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석굴원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天竺寺 毘盧舍那三神佛圖)
서울시문화재 제292호인 이 불화는 가로가 긴 화면이 상하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삼신불이 나란히 앉아있고, 하단에는 보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삼신불은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법신 비로자나불, 왼쪽(向右)에는 양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린 설법인을 취한 석가모니불이 자리하고 있다. 삼불은 모두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고 목리문(木理文 : 나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에 앉아 있다.
†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06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천축사
[CNN 선정 33곳 서울 사찰기행] 도봉산 천축사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혜초 루트
↑혜초 인도 루트
붓다 깨달은 자리 도착한 혜초스님 눈에는 눈물이 …
94. 신라 혜초스님과 '왕오천축국전' - 불교신문
언장녹원소,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誠難見
參差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타방보수최, 큰 인물이 이국땅에서 꺾여졌구나.
신령거하처, 신령은 어디로 갔나,
옥모이성회, 옥 같은 얼굴 이미 재가 되었도다.
억상애정절, 생각하니 애절함 끝이 없다.
비군원불수, 님의 소원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니,
돈지향국로, 뉘라서 그의 고향 길 알 것인가.
개설
8세기 초에 씌여진 이 《왕오천축국전》은 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히며 또한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 4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13세기 후반에 쓰여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릭의 《동유기》 그리고 14세기 중반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손꼽는데, 혜초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천축사는 도봉산의 산 정상 부근 암자를 모두 거느린 중심 사찰이었다. 포대 아래 만월암, 주봉 아래 관음암, 우이암 원통사가 모두 천축사 부속 암자였다. 천축사를 지나 자운봉으로 향하면 가파른 계단길이 계속된다. 마지막 봉우리를 향해 오르기 전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석굴암이다. 도봉산에는 석굴암이 3곳 있다. 만장봉 아래와 송추 쪽 오봉 아래, 그리고 김구 선생이 기도했다는 사패산 회룡사의 석굴암이다.
도봉산 석굴암은 이름 그대로 굴법당이다. 만장봉 아래 자연굴에 법당을 조성했다. 그 옆에는 5백나한전이 있다. 석굴암에 서면 상계동 아파트 단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석굴암에서 도봉대피소 까지 내려와서 다시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만월암(滿月庵)이 반긴다. 선인봉까지 다시 올라가서 옆으로 가는 길도 있지만 현재는 비법정탐방로로 출입을 제한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시낭송] 풀 | 김수영, 풀
천축사 가는 길
ㅡ 목필균
먼 산빛을 친구 삼아
도봉산에 오르면
천축사 가는 길은 열려 있다.
젊은 까치 소리에 눈웃음 치고
이름 모를 풀꽃에도 손길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으면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오히려 내 갈 길을 재촉하니 재미있다.
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축사의 끝없는 도량을 향해
일상의 상념들을 날려보내면
근심은 바람 되어 맴돌다 사라진다.
티끌 같은 몸뚱이에 자리잡은
바위 만한 욕심덩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시간.
천축사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다.
[못 말리는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HDtYJDNUnUM
* 위 환면의 YouTube에서 보기를 클릭하면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tcHxx6UfQ
사리란 범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로 시신(屍身) 시체(屍體)의 뜻.
https://namu.wiki/w/%EC%82%AC%EB%A6%AC(%EB%B6%88%EA%B5%90)
사리(舍利)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신라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 불교계에서는 크게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1], 그리고 승사리(僧舍利)로 나눈다.
진신사리는 석가모니의 실제 유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승사리는 고승의 시신, 또는 그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돌 조각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일반대중에게 다짜고짜 '사리'라고 하면 대개는 고승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승사리를 떠올린다. 아니, 한국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시신을 높여서 법구(法軀)라고 부름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불자들조차도 '사리'라고 하면 보통은 화장하면 나오는 구슬 같은 승사리를 떠올린다.
사리란 범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로 시신(屍身) 시체(屍體)의 뜻.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271
사리란 범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입니다. 원래의 뜻은 신체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유골, 영골(靈骨)의 뜻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육신을 화장한 뒤 나온 작은 구슬 모양의 결정체가 그것입니다. 크기도 여러 가지고 색깔도 황금빛, 검은빛, 붉은빛 등의 오색(五色)이 뒤섞인 영롱한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입멸(入滅)하시고 나서 장례는 부처님의 유훈에 따라 재가 신자들에 의해 치러졌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화장을 치르고 난 뒤 남은 유골을 수습하니 8말 8되가 나왔답니다. 정확한 도량형을 알 수 없어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사리가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이 유골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부처님의 입멸 소식을 전해들은 여러 나라에서 각각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유골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요. 일부 국가에서는 전쟁불사를 외치기도 하였답니다.
결국 한 수행자의 중재로 여덟 나라에 사리가 배분되고 이것으로 탑을 세워 공양하도록 했는데 이 탑들을 근본8탑(根本八塔)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리를 담았던 병을 대신 넣어 만들어진 9번째 탑, 이어 다비식에 나왔던 재를 가지고 만든 10번째 탑이 초기에 존재했던 사리탑의 모습입니다. 탑은 그 후에도 계속 만들어졌는데 부족한 사리 대신 의발, 족적(足跡) 등으로 탑을 만들기도 했고 나중에는 경전과 불상도 봉안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 깊이 귀의했던 인도의 아쇼카 대왕은 나중에 근본8탑을 해체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사리를 8만4천개로 나누어 많은 곳에 탑을 세웁니다.
〈대당서역기〉에는 당나라 때의 현장스님이 150과를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져왔고, 의정스님이 300과를 모셔왔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정골 100과를 모셔와 황룡사, 통도사 등에 봉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리를 최초로 봉안한 탑은 황룡사의 대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불자님이 질문하신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지칭합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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