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李之菡, 151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 ~ 1578년 8월 19일(음력 7월 17일)[2])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출생지는 보령이다. 사헌부 감찰, 우봉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며,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고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다. 이덕형은 그의 조카사위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자기가 사는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해서 정자를 지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3][1][4]
생애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과[1][4][5] 개성의 서경덕으로부터도 글을 배웠다고 한다.[6]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그 성품은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7]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8]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했으며[9]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4][10][1]가 많다.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5][4]
평가
- 이이: "(이지함을) 물건에 비유하자면 기화 이초(奇花異草)와 진금괴석(珍禽怪石) 같다."[5]
- 조헌: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11]
- 《조선왕조실록》: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돌보는 정성을 다했으며,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12]
토정비결(土亭秘訣)은 대한민국에서 운세를 보는 데 널리 쓰이는 연대・작자 미상의 도참서이다. '토정'비결이라는 이름 때문에 농사와 관련된 책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주 중 생년월일과 육십갑자를 이용해 한 해 동안의 운을 점치는, 일종의 점치는 책이다. 사주(연, 월, 일, 시) 중 '시'는 따지지 않으므로 엄밀히는 삼주를 기반으로 한 책.
흔히 조선시대 중기에 토정 이지함이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이지함이 죽고 나서 한참 후에 토정비결이 등장했기 때문에 상관성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지함의 개인문집에 토정비결이 들어있지가 않다. 만약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썼다면 동시대 다른 사람들의 글에도 '토정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썼다', '토정 이지함이 작성한 도참서를 사람들이 보더라'라는 문장이 등장해야 하는데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색의 후손이며 왕실의 인척 가문의 자제가 이런 도참서나 쓰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허무맹랑하다.
이지함은 당시에도 풍수를 잘 보기로 유명하기는 했는데, 그런 측면 때문에 도참서의 저자로 소문이 퍼졌을 수 있다. 이에 토정비결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토정 이지함이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웠을 것이며, 그가 비기에 능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정말 이지함이 몰래 썼다가 나중에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민속학자인 최상수 선생은 '토정 가탁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지함의 호인 '토정'을 빌려 만든 책이라는 주장이다. 민속학자인 문화재 연구소 임형진 연구관 또한 공신력을 얻기 위해 당시 천문과 음양에 능통했던 이지함의 호를 빌려 왔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실상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이지함과 그의 처가에 새겨진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은 그 후 20년이 흐른 1570년, 그의 나이 54세에 이르러서야 선조의 특명으로 벗겨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 자신이 잘못이 아닌 세상이 만든 잔인한 굴레에도 이지함은 한때 방황했을지언정 좌절하거나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생전 낙인을 지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그 끝도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거듭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라는 허장성세로 뒤덮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 시간을 준비해갔다. 모진 체험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에 훗날 그가 “서산과 태안의 염전을 잘 경영하면 능히 국가 재정 비용을 댈 수 있다”라며 재정 빈곤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이지함 졸기의 기록처럼 자신은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54세 이지함. 온몸에 찍힌 낙인은 지워졌지만 다시 과거 공부를 해서 경륜을 펼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그가 추구한 삶이 과거 급제가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런 그였기에 역사의 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가 왔다.
선조 6년인 1573년 6월, 57세의 이지함은 조목(趙穆)·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숨은 현자라는 ‘탁행지사(卓行之士·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천거돼 7월에는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다. 자신의 평소 장담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결과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혁신적인 건의가 완고한 유교 이념주의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인 1574년 8월 사직했다.
62세인 1578년에 다시 천거되었다. 수령의 무능이 크게 문제가 되었던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다. 부임 직후 곧바로 사회복지시설인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했고, 현안이었던 군역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지면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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