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 5.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01
참고문헌
-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정감록(鄭鑑錄)
- 택리지(擇里志)
- 「한국 이상향의 성격과 공간적 특징」(최원석,『대한지리학회지』 44권 6호,2009)
- 「풍기읍의 정감록촌형성과 이식산업에 관한 연구」(오세창,『지리교육』 9,1979)
- 「지리산보」(『개벽』 34,1923)
풍수이야기
동국의 명승이며 세상을 기리는 보배로다.
적선한 자 후손이 들어가 살리라
금계가 첫째이니 좋은 운이 천년에 뻗으리라
삼길성이 내려 비치고 오성이 모이도다.
넓게 열려 평탄하고 물이 나뉘어져 다시 만남이 분명하다.
냇물은 북에서 동으로 흐르고
남으로 학가산에 통하는 도다.
남쪽에는 생봉이 있고, 북에는 곡봉이 있으며
동쪽엔 염봉이 있고 서쪽에는 적봉이 있도다.
둘레가 40리에, 수구는 멀리까지 잠겼도다.
공명이 세상을 덮지만 금계는 더욱 높도다.
묻노니 그 언제 이런고?
운이 트일 때는 돌이 희게 될 때이니라
자죄는 운이 장원하고, 건좌는 발복이 빠르다.
비록 소국이나 중국보다 낫도다.
대신이 많이 나고 명재상이 날지로다.
난시에 살만하니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죽령을 보지 마라 바람과 돌도 많도다.
왼편에 흙 언덕이 있고 오른쪽은 샘이 있으니 찾기 여럽지 않다.
36대나 장수와 대신이 나며 부귀가 겸한 땅이다.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입니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습니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습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습니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습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사고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남긴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선비들의 ‘동서 분당(分黨)’에 대한 것인데 이 이야기는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1575년 남사고가 이산해를 만났다.
남사고는 한양의 서쪽 안산(鞍山)과 동쪽 낙산(駱山)을 가리킨 뒤 말했다.
“조정에서 분당이 있을 것이오. 낙(駱)이란 각(各) 마(馬)로 끝에 가서 헤어지며 안(鞍)은 혁(革) 안(安)이라 개혁 후 편안해지지요.”
말대로 서인은 조선 말기까지 정권의 주류를 이뤘으며 동인은 훗날 대북·소북으로 찢어졌다.
남사고는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언했다고 한다.
그는 남산에 올라 “왕기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지리라”라고 되뇌었다.
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손 없이 사망하고 16세 된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집이 사직동에 있었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고해 적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전해진다.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과연 그의 말대로 왜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백마를 타고 있었다.
격암 남사고가 말한 십승지 으뜸은 경상북도 풍기 금계촌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정감록마을’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풍기는 제주도처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인데 놀라운 것은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 때도 피해를 안 봤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비율이 낮아졌지만 한때 주민의 70%가량이 이북 출신이라는 점도 기이하다. 이북 사람들이 해방 후 공산당의 횡포를 피해 월남할 때 《정감록》에 나오는 풍기를 찾아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다.
베틀로 시작한 게 지금 저 유명한 풍기 인견의 시발점이 됐고 인삼농사로 풍기인삼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금계촌에 서면 뒤로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밭이 많은 게 인상적이다.
십승지마을 가운데 두 번째로 꼽히는 봉화는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다. 그중에서도 춘양(春陽)마을은 임진왜란 때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피란 갔던 곳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겸암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으로 와 아무 피해도 받지 않았다는데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안동에서 봉화 춘양마을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춘양마을 근처에 태백산 사고(史庫)가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전란 등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에 실록을 나눠 보관했다. 춘양마을 인근에 태백산 사고가 있다는 것은 이곳이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라는 반증이 된다.
세번째가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 금당실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현대식 정자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마을을 지킨다는 노거수가 아직도 웅장한 자태로 마을을 보고 있다. 그곳에서 보면 금당실마을은 분지형이며 산들이 마을을 빙 둘러싼 형상인데 특이하게도 2010년 이웃 안동에서 전국으로 번진 구제역 파동이 이곳에만은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얽인 일화도 있다. 이여송이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뒤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당실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법조계와 금융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충북 보은 속리산은 누구나 한 번쯤 가 봤을 장소다. 이 산은 보은·괴산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다. 몇 가지 설화만 소개하자면 속리산은 고려시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몽진 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가던 중 넉달이나 머물렀던 곳이며 조선 중기 최고의 명장이라 할 임경업장군이 경업대·입석대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도 서려 있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관기리는 사실 속리산과 거리가 있으며 주변에는 구병산(九屛山·해발 876m)이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관기리 옆에는 적암리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촌로로부터 “여기는 옛날부터 피란지처”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미사일이 구병산에 막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 때 이곳에 국가기간방송망의 송신탑이 설치됐지요. 6·25가 났을 때는 이북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지만요.”
특이한 것은 구병산을 끼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시루봉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치 떡시루와 같은 형상인데 놀랍게도 이 주변에는 시루봉이라는 이름의 산만 최소 5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봐도 뭔가 범상치 않은 지역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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