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路難
(三首中 其一)
살아가기 어려워라

-李白

金樽淸酒斗十

금항아리 맑은 술 한 말에 만냥

玉盤珍羞値萬

옥반의 좋은 안주 그 값이 만냥이라.

停杯投筯不能食

잔 멈추고 젓가락 던지며 먹지 못하고 ⋅筯저;젓가락

拔劍四顧心茫

칼 빼어 사방을 둘러봐도 마음은 아득해라.

欲渡黃河氷塞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이 내를 막고 ⋅塞변방새,막을색

將登太行雪暗

태행산 오르자니 눈내려 암울한 하늘.

閑來垂釣碧溪上

한가로이 푸른 시내에 낚싯대 드리우다

忽復乘舟夢日

홀연히 배타고 장안 가는 꿈을 꾼다.

行路難 行路[先韻]

살아가기 어려워라 살아가기 어려워라.

多歧路 今安

갈림길도 많았으니 지금 어디 있는 거냐?

長風破浪會有時

그 큰 뜻 때가 오리니

直挂雲帆濟滄[上聲 賄韻]

높은 돛 바로 달고 창해를 건너리라.

 

*장풍파랑;소년이 大志 품은 것을 비유.

乘風破浪.종각의 희망;願乘長風 破萬里波.

⋅賄회;뇌물.회뢰(賄賂)]

 

[섬서성 화산]









이백 [, 701~762]

중국 최대의 성당 기() 시인.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시문집은 송 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자 태백(). 호 청련거사().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隴西]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장밍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서 장난[] ·산둥[] ·산시[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 ·남릉(:) 동로(:)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의 부름을 받아 창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으로 향하여 뤄양[] ·카이펑[]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西)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현재의 ) ·금릉(:)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 영왕() 인()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西)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의 비상()’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까지도 그것을 혼돈화()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와 신선()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다. 두보의 오언율시()에 대하여, 악부() 칠언절구()를 장기로 한다.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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