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 파다웅족 여인들
사슴
ㅡ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노천명의 자화상적인 시<사슴>의 첫 구절이다.
슬픔의 원천은 시인의 짝사랑에서 유래한다.
이화여전 출신의 신여성 노천명은 좌파 인텔리겐치아 유부남을 사랑했다.
그들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월북했던 그 사내는 1.4후퇴 때 공산당 간부가 되어 서울에 입성했다.
피난을 포기하고 서울에 남았던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들은 만남도 가졌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었다.
되려 그와의 만남은 노천명의 생애에 오점만 남겼다.
노천명은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기를 희망했지만 다른 사내에겐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다.
첫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좌익편을 들다가 종전 후 옥살이까지 치르고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출감되어 참회의 눈물만 흘렸다.
노천명의 사랑은 청마 유치환의 시구처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에 그쳤을 뿐이다.
그것이 시인의 순수이고 유치함이다. 자신의 운명 따위엔 무관심하기까지 하다.
청마의 다음 시구는 책 한 권이 되도록 편지만 주고 받은 시조시인 이영도를 두고 지은 것이라 추정된다.
파도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플라토닉 러브인가? 유치한 불장난인가?
은자는 후자라 생각한다.
시인들은 순수를 지향하는 동심을 잃지 않은 유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과 사실의 본질을 직관으로 꿰뚫는 사람들이다.
목이 짧은 7인의 여전사들도 미인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이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남겼다.
관습의 부정적 측면과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굳이 은자가 개입하고 싶지 않다.
은자는 다만 파다웅족 여인들이 하루 빨리 그 용수철링을 벗어 땅바닥에 패대기치기를 바랄 뿐이다.
관광상품용인가?
이들은 무릎 아래에도 용수철링을 찼었다.
이러다가 다음 차례는 발목인가? 팔목인가?
자세히 보니 팔목은 이미 찼군요. 발목만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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