 그늘은 불성에 비유하였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어떤 큰 성에 문이 하나뿐인데 여러 사람이 드나들지만, 아무도 막을 자가 없으며, 파괴하거나 훼손하거나 가지고 가는 자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사람마다 다니는 다리가 막을 사람도 없고 파괴하거나 가지고 갈 이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마치 용한 의원이 여러 사람의 병을 모두 치료하거든, 아무도 의원을 제지하여 이 병을 다스리고 저 병은 버리라고 할 사람이 없는 것과 같나니, 성인의 도와 불성도 그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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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끌어대시는 여러 가지 비유가 그렇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앞에 가던 사람이 길에 있으면, 뒷사람에게 방해가 되거늘, 어찌하여 장애할 것이 없다 하나이까? 다른 비유도 그러하오니 성인의 도와 불성이 그와 같다면, 한 사람이 닦을 때에 다른 이에게는 방해가 될 것입니다.”
“선남자여, 그대의 말은 이치가 맞지 아니하니라. 내가 비유한 것은 일부분만 비유함이요, 전부를 비유한 것은 아니니라. 선남자여, 세간의 도는 장애가 있으며, 이것과 저것이 달라서 평등하지 않거니와, 무루의 도는 그렇지 아니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장애가 없게 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이것과 저것이 다른 곳이 없느니라. 이렇게 바른 도는 모든 중생의 불성을 위하여 아는 인[了因]이 되는 것이요, 내는 인[生因]을 짓지 아니하니, 마치 밝은 등불이 물건을 비쳐 알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중생이 모두 무명의 인으로 행(行)을 반연하여 주나니, 한 사람의 무명이 행을 반연하여 주면, 다른 이는 그러한 몫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라. 모든 중생이 다 무명의 인이 있어서 행을 반연하여 주므로, 12인연이 모든 것에 평등하다고 말하느니라. 중생들이 닦을 무루의 바른 도(道)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번뇌와 네 가지로 태어나는[四生] 모든 경계의 유(有)의 길을 평등하게 끊느니라. 이런 뜻으로 평등하다고 이름하며, 그를 증득하는 이는 피차의 지견(知見)이 장애됨이 없으므로 살바야 지혜라 이름하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중생들의 몸은 한 가지가 아니어서, 혹은 하늘의 몸이요 혹은 사람의 몸이요 혹은 축생·아귀·지옥의 몸이라, 이렇게 여러 가지 몸으로 차별하여 한결같지 아니한데, 어떻게 불성이 하나라 말씀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젖에 독약을 넣으면, 내지 제호까지도 모두 독이 있게 된다. 그러나 젖은 타락이라 이름하지 않고, 타락은 젖이라 이름하지 아니하며, 내지 제호도 그와 같으니라. 이름은 비록 변하였으나, 독약의 성질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섯 가지 맛 속에 두루 있으며, 모두 그와 같아서 설사 제호를 먹더라도 사람을 죽게 하거니와, 제호에 독약을 넣은 것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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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아무리 다섯 갈래로 다니면서 다른 몸을 받더라도, 불성은 항상 동일하여 변함이 없느니라.”
사자후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16대국에 여섯 성이 있사오니, 사위(舍衛)성, 바기다(婆枳多)성, 첨바(瞻婆)성, 비사리성, 바라나성, 왕사성의 여섯 성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이온데, 어찌하여 여래는 큰 성을 버리고 이렇게 변방의 나쁘고 누추하고 작은 구시나성에서 열반에 드시려 하나이까?”
“선남자여, 그대는 구시나 성이 변방이고 나쁘고 누추하고 작다고 말하지 말고, 이 성이 미묘한 공덕으로 장엄한 것임을 말하라. 왜냐 하면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수행하시던 곳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미천한 사람의 집이라도, 임금이 한번 다녀가면 반드시 찬탄하기를, 이 집이 화려하고 웅장하여 복덕으로 이룩되었으므로 임금까지 거둥하였다 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을 적에 보잘것없는 약을 먹고라도 병이 나으면, 반드시 기뻐서 찬탄하기를 이 약이 가장 훌륭하여서 내 병이 낳았다 하리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배가 별안간에 파괴되어 의지할 데 없더니, 마침 송장을 의지하여 저 언덕에 이르면, 크게 기뻐서 찬탄하기를 이 송장을 뜻밖에 만나서 내가 살아났노라 하리라. 구시나성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과 보살들이 수행하시던 곳이거늘, 어찌하여 변방이요 나쁘고 누추하고 좁다고 하겠느냐.
선남자여, 내가 기억하기로 지나간 옛적 항하의 모래 수겁 전에 선각(善覺)이란 겁이 있고, 그 때에 전륜성왕이 있으니 이름이 교시가(憍尸迦)였다. 7보를 성취되고 1천 아들을 구족하였는데, 그 임금이 이 성을 설치하였으니 사방이 12유순씩이요 7보로 장엄하고, 흐르는 강이 많은데 밝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맛나는 물이 가득하였느니라. 이른바 니련선하·이라발제하(伊羅跋提河)·히련선하(凞連禪河)·이수말퇴하(伊搜末堆河)·비파사나하(毗婆舍那河) 등의 강이 5백이며, 강의 언덕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아름다웠으며, 그 때에 백성들의 수명이 한량없었느니라. 그 전륜왕이 백 년을 지난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온갖 법이 모두 무상하거니와, 열 가지 선한 법을 닦는 이는 이렇게 무상한 고통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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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으리라’ 하니,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는 모두 열 가지 선한 법을 닦았느니라.
나는 그 때에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열 가지 선한 법을 받아 지니고 생각하고 닦아 행하면서,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었고, 이 마음을 내고는 또 이 법으로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온갖 법이 무상하고 변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느니라.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서 모든 법이 무상하여 변천하는 것이며, 오직 부처님 몸만이 항상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나는 지난 옛적에 행하던 인연을 생각하므로, 지금 여기 와서 열반에 들려는 것이며, 또 이 땅의 지나간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니,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서 말하기를 나의 권속들은 받은 은혜를 갚으라고 하였느니라.
또 선남자여, 지나간 옛적 중생들의 나이가 한량없을 적에, 그 때에 이 땅의 이름이 구사발제(拘舍跋提)요, 가로와 세로가 50유순이었으며, 염부제에 사는 사람들은 닭이 날아서 서로 미칠 만큼 인접하여 살았다. 전륜왕의 이름은 선견(善見)이라, 7보가 성취되었고, 1천 아들이 구족하여 사천하에서 임금이 되었는데, 제1 태자가 바른 법을 생각하여 벽지불과를 얻었느니라. 전륜왕이 태자가 벽지불 된 것을 보니 위의가 단아하고 신통이 희유하였다. 그런 것을 보고는 즉시 임금의 지위를 침뱉듯이 버리고, 출가하여 이 사라나무 사이에서 8만 년 동안 인자한 마음[慈心]을 닦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非], 기뻐하는 마음[喜心], 버리는 마음[捨心]도 각각 8만 년씩 닦았느니라. 선남자여, 그 때의 선견왕은 곧 나의 몸이었으니,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러한 네 가지 법에 노닐기를 항상 좋아하는 것이며, 이 네 가지 법은 삼매라 이름하나니, 이런 뜻으로 여래의 몸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니라. 선남자여, 이런 인연으로 지금 이 구시나성의 사라나무 사이에 와서 삼매에 드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한량없는 겁 전에는 이 성의 이름이 가비라(迦毗羅)였고, 그 성에 있는 임금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요, 그 부인의 이름은 마야(摩耶)였고, 왕의 외아들은 실달다(悉達多)라 하였다. 그 왕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도 아니하고 저절로 생각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으며, 두 제자가 있으니 하나는 사리불이요, 다른 하나는 목건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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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시봉하는 제자는 아난이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쌍으로 선 나무 사이에서 이와 같은 대반열반경을 연설하였는데, 나도 그 때에 그 회중에 참석하여서,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그 말을 듣고는 보리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스스로 원을 세워서 내가 이 다음에 부처를 이룰 적에 부모와 나라 이름과 제자와 시봉하는 사람과 법문을 말하여 교화하는 일이 지금 부처님과 같게 하여지이다 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지금 여기 와서 대반열반경을 연설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처음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였을 적에, 빈바사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실달 태자여, 그대가 만일 전륜성왕이 되면 나는 신하가 될 것이요,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든, 바라건대 먼저 왕사성에 와서 법을 말하여 사람을 제도하면서 나의 공양을 받으라’ 하기에, 그 때에 나는 말 없이 그의 청을 받았느니라.
선남자여, 내가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교살라국으로 향하였느니라. 그 때에 니련선하에 바라문이 있었으니, 성은 가섭(迦葉)이었다. 5백 제자들과 함께 그 강가에서 위없는 도를 구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일부러 가서 법을 말하였더니, 가섭은 이렇게 말하였다.
‘구담이여, 나는 지금 나이 늙어서 백스무 살이 되었고, 마가다국 사람들과 그 임금 빈바사라왕은 모두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제 당신의 앞에서 법을 듣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뒤바뀐 마음을 내어서 대덕 가섭이 아라한이 아니었던가 하리니, 바라건대 구담이여, 빨리 다른 데로 가시오. 만일 이 사람들이 구담의 공덕이 나보다 나은 줄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다시 공양을 받을 길이 없소.’
나는 그 때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섭이여, 당신이 나를 대단히 미워하지 않을진댄 하룻밤만 쉬고 내일 아침에 가게 하시오.’
가섭은 이렇게 말하였다.
‘구담이여, 나의 마음에는 다른 생각이 없고, 당신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독한 용이 있는데 성질이 매우 포악하여서 당신을 해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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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염려되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섭이여, 독한 것 가운데는 3독보다 더 독한 것이 없는데, 나는 그것을 모두 끊었소. 그래서 세간에 독한 것은 두려울 것이 없소.’
가섭은 또 말하였다.
‘만일 두렵지 않다면 자고 가도 좋소.’
선남자여, 나는 그 때에 가섭을 위하여서 경에서 말한 것처럼 18 변화를 나타내었다. 가섭과 5백 권속들이 이것을 보고 듣고는 모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고, 이 때에 가섭은 두 동생이 있었으니 하나는 가야가섭이고, 하나는 나제가섭이며, 그들의 권속까지 모두 5백 사람인데, 역시 아라한과를 얻었느니라. 이 때에 왕사성에 있던 외도 6사(師)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나에게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었다. 나는 그 때에 신의를 지키고 왕의 청을 받아서 왕사성으로 가는데, 반쯤 갔을 적에 왕이 한량없는 백천 사람으로 더불어 와서 나를 영접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법을 말하였다. 이 법문을 듣고 욕계천의 8만 6천 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었고, 빈바사라왕이 거느리고 왔던 12만 사람은 수다원과를 얻고, 한량없는 중생들이 인위의 마음[忍心]을 성취하였다. 성에 들어가서는 사리불과 대목건련과 그의 권속 2백50 사람을 제도하여, 본래의 마음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게 하고, 나는 그 성중에 있으면서 왕의 공양을 받았는데, 외도 6사들은 서로 모이어 사위성으로 나아갔느니라.
그 때에 그 사위성에 사는 수달다(須達多)라 하는 한 장자가 며느리를 맞으려고 왕사성에 왔다가 산단나사(珊檀那舍) 장자의 집에서 묵었다. 그런데 주인 장자가 밤중에 일어나서 권속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일어나서 옷을 정돈하고 방과 뜰을 깨끗하게 쓸고 음식을 장만하라’라고 했다. 수달다가 이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아마 마가다국 왕을 청하려는 것인가, 경사스러운 혼인 잔치를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장자에게 가서 물었다.
‘대사(大士)여, 마가다국의 빈바사라왕을 초청하렵니까, 즐거운 혼인 잔치가 있습니까, 무슨 일로 바쁘게 서두르십니까?’
장자가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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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거사여, 나는 아침에 위없는 법왕(法王)이신 부처님을 청하려는 것입니다.’
수달다 장자는 처음으로 부처님이란 말을 듣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래서 ‘어떤 이를 부처님이라 합니까’ 라고 물었다. 장자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당신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까? 가비라성의 석가씨 문중에 한 아들이 있으니, 이름이 실달다요 성은 구담이요, 부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인데, 처음 났을 적에 관상보는 이가 말하기를, 결정코 전륜성왕이 될 것이니, 마치 암라 열매를 손바닥에 놓은 듯하다고 하였더라오. 그런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버리고 출가하여서 스승도 없이 혼자 깨달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소. 탐욕·성내는 일·어리석음이 아주 없어지고, 항상 있어서 변하지 아니하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근심과 두려운 일이 없으며,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기가 마치 부모가 외아들 보듯 하며, 몸과 마음이 여러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하지만 교만한 생각이 없고, 살을 베거나 약을 발라 주거나 두 가지 일에서 마음이 한결같으며, 지혜가 통달하여 무슨 법에나 걸림이 없으며, 10력·4무소외·다섯 가지 지혜삼매와 대자대비와 3념처에 머무는 일을 구족하였으므로 부처님이라 합니다. 아침에 우리집에 오시게 되었으므로 바쁘게 서두르느라 서로 쳐다볼 겨를도 없습니다.’
수달다는 이렇게 물었다.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보살[大士]의 말과 같이 부처님의 공덕이 그지없사온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이 왕사성의 가란타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십니다.’
수달다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공덕이신 10력, 4무소외, 5지혜삼매, 대자대비 및 3념처를 생각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니, 그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밝은 빛을 따라서 성문까지 이르니 부처님의 신력으로 성문이 저절로 열리고, 문 밖으로 나가니 천인을 위하는 사당이 길 곁에 있었다. 수달다가 지나다가 공경하여 예배하였더니 밤은 다시 캄캄하여졌다. 무서운 생각이 나서 있던 데로 다시 돌아오려 하였더니, 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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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어떤 천신이 있다가 수달다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일 부처님 계신 데 가면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오.’
수달다가 ‘어떤 것이 좋은 이익이냐’ 하고 묻자 천신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자여, 가령 어떤 사람이 좋은 보배로 장식한 준마(駿馬)가 백 필, 향상(香象)이 백 마리, 보배 수레가 백 대, 금으로 만든 사람 백 명과 몸에 영락을 차고 있는 단정한 여인과, 여러 가지 보배로 잘 꾸민 훌륭한 궁전과 여러 가지 무늬를 아로새긴 전당과 금쟁반에는 은쌀을 담고 은쟁반에는 금쌀을 담은 것들을 각각 일백으로써 한 사람에게 보시하며, 이렇게 염부제에 있는 사람에게 모두 보시하여 얻는 공덕도 어떤 사람이 부처님 계신 데 한 걸음만 나아가려는 마음을 낸 공덕에 미치지 못합니다.’
수달다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냐?’
천신이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나는 승상(勝相) 바라문의 아들로서 당신의 옛날 선지식이오. 나는 예전에 사리불과 대목건련을 보고 환희한 마음을 낸 인연으로 몸을 버리고 북방천왕 비사문의 아들이 되어 이 왕사성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사리불과 목건련에게 예배하고 환희심을 낸 인연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몸을 얻었거늘, 하물며 부처님을 뵈옵고 예배하고 공양한 과보겠습니까?’
수달다 장자는 이 말을 듣고는 곧 걸음을 돌려서 나에게 왔느니라. 와서는 머리를 조아려 나의 발에 예배하기에 나는 그에게 알맞게 법을 말하였더니, 장자는 법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 청하였다.
‘대자대비하신 여래시여, 바라옵건대 저를 굽어살피사 사위성에 왕림하시어 저의 변변치 못한 공양이나마 받으시옵소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사위성에는 우리가 묵을 만한 절이 있느냐?’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저를 가엾히 여겨 왕림하신다면, 힘을 다하여 절을 새로 짓겠나이다.’
선남자여, 나는 그 때에 잠자코 청함을 받았다. 수달다 장자는 허락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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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에게 말하기를 ‘저는 한 번도 이런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여래께서 사리불을 보내시어 규모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였다. 나는 곧 사리불에게 가서 감독하라 하였더니, 사리불은 수달다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위성으로 떠나서, 나의 신력으로 밤낮 하루 동안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 때에 수달다는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이 성밖에 어느 곳에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으면서 샘과 못이 많고, 훌륭한 숲과 꽃과 과일이 무성하고 한적하고 깨끗한 데가 있습니까? 나는 거기에 부처님 세존과 비구스님들을 위하여 절을 짓겠나이다.’
사리불은 이렇게 말하였다.
‘기타숲 동산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고 깨끗하고 고요하며, 샘도 시내도 많고 수목이 우거지며 꽃과 과일이 때를 따라 열리니, 거기가 절을 짓기에 가장 적당합니다.’
수달다는 그 말을 듣고는 그길로 기타 장자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내가 지금 위없는 법왕을 위하여 절을 지으려 하는데, 그대의 동산이 절터로 적당하기에 사려 하니, 허락하실 수 있겠소?’
기타가 대답하였다.
‘설사 진금을 그 땅에 가득히 깔아 놓는대도 팔 수 없습니다.’
수달다가 말하였다.
‘좋은 말씀입니다. 기타여, 숲 동산은 내것이 되었으니 그대는 금이나 받으시오.’
기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동산을 팔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금을 받겠는가?’
수달다가 말했다.
‘뜻에 맞지 않거든 나와 함께 재판관에게 가서 말합시다.’
두 장자는 함께 재판관에게 갔더니, 재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숲 동산은 수달다가 차지하고 기타는 금을 받으라.’
수달다는 사람을 시켜 말과 차에 금을 실어오게 하여, 오는 대로 땅에 깔았는데 하루 동안에 5백 보밖에 금이 채 깔리지 못하였다. 기타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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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여, 만일 후회하거든 그만두어도 좋소.’
수달다가 대답하였다.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아니하오. 생각건대 몇 광의 금만 더 가져오면 넉넉할 것이오.’
기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래이신 법왕은 진실로 위가 없으시고, 말씀하는 법문은 청정하여 티가 없는가 보다. 이 사람이 그렇기에 보배를 아끼지 않는구나.’
그리고 즉시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아직 깔지 못한 것은 그만두시오. 그대로 당신에게 주겠소. 그리고 나는 문루를 지어서 여래께서 출입하시도록 하겠소.’
그래서 기타 장자는 문을 짓고, 수달다 장자는 이레 동안에 3백 간의 큰 집을 지었는데, 조용한 선방이 63개요, 겨울에 머무는 방과 여름에 쓰는 방이 각각 다르고, 부엌과 욕실과 발씻는 데와 대·소변 보는 곳을 모두 구비하였다. 절 짓는 역사를 마치고는 곧 향로를 받들고 멀리 왕사성을 향하여 말하였다.
‘지을 것을 모두 마치었사오니,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사 이 절을 받으시옵소서.’
나는 그 때에 장자의 마음을 알고, 대중을 데리고 왕사성을 떠나서 장사가 팔 한 번 굽힐 동안에 사위성의 기타숲 동산 수달다의 절에 이르렀더니, 수달다 장자는 그 절을 나에게 보시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 그 가운데 머물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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