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ㅡ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참회록
ㅡ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

 

https://www.youtube.com/watch?v=HgIWaf0utPM 

 

https://www.youtube.com/watch?v=szUzvIK5AbE 

 

 흰 그림자

  ㅡ 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45쪽  위에서 보완함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B3%91%EC%9A%B1

 

정병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병욱(鄭炳昱, 1922년 3월 25일 ~ 1982년 10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호는 백영(白影)이다. 경상남도 설천 문항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고

ko.wikipedia.org

정병욱(鄭炳昱, 1922년 3월 25일 ~ 1982년 10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국문학자민속학자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진양(晋陽), 호는 백영(白影)이다.

*정병욱의 호 백영(白影)은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한자어이다.

이력

경상남도 설천 문항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고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며 소년기를 보내고 초등학교(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광양에 거처를 두고 동래고보와 연희전문 문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다. 1948년부터 부산대학교,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 1957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서울대 박물관장, 학술원 정회원을 역임하였다.

일생

1922년 출생한 그는 3.1운동 후 교사를 하게 된 부친을 따라 1927년부터 경남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성장하고 1934년, 부친이 전남 광양에 양조장을 겸비한 주택(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소재, 근대문화유산 등록)에서 사업을 열자 그곳에서 하동 집을 오가며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학업을 위해 부산 동래, 서울 등으로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는 방학 동안 동생들과 함께 본가인 하동 덕천과 섬진강 하류를 사이한 광양 망덕에서 지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벗이자 후배로 연희전문 기숙사와 하숙에서 생활을 함께하고,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증정받아 일제의 눈을 피해 망덕의 집에서 지켜냈다. 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강제 징병으로 전장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께 소중한 원고니 꼭 지켜달라는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겨, 어머니는 마루바닥을 뜯고 보관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옥사하고, 해방이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윤동주의 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 등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게 된다. 한글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말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수필 <잊지못할 윤동주>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문학 연구분야에 학문적 초석을 놓고,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국문학의 여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의 연구와 보존, 대중화 운동에도 선구적 업적을 남겨 판소리를 민족예술의 정화로 부활 계승토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십 편의 수필도 남겼다.

또한 하버드대와 파리대학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 및 강의 활동 외에도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다. 그 외에도 유수의 권위있는 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학술적 업적으로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삼일문화상을 받았으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1] 현재 그가 살았던 전남 광양시 망덕에는 그의 집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며, 원고를 보관했던 마루 등이 남아있는데 원형을 복원 중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B%8F%99%EC%A3%BC

 

윤동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동주 (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독립운동가, 시인이자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호는 해환(海煥)이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

ko.wikipedia.org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치안유지법에 따른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8]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윤동주문학관에 전시된 윤동주의 묘비 사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지린성 룽징시에 유해가 묻혔다(향년 28세).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9]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임시로 발간하였고, 같은 해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10]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작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1948.2.)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새 명동》
  • 《서시(序詩)》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경향 및 평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11][12]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13]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14]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15]

학력

 

https://kydong77.tistory.com/20754

 

윤동주 - 서시, 또다른 고향, 별헤는 밤, 자화상/ 명시 100선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www.youtube.com/watch?v=b27hJ676zS8 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833&categoryId=60538&cid=60538 윤동주 [하늘, 바람, 별]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

kydong77.tistory.com

 

자화상
ㅡ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1]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2]

그리고 한 사나이[3]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무서운 시간
ㅡ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224

 

 

https://www.youtube.com/watch?v=jFPQRDPKmu8

 

↑서시 작품/ 鄭炳昱先生께, 尹東柱

↑정병욱 선생 증언 영상

 

 

 

https://www.ajunews.com/view/20200813163130967

 

[광복75주년, 역사기획] 윤동주 타계 75년, '생체실험 살해'의혹 시인의 절규 | 아주경제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춤을 춘다/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이 노래 끝의 공포를/생각할...

www.ajunews.com

 

대학생 윤동주는 왜 체포됐나

194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윤동주는,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교토도시샤(同志社)대학(일본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 영문과로 편입했다. 1943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고향의 부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향 여비를 좀 부쳐 주십시오. 돈이 도착하는 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뒤인 7월14일 윤동주는 일본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 무렵 ‘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조선독립 망상을 품은 죄’라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고종사촌인 송몽규(교토제국대 문학부 재학)도 같은 혐의로 함께 수감됐다. 일제 경찰은 1년간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미행-도청 기록을 보여줬다. 그들에게서 포착한 혐의는 당시 일제가 막 실시하려고 했던 ‘조선인 징병제를 역이용하는 모략활동’이었다. 일본은 이 혐의를 중대 범죄로 보았다. 이들에 대한 조사 기록이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 작성한 특고월보(特高月報)에 실려 있다.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강제로 주사를···"

미군 생체 해부를 증언한 일본인 의사 도노 도시오는, 당시 끔찍한 장면에 몸이 굳어있는 상황에서 한 일본군인이 이렇게 외쳤다고 말했다.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 일제가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생체 해부'를 감행했을 때의 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군대를 약화하기 위해 조선인 징병제를 방해하려는 자들이라고, 범행을 변명했을 것이다. 일제말의 이런 광기에, 시인 윤동주는 희생된 셈이다.

그가 숨진 뒤 부친 윤영춘은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갔다. 함께 있던 송몽규의 모습 또한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반쯤 깨진 안경을 걸친 그는 피골이 상접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했던 송몽규의 증언(송우혜의 ‘윤동주 평전’(2014년, 서정시학)은 이것이었다.

“난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맞아야 한다고 하며 강제로 주사를 맞게 합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뒤 일본인 간수들은 그의 사인을 ‘뇌일혈(뇌출혈)’이라 말하며 ‘하루만 늦었어도 규슈대학에 해부용으로 시체를 넘기려 했다’고 했다. 이 말은 도노 도시오의 증언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윤동주는 학창시절 농구와 축구를 즐겼으며, 축구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그의 친동생 윤혜원 씨는 윤동주를 ‘건강이 좋아 앓는 법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투옥 10개월 만에 뇌혈관이 터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1945년 2월16일 새벽 3시36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 땅의 28세, 그 순수하고 애국적인 영혼은 그렇게 꺼져갔다. 장례식은 3월6일 용정 집의 앞뜰에서 치러졌다. 용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문익환 목사의 부친)가 장례를 주관했다.

[미군 생체 해부] (본문中에서)

1945년 5월과 6월에 규슈제대 의학부에서는 B29 탑승 미군 8명을 생체 해부한 일이 있었다. (규슈제대 생체해부사건). 생체 해부를 한 까닭은 전쟁터에서 혈장 부족을 겪고 있어서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식염수로 된 대용(代用)혈장을 주입하는 의료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피를 뽑은 뒤 바닷물을 대신 ‘수혈’하는 실험을 했다는 얘기다. 고노오는 “이름모를 주사라는 말과 구주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한다는 전보, 윤시인의 죽음과 구주제대 사건의 시기상의 일치 등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 실험에 의한 희생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고노에의 증언 중에서 미군 생체 해부는 확인된 바 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의 요코하마 전범재판 기록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재판에는 일본 규슈제대 의학교수 5명이 회부됐다. 1945년 5월 5일 추락한 전투기에서 미군을 포로로 잡아 생체해부를 실험했다는 혐의였다. 수술대에 오른 포로들의 장기는 적출되고 몸에는 ‘바닷물 주사’가 꽂혔다.

 

[SBS 주시평 기자가 확인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SBS 뉴스 캡쳐본]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06.03

 

https://kydong77.tistory.com/20754

 

윤동주 - 서시, 또다른 고향, 별헤는 밤, 자화상/ 명시 100선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www.youtube.com/watch?v=b27hJ676zS8 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833&categoryId=60538&cid=60538 윤동주 [하늘, 바람, 별] 시를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어..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8188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넋으로 살아 계신 분들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

kydong77.tistory.com

윤동주와 문익환은 길림성 명동 출신.

 

↑단장 안 <서시> 비

좌측 3기둥엔 시집제목: 天 風 星 詩/ (중앙기둥 우측상단)"하늘과바람과별과시 尹東柱"라 적었네요.

 

https://blog.daum.net/poetlsh/6942536

 

윤동주의 시비가 일본에 3개나 세워졌다

이승신이 윤동주에 대해 쓴 2개의 글 1. 다시 윤동주를 생각하며 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의 기일입니다. 1945년 해방이 되던 불과 몇 달 전인 2월 16일이니 27세요, 애타게 그리던 해방을 못 보고 갔

blog.daum.net

 

쉽게 씨워진 詩

 

窓(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詩人(시인)이란 슬픈 天命(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學費封套(학비봉투)를 받어

大學 노ー트를 끼고
늙은 敎授(교수)의 講義(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홀로 沈澱(침전)하는 것일가?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위안)으로 잡는 最初(최초)의 握手(악수)。

一九四二年六月三日
 
*(  ) 속 한자의 독음 첨가는 운영자 소행. 한자를 안 배운 아이들을 위한 배려임.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중1 교과서 수록 작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