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웅전지붕의 네 모서리 아래에는나부가 지붕을 받치고 쪼구려 앉은 나부상이 있다. 한 팔로, 또는 두 팔로.
야차가 선업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실천하여 다음 생애에는 극락왕생하라는 도편수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전설로는 자신을 배신한 주모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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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나부상, 목수 배신한 여인 맞나 - 법보신문
강화 전등사 대웅전(보물 제178호)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처마를 힘겹게 떠받히는 조각상이 있다. 이것이 원숭이나 나찰이라는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편수와 사랑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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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미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최근 인천학연구 28집에 수록된 ‘전등사 대웅전 귀공포 조각상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새롭게 접근했다. 결론적으로 신 관장에 따르면 전등사 대웅전 조각상은 나부상(裸婦像)이 아니라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용도로 인도 야차(夜叉)에서 유래한 불법수호신이라는 것이다.
신 관장은 이번 연구에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와는 별개로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의 지붕을 받드는 존재로 표현된 조각상의 유래와 배경 등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중국 송대 건축서인 ‘영조법식(營造法式)’을 자세히 검토하고 귀공포에 이러한 인물조상을 배치하게 된 유래를 검토했다. 그 결과 전등사 대웅전 조각상은 귀공포의 쇠서배열과 장식 형태가 ‘영조법식’에 언급된 귀공포의 하앙 결구 방식, 즉 하앙 위에 별도의 유앙(由昂)을 놓고 이 유앙 위에 다시 각신(角神)이라는 추녀 지지용 부재를 놓은 건축기법의 한 사례에 해당한다는 것.
신 관장은 이 조각상이 고대 인도에서부터 내려온 ‘야차상’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보았다. 전등사 대웅전 조각상은 쪼그리고 앉아 한 손 혹은 두 손을 들어 올려 머리 위의 들보를 받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신관장에 의하면 이는 고대 인도 전통신앙인 야차신앙의 한 형태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일본에 남아있는 8세기 사찰에 야차 형상을 구현한 조각이 놓여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동아시아 불전건축의장으로 일찍부터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등사 대웅전 조각상도 기능상으로 볼 때 건축물의 의장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적 성격의 야차상이 어느 시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전 건축물의 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신 관장은 또 전등사 대웅전 조각상과 비슷한 구체적인 사례들도 소개했다. 우리 건축사에서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양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비교적 오래된 한국 다포계 건축물 중에는 전등사 외에도 보은 법주사 팔상전, 황해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 평안남도 박천 심원사 보광전의 귀공포에도 유사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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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신한 죄, 전등사 나부상 - 인천in 시민언론의 길을 열어갑니다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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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대웅전을 고쳐 지을 때 이야기다. 이 일을 맡은 사람 중에 마음씨 착한 노총각 목수가 한 사람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을 마치는 일과가 반복되던 어느 저녁, 그는 절 밑의 마을에 내려갔다. 그곳 주막에 들러 고향 생각을 하며 술을 마시다 그만 주막집 아가씨와 마음이 맞아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노총각이 주막을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고 드디어 둘은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노총각은 매달 나오는 그의 품삯을 모두 그녀에게 맡겼다. 앞으로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니 집안 살림은 그녀가 맡아서 해 달라는 뜻이었다.
목수는 하루하루 정성을 들여 대웅전 공사를 하게 되었다. 대웅전 공사가 끝나는 날, 노총각은 사랑하는 아가씨와 함께 고향 부모님을 찾아간다는 기대감으로 주막을 찾아갔다. 그러나 평상시에 반갑게 맞아 주던 아가씨는 보이지 않고 늙은 주막집 주인이 근심스런 얼굴로 노총각을 대신 맞이했다. 결혼을 약속한 그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이 맡겨 놓은 돈을 모두 가지고 도망을 간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엄청난 일에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맡겨 놓은 돈도 아까웠지만 목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 것은 장래를 약속했던 여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술에 취한 채 거리를 헤매던 목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해야겠다. 이 넓은 세상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나무를 깎고 집을 짓는 일 뿐이니 이것으로 그녀에게 복수를 해야겠다.”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나무 조각상으로 만들어 지붕의 추녀 밑에 집어넣기로 목수는 그녀의 조각상을 만들면서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
첫째, 그녀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원토록 창피를 당할 것.
대웅전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쉽게 쳐다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둘째, 그녀가 영원히 무거운 짐을 지고 신체적으로 고통을 당할 것.
기와집의 지붕은 상당히 무겁다. 그것을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받치고 있으면서 두고두고 육체적 고통을 받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셋째, 영원히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할 것.
아침저녁 스님들이 대웅전에서 부처님에게 예불을 올릴 때, 좋은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듣고 회개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목수는 네 개의 벌거벗은 모습의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대웅전 지붕 밑 네 귀퉁이에 집어 넣었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지붕 아래 네 귀공포의 네 개의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리라.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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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등사2
전각 기둥 네 모서리에는...... 잘 알려진 대로 전등사 대웅보전의 처마 네 귀퉁이에는 특이하게 네 귀퉁이의 들보를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떠받치고 쪼그리고 앉은 여인의 나체상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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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전 주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하니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 강에 달 비추듯 일체도 이와 같네.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네 가지 큰 지혜가 두루 밝은 모든 성인 *사지(四智)는 苦 集 滅 道 사성제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이 법회에 왕림하여 많은 중생 이익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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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 전등사
鼎足山 傳燈寺 | Jeondeung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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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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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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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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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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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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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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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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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에 중수된 적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년)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년)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 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프랑스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이후 다들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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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에는 나부상이 없다 | 스토리텔링 사찰 속으로 - 월간불교문화
추녀 아래 조각은 나부상이 아니랍니다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 손신영 (사)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아래에는 사람 형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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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라 부른다.

어린왕자명대사, 어른이 되면 더욱 공감하는 명대사 BEST 7! | Engoo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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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곰은 이미 여인으로 변신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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