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은자주]

키가 크고 큰 눈에 흰 얼굴, 사진 속의그가 그립다.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승을 떠났다.

1960년대 갈비탕이 50원, 야경비가 20원 하던 시절.

고궁에서 '음탕' 한 단어만 보고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질타한다.

지나쳐도 상관없는 극명한 자아비판이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시인을 괴롭힌다.

세상사람들이 경험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것들을 환기하는 것,

그것이 시의 역할이고, 문학의 일거리인지도 모른다.

‘적다’는 ‘작다’의 잘못임.

[클레마티스 -들꽃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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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은자주]풀은 민초(民草), 민중의 상징이고, 바람은 풀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창작 당시에는 군사독재권력이라 보면 된다. 풀은 쓰러지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인권, 민주에 대한 풀의 꿈은 역사를 바꾼다. 그것이 핏자국으로 얼룩진 세계사이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미당은 <자화상>에서 청춘의 피튀기는 고뇌, 시쓰기의 고뇌를 이렇게 노래했거니.

 

[수국 - 들꽃수목원] +두운, 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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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大한 뿌리
-김 수 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면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은자주]김수영, 과연 그는 거인의 풍모를 갖춘 시인이다. 세상에나,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번역 원고료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에도 민초들을 대신해 욕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욕설은 시어(詩語)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오면 시어가 된다.

[창포꽃 2 - 허브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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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法

-강은교


떠나고 싶은 者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者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時間)은
침묵(沈默)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沈默)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者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者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원추리 2-허브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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