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明淸時代)의 문언소설 (文言小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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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 - 김경미

중국소설사에서 문언소설은 백화소설과 더불어 중요한 양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당대 전기소설에서 극성을 이룬 이후 송대부터는 민간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백화소설의 급속한 확장으로 인하여 문언소설의 창작은 상대적으로 크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전통사상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으며 백화문학이 아직 제대로 각광을 받지 못하였던 시대에 정통문인들에게는 여전히 문언소설이 읽히고 있었으며 명청대를 통하여 문인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좋은 작품도 나타나게 되었다.

1. 창작 배경

명청대에서도 특히 명대 가정(嘉靖) 연간에는 전에 없이 문언소설이 다시 발흥하는 재기의 기회를 맞기도 했다.

그 원인의 첫째는 도시경제의 발전과 인쇄술의 진보에 따른 사회 전반적인 문화수준의 향상을 들 수 있고, 둘째는 당대소설이 다시 발굴되어 문인들의 창작의욕을 크게 북돋구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소설중에서 단행본은 명대에 이르러 거의 90%가량은 유실되었고, 송초에 이방(李昉) 등이 칙명으로 편찬한 문언소설집 《태평광기(太平廣記)》가 만들어졌지만 일부에서 이 책이 후학들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여 간행하지 않고 따로 보관해 두었던 것인데, 이 무렵에 이르러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출판상에서 그 작품의 일부와 다른 작품을 섞어 간행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이 늘어나 당시 문인들에게 유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극을 받아서 인지 평소에는 소설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문인들도 협객이나 기인 또는 여우 호랑이 등을 소재로 전기를 지어 자신의 문집에 넣는 기풍이 명말에 널리 번져 청대에 들어와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2. 시기 구분

명청대를 통틀어서 문언소설의 발달과정을 개관하면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명초의 홍무(洪武1368~ 1399년 )연간에서부터 명대 중기 가정(嘉靖, 1522~1566)연간까지로 문언소설의 부흥이 시작되어 발전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주요 작품을 보면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  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도보(陶輔)의 《화영집(花影集)》 등의 전기소설집이다. 이들 작품의 제목이나 주제를 보면 확실히 당대 소설의 전철을 추구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당대의 우수한 전기소설에 비해 부분적으로 문장력의 부족이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시기는 명대 가정 연간에서 청대 강희(康熙,1662~1722) 연간이라고 하겠는데 이 때는 가히 명청대 문언소설창작의 극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우수한 시문작가들이 전기소설의 창작에 참여하여 좋은 작품을 많이 양산하였다. 명말에는 마중석(馬中錫)의 우언소설《중산낭전(中山狼傳)》 이나 동기(董玘)의 《동유기이(東游記異 ) 》, 채우(蔡羽)의 《요양해신전(遼陽海神傳)》, 소경첨(邵景瞻)의 전기소설집 《멱등인화(覓燈因話) 》, 송무징(宋懋澄)의 《부정농전(負情 傳)》과 《진주삼기(珍珠衫記)》,  잔잔거사(潺潺居士)의 《소청전(小靑傳)》 등이 나왔고, 청초에는 위희(魏禧)의 《대철추전(大鐵椎傳)》, 이어(李漁)의《진회건아전(秦淮健兒傳) 》, 이청(李淸)의 《귀모전(鬼母傳)》, 위탁(衛晫)의《간화술이기(看花述異記)》, 황주성(黃周星)의《보장령최영합전(補張靈崔瑩合傳)》,유수의 《내낭》 등이 출현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또 최고의 명성을 누리는 포송령(蒲松齡)의 문언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가 나와 문인들로 부터 전에 없는 환영을 받아 문언소설의 극성기를 이루고 있다.

셋째 시기는 《요재지이》가 나온 이후부터 청대 말기까지(1679~1911)로서 문언소설의 창작이 경쟁적인 붐을 이루다가 모방으로 치닫고 급기야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겪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요재지이》가 나온 이후에 그 전파는 날로 급격히 늘어나 많은 작가들이《요재지이》의 필법을 모방하여 전기소설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건륭연간에 나온 심기봉(沈起鳳)의 《해탁(諧鐸)》이나 화방액(和 額)의 《야담수록(夜譚隨錄)》 장백호가자(長白浩歌子)의 《형창이초(螢 異草)》등이 그러한 것들이다.《사고전서(四庫全書)》의 총편집을 맡았던 기윤은 《요재지이》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문하생인 성시언(盛時彦)은 그의 말을 풀어서 "《요재지이》가 일세를 풍미하고 있지만 그건 재자(才子)의 글일 뿐이지 저서자(著書者)의 글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윤이 《요재지이》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문체의 혼용과 허구성의 발휘라는 이유에서 였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고망청지 (姑妄聽之)의 발문에 의하면 우선 "그 책이 [소설과 전기의] 두가지 문체를 혼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또 "화려한 언사와 흐느적거리는 교태, 세심한 우여곡절의 표현 등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말로 드러나면 그런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나 남의 말로 대신하니 어디서 들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도다" 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기윤은 건륭(乾隆) 말기에서 가경(嘉慶) 초기 사이에 스스로 《열미초당필기》 5종을 지어 화려한 문체를 배격하고 질박함을 추구하여 위진남북조의 지괴소설과 같은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다. 그의 의도는 《요재지이》의 명성과 견주고자 하여 이 책을 지었지만 사상적 가치나 예술성과에서 도저히 따르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고 말았다. 그러나 기윤은 원래 문필력이 강하고 남들이 못보는 온갖 고금의 전적을 섭렵한 터라 해박한 지식을 통해 귀신의 정황을 드러냄에 인간세태의 갖가지 미묘한 관계를 미루어 잘 드러내고 여우나 귀신의 입을 빌어 하고 싶은 얘기를 잘 풀어내어 독자들이 수긍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한 때 《요재지이》와 더불어 이 책이 널리 전해져 읽혀질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건륭(乾隆) 말기에는 당대 문단의 영수라고 할 수 있는 원매(袁枚)도 필기체 지괴소설인 《자불어(子不語)》(후에《新齊諧》로 개칭함)를 써서, 《요재지이》 및 《열미초당필기》와 더불어 문언소설계를 삼분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때부터 문언소설의 창작은《요재지이》를 모방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열미초당필기》나 《자불어》를 모방하는 작품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방작은 결국 질적 저하에 의해 전체 문언소설의 쇠락을 가일층 촉구하게 되었다.

3. 명대의 문언소설

이상에서 언급된 명대의 문언소설중에서《剪燈新話》《전등여화》《멱등인화》《중산낭전》의 내용을 소개하고 국내에서 발견된 명대의 문언소설집인 《문원사귤》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또 명대 문언소설의 가장 대표작인《剪燈新話》에서는 한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고자 한다.

1) 《剪燈新話》

구우(瞿佑)의 《剪燈新話》는 명대 초기에 문언소설의 붐을 일으킨 작품이다. 모두 4권 22편(또는 21편)으로 되어 있는 이 전기소설집은 대부분 고금의 기이한 이야기와 남녀관계, 괴기사건 등의 내용을 싣고 있다. 이 책은 작자가 당시 호사가들로 부터 전해들은 얘기들과 과거의 지괴 전기작품으로부터 영향받아 만든 것이다. 구우(1341-1417)의 자는 종길(宗吉)이고 호는 존재(存齋), 전당(錢塘)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평생 불우하여 낮은 관리에 머물렀다.

《剪燈新話》의 내용을 분류해보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쓴 작품으로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영당용회록(靈堂龍會錄)> <수문사인전(修文舍人傳)>  등과 같이 지식인들이 현실세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여 용궁의 세계를 환상하는 것이나, 이승과 저승의 대비를 통해 현실사회의 부패와 추악한 모습을 강조하는 것 등이다.

작자 구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벼슬길은 별로 순탄하지 않아 일생동안 훈도(訓導)나 장사(長史) 등의 낮은 관리를 지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시로 인한 필화사건까지 일어나 투옥되고 변방에 10년간이나 파견되어 있어 늘 가슴속에는 불우한 자신을 한탄하고 현실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남녀의 애정을 묘사한 것으로 <연방루기(聯芳樓記)> <애경전(愛卿傳)> <취취전(翠翠傳)> <녹의인전(綠衣人傳)>과 같은 작품 은 {剪燈新話} 속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으로서 젊은 남녀의 진솔한 사랑을 노래하고 자유결혼과 애정이 충만한 행복한 삶의 추구를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셋째는 인과보응을 주로 다루는 권선징악의 작품으로 대부분의 작품속에 이러한 요소가 조금씩은 들어있으나 가장 많이 나타나는 작품은 <부귀발적사(富貴發迹司)>와 <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 같은 것이다.

넷째는 기타 전기작품으로 그 중에는 견우직녀의 무고함을 밝히는 <감호야범록(鑒湖夜泛錄)>이나 세상을 버리고 숨어버리는 은둔사상을 담은 <천태방은록(天台訪隱錄)> 등이 있다.

《剪燈新話》의 작품들은 그 제목이나 이미지가 대부분 당대 전기소설을 닮았지만 사상성이나 예술적 성과에서 전반적으로는 그 수준이 당 전기를 따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剪燈新話》속에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 들어 있다. 적잖은 작품속에서 기상천외한 상상의 세계가 풍부하게 펼쳐지고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있어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일으키고 있으며, 특히 애정을 다룬 작품에서는 거의 원대 말기의 동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전란으로 인한 청춘남녀의 이별과 죽음, 사랑과 슬픔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애경전>에서의 조자(趙子)와 나애애(羅愛愛), <취취전>에서의 김정(金定)과 유취취(劉翠翠), <추향정기(秋香亭記)>에서의 고생(高生)과 양채채(楊采采) 등이 모두 이런 인물들이다. 작자는 이들의 구구절절한 사랑의 애절한 비극을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어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고 있다. 구우는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감성을 동원하여 비교적 다양한 기풍의 작품을 그려고 있다.

그 중에서 <금봉차기(金鳳釵記)>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 대덕(大德) 연간 양주(揚州)의 오부자댁에 흥낭(興娘)과 경낭(慶娘) 이란 두 자매가 있었는데, 오부자는 이웃집에 대대로 벼슬살고 있는 최진사댁의 아들 최흥가(崔興哥)가 어려서부터 훌륭하여 자신의 큰 딸 흥낭과 미리 약혼을 시켜 두었다. 그러나 후에 최생의 부친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가게 되어 온 집안이 이사를 갔는데 부친이 15년간이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딸의 혼기를 놓치게 된 흥낭의 모친은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곳에 혼사를 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부친은 약속을 중시하여 기다릴 것을 강요하였고, 흥낭은 약혼자를 기다리다 결국 아깝게도 병사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뒤에 최생이 돌아와서, 그동안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느라 일찍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최생은 오부자댁의 행낭채에 머물게 되었는데, 청명절을 맞아 집안 식구들이 모두 흥낭의 무덤에 성묘를 갔다 돌아올 때, 가마에서 떨어진 금봉차를 최생이 주워서 간직했다. 이 금봉차는 옛날 두사람의 약혼의 정표로 최생의 집에서 주었던 것인데, 흥낭이 죽자 함께 무덤에 묻었던 물건이다. 며칠 후에 어느 날 흥낭의 여동생인 경낭이 행낭채로 최생을 몰래 찾아와 유혹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여 두사람은 동침하게 되었다.

훗날 탄로가 두려웠던 최생 집안은 경낭을 데리고 야밤에 도주, 최생의 노복으로 있었던 김영(金榮)이란 사람에게 의탁하여 5년여를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경낭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하여, 함께 배를 타고 귀향하였다. 우선 경낭을 배에 남겨둔 채 최생이 먼저 들어가 그 간의 일을 사죄하니, 경낭의 부모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 최생이 떠난 이후 줄곧 경낭은 혼수상태로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하인을 시켜 나가 보게 했더니 방안에 누워 있던 경낭과 배에 남아 있던 경낭이 만나 합쳐져 하나가 되면서 숨겨진 비밀을 말했다.

그녀는 흥낭의 혼백으로서 자신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최생과의 사랑을 이뤄보려고 동생의 몸을 빌렸던 것인데, 이제 경낭과 정식으로 결혼시켜 행복하게 살도록 하라고 부모에게 간청하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흥낭의 혼백은 돌아가고 경낭이 되살아나 두사람은 맺어진다. 후에 최생은 금봉차를 팔아 제물을 마련하여 절에서 흥낭의 명복을 빌어준다.

이러한 소재는 당대 전기소설인 <이혼기(離婚記)>에서도 나타나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다. 흥낭은 사랑을 기다리다 죽었고, 또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사후에도 잇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며, 결국 누이를 통해 최종적인 사랑의 완성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능몽초의《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23권)에서 백화소설로 다시 묘사된다.

《剪燈新話》는 훗날 백화소설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명청대의 희곡작품중에도 이 책으로 부터 영향받은 것이 적지 않다. 명말 소설가 능몽초는 이 책에서 많은 소재를 구하여 새로운 백화소설로 꾸며 그의 《초각박안경기》와 《이각박안경기》에 수록하고 있는데, <삼산복지지(三山福地志)>를 <암내간악귀선신, 정중담전인후과(庵內看惡鬼善神, 井中談前因後果)>(二刻 24권)로 바꿨고, <금봉차기(金鳳釵記)>를 <대자혼유완숙원, 소이병기속전연(大 魂遊完宿願, 小姨病起續前緣)>(初刻 23권)으로 바꿨으며, <취취전>은 <이장군착인구, 유씨녀궤종부(李將軍錯認舅, 劉氏女詭從夫)>(二刻 6권)로 바꾸었다. 또 <녹의인전>은 명대 주조준(周朝俊)이 희곡 <홍매기(紅梅記)>로 고쳐 만들기도 했으며, <기매기(寄梅記)>는, 주청원(周淸源)이 백화소설 <기매화귀뇨서각(寄梅花鬼鬧西閣)>(《西湖二集》 11권)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剪燈新話》는 이처럼 중국내에서 상당한 영향을 일으켜 많은 모방작을 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과 월남 등 해외 각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국에 유사한 문언소설의 창작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소설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세조(世祖) 때의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것으로 구우의 《剪燈新話》와 상당히 유사한 구성의 형식과 전기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 그 영향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금오신화》 에서는 모든 작품의 무대와 인물이 우리의 것으로 바뀌어져 있고 무수한 (詩)를 별도로 개입하여, 나름대로 독창성을 추구한 대목도 적잖게 엿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전등여화》

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는 모두 5권 22편으로 된 전기소설집인데 제 4권의 <지정기인행(至正妓人行)>은 실상 소설이 아니고 가행시(歌行詩)이다. 이 책은 구우의 《剪燈新話》가 나와 일세를 풍미하자 이를 모방하여 나온 전기소설집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이정(1376-1452)의 자는 창기(昌祺)이며 여릉(廬陵: 지금의 江西 吉安縣)사람이다. 이정은 성조(成祖) 때의 진사 출신으로 {영락대전(永樂大典)}의 편수에 참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재주와 학문을 드러내길 좋아했다. 그는 방산(房山)으로 귀양가 있을 때 《剪燈新話》를 보고 극구 칭송하여 '효빈'의 뜻을 두고 백방으로 고사를 수집하여 20여편을 엮었다고 한다. 《전등여화》는 편폭에서나 내용에서 《剪燈新話》와 거의 비슷하지만 전서보다 더욱 소극적이고 진부한 관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작자는 소설창작을 재학을 드러내는 일종의 '유희'로만 여겨 많은 시와 사를 넣어 예술적 성과에서는 전서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작자가 귀양 도중에 만들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현실적 불만이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태산어사전(泰山御史傳)>에서는 이승에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저승에 가서 벼슬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청성무검록(靑城舞劍錄)>에선 관직에 몸 담고 있는 작자가 심리적으로 은둔을 원하면서도 현실적 부귀공명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모순된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剪燈新話》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등여화》에서도 젊은 남녀의 진솔한 사랑이 잘 묘사되어 있어서 훗날 명말청초의 재자가인소설의 출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능몽초의 백화소설 <선휘원사녀추천회, 청안사부부소제연(宣徽院仕女 韆會, 淸安寺夫婦笑啼緣)>(초각 9권)은 <추천회기( 韆會記)>를 근거로 새로 쓴 것이며 《이각박안경기》에도 영향받은 작품이 있다. 주청원(周淸源:周楫)의《서호이집(西湖二集)》 에도 《전등여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작품이 있다.

3) 《멱등인화》

소경첨(邵景瞻)의 《멱등인화(覓燈因話)》는 2권 8편의 전기소설집이다. 이 책도 역시 《剪燈新話》의 유행여파에 의해 이뤄진 모방작으로 볼 수 있는데, 고금의 문언자료에서 작품을 뽑아 새로 쓰고 수정 보충하여 만들었다. 작품의 질적인 수준은 《剪燈新話》는 물론《전등여화》 에도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의 예술가치를 갖춘 작품도 들어있어 주목된다.

특히 인물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몰락한 귀공자의 모습을 그린 <요공자전(姚公子傳)>에서의 요공자, 정조와 의리 현명함을 그리고 있는 <정렬묘기(貞烈墓記)>에서의 곽치진(郭雉眞), 기녀이면서 강하게 자신을 지키는 <취아어록(翠娥語錄)>에서의 이취아(李翠娥) 등은 모두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멱등인화》도 역시 후세에 영향을 끼쳐 풍몽룡의 《삼언》, 능몽초의 《이박》, 주청원의 《서호이집》 등의 화본소설중에는 이 책으로부터 소재를 취한 것도 많이 있다.

4) <중산낭전>

마중석(馬中錫)의 <중산낭전(中山狼傳)>은 송대 사량(謝良)의 작품을 근거로 새로 쓴 우언소설이다. 내용은 동곽선생이 위험에 처한 늑대를 구하였다가 오히려 늑대에게 잡아먹힐 위기를 맞게 되는 줄거리다. 중산의 늑대가 얼마나 배은망덕한가를 보여주고 동곽선생의 우매함과 고루함을 비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늑대와 마찬가지의 악인들이 벌이는 달콤한 꾀임에 빠져 스스로 함정에 이르는 미혹됨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혹자는 마중석이 이 글을 통해 이몽양(李夢陽)이 강해(康海)의 배은망덕에 대해 느낀 점을 풍자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적하든 관계없이 이 우화는 인간사회의 은혜와 원한관계를 풍자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간자(趙簡子)의 사냥으로 상처를 입은 중산의 늑대가 몸을 피해 동곽선생에게로 찾아와 구출해 줄 것을 애걸한다. 동곽선생은 전형적으로 고루한 선비로서 스스로 '박애정신'을 내세워 늑대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조간자를 속여 돌려 보낸다. 중산의 늑대는 위험에서 벗어나자 방금 전까지의 비굴한 모습을 일변하여 흉포한 본성을 드러내 동곽선생과 시비를 벌인다. 늙은 나무에게 물어보고 늙은 소에게 물어봐도 동곽선생은 불리한 입장이 된다. 그러다가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흰 수염의 노인을 만나 다시 계교로서 늑대를 잡게 되지만 동곽선생은 여전히 비수로 늑대를 찌르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드러낸다.

<중산낭전>은 일종의 우언소설이므로 일부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묵자의 '겸애설' 풍자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호질(虎叱)>은 대체적으로 이와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당시 양반세계의 위선과 비굴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주인공이 북곽선생과 호랑이로 바뀌었고 동리자(東里子)가 등장하지만 기본적인 고사의 구성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다만 늑대의 배은망덕과 선비의 고루함을 풍자하는 {중산낭전}에서 {호질}은 양반의 부패한 면을 호랑이의 질책을 통하여 폭로하고자 하는 창작의도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

5) 《문원사귤》

《산보문원사귤(刪補文苑 橘)》이라고 제목이 달려 있는 이 문언소설집은 최근에 우리나라 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는 일본에 남아있는 필사본에 의해 <중국통속소설서목>에 소개가 되었으나 구체적인 수록 작품과 내용에 대한 연구는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집에는 20편의 역대 문언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당대 전기소설이지만 명대 문언단편도 여러 편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 중에서 이미 알려져 있던 것으로는 <동곽선생(東郭先生)>과 <부정농(負情 )> 등이 있으며, 처음으로 원본이 밝혀진 것은 <위십일낭(韋十一娘)>이다.

<동곽선생>은 바로 앞에서 소개한 마중석의 <중산낭전(中山狼傳)>이다. <부정농>은 송무징(宋懋澄)의 <부정농전>인데, 훗날 풍몽룡의 《삼언》중에서 백화로 꾸며져 널리 이름이 알려진 두십낭(杜十娘), 고사로서, 북경의 명기 두십랑이 이생(李生)을 사랑했다가 배신을 당한 절망감으로 보석상자를 안고 강물에 뛰어든 내용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위십일낭>의 고사는 능몽초의 《박안경기》에 들어있는 <정원옥이 객사에서 대신 셈을 치르고, 십일낭이 운강에서 의협으로 구출하다(程元玉店肆代償錢, 十一娘雲岡縱譚俠)>라는 작품을 통해 알려지고 있던 것인데, 그 원본에 해당하는 문언작품은 중국에서 없어진지 오래된 듯 하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원사귤》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명대 성화(成化) 연간에 휘주(徽州) 지방의 상인 정덕유(字가 元玉임)가 장사를 마치고 귀가길에 객사에 들러 식사를 하던 중에 협객의 복장을 한 여인이 들어와 식사를 하고는 돈이 없어 조소를 받는다.

정원옥은 아무말 없이 대신 돈을 치뤄 준다. 여인은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신은 위십일낭이라고 밝히고는 사라진다. 객사를 떠나 길을 가던 정원옥은 도중에 한 사내의 꼬임에 빠져 깊은 산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날이 어두워진 후 강도를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워 진다. 그러나 돌연 위십일낭이 부하 여협객인 청하와 함께 나타나 그를 구출하여 운강의 초당으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위십일낭은 정원옥과 검술과 무협에 관한 문답을 나눈 뒤 하산하도록 하는데, 강도들은 약탈하였던 그의 물건을 되돌려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10여년 후에 정원옥은 촉 지방을 지나다가 청하를 만나 위십일낭이 여전히 협객으로 활약중이라는 말은 듣는다.

이 소설은 여류 협객인 위십일낭을 정원옥이라는 남자의 눈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협객의 형상은 당대 전기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청대의 유명한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에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십삼매(十三妹) 하옥봉(何玉鳳) 의 협의 형상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인다.

4. 청대의 문언소설

청대의 문언소설은 포송령의 《요재지이》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작품을 소개하고, 기윤의 {열미초당필기}와 원매의 <자불어>도 함께 소개한다.

1) 《요재지이》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는 명청 문언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모두 500편에 가까운 문언 단편소설(통행본에는 431편)이 있다. 산동성 치천(淄川) 사람인 포송령(1640-1715)은 자가 유선(留仙)으로 몰락해가는 선비집안에 태어나 일찍이 19살에 수재(秀才)가 되어 두각을 나타내 문명을 날렸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 수차례의 과거시험에서 연거푸 낙방하여 실의속에 지내다가 만년인 71세에 비로소 세공생(歲貢生)이 되었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시 사 부 곡을 지었지만 그의 이름을 날리게 한 것은 역시 {요재지이}로 인해서 였다. 그는 농촌에서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창작을 시작하여 만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수정을 거듭하여 필생의 사업으로 이 책을 편찬했다.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들은 짧으면 수백 자, 길어도 수천 자에 불과한 단편소설이지만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대부분 완벽한 구성을 갖춘 소설이다. 작품의 소재도 지극히 다양하여 민간전설에서부터 전대의 야사, 또는 작자 자신의 견문이나 상상을 통한 허구적 창작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작자는 주로 육조시대의 지괴소설과 당대 전기소설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창작했고, 묘사대상은 대부분 여우와 귀신, 요정과 신선 등으로 되어 있으며 매 작품마다 말미에는 '이사씨(異史氏)'라는 이름으로 작자 자신의 평어를 붙이고 있다.

사상적으로 《요재지이》는 매우 강력한 비판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비판의 화살은 당시 봉건통치자의 부정부패와 어두운 사회로 향하고 있다. 작품속에는 탐관오리와 지방토호들의 추악한 모습이 낱낱이 묘사되어 있으며 일반 백성이 받고 있는 혹독한 압박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당시 과거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폭로와 비판도 나타나고 있는데, <우거악(于去惡)> 같은 작품에는 뛰어난 학문도 없으면서 사사로운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과거 시험관에 관한 묘사가 여실하게 그려지고 있다. 심지어는 눈먼 봉사와 돈만 밝히는 사람까지 그 속에 끼워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묘사 또한 뛰어나 우수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들 작품속에서는 봉건적 예교의 구속하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사랑과 결혼을 하지 못하는 불행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예를 들면 <연성(連城)>에서는 부모가 강제로 시키는 결혼의 불행함과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결혼의 행복함을 대조시켜 봉건사회의 불합리한 질서를 고발하고 진솔한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결혼을 예찬하고 있다. 또 <향옥(香玉)>에서도 황생과 모란꽃의 요정인 향옥과의 진실한 애정을 묘사하고 향옥이 말라 죽은 후에 다시 소생하는 부활의 이야기를 그려내어 "지극한 사랑에는 귀신까지도 감동한다"는 말처럼 진실한 사랑의 힘이 무궁무진함을 칭송하고 있다.

예술적 성과에서 《요재지이》는 문언소설로서는 드물게 상당한 수준에 까지 오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소설이 비록 귀신과 여우를 등장시켜 환상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그려내어 낭만성이 매우 농후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초현실의 세계는 곧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신이나 여우의 이야기도 그대로 인간의 이야기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현실세계의 이야기보다도 더한 풍자와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형상화에 있어서도 작자는 성격과 심리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인간이 아닌 주인공의 묘사에서도 호흡이 통하고 피가 흐르는 듯한 살아 있는 인물로 만들어 예술형상을 더욱 높혔다. 특히 여성인물의 묘사에서 뛰어난 기교를 발휘하여 영녕( 寧) 청봉(靑鳳) 소취(小翠) 홍옥(紅玉) 녹의녀(綠衣女) 등과 같은 중국소설사에서 불후의 인물을 만들었다. 소설언어에 있어서도 문언소설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우아하고 절제된 언어를 적절하게 구성하였고 동시에 생동감있는 구어와 속담을 활용하여 살아있는 언어로 만들었다.

여기서는 가나한 선비가 여우의 정령인 홍옥이란 여자로 부터 도움을 받아 혼인하였으나 포악한 벼슬아치의 박해로 온갖 고생을 겪다가 다시 홍옥의 도움으로 가세를 회복하게 된 이야기인 <홍옥(紅玉)>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나라 광평(廣平) 지방에 풍노인의 아들 풍상여(馮相如)가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였다. 수년후 모친과 아내가 차례로 사망하고 홀아비 부자가 살았다. 어느날 밤 풍생이 달밤에 정원에 앉아 있는데, 한 여인이 담장을 기웃거리다가 넘어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 여인의 미모에 반한 풍생은 곧 그녀와 동침하고, 이름을 물으니 이웃에 사는 홍옥(紅玉)이라고 했다. 풍생은 그녀와 오래동안 함께 살자고 언약하고 반년간이나 밤마다 밀회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풍노인이 아들방에서 나는 여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두 사람을 관계를 알아내고는 크게 책망하였다. 홍옥은 눈물을 흘리며 매파의 소개와 부모의 명이 없으니 함께 살 수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풍생도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 하자, 홍옥은 마침 근처 마을의 위씨집에 좋은 여자가 또 있으니 그녀를 아내로 맞으라고 일렀다.

풍생이 가난하여 그녀를 맞아들일 돈이 없다고 하니 홍옥은 다음날 백금 40냥을 갖다 주었다. 풍생이 위씨를 찾아가 돈을 내놓으니 위씨는 기뻐하며 딸을 주었다. 두 사람은 혼인하여 2년이 지나 아들 복아(福兒)를 낳았다. 그후 어느 해 청명절에 성묘를 갔는데, 그 지방의 권세가 송어사(宋御史)의 눈에 띄었다. 그는 풍생의 아내를 가로채려고 뇌물을 주었으나 풍생은 화도 못내고 그냥 거절하며 돌아와 부친에게 그 말을 했다. 풍노인은 얘기를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송어사를 찾아가 소동을 부렸다. 송어사는 사람을 보내 풍씨 부자를 매질하고 여자를 강제로 데려갔다. 이튿날 부친은 화병으로 절명하고 풍생은 통곡하며 아들을 안고 관가에 가서 고소를 했지만, 권세가인 송어사가 미리 손을 써서 별무소용이었다. 아내 위씨가 송어사집에 가서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풍생은 가슴에 원한을 품고 남몰래 송씨를 죽이고자 결심했다.

어느 날 문득 한 구렛나루의 사내가 조문을 왔는데 평소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는 복수를 부추겼다. 풍생은 그가 혹시 정탐꾼이 아닌가 의심하고 짐짓 거짓으로 답변하니 객이 화를 내며 나갔다. 풍생은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 다시 청해 들여 이실직고하면서 다만 강보에 싸인 아들이 가여워 결행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아이를 맡아 준다면 당장이라도 복수를 하겠다고 하니, 구렛나루의 사내는 대신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했다.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일의 성패를 막론하고 원망도 은혜도 생각말라 하고 떠났다. 풍생은 즉시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 산에 숨었고, 그날 밤 구렛나루의 사내는 송씨집에 들어가 송어사 가족을 여러 명 죽이고 사라졌다.

관가에서는 풍생을 유력한 용의자로 수배하였는데,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는 추적, 체포하였다. 이 때 아이는 산에 버려졌다. 현령이 그를 문초하니, 풍생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도망간 이유에 대답이 궁하여 변명을 못하고 투옥되었다. 그날 밤 현령이 잠자고 있을 때 비수가 날아와 침대에 박혔다. 현령은 속으로 심히 두려워 하며 권세를 부리던 송어사도 이미 죽은 뒤라 풍생을 풀어주었다. 집에 돌아온 얼마 후 현령에게 하소연하여 아내 위씨의 시체를 돌려받아 새로 장사를 지냈다.

어느 날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서 있었다.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불을 켜고 살펴보니 바로 홍옥이었다. 풍생은 그녀를 안고 통곡했다. 홍옥은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떠밀며 아버지에게 인사하라고 일렀다. 풍생이 놀라서 샆려보니 산속에 버려졌던 아들 복아였다.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 하는 풍생에게 홍옥은 그 동안의 숨은 사연을 말했다. 사실 그녀는 여우의 정령이었으며, 풍생의 이웃에 있다가 서로의 인연을 맺었고, 정식으로 혼인하여 살 수 없게 되자 그의 곁을 떠났다가 후에 밤길에 산을 지나다가 계곡에서 아이를 발견하여 지금까지 양육해 왔다는 것이었다. 이제 집안의 큰 날리가 끝났다니 데려왔다고 했다.

날이 밝자 여인은 그때부터 남자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풍생에게 살림 걱정말고 과거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수년 후에 가세가 회복되고 홍옥의 도움으로 무사히 시험을 치러 과거에도 당당히 급제하게 되었다. 홍옥은 몸을 아끼지 않고 거친 일을 했지만 항상 부드러운 피부와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끝에 포송령이 쓴 '이사씨왈(異史氏曰)'에는 "그 아들이 어질고 그 아비가 덕이 있으니 그 복수를 협객이 나서서 해 주도다. 사람만 의협이 있는 게 아니고 여우까지도 의협이 있으니 가히 기이하지 않으랴."라고 말하면서 당시 관청의 우매함과 부패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이야기속에서는 당대의 전기소설 <임씨전>에 나오는 여우의 정령이면서 인간보다 정조를 중히여긴 임씨의 형상이 변형된 모습으로 드러나며,또 <규염객전>에서의 이름없는 구렛나루 협객인 규염객의 형상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 기윤이나 원매의 문언소설이 나오고 이로서 이미 백화소설의 시대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 문언소설의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이 책이 전래되어 특히 문인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후기 북학파의 거두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서 중국소설중에 포송령의 《요재지이》가 가장 볼만한 것이며, 한 때 왕어양(王漁洋)이 그 문장이 좋아 천금을 주고 사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으나 포송령이 응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2) <열미초당필기>

기윤(紀 )의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는 《요재지이》가 유행한 이후 나타난 독창적 특색을 가진 필기체의 지괴소설집이다. 기윤(1724-1805)은 자가 효람(曉嵐)이고 하북성 헌현(獻縣) 사람으로 31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이 예부상서에까지 이르고 칙명에 의해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을 맡아 건륭 가경 연간에 가장 이름있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열미초당필기》는 그의 만년의 작품이며 1789년에서 1798년사이의 10년간에 걸쳐 기록한 총 1100여 조의 문언단편이 실려있는 지괴소설집으로 《난양소하록( 陽消夏錄)》 6권, 《여시아문(如是我聞)》 4권, 《괴서잡지(槐西雜志)》 4권, 《고망청지(姑妄聽之)》 4권, 《난양속록( 陽續錄) 》6권 등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이름은 작자의 북경 서재 이름인 '열미초당'을 그대로 본 따서 붙인 것이며, 《요재지이》가 전기의 법으로 지괴소설을 지은 것에 반대하고 화려한 수식을 없애는데 주력하여 위진남북조의 질박하고 담백한 문풍을 모방하는데 힘썼다. 그가 이처럼 소설의 관념과 문체를 거듭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한 것은 분명 보수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소설작품에서 문학적 수식보다는 도덕적 설교가 지나치게 많도록 하였고 구성상의 짜임새과 인물의 형상화를 이루지 못하여, 그 가치에서는 《요재지이》에 못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재지이}에서 형성된 문언소설의 붐을 더욱 확대시키는데 공헌한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작자는 여전히 유가적 정통사상에서 출발하여 소설작품을 통한 '권선징악'이나 '도덕교육'을 강조하고자 하였으며, 당시의 부패한 어두운 현실에 대해서는 과감한 비판을 유보하고 있어 포송령의 경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당시 엄격한 봉건예속하의 최고 문인으로서 여전히 강직한 성품을 고수하며 소설을 통한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예법이나 황당무계한 미신적 습관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결과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음은 그나마 상당한 기백과 용기를 가진 문인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 당시에까지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던 송명이학의 인간개성 말살의 보수적 사고방식과 도학자들의 고루하고 허위적인 행위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비판적 입장을 드러낸 것은 {열미초당필기}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난양소하록( 陽消夏錄)>은 그가 《사고전서》를 완성한 뒤 지극히 단순한 약간의 공무만을 처리하며 길고 지루한 여름을 보내면서 예전에 들었던 고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중에 '고루한 선비'를 묘사한 고사를 예로 들어 보자.

스스로 강직하고 높은 학식을 자부하는 한 고루한 선비가 밤길을 가다가 먼저 죽은 친구의 혼령을 만났다. 그 혼령은 남촌의 죽은 자의 혼백을 데리러 가는 중이었다. 둘이 함께 낡은 초가집을 지나는데 친구 혼령은 그 집이 높은 선비의 거처라고 말했다. 어찌하여 그런 줄을 아느냐고 물으니 무릇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비의 집은 비록 낡아서 대낮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더라도 그가 잠들어 있을 때는 그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뛰어난 경륜과 학식이 하나하나 불빛으로 새어나와 하늘에 까지 뻗쳐올라 은하수에 이르러 그 밝음을 별빛과 다투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지금 이 집은 지붕위로 칠팔 척이나 빛이 오르고 있으니 그 안에 선비가 있음을 안다고 말했다. '고루한 선비'는 평소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 은근히 "내가 잠들었을 때는 몇 자나 빛이 오를까? "하고 물으니, 친구 혼령은 한참을 주저하다가는 "얼마 전 자네 집 앞을 지나다가 보니 자네가 잠들어 있었는데, 머리 맡과 가슴 위에는 두터운 경전이 펼쳐진 채 있고 서가에는 수백 편이나 되는 자네의 경문과 책략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글자마다 모두 검은 연기로 화하여 지붕 위에는 검은 연기가 가득 씌워져 있을 뿐 한 가닥의 불빛도 찾을 수 없었네 그려" 했다. '고루한 선비'가 노하여 질책을 하니 혼령은 박장대소하고는 사라졌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과거제도에 찌든 한 고루한 선비의 실상을 여실하게 드러내 풍자하고 있다. 이 밖에도 거짓으로 군자연하는 위선자에 대한 폭로나 인색한 상인을 비판하는 글이 있고 특히 귀신과 여우 등의 지괴적 요소가 담긴 작품이 많다.

《열미초당필기》의 예술적 성과는 주로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군더더기 수식을 최대한 절제하여 사실적으로 사건의 단면을 그려냈다는 데에 있다.

기윤의 《열미초당필기》는 중국소설발달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복고적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작자의 소설관이 좀더 진보적이지 못한 결과에서 기인한다. 당시 최고의 문명을 날리던 그와 같은 인물이 이러한 보수적 관점을 견지함에 따라 청대 후기의 소설문학은 오히려 명말 만력에서 청초 건륭에 이르는 소설 극성기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쇠퇴하는, 그리하여 청말에 서양소설이 수입되었을 때 맹목적으로 서구화를 통한 현대소설의 추구에만 전념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가 소설사에서 잊혀지고 있던 문언소설을 새로운 기법과 정신으로 찬란한 중흥을 이루었던 포송령의 뒤를 이어서 진보적 소설관을 견지하고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으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였더라면, 당시 학계에서의 그의 위치로 보아 그 영향은 휠씬 광범위하고 심도있게 청대 후기 소설 문단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중국소설사의 기술에서 문언소설은 백화소설과 함께 명실상부한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아 문학사에서의 소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3)  《자불어》

원매(袁枚)의 《자불어(子不語)》는 <논어>의 "공자는 괴이하고 힘쓰는 것과 어지럽고 신비로운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子不語怪力亂神)"는 대목에서 가져와 명명한 것이지만, 원나라 때에 이미 《자불어》라는 작품이 있었음을 알고 작자는 후에 이를 <신제해(新齊諧)>라고 개명했다. 그러나 원대의 것이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자불어》로 불리고 있으며 정집(正集) 24권과 속집(續集) 10권으로 되어 있다.

원매(1716-1797)는 자가 자재(子才), 호가 간재(簡齋) 또는 수원노인(隨園老人)으로 불렸으며 전당(錢塘: 현 절강성 항주)사람이다. 건륭 4년(1739) 진사에 급제한 뒤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를 제수받았고 후에 외직에 머물며 명성이 드높았으나 나이 서른에 사직하고 강녕(江寧: 현 남경)의 소창산(小倉山)에 수원(隨園)을 지어 살면서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에 힘썼다.

《자불어》에는 다른 문언소설과 같은 권선징악적인 요소나 우언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괴이한 사건을 그대로 심미적 대상으로 삼아 독특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작자는 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막론하고 별도의 수정없이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원매는 작품속에서 가능한 한 많은 유우머를 사용하여 작품의 재미를 더하고 있지만 남색을 즐기는 동성연애가 결코 심리적 변태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등의 남다른 주장도 펴고 있어 주목된다.

 

4. 평가 및 영향

이상에서 명청대 문언소설의 발달과정과 주요 작품을 개략적으로 알아보았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청대에는 문언소설의 지위가 이미 백화소설에게 넘어간 시기였지만 정통문인이나 몰락한 문인들에 의해 여전히 새로운 활기를 불러일으킨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일부 진보적 소설관을 견지하고 뛰어나 문재를 지닌 수명의 작가에 의해 한 때 문언소설의 붐을 일으킨 바는 있지만, 수많은 속서와 모방작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문언소설의 발달을 유도한 작가가 드물었음은 어쩌면 시대적 흐름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쨋든 《剪燈新話》나《요재지이》와 같은 우수한 작품은 당송대에 이어 명청대의 소설사에서도 문언소설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영향은 당시 중국내에서 다양한 문언소설의 붐을 이루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화소설의 창작 소재로서도 많이 활용되어 사실상 전반적인 중국소설발달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명청대의 문언소설은 인접국가인 당시의 조선이나 일본 월남에까지 상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백화소설이 갖고 있는 사상적 개방성과 언어상의 통속성이 오히려 이들 국가에서 전파되는데 장해요인이 되어 상대적으로 한문학에 정통한 이들 국가의 사대부들로 부터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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