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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聞朋黨之說,自古有之
(신문붕당지설) (자고유지),
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
(유행인군변기군자소인이이)。
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為朋
(대범군자여군자)(이동도위붕) ;
小人與小人,以同利為朋;此自然之理也
(소인여소인) (이동리위붕) (차자연지리야)。
신이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예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人君)께서는 군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의(道義)를 함께 함으로써 붕당을 이루며,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이 같아서 붕당을 결성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然臣謂小人無朋 惟君子有之 其故何哉
(연신위소인무붕),(유군자유지)。(기고하재)?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오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小人所好者利祿也,所貪者財貨也
(소인소호자리록야) (소탐자재화야);
當其同利時,暫相黨引以為朋者,偽也
(당기동리시) (잠상당인이위붕자) (위야)。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녹봉으로 재화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 할 때는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을 만들고 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及其見利而爭先,或利盡而交疏
(급기견리이쟁선) (혹리진이교소),
則反相賊害,雖其兄弟親戚,不能相保
(즉반상적해) (수기형제친척) (불능상보)。
故臣謂小人無朋,其暫為朋者,偽也。
(고신위소인무붕) (기잠위붕자) (위야)
그 이익을 보고 먼저 쟁취하려 하며, 혹 이익이 다하면 서로 교류가 소원해져서는,
오히려 서로 해치려 하니, 비록 그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그들이 잠시 붕당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것이고 생각합니다.
君子則不然 所守者道義 所形者忠義 所惜者名節
(군자즉불연) (소수자도의),(소형자충의),(소석자명절);
군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며, 행하는 것이 충성과 신의이며,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조입니다.
以之修身,則同道而相益
(이지수신)(즉동도이상익),
以之事國,則同心而共濟,終始如一
(이지사국) (즉동심이공제) (종시여일)。
此君子之朋也
(차군자지붕야)。
이것으로 자신을 닦으면 도가 일치되어 서로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로써 나라의 일을 하면 한마음이 되어 서로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습니다.
이는 군자의 붕당입니다.
故為人君者,但當退小人之偽朋
(고위인군자) (단당퇴소인지위붕),
用君子之真朋,則天下治矣
(용군자지진붕)(즉천하치의)。
그러므로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된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중용하면 곧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요지시) (소인공공)(환두등사인위일붕),
君子八元)、八愷十六人為一朋
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
而進元、愷君子之朋,堯之天下大治
及舜自為天子,而皋、夔、稷、契等二十二人
並立於朝,更相稱美,更相推讓
凡二十二人為一朋
而舜皆用之,天下亦大治
요(堯)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 네 명이 한 붕당을 만들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열여섯 명이 한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舜)이 요임금을 보좌하여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팔개 등 군자의 붕당을 천거하였으니 요의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순 자신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 고요(皐陶), 기(夔), 후직(稷), 설(契) 등 스물두 명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 번갈아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추천하고 양보하며,
모두 스물두 명이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임금이 그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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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共工) : 신농씨(神農氏)의 후예로 물의 신으로 물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한 수관(水官), 9개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하인 상유(相繇)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 환두(驩兜) : 요순시대에 제위를 노렸던 요의 아들을 말한다. 홍수의 신 공공(共工), 요순시대에 제위를 노린 요의 아들인 단주 환두(驩兜), 단주와 함께 역란을 일으킨 남방의 만족 삼묘(三苗), 동이 부족의 신이었던 곤(鯀)을 사죄(四罪)라 불리운다.
○ 팔원(八元)⋅팔개(八愷) : 제곡 고신씨에 재능이 뛰어난 신하가 여덟 명 있었는데 팔원이라 불렀고, 전욱 고양씨에게도 팔개가 있었다. 원개는 어진 신하나 재능이 뛰어난 자를 지칭한다.
○ 皋夔稷契等二十二人(이고기직설등이십이인) : 고요(皐陶), 기(夔), 후직(稷), 설(契) 등 스물두 명. 고요(皐陶)는 우순(虞舜) 당시의 형관(刑官)이며, 기(夔)는 우순 당시의 악관(樂官), 후직(后稷)은 농업을, 설(契)은 교육을 관장하였다.
《書》曰「紂有臣億萬,惟億萬心
(서)왈 (주유신억만) (유억만심);
周有臣三千,惟一心
(주유신삼천)(유일심)。」
紂之時,億萬人各異心
(주지시) (억만인각이심),
可謂不為朋矣,然紂以亡國
(가위불위붕의)(연주이망국)。
周武王之臣三千人為一大朋,而周用以興
(주무왕지신삼천인위일대붕)(이주용이흥)。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신하가 억만 명이 있었는데 억만 가지의 마음이 있었으나,
주(周) 무왕에게 삼천 명의 신하가 있었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고 합니다.
주왕(紂王) 시절에는 억만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달라
결코 붕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紂)왕이 이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의 신하들은 삼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니, 주(周)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나라가 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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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書(서)》曰(왈) : 서경 제4편 <주서>에 나오는 말이다.
서경(상서) <第四篇 周書> > 주나라 무왕이 상(은)나라 주왕(紂王)을 벌하고자 할 때 한 말이다.
<泰誓第一> 태서 제 1
受有臣億萬, 惟億萬心, 予有臣三千, 惟一心. : 상의 왕 수에게는 억만의 신하가 있으나, 억만의 마음으로 흩어져 있으며, 나에게는 삼천의 신하가 있으나 한 마음으로 뭉쳐 있다.
○ 주왕(紂王) : 은나라의 제31대 왕으로 마지막 군주이다. 주나라 성립 이후에, 제신(帝辛)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비공식 설화에 전해지는 그는 달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하여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술로 만든 호수를 만드는 등(酒池肉林 : 주지육림) 국가예산을 많이 낭비하였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炮烙之刑 : 포락지형)을 새로 제정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위키백과>
○ 周武王(주 무왕) : 주나라의 제1대 왕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다. 주 문왕의 아들이다. 주 무왕은 주 문왕(周文王)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商)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태공을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되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後漢獻帝時(후한헌제시),盡取天下名士囚禁之(진취천하명사수금지), 目為黨人(목위당인); 及黃巾賊起(급황건적기),漢室大亂(한실대란),後方悔悟(후방회오), 盡解黨人而釋之(진해당인이석지),然已無救矣(연이무구의)。 唐之晚年(당지만년),漸起朋黨之論(점기붕당지론)。 及昭宗時(급소종시),盡殺朝之名士(진살조지명사), 惑投之黃河(혹투지황하),曰(왈): 「此輩清流(차배청류),可投濁流(가투탁류)。」 而唐遂亡矣(이당수망의)。 |
후한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시키고,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습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漢)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비로소 뉘우치고
모두 당인들을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습니다.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혹은 그들을 황하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만하다”고 말하더니,
이에 당나라도 마침내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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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獻帝(후한헌제) : 한나라 효헌황제 유협(漢 孝獻皇帝 劉協, 181년 ~ 234년)은 후한(後漢)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자는 백화(伯和)이다
○ 昭宗時(소종시) : 당 소종 이엽(昭宗 李曄, 867년-904년)은 중국 당나라의 제19대 황제(재위 888년-900년, 901년 ~ 904년)이다. 당 의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공헌황후(恭憲皇后) 소생이며 당 희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원래 이름은 걸(傑)이었다가 즉위 후 엽(曄)으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다시 이름을 고쳐 민(敏)이라 하였다. 생전 존호는 성문예덕광무홍효황제(聖文睿德光武弘孝皇帝)이다.
○ 唐之晚年(당지만년),漸起朋黨之論(점기붕당지론) :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다. 당나라 말에 있었던 '우이당쟁(牛李黨爭)'을 말하며, 우이당쟁은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 등을 영수로 하는 '우당(牛黨)'과 이덕유(李德裕)⋅정담(鄭覃) 등을 영수로 하는 '이당(李黨)' 사이에 약 40여 년간 벌어졌던 당쟁을 말한다.
夫前世之主(부전세지주),能使人人異心不為朋(능사인인이심불위붕),莫如紂(막여주); 能禁絕善人為朋(능금절선인위붕),莫如漢獻帝(막여하헌제); 能誅戮清流之朋(능주륙청류지붕),莫如唐昭宗後世(막여당소종후세); 然皆亂亡其國(연개란망기국)。 |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게하여 붕당을 하지 못하게 함은 (은나라) 주(紂)왕 만 한 이가 없을 것이요,
선인(善人)이 붕당을 만듦을 금하고 단절시킨 것은 후한의 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을 것이며,
청류(清流)의 붕당을 베어 죽인 것은 당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 같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모두 혼란해져 멸망하였습니다.
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경상칭미,추양이부자의),莫如舜之二十二臣(막여순지이십이신); 舜亦不疑而皆用之(순역불의이개용지)。 然而後世不誚舜為二十二朋黨所欺(연이후세불초순위이십이붕당소기), 而稱舜為聰明之聖者(이칭순위총명지성자),以能辨君子與小人也(이능변군자여소인야)。 |
서로 번갈아 칭찬하고 양보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음은 순임금의 스물두 명의 신하만한 이가 없었고, 순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임금이 스물두 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웃지 않았고,
또 순임금을 총명한 성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周武之世(주무지세),舉其國之臣三千人共為一朋(거기국지신삼천인공위일붕)。 自古為朋之多且大莫如周(자고위붕지다차대막여주), 然周用此以興者(연주용차이흥자),善人雖多而不厭也(선인수다이불염야)。 嗟乎(차호)!治亂興亡之跡(치란흥망지적),為人君者可以鑒矣(위인군자가이감의)。 |
주나라 무왕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周)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오히려 이 때문에 흥한 것은 선인이 비록 많았지만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아! 흥하고 망하고 다스림과 혼란의 자취를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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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朋黨論 / 作者:歐陽脩
本作品收錄於:《歐陽文忠公集》和《廬陵文鈔/14》
臣聞朋黨之說,自古有之,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為朋 ;小人與小人,以同利為朋;此自然之理也。
然臣謂小人無朋,惟君子有之。其故何哉?小人所好者利祿也,所貪者財貨也;當其同利時,暫相黨引以為朋者,偽也。及其見利而爭先,或利盡而交疏,則反相賊害,雖其兄弟親戚,不能相保。故臣謂小人無朋,其暫為朋者,偽也。君子則不然。所守者道義,所形者忠義,所惜者名節;以之修身,則同道而相益,以之事國,則同心而共濟,終始如一。此君子之朋也。故為人君者,但當退小人之偽朋,用君子之真朋,則天下治矣。
堯之時,小人共工、驩兜等四人為一朋, 君子八元、八愷十六人為一朋。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而進元、愷君子之朋,堯之天下大治。 及舜自為天子,而皋、夔、稷、契等二十二人,並立於朝,更相稱美,更相推讓,凡二十二人為一朋;而舜皆用之,天下亦大治。《書》曰:「紂有臣億萬,惟億萬心;周有臣三千,惟一心。」紂之時,億萬人各異心,可謂不為朋矣,然紂以亡國。周武王之臣三千人為一大朋,而周用以興。 後漢獻帝時,盡取天下名士囚禁之,目為黨人;及黃巾賊起,漢室大亂,後方悔悟,盡解黨人而釋之,然已無救矣。唐之晚年,漸起朋黨之論。及昭宗時,盡殺朝之名士,咸投之黃河,曰:「此輩清流,可投濁流。」而唐遂亡矣。
夫前世之主,能使人人異心不為朋,莫如紂;能禁絕善人為朋,莫如漢獻帝;能誅戮清流之朋,莫如唐昭宗後世;然皆亂亡其國。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莫如舜之二十二臣;舜亦不疑而皆用之。然而後世不誚舜為二十二朋黨所欺,而稱舜為聰明之聖者,以能辨君子與小人也。周武之世,舉其國之臣三千人共為一朋。自古為朋之多且大莫如周,然周用此以興者,善人雖多而不厭也。
嗟乎!治亂興亡之跡,為人君者可以鑒矣。
신은 듣기에 붕당(朋黨)이라는 말은 예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人君)께서는 군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의(道義)를 함께 함으로써 붕당을 이루며,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이 같아서 붕당을 결성하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小人)에게는 붕당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오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녹봉으로 재화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익을 같이 할 때는 잠시 서로 끌어들여 당을 만들고 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 이익을 보고 먼저 쟁취하려 하며, 혹 이익이 다하면 서로 교류가 소원해져서는, 오히려 서로 해치려 하니, 비록 그 형제 친척이라도 능히 서로 보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그들이 잠시 붕당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것이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키는 바가 도의(道義)며, 행하는 것이 충성과 신의이며,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조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닦으면 도가 일치되어 서로 이익을 줄 수 있고, 이로써 나라의 일을 하면 한마음이 되어 서로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습니다. 이는 군자의 붕당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소인의 거짓된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중용하면 곧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요(堯)임금 시절에 소인배인 공공(共工)⋅환두(驩兜) 등 네 명이 한 붕당을 만들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愷) 등 열여섯 명이 한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舜)이 요임금을 보좌하여 네 사람의 흉악한 소인의 무리를 물리치고 팔원⋅팔개 등 군자의 붕당을 천거하였으니 요의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 순 자신이 스스로 천자가 됨에 이르러 고요(皐陶), 기(夔), 후직(稷), 설(契) 등 스물두 명이 조정에 나란히 늘어서서 서로 번갈아 아름다움을 칭송하거나 추천하고 양보하며, 모두 스물두 명이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순임금이 그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신하가 억만 명이 있었는데 억만 가지의 마음이 있었으나, 주(周) 무왕에게 삼천 명의 신하가 있었지만,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고 합니다. 주왕(紂王) 시절에는 억만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달라 결코 붕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주(紂)왕이 이 때문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의 신하들은 삼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니, 주(周)나라가 그들을 등용하여 나라가 흥하게 되었습니다. 후한 헌제(獻帝) 때에 천하의 명사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시키고,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였습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漢)나라 황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비로소 뉘우치고 모두 당인들을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말년에 이르러 붕당의 논의가 점차 일어났습니다.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를 다 죽여서 혹은 그들을 황하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만하다”고 말하더니, 이에 당나라도 마침내 멸망하였습니다.
대저 앞 시대의 군주 중에 능히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품게하여 붕당을 하지 못하게 함은 (은나라) 주(紂)왕 만 한 이가 없을 것이요, 선인(善人)이 붕당을 만듦을 금하고 단절시킨 것은 후한의 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을 것이며, 청류(清流)의 붕당을 베어 죽인 것은 당나라 소종(昭宗)의 시대만 같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모두 혼란해져 멸망하였습니다. 서로 번갈아 칭찬하고 양보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음은 순임금의 스물두 명의 신하만한 이가 없었고, 순임금 또한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임금이 스물두 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웃지 않았고, 또 순임금을 총명한 성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무왕의 시대에는 그 나라의 신하 삼천 명이 모두 하나의 붕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에 많고 또한 큰 것은 주(周)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오히려 이 때문에 흥한 것은 선인이 비록 많았지만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아! 흥하고 망하고 다스림과 혼란의 자취를 임금이 된 사람은 마땅히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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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양수(歐陽脩, 1007년 ~ 1072년)는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범중엄(范仲淹)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仁宗)의 신임을 잃었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誹謗)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산문에서는 한유의 예(例)를 모방하고 소위 고문부흥운동을 추진했다. 저주(滁州)의 자연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 〈醉翁亭記(취옹정기)〉는 아주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고 중국의 기행문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위키백과>
<구양수 주요 작품>
[고문진보 후집/고문관지] 76.취옹정기(醉翁亭記)-구양수(歐陽修)
http://blog.naver.com/swings81/220898199291
[고문진보 후집/고문관지] 77.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修)
http://blog.naver.com/swings81/220849625036
[고문진보 후집] 79.鳴蟬賦(명선부)/鳴蟬賦 並序(명선부 병서)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1058494116
[고문진보] 181.廬山高(여산고)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18783784
[고문진보] 238.明妃曲(명비곡)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63529960
[고문진보] 239.明妃曲和王介甫(명비곡화왕개보) - 歐陽修(구양수)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5950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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