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나라 온릉溫陵의 개원련사開元蓮寺에서 계환戒環이 경의 제목을 해석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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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경판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수능엄경首楞嚴經 선한연의鮮漢演義 (1) [표지] 통합뷰어 수능엄경首楞嚴經 선한연의鮮漢演義 삼장역회三藏譯會 용성당龍城堂 백상규白相奎 정원* ✽ * 봉선사 능엄승가대학원 강주 옮김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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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果體는 其體本然하시니 何假密因이시며 菩薩道用은 其用이 無作하시니 孰爲萬行이리오. 無因無行하며 無修無證하며 無了不了하여 大小名相이 一切不立함이 此ㅣ眞首楞嚴畢竟堅固者ㅣ也이거늘 特以衆生인 如來隱於藏心하니 非密因이면 不顯하며 衆生인 菩薩이 淪於七趣하니 非萬行이면 不修일새 覺皇이 於是에 示之以大法하사 使不迷於小道하여 而默得乎無外之體케 하시며 喩之以佛頂하사 使不滯於相見하여 而妙極乎無上之致케 하시며 指如來密因하사 使明本妙心하사 知三世諸佛이 皆依此하여 爲初因하시며 明修證了義하사 使悟究竟法하여 知一切聖人이 皆依此하여 而證果케 하시며 乃至具足菩薩의 淸淨萬行하여 一切事法이 無不究竟하여 至於實相堅固不壞케 하시니 故로 名이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 하니라. 經이 通有五名커늘 今題가 處三焉하니 以約該博也니라. 若所謂知海와 妙蓮華王十方佛母는 卽餘二也오. 所謂悉怛多般怛囉無上寶印과 淸淨海眼과 灌頂章句는 通前三也니라. 悉怛多般怛囉者는 云白傘盖也니 卽如來藏心이 廣大無染하여 周法界之體시니라. 此經은 卽爲是心之印이며 是心之眼也라 以是寶印으로 印하여 使七大萬法으로 咸契本心하며 以是海眼으로 照了陰入處界가 皆如來藏인달 하나니 繇是로 證菩提心하여 入佛智海하며 作妙蓮華王하여 於染淨萬境에 自在開敷하며 爲十方佛母하여 於塵毛國土에 隨緣降誕하며 乃至成就果德하여 受灌頂位히 則一切畢竟堅固之事가 皆備於我矣라. 首楞嚴은 此云一切事 畢竟堅固며 亦云健相分別이니 一切畢竟은 已如前釋이거니와 餘稱金剛觀察로 覺明을 分析하시되 始於徵心辯見하사 終於破陰褫魔히 無非健相分別事也니라. 經은 卽能詮之文而已라 詮은 猶筌也니 知經爲筌이면 則從而釋之者도 皆筌也요 非魚也라 學者가 愼勿執筌爲魚然後에사 首楞嚴眞經을 可得矣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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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과체果體는 그 본바탕이 본래 그러한 것이니 어찌 밀인密因을 빌린 것이며, 보살의 도력道力의 작용은 그 작용이 조작이 없는 것이니 무엇으로 만행萬行을 삼으리오. 비밀한 인因도 만행行도 없으며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도 없어서 크고 작은 이름이나 형상이 모두 성립되지 아니한다. 이것이 참다운 수능엄首楞嚴으로서 필경견고畢竟堅固(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견고함)한 것이다.
특히 중생의 여래성이 장심藏心에 감추어져 있으니 밀인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하며, 중생의 보살성이 칠취七趣에 빠져 있으니 만행이 아니면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覺皇)께서 이에 큰 법을 보이시어 소승의 도에 미혹되지 않게 하여 묵묵히 밖이 없는 체體를 얻게 하셨다. 부처님의 정수리(佛頂)로 비유하시어 형상과 소견에 걸리지 않고 위없는 이치를 묘하게 다하도록 하셨다. 여래의 밀인(비밀한 因)을 가리켜서 본래의 묘한 마음을 밝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모두 이것을 의지하여 초인初因이 됨을 알게 하셨다. 닦고 증득하는 분명한 이치(修證了義)를 밝혀서 궁극적인 법을 깨달아 모든 성인들이 모두 이를 의지하여 과果를 증득함을 알게 하셨다. 내지 보살의 청정한 만행을 갖추어서 모든 사事와 법法이 구경 아님이 없어서 실상實相의 견고하고 무너지지 아니함에 이르게 하시므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이라고 이름한다.
이 경에는 모두 다섯 가지 이름이 있는데 지금 제목을 세 가지만 다룬 것은 간략하지만 넓은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른바 변지해徧知海와 묘련화왕시방불모妙蓮華王十方佛母는 곧 나머지 둘이며, 이른바 『실달다반달라무상보인悉怛多般怛囉無上寶印』과 청정해안淸淨海眼과 관정장구灌頂章句는 모두 앞의 셋과 통한다. 『실달다반달라』는 백산개白傘蓋(흰 일산)를 말하니 곧 여래장심如來藏心이 광대하고 더러움이 없어서 법계에 두루하는 체體임을 뜻한다. 이 경은 곧 마음의 인印이 되고 이 마음의 눈이 된다. 이 보배로운 인印으로써 도장 찍어 칠대만법七大萬法으로 하여금 다 본심本心에 계합契合하게 한다. 이 바다 같은 눈(海眼)으로 오음五陰·육입六入·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가 모두 여래장임을 드러낸다. 이로 말미암아 보리심을 증득해서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 들어가며, 묘련화왕妙蓮華王이 되어서 더럽거나 깨끗한 만 가지 경계에 자재하게 꽃 피우며, 시방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어서 먼지와 터럭같이 많은 국토에 인연을 따라 태어난다. 또한 과덕果德을 성취하여 관정위灌頂位를 받기에 이르면 모든 궁극적인 견고한 사事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질 것이다. ‘수능엄’이란 이를 번역하면 일체사가 필경에 견고하다(一切事畢竟堅固)라고 하며 또한 건상분별健相分別2)이라고도 한다. ‘일체필경一切畢竟’은 이미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달리 말하면 금강金剛과 같은 관찰로 각명覺明을 분석하는데 마음의 소재를 따져 묻는 칠처징심七處徵心과 팔환변견八還辯見에서 시작하여, 음陰을 부수어 마장魔障을 벗어나는 데 마치기까지 건상분별사健相分別事가 아님이 없다. ‘경’은 곧 능전能詮(경전에 쓰여진 의의 내용을 나타내는 문구)의 문장이다. 전詮은 통발과 같다. 경이 통발인 줄 알면 이를 따라 해석한 것도 모두 통발이요, 물고기가 아니니 배우는 이는 삼가 통발을 집착하여 물고기로 여기지 아니해야 수능엄이라는 참다운 경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불교의 주장(我敎의 主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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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者曰吾佛의 敎意는 心을 敎하는 敎요 天이나 神이나 그러한 모든 것을 信奉함이 아니니 佛學者는 我의 心外에는 一物도 無함을 信할지어다. 誰知君家一輪月이 萬古光明長不滅고 着眼看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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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가 말한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치신 뜻은 마음을 가르치는 종교요, 하늘이나 신神이나 그러한 모든 것을 신봉함이 아니니 불교를 배우는 이는 나의 마음 밖에는 한 물건도 없음을 믿을지어다. 어느 누가 그대의 집 둥근 달이 아주 오랜 옛적의 광명으로 길이 멸하지 아니함을 알리오. 눈을 돌려 볼지어다.

경을 보는 차례(看經次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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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經 楞嚴經 起信論 圓覺經 華嚴經 傳燈錄 拈頌 此等經을 次序로 看然後에사 敎理方圓하니라.

[통합뷰어

『금강경』·『능엄경』·『기신론』·『원각경』·『화엄경』·『전등록』·『선문염송』 이러한 경을 차례로 본 연후라야 교리가 비로소 원만하리라.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백용성이 요긴한 것을 모으고 의심되는 것을 해석함(撮要釋疑 白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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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夫妙奢摩他와 三摩와 禪那者는 乃一經之大本이며 三分之綱宗也로다. 奢摩他者는 寂靜義也요 三摩者는 明照義也오 禪那者는 明靜不二義也니 性體本覺을 謂之明이요 覺體本寂을 謂之靜이요 明靜不二를 謂之體니 此約明靜之體하여 言也댄 卽究竟堅固之理도 亦謂之安住定也건마는 良以明靜之體를 俄然晦昧하여 動念瞥生할새 卽本明而爲無明이요 全本靜而成動念이로다. 於是에 因動以修止는 止其動也요 因昏以修觀은 觀其昏也니 止觀功著에 昏動이 自亡하고 明靜이 自復矣리라. 此는 約止觀之用하여 言也니 卽究竟堅固之行도 亦爲之引起定也니라. 經에 云有三摩提하니 名이 大佛頂首楞嚴王具足萬行이라 하니 斯則奢摩他等이 通於理行이 明矣로다. 故로 阿難이 首問十方如來得成菩提하신 妙奢摩他三摩禪那最初方便者는 意在明究竟堅固之理하여 而爲修行者之本이요 非問進修之行也니라. 蓋十方如來는 由明此妙奢摩他, 三摩, 禪那하여 爲最初方便하여 而得成菩提之果시니라. 是以로 阿難이 卽指果體하사 以問初因하시니 豈非意在明究竟堅固之理耶리요 則最初方便은 只指信解眞正이요 不當復說耳根圓通이니라. 且三卷經半은 皆屬見道이니 此豈問修이리요 是知初問이 爲見道分之總問也로다. 又阿難이 請示三摩他路는 意在求示自性首楞嚴妙莊嚴路요 非求示, 止行也니라. 然이나 奢摩他等이 旣通於理行矣리라 以之爲自性이요 非唯不違於理라. 亦乃發請示者之本意耳라. 所以로 世尊이 放光之後에 先指眞妄二心하사 以明生死涅槃之根本하시고 後에 卽牒其問意云汝今에 欲知奢摩路하야 願出生死인대는 蓋妄心은 是無始生死之本也오 眞心은 出生死證涅槃之本也라 하시니 豈以欲知奢摩路하여 爲願出生死인대 豈非欲知奢摩他路가 是欲知自性乎아. 由是로 卽擧拳以問은 意在驗其用心眞妄이거늘 因其復認能推할새 卽咄而告言하사되 此是前塵虛妄相想이라 하시고 乃至結示云皆由執此生死妄想하야 誤爲眞實故로 不成聖果라 하시니라. 上所開示는 但欲其識妄知眞하여 而出生死하고 未嘗論修하니 故知하라. 諸示奢摩他路는 是求示自性이요 非求示止也니라. 又阿難이 見을 見하는 것이니 見이 아니라 함을 聞하고眞見을 見하는 때에 妄見이 아님을 聞하고 重增迷悶하야 復請云惟願弘慈로 施大慧目하사 開示我等에 覺心明淨하소서 하시니 此欲求釋迷悶하야 得心明淨也로다. 而世尊이 將欲敷演大陀羅尼, 諸三摩提, 妙修行路하사 告阿難言하사되 汝雖强記나 但益多聞이라. 於奢摩他, 微密觀照에 心猶未了로다 하시니 故로 於眞見體用上에 而生迷悶이로다. 蓋眞見은 體也오 寂照는 用也니 以眞見之體가 法爾具寂照之用이니라. 是則寂而常照할새 故로 能照了見精是妄이요 照而常寂할새 見은 是見이 아니라 하시니라.眞見은 이 妄見이 아니라 하니라 阿難이 旣於眞見體用에 俱不達하고 而增迷悶할새 世尊이 卽復指同別二見하사 重示奢摩他觀照云本覺明心이라 覺緣은 非眚이니라. 覺所覺은 眚이거니와 覺은 非眚中이라 하시니 此實見見이니라. 蓋本覺明心은 卽大陀羅尼也요 覺緣非眚等은 卽諸三摩提妙修行路也라 由本覺之體는 寂而常照할새 故로 能覺了諸緣, 是妄하고 照而常寂할새 故로 不墮於眚中하나니 此實見見之時에 見非是見이라 하시니 卽重示奢摩他觀照하여 以釋見見非見之迷하사眞見을 見하는 時는 是妄見이 아니라 令其覺心明淨也니라. 或謂호대 旣云奢摩他觀照라 하며 又云諸三摩提妙修行路라 하실진대 豈非示, 進修止觀하고 何局于見道耶리요 答不然하다. 以此文中에 是破妄見妄覺하고 而顯眞見眞覺이시니 欲使阿難으로 知, 眞覺眞見之體가 法爾具寂照之用하여 而能破妄이니라. 故로 經에 云汝復應知見見之時에 見非是見이라 하시니 意在其知而後에 行이요 行而破妄也니라. 若阿難이 知眞覺體用이면 卽知大陀羅尼, 諸三摩提, 妙修行路거니와 今阿難이 旣不知眞見體用하고 而生迷悶할새 則於理行에 二俱不知矣이라. 是以로 雖云奢摩他, 觀照, 妙修行路나 而文屬破妄顯眞이니 意在知理知行故로 屬見道요 不屬修道也이니라. 然이나 妙奢摩他, 三摩, 禪那가 旣通理行이면 卽見道之所見者도 見此理也니라. 故로 云知如來藏妙覺明心이 含育如來十方國土等이라 하시니 修道之所修者도 修此行也니라. 故로 於, 修道文中에 卽明止觀二決定義하시니 證果之所證者도 證此理니라. 故로 云是覺이 始獲金剛心中에 初乾慧地나 卽還證佛三摩地니라 하시니 故로 予는 謂一經之大本이며 三分之綱宗이라 하노라. 是以로 古人이 云依究竟堅固之理하여 修究竟堅固之行하며 修究竟堅固之行하여 還證究竟堅固之理라 하시니 首楞嚴經大旨가 如是하니라.
蓋楞嚴者도 亦大乘에 初學入道之初門이니 何以知之오 盖般若之後에 慧學이 方盛하고 定力이 未全하여 人이 或溺於多聞하고 失於正受할새 於是에 示楞嚴之大定하사 資般若之大慧하여 使定慧로 均等하며 學行이 兩全하여 而究竟에 趣於一乘實相하게 하시니 此楞嚴所以作也라 하니라.
盖阿難은 其實大權菩薩이라 何以知然고 環師註에 云過去空王佛所에 與佛과 同共發心이라 하고 又云示墮淫室이라 하니 此其證也라.통합뷰어살펴보자면, 무릇 묘사마타妙奢摩他와 삼마三摩와 선나禪那라는 것은 곧 한 경의 큰 근본이며 삼분三分(서분, 정종분, 유통분)의 강종綱宗(불교의 근본정신)이다.
사마타奢摩他란 적정寂靜의 뜻이요, 삼마三摩란 밝게 비추어 본다(明照)는 뜻이며, 선나禪那는 명明과 정靜이 둘이 아닌, 같다는 뜻이다. 성체본각性體本覺을 명明이라고 하고 각체본적覺體本寂을 일러서 정靜이라 한 것이며 명정明靜이 둘이 아님을 체體라고 말한다. 이 명정明靜의 체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곧 구경견고究竟堅固한 이치도 정定에 안주安住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진실로 명정明靜의 체體가 갑자기 우매하게 되어 움직이는 생각이 별안간 생겨서 곧 본래 밝은 것(本明)이지만 무명이 된 것이요, 온전히 본래의 고요함이 움직이는 생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에 동動함을 인하여 지止를 닦는 것은 그 동動을 그치는 것이요, 혼미함을 인하여 관觀을 닦는 것은 그 혼미함을 관하는 것이다. 지관止觀의 공력功力이 나타나면 혼미함과 동動함이 저절로 없어지고 명정明靜이 자연히 회복될 것이다. 이는 지관止觀의 용用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곧 구경견고究竟堅固한 행도 정定에서 이끌어 일으킨 것이다. 경에 이르되 “삼마제三摩提가 있으니 이름이 ‘대불정수능엄왕구족만행大佛頂首楞嚴王具足萬行’이라” 한다. 이는 사마타 등이 이행理行에 통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난이 첫머리에 시방의 여래가 보리를 이루신 묘사마타와 삼마와 선나인 최초방편最初方便을 묻는 것은 뜻이 구경의 견고한 이치를 밝혀서 수행자의 근본을 삼는 데 있는 것이지 닦아 나아갈 행을 물은 것이 아니다. 대개 시방의 여래는 이 묘사마타·삼마·선나를 최초의 방편으로 삼아 보리의 과果를 이루게 됨을 밝힌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난이 곧 과체果體를 가리켜서 최초의 인因을 물으니 어찌 뜻이 구경의 견고한 이치를 밝힘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곧 최초 방편은 다만 참되고 올바른 것만을 믿고 이해해야 함을 가리킨 것이요, 다시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설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또 3권의 경 절반은 모두 견도見道에 속하니 이것이 어찌 수도修道를 물은 것이겠는가. 이 첫 질문이 견도분見道分의 총괄적인 질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난이 사마타의 길을 보여 주기를 청한 것은 뜻이 자성수능엄自性首楞嚴 묘장엄妙莊嚴의 길을 보여 주시길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행止行을 보여 주시길 구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타 등이 이미 이행理行에 통한 것이라 그것으로 자성自性을 삼은 것이며, 오직 이理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보여 주기를 청한 자의 본래의 뜻에도 어긋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 광명을 놓으신 후에 먼저 진심眞心과 망심妄心 둘을 가리켜 생사와 열반의 근본을 밝히시고, 후에 그 질문한 뜻을 끌어다 이르시기를, “그대가 이제 사마타의 길을 알아서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무릇 망심妄心은 바로 비롯함이 없는 생사의 근본이며, 진심眞心은 생사를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근본이다.”라고 하셨다. 사마타의 길을 알아서 생사를 벗어나기를 원하고자 한다면 사마타의 길을 알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곧 자성을 알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곧 주먹을 들어 질문하신 뜻이 마음의 씀이 진眞인지 망妄인지를 시험하는 데 있다. 그로 인하여 다시 그릇되이 추측하므로 곧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앞 티끌(前塵)의 허망한 모양과 생각들이다.”라고 하시고 결론지어 보이시며 이르시기를 “모두 이 생사의 망상을 집착함을 말미암아 그릇되이 진실한 것으로 여겨서 성스러운 과果를 이루지 못함이다.”라고 하셨다.
위에서 열어 보인 바는 다만 망령된 것을 알고 참된 것을 알아서 생사를 벗어나고자 함이고 아직 닦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사마타의 길을 보임은 자성自性을 보기를 구한 것이요, 지止를 보기를 구한 것이 아니다.
또 아난이 ‘견見을 견見하는 것이 견見이 아니라’고 함을 듣고진견眞見을 볼 때에 망견妄見이 아님을 듣고 거듭 미혹함을 더하여 다시 청하여 말씀드리기를, “오직 원컨대 크신 자비로 큰 지혜의 눈을 베푸시어 저희들에게 각심覺心의 밝고 맑음을 열어 보이소서.” 하였으니 이는 미혹함을 풀어서 마음의 밝고 맑음을 얻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 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모든 삼마제三摩提·묘수행로妙修行路를 널리 펴고자 하시어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비록 기억은 잘하나 다만 많이 듣는 것만 더할 뿐이지, 사마타와 미세하고 비밀한 관조觀照에 대해서는 마음이 오히려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진견眞見의 체體와 용用의 위에 미혹함이 생긴 것이다. 대개 진견眞見은 체體요, 적조寂照는 용用이다. 그 이유는 진견의 체가 본래부터 적조의 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고요하되(寂) 항상 비추므로 보는 정기가 이 망妄임을 비추어 아는 것이요, 비추되 항상 고요하니 견見은 이 견見이 아니라 하셨다.진견眞見은 망견妄見이 아니라 하였다. 아난이 이미 진견眞見의 체와 용에 대하여 모두 깨닫지 못하고 미혹함을 더하므로 세존께서 다시 같고 다른 두 가지 견見을 가리켜서 거듭 사마타, 관조觀照를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본각本覺은 밝은 마음이라 연緣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고, 깨달은 것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다. 깨달음은 눈병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보는 것을 보는 것(見見)이다. 대개 본각의 밝은 마음은 곧 대다라니요, ‘연緣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라’고 한 것은 곧 모든 삼마제의 묘한 수행의 길이다. “본각의 체는 고요하되 항상 비춤을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연緣과 망妄을 깨닫고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므로 눈병 속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실로 보는 것을 볼 때에 보는 것이 이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곧 거듭 사마타, 관조를 보여서 보는 것을 보는 것은 보는 미혹이 아니다(見見非見)의 미혹함을 풀어서진견眞見을 보는 때는 이것이 망견妄見의 미혹이 아니라. 각심覺心이 밝고 맑게 해 주는 것이다. 혹 이르기를, ‘이미 사마타, 관조’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모든 삼마제묘수행로’라고 하셨으니 어찌 지관止觀 닦음을 보여 주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찌 견도見道에만 국한하겠는가.
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이 문장 가운데 망령된 소견과 망령된 깨달음을 부수고 참된 소견과 참된 깨달음을 드러내시니 아난으로 하여금 참된 깨달음과 참된 견見의 체가 법답게 적조寂照의 용用을 갖추어서 능히 망령됨을 파할 수 있음을 알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너는 응당 알아야 할지니 견見을 돌이켜 볼 적에 돌이켜 보는 것은 견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뜻을 알고 나서 행해야 하는 것이요, 행하되 망령됨을 파해야 한다. 만약에 아난이 진각眞覺의 체용體用을 알면 곧 대다라니, 모든 삼마제, 묘수행로妙修行路를 알거니와 이제 아난이 이미 진견眞見의 체용을 알지 못하고 미혹함이 생겼으니 곧 이행理行에 대하여 두 가지를 함께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르되 “사마타, 관조, 묘수행로”라고 하였으나 문장이 망령됨을 부수어 진실을 드러내는 데 속하니 뜻은 이치를 알고 행을 알게 함에 있다. 그러므로 견도見道에 속하지 수도修道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묘사마타, 삼마, 선나가 이미 이행理行에 통한다면 곧 견도의 소견所見이라는 것도 이런 이치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여래장묘각명심如來藏妙覺明心이 여래의 시방국토 등을 머금어 기른다 함을 알지니라.”라고 하셨다. 수도견지에서 닦는 것도 이 행을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에 관한 경문에서 지관止觀의 두 가지 결정적인 뜻을 밝히셨다. 증과證果의 소증所證이라는 것도 이런 이치를 증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각覺이 비로소 금강심金剛心 가운데 처음의 간혜지乾慧地를 얻었으나 곧 돌이켜 부처님의 삼마지三摩地를 증득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한 경의 큰 근본이며 삼분三分의 강종鋼宗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구경견고究竟堅固한 이치를 의지하여 구경견고한 행을 닦으며, 구경견고한 행을 닦아서 돌이켜 구경견고한 이치를 증득한다.”라고 하셨다. 『수능엄경』의 대지大旨가 이와 같다. 대개 능엄이라는 것도 대승에서 초학初學이 도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니 어찌 그것을 알리오.
대개 반야 이후에 혜학慧學이 바야흐로 왕성해지고 정력定力이 아직 온전치 못하여 사람들이 혹 다문多聞에 빠지고 정수正受(三昧)를 잃어버리니 이에 능엄의 큰 정定을 보이시어 반야의 큰 지혜를 도와서 정혜定慧로 하여금 고르게 하며 배움과 행이 둘 다 온전해서 구경에 일승一乘의 실상實相에 나아가게 하시니 이것이 능엄을 지으신 이유이다. 대개 아난은 실제로는 큰 권교權敎의 보살이다.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알겠는가? 계환戒環 스님의 주註에 말하기를, “과거의 공왕불空王佛의 처소에서 부처님과 함께 발심하였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음실淫室에 떨어짐을 시현示現함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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