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미를 추구한 주인장의 매력에 이끌려 일주일 뒤에 다시 들린 이 집에는 접시꽃이 나를 맞았다. 앞 꼭지에 있는 집의 대문간에 서서 우리나라 어디에나 산재한 접시꽃이 비시시 웃고 있었다. 주돈이의 <애련설>을 보면, 도연명은은일의 곷으로국화를 홀로 사랑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당나라 이세민 이후로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연꽃을 좋아하는 심경을 고백하엿다.

중국 육조시대 진(晉)나라 도연명이,

採菊東籬下동쪽울타리아래서국화를꺾다가
悠然見南山유연히남산을바라보네.

를 읊은 이후로 국화는 오상고절( 傲霜孤節)의 상징으로 한자문화권의 상류계층 사람들에게 선호도 높은 꽃이 되어 사군자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주로 조화로 사용되다 보니 인기 없는 꽃이 되었다. 보랏빛만 하더라도 한때 서울시에서 시내버스 빛깔로 사용했지만 이것 역시 바이올릿빛이 서양의 초상집 분위기 운운하여 요즈음은 그런 색상의 버스가 많지는 않다. 개인의 가치관과 선호도가 얼마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영향을 받는가 하는 데 대한 극명한 사례라 하겠다.

최치원이 접시꽃을 소외당한 꽃이라니 국화와 모란을 사랑한 중국인들, 중국문화 특히 유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불교의 논리에 맞먹는 논리를 개발한 송대 성리학의 개조 주염계 선생이 생각난다. 아이러닉한 것은 석가가 개발한, 염화미소(捻華微笑)의 상징물인 연꽃을 사랑한 것이라 생각한다.

열두 살에 당나라에 유학한 최지원은 <秋夜雨中(추야우중)>에서 비오는 날 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 앞에 앉아 만리길을 달려가는 향수를 노래하기도 했지만, <촉규화<에서는 길가의 접시꽃을 보고는 이방인의 소외감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도종환은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생명의 연대감으로 승화시켜 <접시꽃 당신>에 담았다. 두 시를 함께 감상해 본다.

<蜀葵花> *접시꽃-자신의 신세

寂寞慌田側 적막한 거친 땅 곁에

繁花壓柔枝 번성한 꽃이 약한 가지 누르네.

香輕梅雨歇 매화에 비 개니 향기도 가벼워라

影帶麥風欹 보리밭 스쳐온 바람 그림자 드리운다.

車馬誰見賞 수레나 말 탄 사람 뉘라서 보아주리?

蜂蝶從相窺 벌이나 나비만이 한갓 서로 엿보네.

自慚生地賤 태어난 땅 천한 것 스스로 부끄러워

堪恨人棄遺 남에게서 버림받고도 그 한을 견디누나.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문학 > 시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화상 --미당 서정주  (1) 2008.07.02
자기 죄를 자랑스러워한 사나이, 이육사 선생  (4) 2008.07.01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2) 2008.06.19
전등사 경내의 찻집  (0) 2008.06.18
사슴이 뿔났다  (1) 2008.06.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