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암이 시야에 가까워진다.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빛 속에 은은하게 비치는 오롯한
사찰이 하늘아래 가을 숨결을 이어가고 있다. 불현듯 거기를 거쳐 간 선인들의 자취가
머리를 스친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을 관조하는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꾸지 아니하
였던가.
산정의 숨결 위에, 적요로운 연봉의 햇살 위에 덧칠해진 것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
이다. 설악의 풍경이 거울처럼 빛나고 신비로운 것은 사실 이 선인들 덕분이다. 그
선인들은 수천 년, 수백 년 먼저 설악의 햇살과 풍경을 동경했을 것이다. 아니, 설악의
혼을 般若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자고로 선계는 따로 없는 것이다.
선명하게 비치는 오전의 금빛 속에, 산봉, 산 능선 어느 곳이나 변치 않는 것은 아늑한
햇살과 가을색 뿐이다. 온후한 기운이 산정에 가라앉아 있다. 그 속에 빛나는 용아의
늠름한 장대함과 협곡의 경이로움에 탄성이 아니나올 수 없다. 암과 암 사이에 10월의
기운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자 춤추는 단풍이 끼어든다.
골(谷)따라 흐르는 유적한 산굽이가 아래로 굽이치면서 바위를 돌아나가는 청명한
계곡에 닿았다. 빛과 어우러지는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점차 흘러내리는
단풍의 색감과 신록의 대비는 가을의 여백이다. 참 좋은 풍경이다.
산면 따라 이어지는 赤心 같은 계곡이 세월을 담아온 시간이 무한하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깊이가 묵직하고 공간속에 피어오르는 신비의 힘을 알 수 있다.
또 절벽위에 병풍처럼 펼쳐진 우람한 바위들이 시속의 변화를 잊게 해준다.
산 능선을 두고 양옆 비탈을 타고 흐르는 단풍의 물결, 바람 따라 금빛 속에 머무르며
오색의 향취를 풍기는 미려한 잎새들. 옥빛 물결에 비춰지는 잎새의 그윽한 잔영.
물살처럼 번지는 그 풍경을 따라 계곡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파란 하늘을
간질이고 있는 내 마음이 되어준다.
가을의 잎새와 단아한 폭포. 계곡으로 뻗쳐 내린 산면속에 고요하게 자리한 선경이다.
깎아지른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모습이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한 선율의 미성을 내면서
가을빛 생명 속을 가로지른다. 역시 물심은 마음속 그대로다.
바위에 걸터앉으면 빛도 바람도 길손도 수림의 단상에 묻혀, 산봉과 연결된 블랙홀 같은
깊은 계곡의 진홍색 숲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온 몸을 적시듯 다가오는 그 신선하고
촉촉한 공기의 느낌은 산소 같은 자연의 청정수이다. 왼쪽으로 너럭바위를 타고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골을 가로지른 계곡의 선율이 온기에 젖어있는 움츠린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능선아래 오색의 물결을 이룬 숲속의 기운찬 모습이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바람을
만난 듯 시원해진다. 그 아래 계곡수는 금빛을 껴안고 흐르며 유정한 황금색 가을을
아우른다. 풍부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낀다.
불타듯 붉은 색과 정열적인 노란 색, 청람 빛 계곡수와 햇살과의 조화, 계곡속으로
빠르게 번져가는 찬연한 금홍색의 물결,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다.
특히 가을빛 아래 나신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며 곱게 불타고 있다. 빛에 반사된
계곡이 실바람에 휩쓸려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옥수처럼 흐르다 웅장한 沼에서
금빛과 어우러지면서 하얀 옥구슬을 그려놓는다. 그 계곡에 투영된 아름다운 그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이며, 추색의 한 구도이다.
너른 암반에서 바라보는 고운 빛깔의 단풍은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 협곡사이를 오가며
번져진 단풍의 화려함은 길게 휘어진 석벽 앞에서 서서히 줄어들지만 이내 또 창창하게
이어져 차분하고 수려한 가을 세상을 만든다. 그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가을이 들어와
내 품속에 몸을 맡기는 듯하다.
추색이 완연한 계곡 길로 접어들어 한 폭의 그림같이 스쳐지나가는 고적한 길을 따라
간다.조용하고 차분한 길이다. 저 건너편 능선에서 쉬고 있는 황금빛 햇살이 붉게
물들은 산허리를 도툼하게 감싸며 해맑게 지내고 있다. 잠시 머문다. 그 풍경은,
은은하게 피어나는 미소 같은 가을의 미려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