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입구에서 2.5km쯤 나오는 길 왼쪽에 허브농원이 있다. 전에는 허브만 있었는데 야생화 간판도 내걸엇다. 철지난 장미덩굴에는 꽃잎이 작은 장미화가 아직도 피고 있었고, 원추리, 창포, 땅바닥에 붙은 야생화들이 무더위에 혀를 빼물었다. 거기 귀족의 클레마티스도 있었다. 그늘을 드리워 '길손의 기쁨'이라는 별명을 지닌 클레마티스가 기중 반가웠다.
자화상(自畵像)
-미당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주]칠월입니다. 이육사의 <청포도> 첫구가 생각납니다. 이육사의 <청포도> 를, 이육사 선생을 회억합니다. 국난 수준의 경제상황인 현실을 생각하면 나라일을 자기 문제로 고심하고 실천하신 육사 선생의 지고지순한 영혼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청포도>에서 근사하게 해방을 맞이하고 싶은 가상적, 그러나 확신에 찬 심정을 노래했다면 <절정>은 절박한 현실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자아화하여 그 초극의지를 표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역에서도 ‘궁즉통(窮則通)’이라 했잖아요.두 작품을 함께 감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1927년(24세)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絶頂>'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1926년조선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된 후 발발한 6.10만세사건후 북경에 갑니다.
1927년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육사(李陸史)가 지은 시. 〈광야 曠野〉·〈청포도 靑葡萄〉 등과 함께 대표작의 하나로 1940년 1월호 ≪문장 文章≫지에 발표되었다. 2행 4연으로, 모두 8행으로 되어 있는 자유시이다. 그 네 개의 연은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한시의 구성법을 따르고 있다. 율격은 한 시행(詩行)이 거의 3음보격으로 각 시행의 음절수도 비슷한 정형성을 보이고 있으나, 자유시의 범주에 포괄된다 하겠다.
이 작품은 전체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의 2연은 시인이 처한 상황의 설정이고, 뒤의 2연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시인의 의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운 계절’로 표상된 시간적 배경과 시의 화자(話者)가 쫓겨온 시적 공간, 곧 북방의 하늘도 지쳐 끝난 고원(高原)이라 함은 공간적 광활성을 나타내면서도 더 갈 수 없는 단애(斷崖)의 강박관념으로 ‘서릿발 칼날진’과 같은 위급한 곳을 표상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을 곳조차 없이 위급한 극한 상황에 이른 화자는 눈을 감고 환상의 ‘무지개’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매운 계절’에서 ‘겨울’까지 이어지는 시상의 이음새가 구김살 없이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점을 이 시의 탁월성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북방으로 쫓겨간 것은 시인 자신이지만, 그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민족 전체의 수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이 시의 핵심적인 종련(終聯)의 ‘강철로 된 무지개’에 대한 해석은 ‘비극적 황홀’이니, ‘황홀한 미래의 약속’이니, 또는 ‘절망적 죽음의 극한경(極限境)의 미화’이니 하여 분분하지만, 죽음과 같은 비극적 초월, 자기 삶의 부정을 통한 자기 변혁밖에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 같다.