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jsessionid=RoNP3op1A4CDgFlfB6EY4pCGFUQPzaPmasvOMOTodVCsZ4CC7zeGs1RrAbKZPWAZ.cpawas_servlet_engine1?pageNo=1_1_2_0&ccbaCpno=1123716480000 

 

보물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 (醴泉 鳴鳳寺 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 : 국가문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2016년 촬영)

www.heritage.go.kr

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승려 자적선사(慈寂禪師, 882~939년)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로 선사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의 명으로 태조 24년(941)에 세운 탑비(塔碑)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968 

 

태실(胎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다르다. 특히 왕

encykorea.aks.ac.kr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다르다. 특히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어느 지장전의 주련]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 큰 성현의 위세와 신통력은,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항하사의 겁 동안도 설하기 어려우리.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생각사이 예 올리며 보거나 들음으로,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한량없는 그 이익은 인천(人天)에 가득하리.

* '人天' - 인간세상과 천상세계, 곧 우주 전체. (문맥해석) 지장보살게서 우주 전체를 이익되게 하는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시다. 지장전에는 부모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는 많은 불자분들이 찾으신다.

地獄未濟不成佛

(지옥미제불성불), 지옥중생 못 건지면 성불도 않겠다는,

大願本尊地藏王

(대원본존지장왕), 크나크신 원 본존의 으뜸은 지장보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8271

 

명봉사(鳴鳳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 1) 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 1662년(현종 3) 화재로 전소된 뒤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1668년 다시 화재로

encykorea.aks.ac.kr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소백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두운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 1) 두운(杜雲)이 창건하였으며,

1662년(현종 3) 화재로 전소된 뒤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1668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신익(信益) 등이 중창의 뜻을 세우고 10여 년 동안 시주를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v1t1TPUgcRg&t=24s 

「단양 사인암(丹陽 舍人巖)」은 남조천(일명 운계천)변에 병풍처럼 넓은 바위가 직벽을 이루며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추사 김정희가 이곳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고 찬양했을 정도로 그 경관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고려시대 경사와 역학에 능통했던 역동 우탁 선생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였던 임재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고 전하며, 암벽에는 우탁의 글이 남아 전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148

 

우탁(禹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

encykorea.aks.ac.kr

 

탄로가(嘆老歌)

우탁 (1262-1342)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청구영언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잠시만 빌렸다가 머리 위에 불게하여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늙지 말고 다시 젊어져 보려 했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다 되었구나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 지은 듯하여라

 

 

https://www.youtube.com/watch?v=mj-sj5smREg&t=158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