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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이 인간세계의 왕이 되다
한국에 전하는 건국신화의 공통되는 내용은, '신성한 존재가 지상에 출현하여 나라를 세우다', 혹은 '신성한 존재가 초대 왕으로 즉위하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신화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은 초대 왕이 되는 자들이 인간이 아니라 신이거나 신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왕은 평범한 인간 존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월등히 뛰어난 신적 존재로 보아왔다. 특히 초대 왕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신화에는 신들의 세계만을 다룬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인간과 인간세계와 연관을 맺을 때에만 호출되는 것이다. 한국의 신에게 요구되는 주요한 자질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존재든 법칙이든, 그것의 기원은 현실의 경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부모는 인간이지만, 태초의 인간에게는 인간 부모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오거나 다른 법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때 자연스럽게 신화가 요청된다.이전에 없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천지개벽에 비유될 만한 인간사에 있어서 최고의 사건이다. 과거의 질서와 관념에서 왕은 그 아버지가 왕이어야 한다. 그런데 최초의 왕은 당연히 아버지가 왕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신이어야 한다. 한국의 건국신화에서는 천신(天神)이 직접 인간세계로 강림하여 나라를 세우고 법을 만들며 인간들을 통치한다. '단군신화'의 환웅은 환인이라는 천신의 아들이다. 신들의 세계는 아버지와 장자가 다스릴 것이기에 자신은 신이지만 왕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나라에 왕이 되고 싶었던 환웅은 인간세계로 와서 신시(神市)를 연다. 부여의 건국신화 '해모수신화'도 천신의 직접 강림과 인간세계 통치가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천상세계를 다스리는 천신 해모수가 지상세계로 내려와 부여를 건국한다. 낮에는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밤에는 자신의 천상세계로 돌아간 것으로 나온다. 낮에 지상에 머물고 밤에 천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인해 해모수가 태양신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초기 국가에 해당하는 고조선과 부여의 건국신화에서는 이처럼 천신이나 천신의 친자가 직접 인간세계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개창한 신라의 경우, '혁거세신화'는 하늘에서 신성한 알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이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존재가 왕이 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가야의 건국신화 '수로신화'에서 수로가 알의 형태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강림하고,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신성한 아이가 이후 새로운 왕조의 시조가 된다. 신라의 김씨 왕조의 시조인 알지 역시 이와 유사하다. '알지신화'에서는 알 대신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궤짝에서 갓난아이를 얻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북방의 국가 중 가장 후대의 신화라 할 수 있는 '주몽신화'에서는 이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주몽은 강신(江神)인 하백의 딸이 인간세계에서 알을 낳고, 그 알을 깨고 태어난다. 혁거세나 수로는 하늘에서 알이 지상으로 떨어졌지만, 주몽은 지상에서 여인이 직접 알을 낳은 것이다. 지상의 법칙상 여인이 알을 낳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주몽은 처음에는 신성한 존재로 인지되지 않고 배척당한다. 고난을 겪고 이를 극복하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뒤에 신성한 존재로 인정받는다. 이와 유사한 인물은 신라의 석씨 왕조의 시조인 탈해이다. '탈해신화'에서 탈해는 인간인 어머니가 알을 낳았고 부모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해서 알을 버린다. 알을 깨고 나온 탈해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극복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이후 신라의 왕이 된다.
탐라의 건국신화 '삼성신화'에서 시조왕들은 앞에서 언급한 육지의 왕들과는 사뭇 다르다. 육지의 왕들은 주로 천신이거나,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자였다. 주몽과 탈해와 같이 지상에서 알로 태어난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이들 또한 알로 상징되는 하늘과 관련을 맺고 있다. '주몽신화'에서 주몽의 부모는 각각 신화적 동물과 관련이 있다. 어머니인 유화는 물새와 관련이 있으며, 아버지인 해모수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와 관련이 있다. '탈해신화'에서 탈해가 한반도에 도착할 때 까치가 그를 보호하였고, 그래서 탈해는 자신의 성(姓)을 까치에서 따왔다. 이에 반해 탐라의 시조왕 세 명은 모두 땅에서 솟아난 인물이다. 원 출처를 하늘이 아닌 땅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와 바다로 나뉘어져 있던 탐라는 아무래도 육지의 신화 전통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더 강했을 것이다. 또한 육지처럼 외부와의 교류가 어렵기 때문에 천상에 온 외부의 인물을 설정하기 힘들며, 그 집단의 경험상 탐라의 고유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땅에서 지배자가 출현해야 하는 필요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인간이 신이 되다
한국의 신화에서는 신이 아닌 자가 신이 되는 내용이 많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서는 신과 인간을 뚜렷이 구별하며,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고 해도 신이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신과 인간이 결합한 반신반인(demigod)이라 하더라도 불멸의 존재인 신이 될 수는 없다. 결국 그리스ㆍ로마 신화의 영웅들이 신과의 경쟁이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만큼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이에 반해 한국의 신화에서는 신이 인간이 된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왕으로서 인간세계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시 신으로 변신하거나 신성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온다. 환웅의 아들 단군은 오랫동안 인간세계를 다스리다가 이후 산신(山神)이 된다. 주몽은 시신을 남기지 않은 채 천상세계로 올라가 버린다. 탈해는 죽고 나서 신라를 지키는 산신이 된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원래 신이거나 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끝나면 다시 신으로 화하거나 천상으로 돌아간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신화에는 원래 인간이었던 자들이 신이 된다. 생산신과 삼신의 이야기인 '제석본풀이'의 여성 주인공인 당금애기는 인간세계의 좋은 집안의 아름다운 막내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신성한 존재인 스님을 만나 운명이 바뀐다. 가족들이 없는 틈에 스님의 꼬임에 빠져 하룻밤 동침하게 된 것이다. 스님이 떠난 뒤, 가족의 허락 없이 몰래 남자와 동침한 사실이 밝혀져 당금애기는 죽을 위기에 빠진다. 결국 남편 없이 홀로 출산하고 아들 3형제를 양육한다. 아들들이 성장하자 스님을 찾아가게 되는데, 스님은 당금애기와 그의 자식들을 모두 신으로 변신시켜준다.
'바리공주'의 주인공 바리공주는 인간세계의 공주였다. 태어나자마자 벼려졌다가 신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성장하고, 이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지옥을 건너 신선들의 세계로 가서 생명수를 구해 인간세계로 돌아온다. 아버지를 살린 보상으로 바리공주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신으로 변신한다.
'이공본풀이'에서는 천상의 꽃밭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은 인물이 아내와 함께 천상세계로 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내가 임신한 몸으로 먼 길을 갈 수 없어 지상에 남게 되면서 아내와 아들이 위험에 빠진다. 지상에 남은 아내는 부자집에 종이 되고 그녀를 탐하던 주인 때문에 결국 죽게 된다. 아들은 주인집에서 탈출하여 아버지를 찾아 천상세계로 간다. 아버지를 만난 할락궁이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꽃을 얻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살리고 원수를 죽인다. 어머니와 함께 천상세계로 간 할락궁이는 아버지를 이어 천상 꽃밭을 관리하는 신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무속신화는 주인공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다른 세계를 탐험함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변신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항상 인간에서 신으로의 변신이며, 이제 이 신으로 인해 인간세계는 더욱 살만하고 풍요로운 세계가 된다.
3. 신과 인간의 호혜적 관계 맺기
일반적으로 신은 인간이 숭배하고 복종해야 할 대상임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창세신화인 '창세가'에서 인간은 미륵과 석가라는 절대자 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태초의 신과 인간은 창조자 대 피조물의 관계에 있다. 건국신화에서도 신과 인간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신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군장이기까지 한 통치자에게 인간은 절대복종해야 한다. 무속신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신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좌우된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한국의 신화들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한 점을 가진다.한국의 신화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종교적인 관계이건, 정치적 권력 관계이건 무조건적인 군림과 복종, 지배와 피지배의 형태를 벗어난, 다소 수평적이며 인간 중심의 관계 양상을 띠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한국 신화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가족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상당수이며 이 관계는 한국인의 신관(神觀)과 인간관(人間觀)을 잘 보여준다.
건국신화에서 신과 인간의 가족관계 형성이 잘 나타나는 것으로 '단군신화'와 '수로신화'가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강력한 신왕(神王)의 위상으로 인간세계에 강림해 신시를 열고 인간을 통치했다. 하지만 환웅은 지배자로서뿐 아니라 피지배자들을 원조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곰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했을 때 이를 성취시켜 주며, 인간 웅녀가 잉태하고자 소원하자 스스로 인간으로 변신해 웅녀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고조선의 개창자 단군은 이처럼 신과 인간의 결합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신성한 인간인 것이다.
신이 가장(家長)이며 그 배우자가 인간인 가족관계는 무속신화에서는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인간에 비해 전지전능한 신이 왜 굳이 인간과 결혼하는가? '천지왕본풀이'는 인간과 신의 대립에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 신화는 이승(산 인간들의 세계)과 저승(망자들의 세계)을 맡아 다스리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탄생과 두 왕 사이에서 벌어진 인간세계 차지 경쟁을 다룬다. 이본에 따라서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아버지인 천지왕과 인간세계의 지배자인 수명장자의 갈등을 주되게 다룬 것도 있다. 천신인 천지왕이 지상의 인간 수명장자가 악행을 일삼자 이를 벌하려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수명장자는 천지왕에게 자신을 잡아 갈 자는 없다며 큰소리를 친다. 분개한 천지왕은 직접 일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명장자를 공격했지만 실패한다. 천지왕은 수명장자 처벌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에 지상에서 만난 인간 여성에게서 대별왕과 소별왕 두 아들을 얻는다. 결국 성장한 소별왕이 수명장자를 징치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이처럼 천상의 절대신의 권위와 명령에 불복하고 정면 대결을 펼치는 인간이 등장하는 신화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의 질서나 명령에 반하는 인간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지만 절대 권능을 가진 천신이 직접 인간을 징치하려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는 더욱 찾기 어렵다.
이 신화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점이 한국의 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라는 점이다. 반면 인간은 신보다 분명 열등하고 불완전하지만 존재론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과 인간, 두 존재는 상호 결합을 통해 각각 자신의 결핍을 충족하거나 존재론적 상승을 도모하게 된다. 한국의 신화에서는 신은 인간과 관계를 맺음으로 보다 완전한 존재가 된다. 인간 역시 신과 관계맺음으로써 애초의 존재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보완된 두 존재가 함께 산출한 새로운 존재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태어나고 있다. 한국 신화에서 신과 인간은 호혜적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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