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은 백운봉, 인수봉, 만경대를 일컫는다.

북한산의 3 봉우리 중 백운대(837m), 인수봉(811m), 만경대( 799.5m) 북한산의 옛이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TbS3HfDSI

*북한산의 별칭으로  백운봉, 노적봉, 만경대(또는 의상봉/청운봉)의 세 봉우리가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 불린다는 사전의 설명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3W4UefUDDU

 

 

 

https://www.youtube.com/watch?v=e94tvx5MbLQ

 

https://ko.wikipedia.org/wiki/%EC%86%90%EB%B3%91%ED%9D%AC#%EC%9D%BC%EB%B3%B8_%EB%A7%9D%EB%AA%85

손병희 (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는 천도교(동학)의 지도자이며, 제3대 교주이자 대한제국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당시의 기미 민족 대표 33인의 일원이다.  밀양(密陽)이고, 충청도 청주목 청원군 생이다.

(字)는 응구(應九)이며, 타지로 망명하던 중에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이고, 배다른 서얼 매제 최시형(동학 제2대 교주)에게 받은 도호(道號)는 의암(義菴)이다.

 

천도교 입도

충청도 청주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던 아버지 손의조(훗날 개명하여 손두흥)의 첩실 최씨의 소생의 아들(서자)로 태어났다. 1882년 배다른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 때문이었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 선생은 일부러 손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한다.[4]

동학농민운동 가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순도(殉道, 순교)를 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혁명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였다.

일본 망명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탄압을 피해 손병희 선생은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여기에서도 같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귀국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 신도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져서,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독립운동

귀국 후에는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최후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5월 19일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상춘원에서 별세하였다.[5][6]

 

https://www.youtube.com/watch?v=KWGo1ldfCaY

 

 

https://ko.wikipedia.org/wiki/3%C2%B71%EB%8F%85%EB%A6%BD%EC%84%A0%EC%96%B8%EC%84%9C

3·1독립선언서(3·1獨立宣言書)는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언한 문서로 1919년 3월 1일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다.

역사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했다. 일본 제국 강제로 병합된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 곳곳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33명의 대표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요릿집)에서 회동을 가졌으며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투옥되었다. 이에 앞서 2월 26일 ‘보성사’에서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2월 28일에 1,500여 장을 학생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를 그 밖의 각처와 각 지방에 분배했다.[1]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낭독하였다.

*부칙 작성자 ㅡ 한룡운.

*정재용이 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 부근 비각 앞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선언서로,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어, 2016년 10월 20일 2건의 문서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664-1호, 제664-2호로 각각 지정하였다.[2]

 

서울둘레길 코스에는 가는 곳마다 독립투사들의 독립 의지를 쓴 작은 판을 세워 놓았다.

https://korean.visitseoul.net/museum/%EA%B7%BC%ED%98%84%EB%8C%80%EC%82%AC%EA%B8%B0%EB%85%90%EA%B4%80/KOP027105

 

근현대사기념관

근현대사기념관은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뜻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korean.visitseoul.net

서울 강북구 4.19로 114 (수유동)  근현대사기념관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연하(蓮下),  백범(白凡)·연상(蓮上)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1][2]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윤봉길 의거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생활을 하였으며[3],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4][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사회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되고 일제에 의해 국내 연결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는 등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김구는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동경 의거, 윤봉길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가평의회 의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한반도는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근현대사기념관 앞에는 그분들의 반신 동상을 나열하고 인물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실제로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수많은 희생자들을 냈고,

실제 한국독립은 미일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2발의 원폭 덕분임을 상기할 수 있다.

아래의 글 참조.

 

https://kydong77.tistory.com/19519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745435.html 히로시마에 묻힌 나가사키 원폭 투하 7만여명 숨져 히로시마 사망자의 절반 www.hani.co.kr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49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kydong77.t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nU-UFyBuuRQ

 

https://www.youtube.com/watch?v=wDnggy2VE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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