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18번
-100명의 시인 설문 조사 분석
오 광 수 | 시인·경향신문 주말팀장

미당未堂은 그의 절창 '꽃밭의 독백'에서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라고 썼다. 생전에 그는 술이 거나해지면 ‘여보게, 거 창가唱歌 한 번 해보지’라고 말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후학들이 부르는 노래를 완상玩賞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곧 시였고, 시는 노래였다. 그러나 노래나 시 모두 그가 꿈꾸던 구름 저쪽의 세상에는 닿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사료를 들추지 않더라도 노래는 시의 원형질이었다. 석기시대의 어디쯤 ‘시인의 피’를 가진 누군가는 가슴 저쪽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을 노래로 흥얼거렸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시인과 노래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다. 다만 다양한 직업군들이 나뉘어지면서 타고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시를 쓰고, 타고난 소리를 가진 이들은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시인들의 18번’이 공개된 이번 조사는 당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대중적 취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18번이 <방랑시인 김삿갓>이었다거나, 노태우 전대통령은 <베사메무초>였다는 건 알면서도 ‘시인들의 18번’을 몰랐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봄날은 간다

조사 결과 압도적인 점수로 1위에 오른 <봄날은 간다>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여가수 백설희가 발표한 곡이다. 손로원이 쓰고 박시춘이 작곡했다. 손로원은 일제 치하에서는 한 줄의 가사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가 해방과 함께 손석봉이 부른 <귀국선>을 필두로 왕성한 활동을 재개한 작사가이다. 아니러니하게도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경찰에 끌려간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번은 그가 작사한 <비내리는 호남선> 때문이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유행한 건 1956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대선전에 나선 해공 신익희는 호남 유세 도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 와중에 <비 내리는 호남선>이 해공 신익희의 미망인이 설움에 겨워 작사한 노래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 때문에 손로원은 경찰 당국에 연행되어 치도곤을 당했던 것이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으로 시작하는 <물레방아 도는 내력>도 자유당 말기 세태를 풍자했다 하여 경찰에 끌려가야 했고, 끝내 금지곡이 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이들 노래 외에도 <페르시아 왕자>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등의 노래를 작사했다. 곡을 붙인 박시춘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신라의 달밤> 등 히트곡만 300여 곡이 넘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다.

<봄날은 간다>의 2절 가사 중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부분은 처음 발표된 SP음반에는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로 돼 있으나 어떤 연유로 개작됐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여하튼 한영애가 리메이크하고, 허진호 감독이 동명의 영화까지 만든 걸 보면 아직 봄날은 가지 않은 모양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조용필의 대표곡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시로 따지면 장편 서사시라고 할 만큼 긴 노래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출신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인 양인자 씨가 노랫말을 썼고, 그의 부군인 김희갑 씨가 곡을 붙였다. 두 부부가 수많은 히트곡을 낸 콤비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0위권 안에 오른 조용필의 또 다른 곡 <그 겨울의 찻집> 역시 양인자 씨의 작품. 이 노랫말의 모티브는 E.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 얼어죽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라고 소설의 서두를 시작했다.

이 노래는 1986년 조용필의 8집에 수록된 <허공> <바람이 전하는 말> <그 겨울의 찻집> 등과 함께 발표되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당시 뭔가 변화가 필요했던 조용필은 평소 친분이 있던 김희갑·양인자 부부에게 곡을 의뢰했다. 양인자 씨가 ‘짧은 노랫말로는 성이 안 찬다’고 해서 랩을 포함하여 6분짜리 대곡이 나온 것이다. 레코드사에서 너무 길어서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줄여주길 원했지만 작품자들의 고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10위권 내에 든 노래들 중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4위), <한계령>(5위), <아침이슬>(6위)은 모두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양희은과/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키타/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이 셋이 시대의 자유를 꿈꾸었다 모두와 함께’라고 썼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70년대에 암울했던 청춘을 보낸 모든 이들은 일정 부분 양희은의 노래에 빚지고 있다. 시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들 노래 중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1991)는 그가 직접 노랫말을 썼으며, <아침이슬>(1971)은 김민기, <한계령>(1985)은 하덕규가 각각 썼다.

70년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에서 김민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에 누구든 김민기와 한대수, 양병집 등 소위 판매금지된 LP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그 노래를 들으며 가슴 뜨거워지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 절정에 있었던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임을 누구든 부인할 수 없다.

김민기의 막강한지원 아래 양희은은 가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여학교 시절에 맞았던 부모의 이혼, 돈 때문에 늘 절망해야 했던 대학시절, 80년대초 도피하듯이 떠났던 미국과 유럽 여행, 암투병, 뒤늦은 결혼과 해외이주 등. 지금은 넉넉한 아줌마로 우리 곁에서 편안하게 노래하는 양희은과 <지하철 1호선>을 장기공연하면서 기획자로 자리잡은 김민기. 그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만큼이나 신산했던 역사가 두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들이 겪었던 70년대와 80년대의 풍경이 시인들이 겪었던 그 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기에 그들의 노래가 사랑받을 수 있었으리라.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네/발 아래 젖은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존경하는 선배 양희은에게 <한계령>을 써서 헌사한 하덕규는 알다시피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또 다른 노래 <가시나무> 역시 시인들이 좋아하는 주요 노래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선배격인 가수 조동진의 느릿느릿한 포크에 영향을 받은 하덕규는 시적인 상상력과 언어구사가 탁월한 가수였다.

나중에 후배가수 조성모가 리메이크하여 밀리언셀러가 됐던 <가시나무> 역시 시적인 언어와 상상력으로 가득 찬 노래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고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덕규에게 한계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눈만 뜨면 안개를 두르고 묵묵히 서 있는 한계령이 온전히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해온 그에게 고향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찾는 마음의 도피처였다. 스물여섯 살 여름, 홍익대 미대에 재학중이던 그는 ‘시인과 촌장’을 결성하여 노래를 발표했지만 방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그 무렵 다시 한계령을 찾았고, 게서 <한계령>이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CCM에 심취하여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는 그가 그리운 이유는 탁월한 시적인 감성을 가진 새 노래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태춘을 얘기해야 한다. 그의 처음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쩌면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으로 시작하는 <촛불>과 <시인의 마을> 등의 노래로 기억할 것이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래 3위에 오른 <북한강에서>를 비롯해 <떠나가는 배>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노래는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방불케 하는 대작이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사실 정태춘은 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통기타 가수와는 다른 느낌을 가진 가수다. 그는 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도 대학이 가진 이상이나 낭만, 열정 이상의 것을 노래로 쏟아부은 가수다. 특히 동료가수 박은옥과 결혼한 뒤 보여준 전투적이면서도 서사적인 전사의 풍모는 그가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특히 그는 줄기찬 투쟁 끝에 대중들의 상상력을 억눌러온 ‘사전 심의제’를 철폐하는 데 공헌했으며, 운동권 대학생들의 집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선동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그가 일찍이 고백했듯이 선배가수 김민기의 영향이 컸다.

한때 레오나드 코헨이나 존 바에즈, 비틀즈나 에릭 클랩튼을 들으면서 풍성한 노랫말에 감탄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이 숨쉬면서 살아가는 동시대 가수들도 음유시인으로 칭송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음악이 상업화로 치달으면서 가사는 전자음의 소음에 묻혀 버렸고, 운율은 빠른 비트에 희생됐다.

노래는 시보다도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을 반영한다. 시보다도 훨씬 대중적인 매개체인 노래가 시대를 재빠르게 반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피드가 미덕인 시대에 댄스음악이 유행하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시대에 랩이 각광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느릿느릿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온다면 다음 세대들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면서 완상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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