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룻길'은 '벼랑길'이라고도 한다. 강이나 바닷가의 낭떠러지 위에 난 길을 말한다.
범어 '나무'는 귀의하다는 의미다. 귀의 대상은
인도의 지공화상, 고려 나옹화상, 조선 무학대사이다.
인도승 지공선사> 고려말 선불교를 집대성한 나옹선사의 스승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33
선불교의 법맥
https://www.youtube.com/watch?v=9oj7SxLuozc
https://kydong77.tistory.com/21075
나옹화상 (懶翁和尙)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 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 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 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 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 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 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 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5행과 7행의 兮 : 어구를 맞추기 위해 덧넣은 字.
나머지 兮 는 7언한시가 아님을 나타낸, 우리말답게 표현한 덧글자.
위 청산시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나옹화상의 불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135
한국 선불교의 완성자, 나옹선사
나옹은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문경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 선사의 문하로 출가한 후, 25세까지 각지를 두루 유력하며 수행하다가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4년간의 장좌불와를 통한 용맹정진 끝에 28세의 나이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옹은 깨달음을 증득한 직후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대도의 법원사에서 지공을 참배하고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후 중국의 불교유적과 선승들을 참례하는 과정에서, 임제종의 18대가 되는 평산처림의 인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계속 성적순례를 하다가 수도로 되돌아와서 지공에게도 인가를 받는다. 고려로 돌아온 나옹은 공민왕 말기에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대두된다. 공민왕의 불교개혁에 발맞춰 고려불교 최대의 초승과(超僧科)인 공부선(功夫選)을 주도하고, 왕사가 되어 고려불교의 발전과 변혁을 도모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옹립되는 과정에서, 나옹 역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나옹에 대한 탄압 명분은 나옹이 중창(修造)한 회암사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최고 권력자를 위협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이 죄목이었던 셈이다. 결국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돌연 열반하게 된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왕십리(往十里)의 유래
조선 건국초. 송도 도창관에서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 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만한 길상지로구나.」
무학대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걸어오는데 한 노인이 소를 몰면서 소리쳤다.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적 뜨였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어른,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의 말씀이신지요? 」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어른,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자리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로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운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중궐을 짓기로 했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간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일파는 이를 반대, 인수봉안으로 성을 쌓아야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1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만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천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되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이야기를 태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설」자와 삥둘러 쌓는다는 울타리「원」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서울」로 불리어졌다는 설도있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왕자와 십리를 써서 왕십리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왕십리에 속했던 일부지역이 도선동으로 분할됐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이 같고 글씨는 다른 청련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지인 것이 같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819
https://www.youtube.com/watch?v=7DtP8UABKdA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cjkks&logNo=220788028802
【북고사】전북 무주군 무주읍 향로산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경월사(慶月寺)라는 본래의 이름을 북고사로 바꿨다는 설화가 전하므로 늦어도 고려말에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년(조선 태조 1)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자초가 새 도읍지를 찾아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이 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무주의 지세가 복지(卜地)이나 북쪽 능선이 약하다'라고 하며 고을 현감에게 절에 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북고사로 바꾸면 장차 큰 고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바 없으며, 1978년에 주지 관주(觀柱)가 극락전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건물로는 극락전과 칠성각·산왕각·요사채 등이 있고 유물로는 삼층석탑과 불상 1점, 탱화 2점이 전한다. 이 중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탑의 창건연대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단 자초의 일화에 나오는 탑인지는 알 수 없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좌상(전북 유형문화재 제183호)과 1831년(순조 31) 제작된 신중탱화(전북 유형문화재 제187호)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https://www.youtube.com/watch?v=0tWrSqIvgMQ
https://www.youtube.com/watch?v=rma6eizXdIw&t=34s
https://www.youtube.com/watch?v=K2w7W59CXlA
http://muju.grandculture.net/muju/toc/GC06500899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7 교구 금산사의 말사.
[건립 경위 및 변천]
북고사(北固寺)의 창건 연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기록이 없으며, 이후 18세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가람고(伽藍考)』, 『범우고(梵宇攷)』 등에 “부(府)로부터 북쪽으로 5리의 거리에 있다”라고 간단한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1898년에 간행된 『적성지(赤城誌)』 사찰조에 “북고사는 향로산에 있는데 무주로부터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옛 이름은 경월사(慶月寺)로서 당시로부터 약 700년 된 고찰”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 사찰에는 건립 시기가 고려 말, 조선 초로 판단되는 삼층 석탑이 남아 있어 북고사가 적어도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창건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2000년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성보 문화재 조사에서 북고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北固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의 복장기와 개금기가 발견되었다. 복장 조성기에는 1657년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처음에는 ‘경월사’라는 사명으로 법통을 이어오다 19세기 어느 시점에 ‘북고사’로 개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30개 본사인 보석사의 말사에 소속되었다. 이후 1976년 주지 관주가 극락전을 새롭게 건립하고 산왕당과 칠성각을 중건하였다. 1978년에 법당을 세웠다가 해체하고 1993년에 다시 지었다. 1994년에 극락전 건물을 이용해서 요사를 지었다. 1996년에 산왕당 앞 공터에 미륵불을 봉안하였고, 1997년에 칠성각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kydong77.tistory.com/18947
https://www.youtube.com/watch?v=19oP0LCIZz4
https://kydong77.tistory.com/18952
대적광전(大寂光殿) :
전각의 형태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삭지붕의 건물로 원래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1986년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월주 화상의 원력으로 도제들과 사부대중의 협력을 받아 1994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정유재란 때 경내 모든 전각이 소실된 후 인조13년(1635년)수문대사에 의해 중창하면서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나한전" 등의 다섯 전각을 하나로 통합하고, 기존의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봉안된 5여래 6보살을 모두 한 자리에 봉안하여 편액을 '대적광전'으로 바꾸었으며, 지금의 웅장한 모습은 이때부터 였다고 한다.
☞ 5여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약사여래불.
☞ 6보살: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금강문 안 좌우에도 모십니다. 곁에는 금강 력사가 떡 하니 지키시지요. 미륵 사찰에는 금강문 다음에 사천왕문이 있습니다. 속리산의 법주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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